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구치 안고 - 타락론 (1947); 전후 일본의 뒤바뀐 풍경을 가감없이 묘사한 수작; 인간의 모순적이고 변덕스런 감정에 대한 허무주의적 감상,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의한 기대감이 작품 속에서 복잡하게 교차하고 있다;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오자키 가쿠도가 주창한) 세계연방론에 대한 논의도 매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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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년 사이에 세상은 변했다. ‘천황의 방패로 나서는 비천한 이 몸, 임 곁에서 죽으리라 돌아보지 않으리라.’ 젊은이들은 꽃처럼 졌으나 같은 젊은이들이 살아남아 암거래를 한다. 갸륵한 심정으로 남자들을 떠나보낸 여자들이 부군의 위패 앞에 머리 조아리는 일도 반년의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점점 사무적으로 변해갈 터이며, 이윽고 사모하는 새 임의 얼굴을 가슴에 품게 되는 날도 멀지 않았다. 인간이 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원래 그러한 것이며 변한 것은 세상의 겉껍질일 뿐이다.
옛날에 사십칠 인의 사무라이를 살려두지 않고 처형을 단행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목숨 부지하여 비굴한 생을 삶으로 인해 공들여 얻은 명예를 더럽히는 자가 생겨선 안 된다는 노파심 때문이었다던가. 현대의 법률에 그와 같은 사려는 존재하지 않는다. 허나 사람의 심정에는 다분히 이 같은 경향이 남아 있어,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상태로 끝나게 하고픈 바람은 일반적 심정 중 하나인 듯하다.
무사는 복수를 위해 풀뿌리를 헤치고 다니며 걸인 행세를 하면서도 끝끝내 원수의 족적을 쫓아 헤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과연 진정으로 복수의 정열로써 원수의 족적을 쫓아다닌 충군효자가 있었을까. 그들이 아는 바는 원수는 갚아야 한다는 법칙과 법칙으로 규정된 명예뿐이 아닌가. 원래 일본인은 가장 증오심이 적은 동시에 또 오래가지 않는 국민이며,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라 하는 낙천성이야말로 실제 일본인의 거짓 없는 심성이다. 어제의 적과 타협하는, 아니 서로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사이가 되는 일은 일상다반사이며, 원수이기에 더욱 속을 드러내 보이고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되어 이군(二君)을 섬기려 하고 어제의 적도 섬기려 든다. 살아서 포로가 되는 수치를 당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건 그와 같은 규정이 없으면 일본인을 전장으로 내몰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규약에 순종하지만 우리의 거짓 없는 심성은 규약과는 반대이다. 일본 전사(戰史)는 무사도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권모술수의 전사이며, 따라서 역사의 증명을 기다리기보다 자아의 본심을 직시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에 내장된 법칙을 알게 된다. 오늘날 군인 정치가가 미망인의 연애에 대한 집필을 금한 것처럼 옛 시대의 무인은 무사도에 의해 자신과 또 자신의 부하들의 약점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정치가를 인간 유형으로 구분하여, 독창성과는 무관하게 그저 관리하고 지배할 뿐인 인종이라 했으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정치가 중 대다수는 늘 그러하다 하겠으나 소수의 천재는 관리나 지배 방법에 독창성을 낳고, 그것이 범속한 정치가들의 규범이 되어 개개의 시대, 개개의 정치를 관통하는 하나의 역사의 모습을 이룸으로써 살아 있는 거대한 의지를 나타내게 된다. 정치의 경우에 있어 역사는 개개의 것을 서로 이어가지 않고 개개의 것을 함몰시키며 별개의 거대한 생물체로 탄생하는 것으로, 그러한 역사의 모습에 있어 정치도 또한 거대한 독창성을 발휘한다. 이번 전쟁을 행한 자가 누구인가. 도조이고 군부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러나 또 일본을 관통하는 거대한 생물체인 역사의 어찌할 수 없는 의지였음에 틀림없다. 일본인은 살아 있는 정치적 의지로서의 역사 앞에서는 단지 운명에 순종적인 어린아이였을 뿐이다. 좋다. 정치가 자체에게는 독창성이 없다치더라도 정치는 역사의 모습에 있어, 독창성을 갖고 의욕을 갖고 그칠 줄 모르는 보조(步調)로 대해의 파도처럼 걸어간다. 그 누가 무사도를 만들어냈던가. 이 또한 역사의 독창 혹은 후각이었으리라. 역사는 항상 인간이란 것을 냄새 맡고 있다. 그리고 무사도는 인성이나 본능에 대한 금지 조항이기 때문에 비인간적, 반인성적이나, 인성이나 본능에 대한 통찰의 결과라는 점에서는 지극히 인간적이다.
