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버블들: 프랑스 존 로의 미시시피 회사와 영국의 남해주식 회사 / 화폐의 가치는 신용으로부터 창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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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5] 도박과 여자. 그의 인생에 유이(有二)한 낙이었습니다. 매일 밤 그가 향한 곳은 일확천금의 꿈으로 가득한 도박장. 한탕 크게 당겨서 큰 부자로 살아보겠다는 사내들의 어리석은 꿈으로 가득한 곳. 20살이 갓 넘은 청년은 이곳에서 자산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푼돈이라도 손에 쥔 날이면 여자에게 달려가곤 했습니다.
닳고 닳은 그에게 일말의 순애보가 남아있었는지. 그가 미치도록 갖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모든 귀족이 탐낼 정도로 미인이었던 탓에 라이벌도 많았지요. 꿈에 그리던 그 여인이 다른 남자의 추파를 받는 것을 보았을 때, 혈기를 끝내 참지 못하고 그 사내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노름꾼, 난봉꾼, 협잡꾼이라는 멸칭에 살인자라는 오명까지 덧대어집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존 로’의 이야기입니다.
‘살인자’ 존 로의 영광은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프랑스로 도주한 그가 재정 총감으로서 경제의 혁신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했을 때 엔비디아와 애플을 합한 회사도 만들어 냈습니다(물론 거품이었지만). 오늘날 화폐 금융 시스템을 처음 상상한 것이 존 로였습니다. 한 살인자가 불러온 혁신을 사색하는 시간입니다.
“돈을 배워야 한다.”
날 때부터 난봉꾼은 아니었습니다. 존 로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번듯한 은행 가문 자제로 1671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로는 금세공사이자 은행가. 돈에 눈이 밝았던 덕분에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부를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존 로가 자신처럼 훌륭한 은행가가 되기를 바랐지요. 수학과 회계학을 꾸준히 공부시킨 배경이었습니다.
존 로는 명석한 아이였습니다. 아주 복잡한 계산도 척척 해낼 정도로 두뇌가 총명했지요. 다니던 학교에서도 단연 주목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신은 대개 명석한 이에게 훌륭한 성품을 내리지 않습니다. 존 로가 그랬습니다. 그의 품행은 유달리 방정맞았습니다. 거칠게 놀기 좋아하고, 여자에게 집착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를 바로잡는 마지막 울타리였습니다. 에딘버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은행업을 배우면서 가업을 이어갑니다. 사내로서 이제 제 몫을 다할 무렵 아버지 윌리엄 로가 눈을 감았습니다. 존 로의 나이 고작 18살이었습니다.
“오늘도 죽도록 놀겠어.”
가업을 물려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사업을 통해 들어오는 큰돈을 존 로는 운용할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제어되던 방탕한 품성에 고삐가 풀린 것이었습니다. 술을 먹고, 도박하고, 여자를 만나는 삶에 빠져든 것이었지요.
그의 성(Law)과 다르게 Unlaw(불법)에 가까운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왕의 정부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에게 반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스코틀랜드의 번듯한 귀족 도련님에서 살인마로 추락하게 된 셈입니다.
그에게 내려진 건 사형이었습니다. 존 로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줄 아는 사내였습니다. 이번에도 그가 좋아하는 ‘도박’을 감행합니다. 뉴게이트 교도소에서 탈옥에 성공합니다. 그는 그 길로 암스테르담으로 도주합니다. 무역과 금융의 수도였습니다.
‘은행가’로서의 기질은 이때부터 꽃 피우기 시작합니다. 물산과 돈이 활기차게 도는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행이 강국을 만든다.”
가업에 대한 피가 다시 끓기 시작합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은행의 역할을 보면서였습니다. 시 정부가 설립한 암스테르담 은행은 경제 순환의 마중물 역할을 자임합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건 네덜란드 상인들이 활용하는 ‘환어음’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상인들이 무겁고 보관이 어려운 금화나 은화로 거래를 하는 반면,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환어음’ 종이를 들고 간편하게 물건을 교환합니다. 경제적으로 튼실하고 안정적인 은행이 지급을 보증하는 시스템이었지요.
