인도에 쿠데타가 없는 이유 - 식민지를 겪은 신생 국가로는 유일

 

우리 한국의 과거의 한부분이 그러했듯이, 신생 독립국가에서는 의례 군부가 하나의 세력집단을 형성하고 쿠데타를 벌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식민지에서 독립하는 경우가 많은 이들 국가의 경우, 식민당국이 자신의 필요성에 따라 군에는 피식민지 인력을 채우고 상당 수준의 근대식 교육을 이수하게 하는 등 피식민지 민 대다수 보다는 상대적으로 유능한 집단으로 양성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양성된 군의 엘리트들이 무력을 바탕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것은 흔하디 흔한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어디에나 예외가 있는 법, 인도대륙의 대부분을 영역으로 하는 인도 공화국은 흔하디 흔한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하지 않았다.

심지어 부패한 최고 지도자가 군부에 친위 쿠데타를 요구했지만, 군부가 거절한 적이 있다.

이런 인도군은 어떻게 문민통제에 철저하게 길들여 졌을까...


현대 인도군의 모태는 대영제국 인도총독부의 영연방 인도군에서 시작된다.

인도대륙에 대한 영국의 진출 발판은 현재 방글라데시와 인도의 웨스트 벵갈에 해당하는 벵갈지역이었다.

영국동인도회사로 시작한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부족한 군사력을 충당하기 위해 현지 용병을 고용했으며, 처음 시작은 벵갈지역민들이었다.

세포이로 알려진 이들은 무굴제국의 장총보병 "세포이"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페르시아의 '스파히' 에 어원을 둔다), 영국 동인도 회사에는 서부의 봄베이군, 동부의 벵갈군, 남부의 마드라스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벵갈군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정복전쟁에 크게 기여했으나 세포이 항쟁을 주도하였고, 세포이 항쟁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가 몰락한 이후 들어선 대영제국 인도총독부는 이를 기억해 두고 그 대가를 치루게 한다.

우선, 거점을 벵갈지역 항구도시 캘커타(현 웨스트 벵골 주도 콜카타)에서 델리로 옮기고, 영국의 용병부대로 고용한 부대의 체질을 바꿔 버린다.

벵갈군을 구성했던 벵갈출신들을 북부 펀잡지역 출신으로 대대적으로 교체한다.

벵갈 경보병대대 10개의 해체를 시작으로 기존 부대 편제 74개 중 12개만 남기고 군을 재편하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새로 재편된 군대에 벵갈인의 자리는 사라진다.

영국의 진출로 인해 경제적 혜택을 누리며 타지역보다 세력이 강했던 벵갈지역은 영국식민당국의 철저한 보복정책으로 인해 몰락하게 된다.

《 ※ 이전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콜카타 자체는 여전히 인도의 대도시로 주요 도시에 해당한다 》

세포이 용병을 시작으로 민중까지 합세한 대형 저항운동으로 번지는 것을 목격한 영국은 자신들이 통제할 군사조직이 민중과 합세할 접점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영국이 관리할 군사조직을 개편하기 위해 특정한 세력이 중심으로 구성체계를 바꾸는데 이것이 "Martial Race" 다.

영국식민당국을 위해 고용할 군인들을 선발하는데 종족개념을 적용하는 일종의 "화이트 리스트"인 것.

여기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구르카와 시크가 포함되었고, 영국당국 입장에서 뒤통수를 때린 벵갈지역민은 제외되었다.

그리고 영국령 인도군의 중심세력은 인도대륙 본진과는 섞이기 힘든 소수민족, 즉 민중과는 섞일 접점이 적으면서 고용주에게는 절대충성할 수 있는 집단이 선택받았다. 그들은 북서변경지역의 펀잡이나 파슈툰 출신들이었다.

인도가 독립된 이후인 1949년에 들어 신생 인도정부는 식민당국의 이러한 정책을 폐지한다.

신생당국의 입장에서 합법적 무장조직인 군대가 동질감을 지닌 특정세력에 의해 독점될 경우, 이는 군부 쿠데타로 연결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더구나 인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군인은 공무원으로 양질의 일자리에 해당하기에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 집단인 인도 전국의 민족집단이 자신들에게도 군에 모병할 수 있는 기회를 요구했다.

신생독립공화국인 인도군은 다양한 민족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도 절대 특정 종족이 하나의 부대에 집중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특히 영국령 식민시절부터 영국령 인도군의 모병 베이스였던 펀잡민 특히 그중에서 펀잡 무슬림의 경우 하나의 부대로 결성하는 대신 전국의 부대로 흩어서 관리했다.