나는 천황제에 대해서도 지극히 일본적인(따라서 독창적인) 정치적 작품을 본다. 천황제는 천황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천황은 때로 음모를 일으킨 적도 있으나 대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음모도 늘 성공한 예가 없어 유형(流刑)을 가거나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했으며 결국 언제나 정치적 이유에 의해 그 존립을 인정받아왔다. 사회적으로 망각되었다가도 정치적 이유에 의해 실려 나오며, 그 존립의 정치적 이유는 이른바 정치가들의 후각에 의한 것으로, 그들은 일본인의 성벽에 대해 통찰하고 그 성벽 속에서 천황제를 발견했다. 그들이 필요로 한 것은 반드시 천황家에 한정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공자 가라도 석가 가라도 레닌 가라도 무방했다. 단지 대신할 수 없었을 뿐이다.
적어도 일본의 정치가들(귀족이나 무사)은 자기의 영원한 융성을 약속하는 수단으로서 절대 군주의 필요성을 냄새 맡았다. 그들은 본능적 실질주의자로, 자신의 인생이 즐거우면 그만이었으며, 게다가 조정 의례를 성대히 하여 천황을 떠받들어 모시는 기묘한 의식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그에 만족했다. 천황을 숭배하는 일이 자기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고 또 스스로가 자신의 위엄을 느끼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한심한 것들을 자발적으로 숭배하며 살면서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도학(道學) 선생은 교단에 서면 먼저 책을 머리 위로 받들어 보이는데 그는 그 행위에서 자신의 위엄과 자기 자신의 존재까지도 느끼는 것이리라. 그리고 우리들도 무언가의 형태로 그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일본인처럼 권모술수를 업으로 삼는 국민에게는 권모술수를 위해서도 천황이 필요하다. 개개의 정치가는 반드시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인 후각으로써 그 필요성을 느끼려 하지 않고 또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의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히데요시는 주라쿠에 천황을 초대하여 납시게 하고 스스로 자신의 성의(盛義)에 감읍했는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위엄을 느낌과 동시에 그 속에서 우주의 신을 보았다.(.........)
전쟁에 패하고 보니 결국 불쌍한 건 전몰한 영령들이라는 생각에도 나는 금방 수긍하기 어렵다. 예순이 넘은 장군들이 아직도 생에 연연해하며 법정에 끌려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무엇이 인생의 매력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마 나 자신도, 만약 내가 예순 넘은 장군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생에 연연해하며 법정으로 끌려갔으리라 상상하지 않을 수 없기에, 나는 그저 인생이라고 하는 기괴한 힘 앞에 망연해질 따름이다. 내가 스무 살 미녀를 좋아하듯이 노장군들 역시 스무 살 미녀를 좋아하는 걸까. 또 전몰한 젊은 영령을 애틋하게 기리는 까닭도 스무 살 미녀를 좋아하는 까닭과 같을까.
나는 피를 보는 것을 무척 싫어해서, 언젠가 눈앞에서 자동차가 충돌했을 때 순간적으로 그 자리에서 빙글 뒤로 돌아 도망쳐버렸다. 하지만 나는 위대한 파괴를 좋아했다. 나는 폭탄이나 소이탄에 전율하며 광포한 파괴에 격하게 흥분했지만 그럼에도 그때만큼 인간을 사랑하고 그리워한 때는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소개(疏開)할 것을 권하며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골집을 제공하겠노라 한 몇 명의 친절한 제안을 뿌리치고 도쿄에 버티고 남았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살 수 있으리라는 확신 쪽이 더 컸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폐허에서 꼭 살아남아야만 하는 이유가 될 무언가의 포부를 가졌는가 하면, 나는 단지 살아남는다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계획도 가지지 않았다. 단, 패전 후에 있을 예상 불가능한 신세계를 향한 신비로운 재생, 그에 대한 호기심은 내 일생에서 가장 신선하다 할 것이었고, 그 기이한 신선함에 대한 대상(代償)으로라도 도쿄에 버티고 남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기묘한 주문에 걸렸을 뿐이다. (........)
