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다 쇼헤이와 김선일 피랍사건으로 보는 한일 양국의 국민성 차이와 일본의 메이와쿠 문화 / 코다 쇼헤이의 '자아찾기' 여행은 결국 참살로 끝났다 - 신에게 자비란 없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본 정부의 대답은 단호하게 거절이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본국 소환은 없다"는 말로 단언했으며 "협상은 없다"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렇게까지 일본 국민들의 대다수는 인질 구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어머니마저 아들의 구출을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적극적으로 나서 봐야 자위대의 피해만 커질 게 뻔했던 점도 있긴 하지만.
결국 48시간이 만료되어 협상은 결렬되었고 유일신과 성전은 경고대로 코다 쇼세이를 참살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만 24세였다.
2004년 10월 31일 새벽에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목 없는 시신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음 날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집행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에서 유일신과 성전은 알카에다 조직으로의 편입을 선포하고 이놈은 일본 정부의 미온한 태도로 죽은 것이니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정당화하였고 쇼세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본 정부의 미국 협조를 비난하며 미국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경고했다. 일본 정부의 몸값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고 성명을 모두 낭독한 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쇼세이를 성조기 위에 강제로 눕힌 뒤 단검으로 참수하였고[15][16] 참수한 목은 몸 위에 올려 놓았다. 특이하게도 다른 인질들과는 다르게 주황색 죄수복을 입지 않고 눈도 가려지지 않은 채 사복을 입은 상태에서 참수되었는데 사후 부검 결과에서 머리에 총상이 발견되고 여러 고문 흔적이 있었는데 코다 쇼세이의 저항이 있었거나 인질을 겁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가한 고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미국인 인질이었던 폴 존슨은 심문 영상에서 안대를 씌운 상태로 말을 하지 못하게 입 막음을 당했으며 또 다른 미국인 인질들인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는 피랍 영상에서 테러범들이 총을 머리 옆에 들이갖다 대면서 유언이나 말을 남길 수 있게끔 시켰다. 참수된 시신은 집행 당시 깔아놓은 성조기에 싸였으며 총상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쿠웨이트를 넘어서 일본으로 송환되어 유가족에게 전달되었고 기독교 집안의 영향으로 기독교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당시 한국 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보도되었으며 고이즈미 총리는 "새삼스레 분노를 느낀다."고 발언했다.
한편 여론의 반응과 별도로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살인죄로 분류하여 검찰에 송치했으며 현재 공소시효가 영구 중단되었지만 김선일 피랍 사건과는 다르게 범인 중 한 명은 신원이 밝혀졌는데 이름은 후세인 파미 바드르로 2006년 초에 체포되어 그 해 11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형 판결 뉴스가 존재하는데 영어로 되어 있다. # 현재는 사형이 집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수를 집행한 인물로, 위의 참수 직전 사진에서 맨 왼쪽의 인물이다. 살해범 이외의 다른 범인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미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쇼세이를 참수한 범인이 김선일을 참수한 유일신과 성전 소속이고 체포 직후 심문에서 불교 신자를 포함해 무려 자신이 116명이나 참수했다고 자백한 바 있기 때문에 이 자가 김선일을 참수했던 자일 가능성도 존재하디만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 중에 김선일도 포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2004년 10월 31일 새벽에 동양인으로 추정되는 목 없는 시신이 먼저 발견되었고 다음 날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집행하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영상에서 유일신과 성전은 알카에다 조직으로의 편입을 선포하고 이놈은 일본 정부의 미온한 태도로 죽은 것이니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라며 코다 쇼세이의 참수를 정당화하였고 쇼세이에게 삿대질을 하며 일본 정부의 미국 협조를 비난하며 미국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경고했다. 일본 정부의 몸값 제의가 있었으나 거절했다고 밝혔고 성명을 모두 낭독한 뒤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며 쇼세이를 성조기 위에 강제로 눕힌 뒤 단검으로 참수하였고[15][16] 참수한 목은 몸 위에 올려 놓았다. 특이하게도 다른 인질들과는 다르게 주황색 죄수복을 입지 않고 눈도 가려지지 않은 채 사복을 입은 상태에서 참수되었는데 사후 부검 결과에서 머리에 총상이 발견되고 여러 고문 흔적이 있었는데 코다 쇼세이의 저항이 있었거나 인질을 겁박하기 위한 차원에서 가한 고문이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미국인 인질이었던 폴 존슨은 심문 영상에서 안대를 씌운 상태로 말을 하지 못하게 입 막음을 당했으며 또 다른 미국인 인질들인 유진 암스트롱과 잭 헨슬리는 피랍 영상에서 테러범들이 총을 머리 옆에 들이갖다 대면서 유언이나 말을 남길 수 있게끔 시켰다. 참수된 시신은 집행 당시 깔아놓은 성조기에 싸였으며 총상의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쿠웨이트를 넘어서 일본으로 송환되어 유가족에게 전달되었고 기독교 집안의 영향으로 기독교 형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다고 한다.
