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가 볼 때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국제투기자본 (데이비드 록펠러-로널드 레이건-조지 슐츠)이 (로스차일드-소련-냉전체제를 약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CIA 공작을 통해 소련 상공에서 미군 정찰기를 민간기로 위장하는 연습을 여러차례 벌이며 소련을 도발한 뒤 한번 사건이 터지길 기다린 것; 비슷한 시간대에 소련 상공을 미국의 RC-135 정찰기가 배회한 것은 일부러 폭격을 유도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는데, 하필 미국의 다른 의원들은 다음편 항공기에 탑승하고, 평소 신세계질서를 비판했던 극우 성향의 민주당원 래리 맥도날드만 폭격을 당해 죽은 것을 보면, 국제투기자본이 이 비행기를 타겟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보기관 지시로, (대통령 전용기 기장까지 지냈던) 대한항공 007편의 베테랑 기장은 처음부터 비상식적으로 INS를 끄고 나침반 비행을 하여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가능성으로, 보잉 여객기 2개가 비슷한 시간대에 소련 상공에서 운항했는데, 하나는 민간기로 위장한 미군의 정찰기 RC-135고, 다른 하나는 대한항공 007편인데, RC-135는 오시포비치가 폭격하고, 대한항공 007편은 미국이 폭격했을 수도 있다; 민항기임에도 꼬리날개에 달린 조명등을 켜지 않은 것이나, 269명의 시신이 아닌 6~7명 정도의 시신과 그 잔해만 발견된 것이나 (미국에서는 해상에서 유실됐거나 바닷가재 등이 시신을 먹어치웠을 것으로 어영부영 넘어감), 오시포비치가 격추한 비행기가 정상 항로를 무려 300~600마일 벗어났던 것이 그 증거; 소련에게 폭격을 유도했든, 아니면 미국이 자작극을 벌였든, 국제투기자본이 개입한 것은 거의 확실하다; 이 사건으로 밝혀진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당시 미국이 소련의 군사 통신망을 모조리 감청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준비된 각본을 읽는마냥, 이 사건 직후 미국 국무부가 신속하게 반응한 것도 주목할만한 점; 예나 지금이나 소련은 미국의 밥이며, 소련과 미국 모두 국제투기자본 (다국적 자본)의 지배 하에 있는 국가들이었다
대한항공 007기를 격추시킨 Su-15의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 방공군 대령은 007기가 민항기인 줄 몰랐으며 창문 사이로 어떠한 인적도 발견할 수 없었고 기체에 대한항공 마크가 없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1996년에 민항기임을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007편을 격추한 전투기
조종사인 오시포비치와의 인터뷰 내용 중에 '민항기인 것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는데 아무 죄책감도
없었나?'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런데 오시포비치는 당시 007편 꼬리날개에서 민항기 항법 등을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찰기인 줄 알고 과감하게 미사일을 발사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에선 일반 여객기에 여러가지 장비들을 달아 군용 정찰기로 써먹기도
했고 정찰기들을 민항기로 위장시키는 페이크를 자꾸 쳐 온 터라 격추 당시에는 민항기인 걸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나마나 또 민항기로 위장한 미군 정찰기겠지'라는
생각에 과감하게 발사 버튼을 눌렀다고 한다. 때마침 소련 정보부로부터 '해당 지역에 민항기로 위장한 미군 정찰기들이 자꾸 정찰
중인 첩보를 입수했으니 그 지역 방공부대들은 제대로 정신줄 잡고, 걸리는 비행기들은 전부 조치해도 되오.' 라고 지시를 받은 터라
확신을 가지고 미사일을 실수로 발사했다고 한다. 이후 사건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본인이 일을 저질러놓은 비행기가 알고 보니 민항기로 위장한 군용기가 아니라 진짜 민항기였음이 밝혀지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나중에 오시포비치는 "제가 일을 저지른 대상이 대한항공기였다면 진심으로 머리 숙여 용서를 빌겠습니다" 로 사과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였다면으로 사과했기 때문에 사실상 민항기 관련 사고에 대한 충격과 그로 인한 죄책감 등으로 인하여 현실도피를 위해 책임을 부정하는 사과이다.[42]관련 자료
- KAL기는 왜 3백 마일 가량 항로를 이탈했는가?[47]
- 소련은 왜 아직도 CIA 첩보작전으로 믿고 있는가?