하지만 나는 위대한 파괴를 사랑했다. 운명에 순종적인 인간의 모습은 기묘하게도 아름다운 법이다. 고지마치의 온갖 대저택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여진만이 자욱하게 이는 가운데, 기품이 느껴지는 아버지와 딸이 붉은색 가죽 트렁크를 사이에 두고 개울가 초록색 풀밭에 앉아 있었다. 다른 한편에 여진을 날리는 망망한 폐허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와 딸의 평화로운 피크닉의 한때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도겐 언덕 역시 모든 게 소실되고 여진만이 날렸는데, 언덕 도중에 폭격 때문이 아니라 자동차에 치여 죽은 것으로 보이는 사체가 쓰러져 있었고 그 위에 함석판 한 장이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총검을 든 군인이 서 있었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이재민들의 행렬이 실로 그저 무심한 물줄기에 불과하듯 사체를 비켜 지나갔고, 길을 적시는 선혈에도 누구 하나 주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쩌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도, 버려진 휴지조각을 보는 만큼의 관심만 보일 뿐이다. 미군들은 종전 직후의 일본인이 허탈 상태에 빠져 방심하고 있다 했지만 폭격 직후의 이재민들의 행진은 허탈이나 방심과는 종류가 다른, 놀랄 만큼의 충만함과 중량을 지닌 무심함으로 운명을 따르는 더없이 천진하며 순종적인 어린아이와 같았다. 웃는 이는 언제나 열대여섯 살, 혹은 열일고여덟 살의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의 웃음은 상쾌했다.
전쟁의 위대한 파괴 아래서는 운명은 있었으나 타락은 없었다. 무심했지만 충만했다. 성난 불길 속을 뚫고 도망쳐온 사람들은 불타기 시작한 집 근처에 모여들어 불을 쬐며 추위를 달랬고 같은 불에 달려들어 필사적으로 소화 작업에 임하는 사람들과 단지 일척지간에 있었지만 전혀 다른 별세계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위대한 파괴, 그것이 초래하는 생에 대한 놀라운 애착, 위대한 운명, 그것을 향한 인간의 놀라운 애정, 그에 비하면 패전 후의 표정은 진정 한낱 타락에 지나지 않았다.
허나 타락이라고 하는 것의 놀랄 만한 평범함과 당연함에 비교하면 저 처절하고도 위대한 파괴가 낳는 애정과, 운명에 순종하는 인간들의 아름다움도 단지 물거품과 같이 공허한 환영에 지나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도쿠가와 바쿠후의 사상은 사십칠 인의 사무라이를 처형함으로써 그들을 영원한 의사(義士)로 남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 결과 사십칠 인의 타락만은 막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인간 자체가 언제나 의사에서 범속으로, 범속에서 다시 지옥으로 계속 전락해가는 수순을 막을 도리는 없다. 특공대 용사라는 것 또한 한낱 환영에 지나지 않고, 진정한 인간의 역사는 암거래상이 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미망인이 사도와 같은 여생을 사는 것도 허망한 환영에 불과하며, 가슴에 새 임의 얼굴을 품는 것에서부터 인간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어쩌면 천황도 그저 또 다른 하나의 환영에 지나지 않으며, 평범한 인간이 되는 일에서 비로소 진실한 천황의 역사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역사라고 하는 생명체의 거대함과 마찬가지로 인간 자체도 놀라우리만큼 거대하다. 산다는 일은 실로 유일무이한 불가사의다. 예순일곱 살의 장군들이 할복도 하지 않고 똑같은 형색으로 줄지어 법정에 끌려나오는 장면 등은 종전(終戰)에 의해 새로이 발견된 인간의 진실을 말해주는 장관이라 하겠다. 일본은 패했고 무사도는 망했지만, 타락이라고 하는 진실의 모태에 의해 비로소 처음으로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살아남아라, 타락하라. 그 정당한 절차를 따르는 것 외에 진실로 인간을 구원할 만한 편리한 첩경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전쟁의 위대한 파괴 아래서 두려움에 떨면서 황홀하게 그 아름다움을 응시했다.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것이 있을뿐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난리 중에는 도둑조차도 없었다. 최근 도쿄가 많이 어둡다고들 하지만, 전쟁 중에는 실로 칠흑 같았는데, 그럼에도 아무리 밤이 깊어도 강도를 만날 걱정 없이 밤길을 걸었고, 대문도 잠그지 않고 잠에 들었다. 전쟁 중에 일본은 거짓말 같은 이상향을 구현하며 허망한 아름다움으로 넘쳐났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진실에서 비롯하는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일을 잊는다면 이처럼 마음 편하고 훌륭한 구경거리는 또 달리 없을 것이다. 비록 쉼 없는 폭탄의 공포가 있다 하더라도 생각하는 일이 없는 한 인간은 언제나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으며, 그저 황홀하게 바라보고 있으면 된다. 나는 그런 바보였다. 그 누구보다 천진하게 전쟁이 제공하는 유희에 빠졌다.