애써 무거운 금화를 배로 옮기지 않아도 됐습니다. 금화가 차지하는 자리에 물건을 하나라도 더 실을 수 있게된 셈입니다. 금화의 제한된 수량 탓에 거래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인들에게 환어음장과 같은 종이 지폐는 천군만마와 같았습니다. 금융이 실물 경제의 피와 살이 되고 있던 것이지요. 현대인에게 신용카드와 같은 결제 혁신이, 중세 네덜란드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고, 국부는 늘어납니다. 조그만 크기의 네덜란드를 강국 프랑스마저 무시할 수 없게 된 배경입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기어이 승리를 쟁취하는 네덜란드를 보며 존 로는 깨닫습니다. “금융은 한 나라를 강국으로 만든다.”
이때부터였습니다. 존 로가 ‘신뢰 기반의 지폐(Fiat Money)’를 구상하기 시작한 건. 파리, 베니스, 제네바 등 힘 깨나 쓰는 도시를 방문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제 이론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베니스에서도 암스테르담처럼 상인들이 종이로 거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이 역시 신뢰있는 은행들이 중간에 지급을 보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존 로는 이제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무역에서 사용되는 신용기반 지폐를 전 국가 차원에서 사용한다면, 그 국가의 부는 크게 늘어날 거야.” 유럽 화폐혁신의 불꽃이 존 로의 마음속에 촛불처럼 옮겨 붙습니다.
“자 나의 이론을 실현할 국가를 찾을 시간이다.”
경제 이론으로 무장한 존 로는 야심이 넘쳤습니다. 시칠리아 왕국과 사보이 공작에게 찾아가 자신의 말대로 경제를 이끌어 볼 것을 권했습니다. 당연히 돌아온 대답은 거절. 평판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귀족 자제의 말을 믿을 리 없었지요.
존 로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 탑니다. 어렵사리 루이 15세와 어린 왕을 보필하는 섭정 필립 오를레앙을 만납니다. 존 로를 면박할 것이란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프랑스 왕실이 존 로를 반긴 이유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제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코노미 4화 참고). 베르사유 궁 확장, 이웃나라와의 전쟁으로 루이 14세는 프랑스에 막대한 빚을 남겨 놨습니다. 1715년 나라 빚은 무려 20억 리브르(당시 화폐 단위)에 달했습니다. 이자만 해도 한해에 8000만 리브르나 됐습니다. 1년 국고 수입은 6900만 리브르.
가만히 있어도 매년 원금이 늘어나는 절체절명의 순간. 프랑스는 ’파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 “모든 빚을 갚을 수 있다”며 홀연히 나타난 운명적 사나이. 난봉꾼, 살인마로 불렸던 남자. 존 로였습니다.
“프랑스라는 이름의 신뢰를 활용해 지폐를 발행해야 합니다.”
존 로는 프랑스 경제 개혁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의 빚 청산이었습니다. 존 로의 ’첫 번째 화살‘은 은행이었습니다. 은행이 종이 지폐 발행을 늘려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복안. 그동안 프랑스 경제는 금화·은화와 같은 무거운 화폐에 의존해 유동성 부족으로 경제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았다고 존 로는 분석합니다.
사용이 용이한 종이돈을 사용하면 그만큼 많은 경제 활동이 일어나고, 이는 세입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구상이었지요. 지폐를 은행에 제출하면 언제든 은화로 교환되었기에 상인들은 안심하고 지폐를 활용한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보던 모델을 국가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었지요. 프랑스의 첫 은행 ‘방크 제네랄’의 출범이었습니다.
‘존 로’의 체제는 완벽하게 안착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1년 만에 국내 사업자 수는 60%나 늘었습니다. 프랑스 깃발을 단 무역함도 16척에서 300척으로 증가합니다. 방크 제네랄이 발행한 지폐가 무역의 문턱을 낮춘 덕분입니다.
방크 제네랄의 효과를 톡톡히 본 왕실은 은행을 인수하며 직접 운영에 나섭니다. ‘방크 로얄’로의 승격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은행권 지폐를 사용하라고 독려합니다. 존 로의 구상대로 프랑스는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720년 프랑스의 새로운 재무총감이 임명됩니다. 존 로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나라 살림을 도맡은 기획재정부 장관. 방탕한 살인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경제의 신’ 존 로만이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부를 위한 회사가 필요하다.”
‘두 번째 화살’도 곧바로 발표됩니다. 국부를 실질적으로 늘리기 위한 사업 구상안입니다. 미국의 미시시피강 인근 루이지애나 무역을 독점하는 국유회사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미시시피 회사’였습니다.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을 부채 상환에 활용하자는 원대한 계획. ‘위대한 콜베르’가 이끌던 부국 프랑스로 만들자는 포부였지요. 은행(방크 로얄)-상업(미시시피 회사)-국가재정(프랑스왕실)이라는 삼각편대의 시너지를 노린 것입니다. 시민들은 점점 성장하는 프랑스와 미시시피 회사에 배팅하려는 열망에 휩싸입니다.