- RC-135 미국 첩보기는 왜 비슷하게 정찰했나?
- 코브라 볼 비밀작전의 정체
- 미국 정보기관들의 의회 내 비밀 보고회의 내용
- 레이건 대통령과 슐츠 국무장관이 자료조사 완결 전부터 신랄하게 대소공격을 서두른 이유
- 국제민간항공기구 조사보고서의 골자는 무엇이었나?
- 소련은 왜 캄차카 반도에서 격추하지 않고 사할린 섬을 지날 때까지 그 많은 시간을 기다렸는가?
- 자동항로 추정기란 어떤 컴퓨터이며, 기장 천병인, 부기장 손동휘, 항공기관사 김의동의 실수라면 어떤 순서로 이루어졌을까?
냉전 와중에 벌어진 사건이고 적국 영공에서 벌어진 일인지라 당연히 음모론이 따라오게 되었다. 일단 고의 정찰설, 미국 방조설[48] 등이 주요 음모론이다. 5년 전인 1978년 일어난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과
너무 유사해서 대한항공이 미국의 비밀 작전에 동원되었고 소련은 낚인 것 아니냐는 음모론은 지금도 이 사건을 다룬 외국어 위키백과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하지만 항로 및 침범 영공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음모론이 말하는 것처럼 거의 완전히 똑같은 사건은 결코
아니다. 902편 때와 007편이 침공한 영공은 전략적 가치가 완전히 다른 영공이다.
사망한 탑승객 중 미국의 래리 맥도널드 하원 의원이 있던 것도 음모론의 근원인데 1983년은 6.25 전쟁 휴전 30주년이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30주년이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상원 의원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이 비행기에 탑승한 유일한 의원이 맥도널드
하원 의원인 것도 미국이 방조했다는 음모론의 불씨이다. 다행히 대표단은 10분 뒤 출발하는 다음편 항공기에 탑승한 덕에 주요
의원 몰살이라는 비극은 피했지만 하필이면 맥도널드 의원이 문제의 항공기에 탑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높으신 분들[49]의 암살 작전이라는 게 음모론의 요지이다. 음모론 총정리 하지만 맥도널드가 민주당 소속이었지만 레이건 행정부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소련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했고, 프란시스코 프랑코와 조지프 매카시를 공개적으로 찬양하고, 같은 당 소속 케네디 형제의 추모도 거부할 정도의 극우주의자에 미국 극우단체 회장까지 역임했던 전형적(?) 남부 민주당원이었다.
추락이 아니고 사실은 캄차카에 착륙했고 탑승객들이 전원 살았으며 맥도날드 의원은 루뱐카에, 나머지 승객들은 시베리아에 위치한 굴라크에 수용되어서[50]
사망했다는 음모론도 미국에는 꽤 퍼져 있다. 이에 따르면 해상에서 발견된 파편은 소련이 비슷한 기체를 고의로 폭파시켰고
블랙박스는 소련이 당연히 입수해서 처리했다는 논지인데, 위에 서술한 대로 보리스 옐친이 블랙박스를 한국 정부에 넘겨주었고 그것에
따른 분석자료가 나온 후에는 거의 폐기된 음모론이다.
하지만 사건은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는데 국제사회가 들끓었고 미국이 증거를 제시했다. 미국 측은 KE007편이 소련에 의해 격추되었다는 것을 소련군 교신을 감청하여 알고 있었음에도 처음에는 침묵하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감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함이었는데 결국 소련이 계속 격추 사실을 부인하자 감청된 녹음을 공개하였다. 소련 측은 이를 통해 자국의 군사 통신망이 미국에 의해 감청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사건이 일단락된 후 군 교신용 주파수를 모조리 바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미국은 감청을 통한 소련군의 정보수집에 난항을 겪었다.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0311100020
―지상관제소에서 「점멸등을 깜빡거리고 있는가」고 물어 왔는가.