전쟁이 끝난 후 우리들은 온갖 자유를 허용 받았으나, 사람들은 자유를 허용 받았을 때 자신이 영문 모를 제한 속에 있으며 여전히 부자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간은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 있고, 또 죽지않으면 안 되며, 그리고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상의 개혁은 단 하루에 단행될 수 있지만 인간의 변화는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저 멀리 그리스에서 발견되어 확립을 향한 첫걸음을 대딛었던 人性이, 오늘날 과연 얼마만큼의 변화를 보이는가.
인간. 전쟁이 아무리 처참한 파괴와 운명으로 인간을 사로잡으려 해도 인간 자체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 전쟁은 끝났다. 특공대 용사는 벌써 암거래상이 되었고 미망인도 이미 새로운 연인의 얼굴 때문에 가슴이 부풀었지 않은가.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인간은 타락한다. 의사도 성녀도 타락한다. 그것을 막을 수도 없거니와 그럼으로써 인간을 구원할 수도 없다. 인간은 살고, 인간은 타락한다. 그 진실 이외에 인간을 구원할 편리한 첩경은 없다.
전쟁에 졌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기에 타락하는 것이며 살아 있기에 타락할 뿐이다. 허나 영원히 타락하지는 못하리라.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고난에 대해 강철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가녀리고 위약하며, 그 때문에 어리석은 존재지만 완전히 타락하기에도 너무 약하다. 인간은 결국 처녀를 살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무사도를 짜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며 천황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처녀가 아닌 자신의 처녀를 살해하고 자신의 무사도와 자신의 천황을 고안해내기 위해서는 사람은 올바르게, 타락해야 할 길을 온전히 타락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타락할 필요가 있다. 타락해야 할 길을 온전히 타락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구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에 의한 구원 따위는 겉껍질에 불과한 허황한 거짓이다.
- 사카구치 안고, <타락론 (1946)>에서 발췌
패전 후 일번 국민의 도의(道義)가 퇴폐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전쟁 전의 건전한 도의로 복귀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축하할 일일까.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 자란 니카타 시는 석유 산지이고, 때문에 석유 졸부들의 산지이기도 한데, 내가 소학교에 다닐 무렵 나카노 간이치라는 한 졸부가 재산을 이룬 다음에도 대단히 검약한 생활을 지속하여, 정차장에서 인력거를 타면 이래저래 삯이 많이 든다며 반다이 다리라고 하는 다리 근방까지 걸어와서 거기서 싼 차를 주워 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통해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듣곤 했다. 그런데 얼마전 고향 사람이 와서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지금은 그 이야기가 신쓰 아무개라고 하는 새로운 석유 졸부의 일화로 둔갑하여, 지금도 여전히 니가타 시민의 일상의 교훈이자 생활 규범으로 구전된다고 한다.
그러나 백만장자가 오십 전인 인력거 삯을 삼십 전으로 아껴 쓴다는 것이 과연 미덕이며 또 그것이 우리가 일상의 모범으로 삼을 만한 생활일까. 문제는 이 이야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부류의 수많은 일화들, 그 근저를 관통하는 정신이자 생활방식이 문제다. (........)