당시 한국 뉴스에서도 이 사건이 보도되었으며 고이즈미 총리는 "새삼스레 분노를 느낀다."고 발언했다.
한편 여론의 반응과 별도로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살인죄로 분류하여 검찰에 송치했으며 현재 공소시효가 영구 중단되었지만 김선일 피랍 사건과는 다르게 범인 중 한 명은 신원이 밝혀졌는데 이름은 후세인 파미 바드르로 2006년 초에 체포되어 그 해 11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사형 판결 뉴스가 존재하는데 영어로 되어 있다. # 현재는 사형이 집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수를 집행한 인물로, 위의 참수 직전 사진에서 맨 왼쪽의 인물이다. 살해범 이외의 다른 범인들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미 미군의 공격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쇼세이를 참수한 범인이 김선일을 참수한 유일신과 성전 소속이고 체포 직후 심문에서 불교 신자를 포함해 무려 자신이 116명이나 참수했다고 자백한 바 있기 때문에 이 자가 김선일을 참수했던 자일 가능성도 존재하디만 그가 살해한 희생자들 중에 김선일도 포함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 사건 당시 일본 사회의 반응은 '와(和)'라고 하는 개인이 전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정신문화, 즉 메이와쿠에서 기인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납치범들의 요구 내용과 결국 피살당했다는 점은 김선일과 판박이였지만 파헤쳐 보면 김선일 피랍 사건과 대조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질타가 심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정부의 태도를 불가피하다고 봤으며 피해자 비난 여론도 종종 있었으나 대체로는 동정하였다.
피살 이후 한국에서도 응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을 동일한 선상으로 바라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납치되기 전까지의 행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김선일은 그가 속한 가나무역 회사에서 해당 지역에 파견한 근로자였고 정상적인 업무를 행하고 정상적으로 복귀하던 중에 납치당했기 때문에 김선일이 이라크에 간 것이 선교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 추후에 알려지긴 했지만 대중들의 입장에서 "위험한 곳으로 발령받아 자신의 일을 하다 납치되어 살해당한 아주 불쌍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반면 코다 쇼세이는 그냥 자아 찾기 해볼 겸, 다른 나라들을 자기 마음대로 놀러 다니다가 이라크에 들어가서 피해를 끼친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것이 김선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유발한 원인으로 작용되었지만 김선일 그 자신이 그런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간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테러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론을 고수한 것도 대중들도 당연히 대체로 이해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이 한 가지 있는데 이것은 두 나라의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엄밀히 다른데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면 개인주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터치를 하지 않되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 되고 본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도 자신이 알아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피살된 이 두 사람 말고도 미국인 민간인이었던 닉 버그 역시 본인이 간 거였고 본인의 선택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니 본인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유가족 인터뷰에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내 아들이 선택한 길이니 존중한다."며 담담하게 인터뷰하여 한국과 일본과도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확연하게 보여주었다.[17] 왜냐하면 당시 한국의 정서 상으로는 유가족들은 이건 다 정부 탓이라며 정부를 비난하며 소송을 걸거나 피해자는 협상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며 빨리 군대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정서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개인주의 정서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정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대응 과정에서 정부가 잘못한 점이 없고 납치 피해자 본인이 위험을 인지하고도 비필수적인 이유로 들어갔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온전히 다 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의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과도 비슷한데 당시 한국 정치권과 중노년층은 '우리 민족이고 우리나라 사람인데 세금을 들여서라도 당연히 구해와야 한다.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같은 의견이 대다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지만 청장년층에서는 "선교하겠다고 자기들이 알아서 간 건데 굳이 구해와야 하냐?"거나 "설사 구한다고 하더라도 구출에 든 비용은 모두 교회 측이 지불해야 한다."와 같은 반응이 많았다. 때문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은 물론 샘물교회 신도들과 관련자들 모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이 구출된 뒤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고 한국 정부는 이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여행금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 사회도 이처럼 비슷하게 "그냥 멋대로 간 사람이 잘못한 것", "죽든 말든"이라는 반응으로 책임은 전적으로 피랍자에게 물어 버리며 구출은 대개 포기해 버린다. 이런 태도는 10년 뒤에 또 다시 일어난 유카와 하루나 이슬람 국가 피랍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반면 이 사건의 2차 피해자인 고토 겐지는 유카와 하루나와 달리 지인을 구출하려는 올바른 일을 하다가 같이 사건에 휘말려서 죽었기 때문에 본토인 일본에서도 자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받았다. 이는 기인하는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정당한 대의 없는 자신의 행위로써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는 이들을 매우 안 좋게 보는 한국과 일본의 공통적인 면모다.