《 ※ 사실, 식민당국 시절인 1920년대부터 인도내 정치세력들은 화이트 리스트 제도의 철폐를 요구해왔다. 취업제한이라는 이슈와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

독립후 인도 총리 네루는 인도군의 구성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장교와 사병의 3/4가 영국식민당국이 제정했던 "화이트 리스트"에 속한 민족집단이었으며, 최고위 장교단의 절반이 인도 전체인구의 겨우 5퍼센트에 불과한 펀잡출신으로 채워져 있었다.

펀잡은 파키스탄 인구의 44퍼센트로 주류 민족이다.

독립과정에서 펀잡은 둘로 나뉘었다.

당시 인도 집권세력은 이를 위험한 시그널로 인식했고 구체적인 조치에 나섰다. 네루의 지시에 따라 당시 군 지휘부와 국방장관은 군구성원의 동질성을 해체해 나갔다.

먼저 가장 큰 군내 세력인 동-펀잡 출신의 비중을 줄였다. 1939년에 군 구성원의 60퍼센트를 차지했던 이들은 48년에 32퍼센트로 추락했다.

민족구성 비율도 신경을 써서 현재 단일 주 출신이 인도군의 13퍼센트를 넘지 못하도록 모병쿼터를 운영하고 있다.

복지면에서도 장교단이 엘리트 귀족세력화 되는 것을 막기위해 장교단의 급여를 하향조정해 중산층에 맞춰 나갔다.

고위장교에게는 정치활동금지와 공식연설금지라는 제약이 걸렸고, 군총사령관직은 폐지되었다( ※ 최근 카길 전쟁 이후 2019년에 군총사령관에 해당되는 직책이 부활).

인도군의 구성

주축은 당연히 육군이며 쿠데타 우려 역시 이들에 집중.

육해공 3군 사령관을 임명하되 이들의 구심점이 될 상위보직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사관생도는 출신지역에서 원거리에 위치한 사관학교에서 교육받도록 배정하였고 ( 국가에 따라 사관학교가 여러개인 경우가 있음),

영향력이 강한 고위장교는 전역후 외교관으로 임명해 원거리 해외로 내보냈다.

군조직을 세분화 파편화 해서 파벌간 견제를 통해 뭉치는 것을 막았으며 이들 파벌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히나 군부에서 세력이 강했던 '펀잡' 출신의 경우 1970년대까지 고위사령관직에 오를 수 없게 했다.

1960년대 이후 군에 버금가는 전투력을 갖춘 준군사조직을 양성해 수도 델리 일대에 배치해 정규군을 견제하게 했다.

내무부 관할 중앙무장경찰로 편성된 7개 준군사조직이 존재하며, 그중 국경수비대는 25만 7천여명에 달한다.

인도는 이렇게 다양한 제도를 통해 인도군부의 체질을 바꾸고 견제를 강화하면서 인도군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권력화 하는 것을 막았다.


반면, 군부가 지배하는 파키스탄은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파키스탄이 영국령 인도에서 독립할 때 파키스탄군에는 인도군에 있었던 무슬림 세력들이 개별적으로 입대하는 방식으로 그들만의 하나의 정체성이 만들어 졌고,

이들은 신생국가에서 그러하듯이 엘리트로 간주되는 군부가 되었으나 파키스탄의 정치권은 이들을 통제하는데 실패했다.

《 ※ 파키스탄은 군부 이외에도 민간부문의 엘리트 계층(인구의 약 7퍼센트)인 "무하지르(인도대륙 분리독립당시 인도에서 파키스탄으로 피신한 실향민 세력)"가 있어, 이둘의 연합으로 권력이 굴러간다. 》

현재까지의 파키스탄 민간 집권 정치세력은 사실상 군부의 후원을 받아서 집권하기에 군부의 영향력 아래에 존재하며 이 때문에 파키스탄에서 임기를 완전히 채운 총리는 없다고 한다.

현 샤리프 총리 이전 22명의 총리 모두 5년 임기를 채우지 못한 것. 군부의 인사문제도 군부에서 명단을 올리면 총리는 결제만 하는 구조.

군부 1인자. 육군참모총장 "카마르 자베드 바즈와" 육군 대장 / 2인자. 현 11군단 사령관 "파이즈 하미드"중장. 이전 보직 파키스탄군 정보부 ISI의 제 24대 국장

《 * 현재 파키스탄군 서열 1위는 총사령관 '바즈와'장군, 2위는 우리도 잘아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의 24대 국장 '하미드'장군이다.

파키스탄 정보부 ISI

현재 바즈와가 전역을 거부하고 한차례 임기연장한 상태인데, 그가 그만두고 나면 하미드가 1인자가 될수도 있고.... 아니면 바즈와가 낙점한 제3자가 될수도 있다.

현재 하미드가 맡고 있는 11군단은 아프간과의 접경인 북서변경주 일대, 즉 파슈툰 소굴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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