작년 팔월 십오일, 천황의 이름으로 전쟁이 종결됨으로써 천황에 의해 죽지 않고 살게 되었노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일본 역사가 증명하는 바에 의하면 천황이란 존재는 언제나 그같은 비상사태를 처리하기 위해 일본 역사가 고안해 낸 독창적인 작품이자 방책이며 비술이다. 군부는 이 비술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으며 우리들 일본 국민 또한 이 비술을 본능적으로 기다리고 있다. 그리하여 군부와 일본 국민이 합작한 대단원의 일 막이 팔월 십오일이 되었다.
견디기 힘든 것을 참고, 참기 힘든 것을 참으며 짐의 명령에 따라 달라고 천황이 말한다. 그러자 국민은 엎드려 울며 다름 아닌 폐하의 명령이니까, 참기 힘들지만 억지로 참으며 미군에게 지겠노라고 말한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우리들 국민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았는가. 죽창을 들고 흔들며 미군의 전차에 대항하다 찰흙인형처럼 푹쑥풀쑥 죽어갈 것이 너무도 싫어 어쩔 줄 몰라 하지 않았는가. 전쟁이 끝날 것을 가장 절실히 바랐었다. 그런 주제에 그걸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의명분이라고 하고, 천황의 명령이라고 한다. 참기 힘든 것을 참는다고 한다. 이 무슨 조화란 말인가. 비참하고도 한심하다 할 엄청난 역사적 기만이 아닌가. 더욱 x통탄할 일은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기만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천황의 정전 명령이 없었다면, 우리는 실제로 미군 전차에 몸을 던져, 정말은 싫으면서도 내색도 하지 않고 장렬하게 찰흙인형이 되어 풀쑥풀쑥 죽어갔을 것이다. 가장 천황을 모독하는 자가 가장 천황을 숭배하는 것처럼. 우리 국민들은 그렇게까지는 천황을 숭배하지 않는 대신 익히 천황을 이용할 줄 알며, 그러한 자신의 교활함과 대의명분이라는 교활한 간판을 깨닫지 못하고 천황 존엄으로부터 얻는 이익을 구가한다. 이 무슨 해괴한 장치이며 또 교활함이란 말인가. 우리는 이 역사적 조정 장치의 작동 원리에 사로잡혀 인간과 인성의 올바른 모습을 상실했다.
인간과 인성의 올바른 모습이란 무엇인가.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원한다 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하는 것, 요는 그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할 것, 좋아하는 여자를 좋아한다 말할 것. 대의명분 혹은 불의에 대한 금제, 의리와 인정이라고 하는 거짓된 옷을 벗어버리고 적나라한 마음이 되어보자. 이 적나라한 모습을 규명하고 응시하는 것이 인간 부활을 위한 제일 조건이다. 거기서부터 자신과, 인성의 진실한 탄생과 새로운 출발이 비롯한다.
일본 국민 제군, 나는 제군에게, 일본인 및 일본 자체의 타락을 소리 높여 호소한다. 일본 및 일본인은 타락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친다. 천황제가 존속하고, 그같은 조정 장치가 일본의 관념에 계속 남아서 작용하는 한 일본에 인간과 인성의 참된 개화를 바라기는 어렵다. 참된 인간의 빛은 영원히 폐쇄되고 진정한 인간적 행복도, 인간적 고뇌도, 인간의 그 어떤 진실한 모습도 일본에 찾아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일본으로 하여금 타락하라고 외치고 있지만 실제 의미는 그 반대로서, 실은 현재의 일본이, 그리고 일본적 사고가 거대한 타락에 침윤되어 있다. 봉건 제도의 기만에 찬 ‘건전한 도의’로부터 전락하여 알몸으로 진실의 대지 위로 내려서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건전한 도의’로부터 타락함으로써 진실한 인간으로 복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천황제니, 무사도니, 내핍의 정신이니, 오십 전을 삼십 전으로 깎는 미덕이니 하는 그런 온갖 거짓된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이 되어 여하튼 인간이 되어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금 어제의 기만의 나라로 되돌아갈 뿐이다. 우선 알몸이 되어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터부에서 벗어나 진실한 자신의 목소리를 낼 것을 원하라. 미망인은 연애를 하고 지옥으로 떨어지라. 복귀한 군인은 암거래상이 되라. 타락 자체는 나쁜 것이 틀림없지만 대가를 치르지 않고 진실을 찾기는 어렵다. 피상적인 미사여구만으로 진실을 보상하기는 어려우니, 살과 피와 진실한 비명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 타락해야 할 때는 온전히 거꾸로 떨어져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도의를 퇴폐케 하고 혼란을 부르라. 피를 흘리고 온몸에 독을 바르라. 우선 지옥문을 통과하고서 천국을 향해 기어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손과 발, 스무 개의 손톱과 발톱이 피로 물들어 다 뽑혀나가도록 천천히 착실히 기어올라 천국 가까이로 다가가는 이외에 달리 어떤 길이 있겠는가.