실제로 샘물교회 사건 때도 정부가 분명 테러 첩보 경고를 고지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은 그 경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피해자 유족들 중 일부는 출국을 막지 않은 정부가 잘못이라며 정부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의 주장은 본인의 선택으로 갔음에도 행동의 결과를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한국 법원은 이것이 궤변이라고 여겨 패소 판결했고 이미 개인주의적 시각이 강해진 한국의 여론도 냉담했다. 다만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거대 시민 단체들의 존재로 정치권에서 구조를 위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뿐이다.
여기에 각 개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서양과 각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일본의 인식의 차이가 더 해져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 사회에 폐를 끼친 코다 쇼세이를 그렇게 키우고 코다 쇼세이를 말리지 않은 그의 가족들을 비난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의 피해자들인 닉 버그의 유족들은 1차적으로 닉 버그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개전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많은 동정을 받았다.[18] 영국에서 일어난 영국인 케네스 비글리도 역시 닉 버그와 마찬 가지로 영국 내에서의 여론은 비글리를 비난하는 여론이 없고 동정하는 여론이 대다수였고 케네스의 유족들과 영국 시민들이 비글리가 무사 생환하기를 바랬으며 심지어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을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깨고 테러리스트들이랑 협상을 해서 이라크인 여성 포로들을 석방해 비글리를 구출해내야 할 정도였다.[19] 하지만 코다 쇼세이의 가족들은 오히려 아들의 기행이 낳아 버린 무모한 결과에 대해 아들 대신 사죄하면서 일본 사회의 비난을 그대로 들어야만 했다.[20] 결론적으로 다른 국가들의 인질들이 희생당할 때는 보통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매우 크게 오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코다의 유가족들은 오열보단 일본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가 되었다.[21][22]
흥미로운 점은 납치범들의 요구 내용과 결국 피살당했다는 점은 김선일과 판박이였지만 파헤쳐 보면 김선일 피랍 사건과 대조적인 부분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질타가 심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정부의 태도를 불가피하다고 봤으며 피해자 비난 여론도 종종 있었으나 대체로는 동정하였다.
피살 이후 한국에서도 응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두 사람을 동일한 선상으로 바라보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납치되기 전까지의 행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김선일은 그가 속한 가나무역 회사에서 해당 지역에 파견한 근로자였고 정상적인 업무를 행하고 정상적으로 복귀하던 중에 납치당했기 때문에 김선일이 이라크에 간 것이 선교 목적도 있었다는 것이 추후에 알려지긴 했지만 대중들의 입장에서 "위험한 곳으로 발령받아 자신의 일을 하다 납치되어 살해당한 아주 불쌍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으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반면 코다 쇼세이는 그냥 자아 찾기 해볼 겸, 다른 나라들을 자기 마음대로 놀러 다니다가 이라크에 들어가서 피해를 끼친 사람으로 밝혀졌다. 이것이 김선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유발한 원인으로 작용되었지만 김선일 그 자신이 그런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간 것이나 다름 없으므로 이에 대해 한국 정부가 테러와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론을 고수한 것도 대중들도 당연히 대체로 이해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차이점이 한 가지 있는데 이것은 두 나라의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의 차이점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와는 엄밀히 다른데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피해를 끼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면 개인주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터치를 하지 않되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선 안 되고 본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도 자신이 알아서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피살된 이 두 사람 말고도 미국인 민간인이었던 닉 버그 역시 본인이 간 거였고 본인의 선택으로 그렇게 되어 버린 것이니 본인도 담담하게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유가족 인터뷰에선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내 아들이 선택한 길이니 존중한다."며 담담하게 인터뷰하여 한국과 일본과도 문화적으로 다르다는 확연하게 보여주었다.[17] 왜냐하면 당시 한국의 정서 상으로는 유가족들은 이건 다 정부 탓이라며 정부를 비난하며 소송을 걸거나 피해자는 협상 인터뷰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려 달라며 빨리 군대 철수하라고 주장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정서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도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개인주의 정서가 강해지기 시작했고 정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해지기 때문에 대응 과정에서 정부가 잘못한 점이 없고 납치 피해자 본인이 위험을 인지하고도 비필수적인 이유로 들어갔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온전히 다 져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다.