존 로는 여기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정부 채권으로만 살 수 있게 하는 방안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의 ‘빚’을 유망한 회사 주식으로 탈바꿈 시키는 전략입니다. 미시시피 회사의 장밋빛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던 채권자들은 주식을 사는 데 선뜻 동의합니다.
프랑스 왕실로서는 빚도 갚고, 미시시피 회사 투자자도 모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린 셈입니다. 조금 뒤에는 뱅크 로얄이 발행한 은행 지폐로만 구매가 가능하도록 바꿨습니다. 지폐 사용이 늘어날수록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가 클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원했습니다. 더 많은 미시시피 주식을, 더 많은 프랑스의 지폐를. 귀족과 시민. 계급을 가리지 않고 이들은 모두 앞다퉈 미시시피 회사의 주주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곧 미시시피 회사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루이지애나에서 엄청난 금광이 터졌소.”
파리 시내는 흥분과 아드레날린으로 가득합니다. 미시시피 주식회사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모든 주주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제 자신들은 부자가 됐다고, 프랑스는 영원한 부국이 될 것이라고.
광풍에 가까운 투기였습니다. 1년 사이에 주식 가격은 16배나 뛰었습니다. 국가 통치자가 밀어주는 사업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시골 촌부마저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사기 위해 파리로 올라왔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시가 총액을 오늘날 현금가치로 계산하면 6조 5000억 달러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엔비디아와 애플을 합친 수준입니다. 얼마나 거품이 끼었는지를 증명하는 셈).
프랑스 왕실이 발행한 지폐는 엄청난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라는 부작용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물가상승을 뛰어넘는 황금 ‘미시시피 회사 주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국가에 요구합니다. “더 많은 은행 지폐를 발행하라. 우리가 미시시피 주식을 살 수 있게.”
거짓이 프랑스를 뒤엎었을 때, 진실 역시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미시시피 회사의 실적이 전무하다는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장밋빛 미래는 모래성처럼 무너집니다. 모든 시민들이 미시시피 주식을 던졌습니다. 황금으로 여겨지던 주식은 어느덧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은행에는 지폐를 들고 은화 교환을 요구하는 시민으로 가득했고, 존 로를 잡아 죽이자는 분노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은행권의 남발로 야기된 고물가, 주식 폭락으로 가난에 빠져버린 시민들, 금융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저는 프랑스를 떠납니다.”
존 로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프랑스를 조용히 탈출해 이탈리아 베니스에 정착합니다. 그가 경제를 배우고, 도박에 빠진 그곳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존 로는 다시 도박에 손을 댑니다. 협잡꾼에서 경제의 신으로, 또다시 협잡꾼으로. 1729년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격변에 빠져듭니다. ‘방크’라는 이름은 금기였습니다. 주식회사 설립은 무려 150년 동안이나 금지됩니다. 금융과 산업을 경시한 프랑스는 무너지고, 유럽의 헤게모니는 영국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루이14세의 말년처럼, 루이15세의 프랑스는 다시 과대 채무국으로 전락합니다. 후임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오늘날의 눈으로 존 로의 실패 원인은 명확합니다. 실물 경제에 기반하지 않은 과도한 화폐 발행은 극심한 물가상승을 초래함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혁신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신용’에 기반한 화폐 시스템이 경제를 혁신한다는 구상은 오늘날 현대 금융제도의 기반이 됐기 때문입니다. 존 로와 달리 오늘날 중앙은행은 그 어떤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돼 운영됩니다. 그의 실패에서 교정해 더욱 정교한 프로그램을 구현한 것이지요.
민주주의가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듯, 경제는 시민의 욕망과 부를 먹이삼아 성장합니다. 협잡꾼이자, 살인마, 그리고 위대한 경제 실험자였던 존 로가 남긴 교훈입니다.
<네줄요약>
ㅇ루이14세가 남긴 빚으로 허덕이고 있던 프랑스를 구원해주기 위해 등장한 남자가 스코틀랜드 도박꾼 ’존 로‘였다.
ㅇ국가가 은행을 만들어 지폐 발행을 늘리고, 무역 회사를 독점하면 부를 늘릴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ㅇ이 모든 계획이 ’미시시피 회사‘ 거품 붕괴로 실패하면서 프랑스는 금융을 금기하기 시작했다.