타락 자체는 언제나 평범하고 시시하며 그저 악일뿐이지만, 타락이 갖는 성격 중에는 고독이라는 한 가지 위대하다 할 인간적 면모가 엄연히 존재한다. 즉 타락은 언제나 고독한 것으로, 타인들에게 버림받고 부모에게까지 버림받은 후, 오직 자신의 내적 진실에 의지하는 외에는 달리 어떤 길도 주어지지 않는 숙명을 띤다.
善人은 마음 편히 부모형제를 비롯한 사람들과의 공허한 의리나 약속 위에서 안면(安眠)하고, 사회 제도에 충성을 바쳐 투신하다 태연히 죽어간다. 허나 타락자는 언제나 그 궤도에서 벗어나 홀로 황야를 걸어간다. 악덕은 시시하고 평범하나 고독이라는 통로는 신에게 닿는 길이다. ‘선인조차 극락왕생을 이루거늘 악인은 말해 무엇하리요’라는 현자의 말은 곧 이 길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매춘부를 감싸려 한 것도 이 홀로 걷는 황야의 길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 길만이 천국으로 이르는 통로다. 몇 만, 몇 억의 타락자가 언제나 천국에 이르지 못하고 헛되이 지옥을 홀로 헤맨다 하더라도 이 길이 천국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비통한 일이지만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그렇다. 실로 비통하게도 여기에 인간의 실상이 있다. 이 실상은 사회 제도나 정치 따위에 의해서 변화하거나 구원받을 만한 종류의 것이 아니다.
정치의 신으로 불리는 오자키 가쿠도는 종전 후 세계연방론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르면 원시적인 인간은 부락과 부락으로 대립했다. 메이지 시대까지 일본에는 아직 일본이라는 관념이 없이 번과 번으로 대립했으며 일본인이 아닌 번인으로 존재했다. 거기에 非번인이 나타나 번의 대립의식을 타파함으로써 일본인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현대의 일본인은 일본 국민으로서 국가 간에 대립하고 있으나 메이지 시대의 비번인과 같이 비국민이 되어 국가 의식을 타파함으로써 국제인이 될 필요가 있으며 따라서 비국민이란 대단히 명예로운 명칭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세계연방론의 근간으로, 일본인이네 미국인이네 중국인이네 하고 구별하는 것은 여전히 원시적 사상의 잔재에 사로잡혀 있음을 말하며, 모두가 세계인이 되어 만민이 국적 구별 같은 건 폐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일단은 경청할 만한 주장이라 하겠다. 순결한 일본인의 혈통이라고 칭하며 소중하게 보전해야 할 그런 피 따위는 있을 리가 없다는 그의 거침없는 단언에서는 다소 귀기(鬼氣)마저 느껴지는 처절함이 배어나는데,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그의 부인은 영국인일 터이다. 일본인 아내가 있고 일본인 딸이 있는 사람이라면 좀처럼 이렇게는 단언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굳이 가쿠도에게 묻는다. 가쿠도는 어차피 대립이라는 것은 저급한 문화 단계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는데 과연 그러한가. 그는 인간이라는 중대한 사안을 혹시 잊은 것은 아닌가.
대립이 발생하는 것은 문화가 저급하기 때문이라지만, 국가와 국가 간의 대립이 사라진다 해도 인간과 인간 간의, 한사람과 한사람의 대립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 대립은 오히려 문화가 진보함에 따라 더욱 격해질 뿐이다.