『물어 왔다. 나는 「깜빡거린다」고 보고했다. 이는 통상 여객기나 화물기에 채택된 것으로, 전투기 조종사로서 기본적으로 확인하는
사항이다. 그러나 당시는 미국 정찰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군부의 분위기도 날카로웠다. 사할린 주변 상공은 미국이 소련
방공망과 지상 레이더 기지 정보를 캐내기 위해 혈안이 돼 있는 곳으로, 말 그대로 전쟁터였다. 말이 첩보전이지, 거의 전쟁하는
분위기였다』
―언제 격추 명령을 받았나.
『비행기가 캄차카 상공에서 사할린 반도 상공을 향해 계속 접근해 오자 「비행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소련 영공을 침범했기
때문에 상대 비행기를 격추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돌연, 관제소에서 명령취소 지시가 내려졌다. 그리고는 비행기를 지상에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아마도 지금 생각하면 소련 군부도 비행기가 여객기였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착륙지시를 받고 어떤 행동에 취했는가.
『KAL 007기와 같은 고도로 날아가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날개 쪽에 달린 경고등을 깜박거리며 수차례 신호를 보냈다.
국제신호 규정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에서는 아무 응답이 없었다. 지상 관제소에서는 소형 조명탄 미사일을 발사해 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네 차례 발사했다. 연발형식의 조명탄 미사일을 네 차례 발사했다. 아마도 조명탄을 네 차례 발사했으니,
250여 발의 산탄이 발사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너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혹시 조명탄이 아닌 철갑탄을 발사한 것은 아닌가.
『조명탄을 발사했지만, 철갑탄을 발사했다 하더라도 불꽃이 일기 때문에 밤에 식별이 가능했을 것이다』
―재차 격추 명령을 받은 때는 언제였는가.
『공중에서 KAL 007기를 계속 추적하는 과정이었고 어느 새 결국 사할린 항구도시인 네벨스크市 상공에까지 이르렀다. 이
순간이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사할린 해상이 아니라 네벨스크 상공이었다. 관제소로부터 두 번째로 「격추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그
순간, 나는 전투기 속도를 바짝 내어 비행기 앞으로 타원을 그리면서 회전한 뒤 미사일을 발사했다.
처음에는 熱유도 미사일을 발사, 날개 쪽에 달린 엔진 쪽에 명중했고, 두 번째는 방사능 미사일을 발사, 꼬리 부분에 명중했다.
처음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폭발음에 이어 섬광, 후폭풍 때문에 눈을 감았다. 약 0.5초의 순간으로, 눈깜짝할 새였다, 첫 미사일
발사 직후 폭발 여부를 감지하지 못했고, 2차 미사일을 발사한 뒤 미사일이 비행기에 명중하는 모습을 보았다.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이는 모습을 본 뒤 비행기지가 있는 소콜 기지로 기수를 틀었다. 그리고는 「목표물 격추, 임무 완수」라고 지상관제소에
보고했다』
―비행기를 격추했는데 여객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가.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점멸등이 깜빡이는 것을 제외하고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창문을 통한 기내의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격추한 비행기가 아직도 정찰기라고 확신한다』
그는 전투기를 몰고 사할린의 방공군 공항에 착륙해 보니 사령관과 동료 비행사들이 도열해 축하해 주었고, 또 지휘관들로부터는 탁월한
비행술과 사격술로 적의 비행기를 격추했다며 칭찬을 받았다고 말했다. 오시포비치는 그 순간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날 이
사건은 희대의 여객기 격추사건으로, 세계적인 스캔들로 비화하면서 그의 인생은 지옥으로 빠져들었다.