ㅇ그럼에도 신뢰 기반 지폐를 상상한 그의 구상은 오늘날 현대 금융제도에 녹아 있다.
<참고문헌>
ㅇ윤은주, 18세기 초 프랑스의 재정위기와 로 체제, 프랑스사 연구 16호
https://www.mk.co.kr/news/culture/11134334
[히코노미-6] 저택에 화려한 정원, 분숫가에 앉아 편안하게 공부하는 안락한 삶. 그가 평생을 꿈꿔왔던 장면이 곧 현실로 다가오는 듯 했습니다. 투자한 주식이 대박을 앞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리학에 매료돼 공부에 푹 빠져 산 지 어언 60년. 진리를 탐구한 그에게 신께서 선물을 내리려 했던 것이었을까요. 학문도 투자도 모두 성공한 그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습니다.
화창한 아침, 그러나 시내는 분노와 절규로 부산합니다. 어제만 해도 환희에 젖어 있던 투자자들의 외침입니다. 거짓말처럼 폭락한 주식 소식을 듣고 찾아온 군중들. 폭락을 부정하던 투자자들. 그 속에는 어젯밤까지 가슴 벅찬 채 잠이 들었던 물리학자도 있었습니다.
꿈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투자한 주식회사는 모든 거짓 정보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의 이름은 ‘사우스시 컴퍼니(South Sea Company·남해 주식회사)’. 허상에 빠져 결국 전 재산을 날린 투자자의 이름은 아이작 뉴턴이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인류의 지성인 그조차도 ‘대박’이라는 꾀임에는 까막눈이었습니다. “중력은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들의 광기는 계산할 수 없었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오늘날 본질적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주식 가격에 ‘거품’(버블)이라는 관용구가 붙은 것도 이 사건 직후였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사건 이후 잉글랜드는 세계적 금융 강국으로 거듭납니다. 경제사에서는 절대 작지 않은 의미를 남긴 사건인 셈이지요. 사우스시 버품붕괴 사건을 돌아봅니다. 버블은 언제나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갓, 세이브 더 킹 앤 퀸”(신이시여, 왕과 여왕을 구원하소서)
1688년 잉글랜드에 일대 격변이 일어납니다. 왕 제임스 2세가 신하들에 의해 왕좌에서 쫓겨나면서였습니다. 개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에서 제임스 2세가 가톨릭을 옹호하는 정책이 화를 일으킨 것이었지요.
새로 옹립한 왕은 같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의 지배자 윌리엄과 그의 아내 메리였습니다. 제 나라 폭군의 폭정을 견디지 못해 외국의 지배자를 수입해온 셈이었지요. 완전한 외국인을 모셔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의 또 다른 정체성은 제임스 2세의 사위와 딸. 제임스 2세는 워낙 인기가 없는 왕이었기에 큰 소란 없이 부드럽게 정권이 교체됩니다. ‘명예혁명’이라고도 불리는 배경입니다. 메리2세와 윌리엄3세의 공동통치가 막을 올렸습니다.
명예혁명은 ‘금융혁명’이기도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시스템이 가장 잘 갖춰진 나라 네덜란드 군주가 잉글랜드를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의 금융 체계가 영국에 이식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네덜란드에만 존재하던 증권거래소와 중앙은행이 영국에 등장한 배경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주식회사의 주식은 창고에서 경매될 정도로 열악했습니다.
윌리엄 3세 통치 이후 뱅크오브잉글랜드 설립(1694년), 약속어음에 관한 법 제정(1704년)이 모두 이뤄졌습니다. 현재 세계 금융의 수도인 런던은 네덜란드 군주로부터 그 첫발을 뗀 셈입니다.
도로가 닦이면 차가 늘어나듯, 금융이라는 비단길 위에는 자본가들이 올라섭니다. 1690년대 영국은 ‘Monyed Man’(자본가)의 시대로 불립니다. 은행가이자 동인도회사의 주주로서 큰돈을 번 조사이아 차일드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당시 금욕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교회는 이런 자본가들의 허영과 야만을 비판했지만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응수합니다. “인간은 이윤을 좇는 존재”라고 말이지요.