한국의 샘물교회 선교단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건과도 비슷한데 당시 한국 정치권과 중노년층은 '우리 민족이고 우리나라 사람인데 세금을 들여서라도 당연히 구해와야 한다. 야박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같은 의견이 대다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지만 청장년층에서는 "선교하겠다고 자기들이 알아서 간 건데 굳이 구해와야 하냐?"거나 "설사 구한다고 하더라도 구출에 든 비용은 모두 교회 측이 지불해야 한다."와 같은 반응이 많았다. 때문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은 물론 샘물교회 신도들과 관련자들 모두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이 구출된 뒤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야 했고 한국 정부는 이후 비슷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여행금지 제도를 만들었다.
일본 사회도 이처럼 비슷하게 "그냥 멋대로 간 사람이 잘못한 것", "죽든 말든"이라는 반응으로 책임은 전적으로 피랍자에게 물어 버리며 구출은 대개 포기해 버린다. 이런 태도는 10년 뒤에 또 다시 일어난 유카와 하루나 이슬람 국가 피랍 사건에서도 나타났다. 반면 이 사건의 2차 피해자인 고토 겐지는 유카와 하루나와 달리 지인을 구출하려는 올바른 일을 하다가 같이 사건에 휘말려서 죽었기 때문에 본토인 일본에서도 자국민들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받았다. 이는 기인하는 문화적 맥락은 다르지만 정당한 대의 없는 자신의 행위로써 공동체에 피해를 끼치는 이들을 매우 안 좋게 보는 한국과 일본의 공통적인 면모다.
실제로 샘물교회 사건 때도 정부가 분명 테러 첩보 경고를 고지했음에도 오히려 피해자들은 그 경고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피해자 유족들 중 일부는 출국을 막지 않은 정부가 잘못이라며 정부에 소송을 걸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샘물교회 납치 피해자들의 주장은 본인의 선택으로 갔음에도 행동의 결과를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라 정부와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한국 법원은 이것이 궤변이라고 여겨 패소 판결했고 이미 개인주의적 시각이 강해진 한국의 여론도 냉담했다. 다만 한국은 일본과는 달리 거대 시민 단체들의 존재로 정치권에서 구조를 위해 '노력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뿐이다.
여기에 각 개인을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서양과 각 개인이 사회적 관계 속에 위치해 있다는 일본의 인식의 차이가 더 해져 당시 일본인들은 일본 사회에 폐를 끼친 코다 쇼세이를 그렇게 키우고 코다 쇼세이를 말리지 않은 그의 가족들을 비난했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에서도 비슷한 사건의 피해자들인 닉 버그의 유족들은 1차적으로 닉 버그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부시 행정부의 무리한 개전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많은 동정을 받았다.[18] 영국에서 일어난 영국인 케네스 비글리도 역시 닉 버그와 마찬 가지로 영국 내에서의 여론은 비글리를 비난하는 여론이 없고 동정하는 여론이 대다수였고 케네스의 유족들과 영국 시민들이 비글리가 무사 생환하기를 바랬으며 심지어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을 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깨고 테러리스트들이랑 협상을 해서 이라크인 여성 포로들을 석방해 비글리를 구출해내야 할 정도였다.[19] 하지만 코다 쇼세이의 가족들은 오히려 아들의 기행이 낳아 버린 무모한 결과에 대해 아들 대신 사죄하면서 일본 사회의 비난을 그대로 들어야만 했다.[20] 결론적으로 다른 국가들의 인질들이 희생당할 때는 보통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매우 크게 오열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코다의 유가족들은 오열보단 일본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가 되었다.[21][22]
- 고등학교를 2학년 때 중퇴하고 통신제 고등학교를 통해서 졸업장을 취득했다고 한다. 프로 복서를 꿈꾼 적도 있었다고 하며, 과거에는 도장(塗装) 회사와 다다미 가게에서 일했던 경력도 있다. 그로 인해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했다고 한다. 자신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로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자아 찾기 여행을 하고 싶다. 뉴질랜드에 머문 뒤에 각국을 여행하고 싶다"면서 알렸다고 한다.
- 중학교 동창회 시절에 "뉴질랜드에서 홈스테이로 머무른 뒤, 워킹 홀리데이로 세계 각지를 여행하고 싶다."며 자신의 계획을 기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외국에서 견문을 넓히고 싶다는 뜻을 자주 비춰 왔다고 하지만 당시 이라크는 정세와 치안이 극단적으로 악화되어 있었고 이것을 잘 생각하지 않고 이라크를 방문한 그가 결국 무모한 행동을 벌이는 원인으로 작용되어 격렬하게 비난을 받는 원인이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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