『소련 정권은 여객기 격추 이유에 대해 거짓 이유를 찾았으며, 진실 공개를 회피했다. 소련 영공을 침범한 여객기가 점멸등을 켜지
않았다고 했다. 전투조종사는 그 비행기가 어떤 類(유)의 비행기인지 식별할 수 없는 상태였고, 비행기 측과 교신을 시도했는데도
아무런 답신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턱도 없는 거짓말을 해댔다. 너무도 뻔한 사실을 왜 은폐하려고 했는지 모를 일이다. 정당하게
있는 사실을 밝혀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런 것을 러시아 속담으로 「하얀 실로 검은 천을 꿰맸다」고 한다. 진짜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사고 당시 미국과 일본은 일본 군 기지에서도 나와 지상 관제소 간 교신 내용을 모두 도청하고
있었을 텐데 뭣 때문에 당시 소련 정부가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이어 『소련 당국은 내가 점멸등을 보았다고 했지만 이를 보지 않았다고 속였고,
비행기와 교신 노력을 한 적이 없는데 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는 『상대 비행기와 교신을 하려면 적정한 주파수가 있어야 했는데
주파수를 찾지 못했고, 언어장애로 무선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사고 직후 모스크바에서 정보 전문가들이 사할린 기지에 급파돼
왔다. 나와 地上 관제소 간 무선 교신 내용을 위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교신 내용을 바꿨다. 점멸등이 깜박이지 않았다고
녹음했다. 그리고 9월3일에는 TV 방송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공군사령관 참모들이 「당신 이렇게 말하라」며 원고를 다 적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 순간부터 그는 KAL 여객기 격추범으로 낙인되는 운명으로 바뀌었다. 사실 사건 직후 그는 그 파장이 엄청난
방향으로 일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당시의 상황에 대해 그의 말이 계속된다.
『사건 직후, 처음에는 소련 당국으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며칠 지난 뒤에는 어떤 죄과를 받을지 몰랐다. 극형을
받을 수도 있거나 아니면 감옥까지 갈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사할린에는 4만여 명의 고려인(韓日동포)이 살고 있어
소련 정부는 이들이 무슨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졌던 것 같았다.
사건 발생 이후 우리 가족은 「낯선 사람에게 대문을 열어 주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는 등하교시 경호원이
배속됐다. 사할린을 떠나라고 명령을 받은 것도 하루 전 기습통보를 받았다. 겨우 하루 만에 짐을 챙겨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서 불이
났거나 난리를 당한 사람처럼 쫓겨났다. 옷가지 등 필요한 짐은 컨테이너에 던져 두고, 가구는 다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는 내가 졸업한 학교가 있었는데 교수들 역시 「졸업생인 나에 대해 훌륭한 선배로 재학생들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했다」고 말했지만, 어느 날부터는 그런 말도 아예 못 하게 했고, 나 자신이 어느 곳에서라도 떳떳하게 그날의 일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도 금지됐다. 그리고 나는 언론과 세상에서 잊혀져 갔다. 한동안 내 자신이 영웅인지, 살인범인지, 정부가 나를 어떻게
대우하려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당시 소련 정권도 국제적 비난에 직면하면서 다급해졌다. 사건 직후 안드로포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1983년 9월1일(모스크바 시각)에 생애 마지막 정치국원 회의를 열었다. 안건은 당시 국내 경제문제와 국제관계 등이었다. 회의 직전 우스티노프 국방장관이 한국 민간항공기를 격추시켰다고 전했지만,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요양차 크림반도로 떠났다. 그러나 국제여론이 예상 외로 들끓자, 안드로포프는 모스크바에 있던 당시 제2인자 격인 체르넨코에게 전화를 걸어 공세적인 자세를 취할 것을 지시했다. 다음날 체르넨코가 서기장을 대신해 비상 정치국원 회의를 소집했고, 사건 발생 일주일 뒤인 9월7일에 소련 정부는 특별성명을 통해 『KAL기가 첩보행위를 하다 격추됐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당시 사할린 해역에서 블랙박스를 건져냈지만 숨길 수 있는 모든 것을 비밀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이 사실은 비밀로 분류됐고 숨겨졌다.