제임스 브리지스나 찬도스 백작 같은 이들도 큰 부를 일군 인물로 이름난 사람들입니다. 탐욕과 소비가 경제적 미덕이라는 자유주의의 살아있는 상징들이었지요. 이들은 ‘꿀벌의 우화’를 쓴 버너드 맨드빌의 명언을 가슴에 새긴 채 살아갑니다. “탐욕, 낭비, 자만, 사치와 같은 개인적인 악덕은 사회에 이롭다”.
윌리엄 3세 통치기 잉글랜드 상업활동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합니다. 항구에는 매일같이 거대한 함선이 들어와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물건들을 내려놓고 다시 항해를 떠나기 바빴습니다.
금융의 달인인 이주 네덜란드인들은 영국 경제를 금빛으로 바꿔놓은 일등 공신이었지요. 회사의 가치는 치솟았고, 더 많은 사람들은 주가를 거래하기를 원했습니다. 잉글랜드 증권거래소인 익스체인지 앨리의 시작이었습니다. 옵션 투자와 같은 선진 투자 기법도 네덜란드에서 수입되기에 이르렀지요.
‘주식회사 잉글랜드’는 언제나 상한가였습니다. 1710년에는 영국 최초의 보험회사 선 파이어가 주식 투자 붐을 이끌었습니다. 잉글랜드는 그러나 아직 배가 고팠습니다.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 걸출한 회사가 나라 전체를 부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시시피 주식회사’(히코노미 4화 참조)였습니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입니까. 수백 년 된 영국의 앙숙이요, 체스게임이라도 져서는 안 될 숙적이었습니다. 잉글랜드 정부의 가장 큰 목표는 단 하나. ‘미시시피 회사’를 능가하는 회사를 만들어야 한다. ‘사우스시 컴퍼니’의 등장이었습니다.
사우스시 컴퍼니의 기본 구조는 ‘미시시피 회사’와 같았습니다. 남아메리카 지역의 무역 독점권을 보유한 조직으로 잉글랜드 국채 보유자들에게 회사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합니다. 영국 정부로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과 대북방전쟁으로 쌓인 빚을 털어버릴 기회였고, 시민들은 유망한 회사의 주식을 보유할 찬스였습니다.
모든 투자자들이 장밋빛 전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주가가 하루가 다르게 치솟으면서였습니다.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모두가 사우스시에 투자합니다. 물리학자 뉴턴도, 시인 알렉산더 포프도 대박의 열기에 휩싸인 인물이었습니다. 포프가 주식 브로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저는 국채의 주식전환에 관한 이야기를 매일 듣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열망에 너무나 들떠 있습니다.” 시인도 물리학자도 일확천금 앞에서는 속물이나 진배 없었습니다.
주식 거래소는 사우스시 주식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다니엘 디포(‘로빈슨 크루소’ 저자)는 그 때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익스체인지 앨리에는 한몫잡기 위해 영국 전역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가를 끌어올리는 게 회사의 이익을 위해 좋은 일.”
사우스시는 그러나 대중의 믿음과는 달리 건실한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회사를 이끄는 존 블런트는 내실보다는 주가만 쳐다보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방법으로 사우스시 주식에 대한 수요를 끌어올렸습니다. 주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엔비디아를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엔비디아가 직접 돈을 빌려주고 주식을 사게끔 유도하는 셈입니다. 수요 폭증은 예정된 일. ‘돈 없어도 사우스시 주식을 살 수 있다’는 문구 하나가 미친 파급력은 어마어마 했습니다.
잉글랜드에 있는 모든 빈자들 역시 본인들의 비루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너도나도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주가는 폭등했지요. 한 달 사이에 80% 가까이 올랐습니다. 황당한 사업계획과 빈약한 매출에도 투자자들은 눈을 감았습니다.
거품이 낀 회사 뒤에는 언제나 정치적 배경이 있기 마련입니다. 존 블런트는 의원들과 장관의 몫을 언제나 남겨 놓습니다. 정경이 유착할 때 그 이익이 폭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원들은 주식을 우선 배정 받았고, 뇌물을 받아 챙긴 의원들은 2배 이상의 시세 차익을 맛봤습니다.
상원의원인 허치슨은 국채를 사우스시 주식으로 전환하는 계획에 대해서 “수많은 가정을 파멸로부터 보호해야하는 것이 상원의원의 의무”라고 일갈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180파운드에서 시작한 사우스시 주가는 어느덧 1000파운드를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1720년 국왕 조지1세도 이 주식 청약에 참여했습니다. 런던의 모든 사람이 외칩니다. “롱 리브 킹, 롱 리브 사우스시”(영원하라 왕이여, 사우스시여).