원시인의 생활에는 가정이 확립되어 있지 않고 다부다처가 야합하고 있어 질투도 적거니와 개인의 대립이 극히 희박하다. 문화가 진보함에 따라 가정의 모습이 명확해지면서 개인의 대립이 격화, 첨예화의 일로를 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인간의 대립, 이 기본적인, 최대의 심연을 잊고서 대립감정을 논하고 세계연방론을 주창하며 인간의 행복을 들먹인다 하여 그것이 무슨 처방이 되고 위로가 되겠는가. 가정의 대립, 개인의 대립, 이것을 잊고서 인간의 행복을 논하는 일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이야기며, 정치의 한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산주의도 결국 세계연방론의 하나라 하겠는데, 그들도 인간의 대립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인성에 대해 가쿠도와 대동소이한 미비점을 폭로하고 있다. 그렇듯 정치는 인간에, 또 인성에 닿는 일이 불가능하다.
정치 그리고 사회 제도는 성긴 그물이며 인간은 영원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물고기다. 천황제라는 정치를 타파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도 그것도 어차피 사회적 조정 장치의 또 다른 진화에 불과하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물에서 빠져나와 타락하고, 제도는 인간에 의해 복수 당한다.
나는 본디 세계연방도 대단히 바람직하다 여기고 있으며 가쿠도가 주장하듯 보전할 가치가 있는 일본인의 순수 혈통 따위는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세계연방에 의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그런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진실한 생활은 그런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일본인이 세계인이 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으며 의외로 간단히 이루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 개인과 개인의 대립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의 진실한 생활이란 언제나 오직 이 개인이 대립하는 생활 안에 존재한다. 이 생활은 세계연방론이나 공산주의 등의 정치가 아무리 기를 쓰고 물구나무를 선다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이 개인이 대립하는 이 생활로부터 개인의 영혼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을 문학이라고 한다. 문학은 언제나 제도에 대한 또 정치에 대한 반역이며, 인간을 묶는 제도에 대한 복수다. 따라서 그 반역도 결국 복수를 통해 정치에 협력하는 것이다. 반역 자체가 협력이다. 애정이다. 이것이 문학의 숙명이며 문학과 정치 간의 절대불변의 관계다.
인간의 일생은 덧없다. 그러나 인간이란 것은 실로 대단한 옵티미스트이며 뒤죽박죽 모순투성인데다 심히 촐랑대는 존재여서, 전쟁이 한창인 중에 도쿄 사람 태반이 집을 잃고 방공호에서 살며, 비에 젖어도 달리 갈 곳이 없다고 한탄했지만, 그런 사람도 분명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 생활이 주는 묘한 안정감과 결별하기 힘든 애정을 느끼던 사람도 적지 않았을 터이며, 비에 젖고 폭격에 움츠러들면서도 그런 하루하루를 꽤나 즐기기 시작한 옵티미스트도 적지 않았다. 내 근처에서 지내던 한 아낙은 ‘폭격이 없는 날은 외려 심심하네’ 하고 우물가 회의에서 무심코 말을 흘려놓고 아차 했지만 모두 크게 웃기에 자신 또한 크게 웃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했는데, 그녀와 함께 웃은 다른 사람들도 의외로 본심은 그녀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리라고 생각한다. 매춘부는 사회 제도의 결함이라 하지만 본인들은 징용되어 기계에 달라붙어 앉아 일하던 때보다 재미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며, 여자에게 제복을 입혀 호령 붙여가며 노동시키면서 그런 생활이 건전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인생유전(人生流轉). 무한한 인간의 영원한 미래에 비하면 우리의 일생 따위는 이슬과 같은 목숨에 불과하며 그런 우리가 절대불변의 제도나 영원한 행복을 운운하며 미래를 약속하는 일은 주제넘기 이를 데 없는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 또는 영원한 시간에 대해, 그것이 가능케 할 인간의 진화에 대한 가공할 만한 모독이 아닌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조금씩 좋아지길 바라는 일이며 인간의 타락도 실은 그같은 한도 내에서만 가능한 한계를 가진다. 인간은 무한히 타락할 만큼 견고한 정신을 선사받지 못했다. 무언가의 장치로써 타락을 끌어 막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 장치를 만들고 그 장치를 부수면서 그리고 인간은 나아간다. 타락은 제도의 모태라는 그 애절한 인간의 실상을 우리는 지금 우선, 가장 엄격한 시선으로 응시할 필요가 있다.
- 사카구치 안고, <속 타락론 1946>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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