『여객기는 미국이 격추, 나는 정찰기 격추』
오시포비치는 20년 동안 똑같은 질문을 받고 있다고 했다. 「격추시킨 여객기에 승객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라는
질문이다. 『솔직히 나는 탑승객들이 있다는 인식도 못 했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여객기라는 생각도 했지만, 여객기를 개조한
정찰기로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분명히 확신하는 것은 그 비행기는 정찰기였을 것으로 믿고 있다. 승객들은 분명히 없었다고 확신했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당일 KAL기가 사할린 상공에 이르기 직전 美國 첩보기 RC 135기가 주변 지역 정찰을 시도했고,
소련 레이더망에 잡힌 뒤 곧바로 KAL기가 나타난 것도 우연의 일치치곤 비극이었다. 美 첩보기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 생길 수 있다. 더구나 RC 135기가 KAL 007機와 같은 보잉기를 개조해 만든 것이어서
정확한 식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는 충분히 착각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오시포비치는 사건 발생 후 6년 만에 외국인과 처음으로 접촉했다. KAL 007機를 소재로 책을 쓴 영국 작가 케리와의
만남이었다. 이후 사건 발생 10년째인 1993년 이즈베스티야紙와 인터뷰를 했고, 美 언론과는 1996년 뉴욕타임스와 첫 인터뷰를
했다. 이후 일본 기자가 다녀갔지만 한결같은 질문들이었다고 말했다. 20년 만에 찾아온 한국 기자마저 같은 질문을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격추 직후에도 기내 승객들이 없었다는 얘기들이 곧바로 나왔다. 시신들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객기가 추락한 지점 사할린
해상에서는 이상한 것들이 있었다, 여성 화장품 파운데이션 통, 헌 옷들이 발견됐지만 시신은 그리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 정부는 여객기 잔해를 찾기 위해 비밀 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에 참석했던 특수부대는 해저 잔해 수거 작업을 비디오로 촬영했다. 이 테이프는 정보기관에 넘겨졌고, 비밀정보로 분류됐다.
하지만 나는 이 비디오 테이프를 봤다. 발견된 시신은 물론 팔·다리 등 시신의 일부였다. 시신을 수거한 결과, 겨우 6~7명
정도의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그 인원 정도가 비행기에 타고 있고 있었을 것으로 전문가들도 추정했다』
그는 기자에게 『269명이 타고 있었다면 이보다 훨씬 많은 시신이나 시체 조각들이 발견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도대체 269명의 시신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고 기자에게 반문했다. 그는 미국 등에서는 해상에서 유실됐거나 바닷가재 등이
시신을 먹어치웠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오시포비치는 『혹시 당일 격추된 비행기와 동시에 또 한 대의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을 날고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는가』라고
되물었다. 『내 생각으로는 당일 비슷한 항로에 시차를 두고 보잉 여객기 2대가 비행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1대는 캄차카에서
사할린 상공으로 날아오다가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됐고, 다른 한 대의 여객기는 정상 항로를 따라 비행하며 일본 관제소 측과 교신을
했다고 본다. 그 여객기도 누군가에 의해 격추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 미국이 격추했을 것이다. 나는 이 비행기에 269명의
탑승객들이 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추정은 ICAO 보고서에 언급된 내용과 단순 비교해 보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할 수도 있다. 보고서에는 미국 정찰기 RC
135기가 KAL 007機가 출현하기 직전 사할린 주변 상공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는 보고가 있다. 오시포비치는 당시 이 정찰기를
자신이 격추했고, 뒤따라오던 여객기는 미국이 격추했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는 특히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정상 항로를 무려
600마일이나 벗어났기 때문에 여객기가 길을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여객기 조종사는 물론 지상 관제소도 이를 방치할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정말 유감』
―ICAO 조사에서 KAL기는 관성항법장치(INS) 대신, 나침반 방위 비행을 한 것으로 보고됐다. 이 때문에 항로를 이탈했다고 조사됐다.
『아무리 나침반 방위 비행을 했다고 하더라도 조종사는 물론 부기장들마저 그런 착각을 하며 비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종사들이 다 눈을 감고 조종석에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격추된 비행기는 여객기로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불가능한 항로로
비행을 했다』
그는 비행기의 위치와 정상적인 여객기 항로를 직접 그림을 그려 가며 600마일이라는 것은 엄청난 차이라고 단정했다.
―KAL 007기가 여객기가 아닌 정찰기라는 확신을 아직까지 갖고 있는가.
『그렇다. 하늘에 맹세한다』
―실제 전쟁에 참여해 본 적이 있는지.