시장 저잣거리에서마저 주식 이야기가 나올 때는 언제나 매도 시점이라는 우스갯소리, 동서고금의 진리인가 봅니다. 런던의 모든 사람들이 사우스시 주식이라는 광품에 사로잡히는 즈음해서 조금씩 그 실체가 드러납니다. 본업(本業)인 라틴아메리카와의 독점 무역에서 별다른 수익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졌었습니다. 정보는 언제나 비대칭적이고, 그 피해는 시민의 몫입니다.
‘사우스시’라는 바다에는 물과 고기가 없었습니다. 오직 거품만이 가득합니다. 주가 폭락은 수순이었습니다. 1000파운드에 달하던 주가는 이제 100파운드로 떨어집니다. 며칠 만에 10분의 1토막이 난 것이었습니다.
주가가 폭락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전 재산을 날린 시민들이 의회에 찾아가 구원을 원했지만 묘수는 없었습니다. 폭도로 변한 군중들은 영국 정치의 중심지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난입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성경에서나 묘사되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사우스시’라는 파도가 잉글랜드를 강타합니다. “모든 질병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 환상 속에 빠져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태가 우리 눈앞에 와 있다.” 다니엘 디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잉글랜드 조폐공사 사장으로 일하고 있던 뉴턴 역시 이때 모든 재산을 날렸습니다. 오늘날의 가치로 77억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습니다. 부를 향한 욕심 앞에서는 그의 빛나는 지성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 마침 라이벌 프랑스에서도 미시시피 회사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전 유럽을 뒤흔든 금융 위기였습니다.
“영국의 금융을, 더 나아가 경제를 구해야 한다.”
국격은 번영이 아닌 위기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미시시피 회사가 무너진 후 프랑스는 휘청거렸지만, 잉글랜드는 달랐습니다. 품격있는 지도자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등판했기 때문입니다. 새로 임명된 재무부 장관 로버트 월풀이었습니다.
그는 입각하자마자 책임자에 대한 조사에 나섰습니다. 사우스시의 부패에 눈감아준 유력 정치인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습니다. 전임 재무장관 존 아이슬라비를 비롯해 고위 관료 여럿이 탄핵당합니다. 광분한 투자자를 진정시키기 위한 제물로 충분한 인물들이었지요.
주식 폭락으로 완전히 얼어붙은 경제에 활력을 돌리기 위해서 영란은행을 적극 활용합니다. 필요한 곳에 돈을 공급하고, 살려야 할 기업은 살리는 작업. 냉철하지만, 때론 잔인하게. 선비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모두 겸비한 접근이었지요.
거친 말처럼 뛰놀던 기업들에겐 재갈을 물렸습니다. 1720년에 통과된 버블법(Bubble Act)이었습니다. 기업이 허위성 정보를 기반으로 주식을 발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었습니다. 경제사상 기업에게 규제를 가한 첫 번째 법안이기도 했었지요.
기업의 투명성과 금융시장의 건전성 없이는 자본 시장이 성장할 수 없다는 걸 잘아서였습니다. 선명한 금융시스템 속에서 잉글랜드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로버트 월풀은 사태 수습의 공을 인정받아 잉글랜드 역사상 첫 총리(Prime Minister) 자리에 오릅니다.
18세기 후반 증기기관의 혁명적 발전은 잉글랜드를 산업 부국으로 이끌었습니다. 사우스시의 거품을 내실로 가득한 풍요의 바다로 만든 건 잉글랜드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같은 시기 미시시피 회사 거품의 직격탄을 맞은 프랑스는 1787년 프랑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집니다. 프랑스에는 월풀이라는 위대한 정치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때로 국가의 명운을 가릅니다.
<네줄요약>
ㅇ18세기 초 잉글랜드는 사우스시 회사라는 독점 무역권을 가진 회사를 설립하고 국채를 가진 투자자들이 주식을 가질 수 있게 했다.
ㅇ장밋빛 전망이 가득하면서 잉글랜드 전역에 주식을 사려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이작 뉴턴도 그 중 하나였다.
ㅇ수익에 대한 거품이 드러나자 주식은 10분의 1로 폭락했다.
ㅇ그러나 월풀이라는 위대한 정치인이 책임자를 처벌하고, 금융시장을 안정화시키면서 다시 잉글랜드는 금융중심지로 거듭났다.
<참고문헌>
ㅇ에드워트 챈슬러, 금융투기의 역사, 국일증권경제연구소,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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