『전쟁에 참가한 적은 없지만, 모의 전쟁은 많이 치렀다. 훈련 중에 실제 상황을 가상한 훈련을 자주 했다』
―당일 실제로 KAL기에 가장 근접한 것은 몇 미터 정도였는가.
『약 300m까지 접근했었다. 비행기를 격추하기 직전 착륙을 誘導(유도)하기 위해 가장 근접했던 거리이다. 양측 날개에 부착된
녹색과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이때 제대로 신호에 응했더라면 사고는 면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유도 순간 비행기와 전투기의 위치를 직접 그렸으며, 그 위치는 피격된 비행기 우측에 나란히 붙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소련 당국의 미사일 발사 명령에 대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나는 군인 신분이었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당시 나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고 생각했다. 미사일 발사도 오차 없이 정확히 명중시킨 데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당시 KAL기와 교신은 불가능했는가.
『교신을 시도해 보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교신하려면 주파수도 동일해야 하고 언어가 통해야 한다. 나는 영어를 하나도
모른 상태였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교신을 시도할 수 있겠는가. 결국 교신 시도도 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당신이 격추한 그 비행기는 KAL 여객기로 확인됐고, 승객과 승무원 등 269명의 탑승객이 타고 있었다.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정말 유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기내에 아무도
없었다고 확신했다. 솔직히 말해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오직 창문을 통해 움직이는 물체를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앞에 말한 대로
움직이는 물체를 전혀 보지 못했다』
『여객기임을 확인했다면 격추 명령에 이의 제기했을 것』
―당시 격추한 비행기에 「대한항공」이라는 한글이나 한자, 「KAL」이라고 쓰인 영문자를 보지는 않았는가. 또 KAL기는 꼬리 부분에 스팟 라이트(로고등)을 켜고 다녔는데, 꼬리 부분에 등이 켜져 있지 않았는가.
『본 적 없다. 점멸등 외에 어떠한 등도 켜고 있지 않았다. 아무런 문자나 글자, 그리고 대한항공 마크 등 어느 것도 볼 수 없었다』
기자는 月刊朝鮮이 1993년 6월 ICAO 보고서를 중심으로 보도한 기사 全文을 보여 주었다. 月刊朝鮮이 보도한 기사에는 피격된
KAL기와 동일한 기체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있었고, 대한항공의 영문표기와 한자표기 그리고 로고등을 보여 주었다. 오시포비치는
『당시 비행기에는 아래·위 층으로 2중으로 창문이 있었는데, 모양이 좀 달라 보이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비행기에
표시된 어떠한 표시나 글자를 본 적이 없었다고 강조했다.
―만약 사람이 탄 여객기라고 생각했다면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았을 수 있었으리라고 확신하는가.
『그런 가정은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면 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상부에 보고했을 것이다. 여객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격추를 분명히 반대했을 것이다』
―격추 명령을 어길 수도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 생각하면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도 착륙을 시도하라고 했을 때는 어떤 심정이었나.
『지상 관제소에서도 심각하게 행동하라고 했듯이, 나 역시 아주 조심스럽고 긴장된 상태에서 유도 착륙 시도에 나섰다. 그러나
비행기가 중립지역으로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만약 유도에 응했더라면 사고를 면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확신한다』
―격추된 비행기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지. 어떤 모습이었는가. KAL 007기 최후의 모습을 본 마지막 당사자인데.
『첫 미사일이 발사돼 엔진 부분에 명중된 것은 불과 0.5초의 짧은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나 두 번째 미사일이 비행기에 명중된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비행기는 화염에 휩싸여 폭파됐고 불길이 솟구쳤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완전히 산화했는지, 아니면 몇 조각으로 분리돼 떨어져 나갔는지 보았는가.
『그렇게 자세히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비행기가 불길에 싸여 나선형으로 추락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비행기가 화염에 싸여 폭파하는 순간 기수를 돌려 기지로 귀환했다』
―왜 육지 상공에서 피격됐는데 해상에서 잔해가 발견됐는가.
『비행기는 육지 상공에서 해상으로 이동 중이었다. 즉 사할린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격추된 비행기는 진행방향으로 가면서 나선형으로 약 5km를 날아가며 사할린 해상 마네론 섬 주위에 잔해들이 떨어진 것이다』
미군 정찰기 요격에 500회 출동
―당시 소련 공군 조종사들에게는 격추를 할 수 있는 독자적인 권한이 없다고 들었다. 사실인가.
『공군 전투조종사들은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 敵機(적기)를 발견하더라도 독자적인 판단으로 격추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반드시 관제소의 명령에 따라 격추할 수 있도록 수칙이 정해져 있다』
―사건 발생 당시 사할린 소콜 基地(기지)는 어떤 명령 시스템이 놓여 있었는가.
『소콜 基地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약 140km 떨어진 곳에 있다. 소콜 기지는 하바로프스크 사령부 지시를 받고, 하바로프스크
사령부는 몽골과의 접경에 있는 시베리아 울란우데에 있는 상급 사령부 지시를 받고, 울란우데 사령부는 모스크바 사령부의 최종 명령
지시를 받도록 돼 있다. 즉 모스크바→울란우데→하바로프스크→사할린으로 이어지는 명령 체계 속에 놓여 있었다. 당시 미사일 발사
명령도 결국 모스크바에서 최종 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최초 KAL기가 캄차카 상공 소련 영공을 침입했을 때 소련이 격추 기회를 놓친 것으로 알고 있다. 혹시 당시 소련 영공을 침범한
이 비행기를 놓쳤을 경우, 상부에 의해 담당자들이 모두 숙청되거나 문책될 것으로 두려워하고 강박 관념에 사로 잡힌 나머지 재차
격추에 나섰다는 설도 있다.
『아니다. KAL기가 캄차카 상공에 접근했다가 잠시 공해상으로 나가자, 첫 격추 명령을 철회한 것이다. 만약 캄차카 상공에서
공해상으로 접근했을 때 격추를 했다면 문책이 따랐을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공해상에 잠시 나갔던 비행기가
사할린 영공 정면으로 접근해 왔다. 관제소에서는 이미 선을 넘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유도 착륙에 응하지 않자 다시 발사
명령이 하달된 것이다. 정말 당시 상황은 마치 평상시 미군 정찰기의 움직임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당시 사할린은 美蘇 간 첩보전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등 「공중 전쟁터」로 불렸다고 들었는데 어느 정도였는가.
『낮에는 거의 매일 美 정찰기가 소련 영공을 파고 들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낮 근무하면
지치고 힘들며 위험하기도 했다. 매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었으니까. 적이 먼저 공격하면 공중전을 치러야 할 판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낮 근무를 하다가 밤 근무로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밤에는 정찰기의 활동이 뜸하고 月光(월광)이 없으면 비교적 정찰기의
출몰도 적었다. 내가 근무했던 7년 동안 美 정찰기를 감시하고 영공에서 경계 비행을 한 것만도 500차례 이상 된다. 이 정도면
이해가 된는가』
―미국 정찰기는 어떤 식으로 활동을 했나.
『사할린과 쿠릴 열도 사이에 나타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리고 사할린 상공인 소련 영공으로 침입했다. 그 순간이 되면 소련 사할린
소콜 基地는 조종사들에게 발진 명령을 내린다. 미국과 일본은 이를 다 알고 이용한 것이다. 미군 첩보기의 활동은 순전히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말 그대로 첩보활동이 목적이었다. 미국은 러시아 군 기지 운영방법과 레이더 통제 시스템을 확인하기 위해 출격했다.
물론 지상과 조종사 간 交信 내용을 모조리 도청했다. 사할린에는 소콜 기지 위쪽에 공군 비행기지가 한 곳 더 있었다. 사할린을
남북으로 나눠 이 기지와 소콜 기지가 임무를 나눠 분담했다. 정찰기가 북쪽으로 가면 북쪽기지에서 감시를 했고 양쪽에서 출동 임무를
이양하는 식이었다. 美 첩보기는 한마디로 지그재그로 사할린 소련 영공을 침했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즉, 격추를 하려면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특히 3개월에 한 차례씩 집중적으로 정찰활동을 했다. 그때가 되면 기지는 아예 비상상태에
돌입했다. 소련도 마찬가지로 그런 정탐 활동을 했을 것이다. 물론 우리는 정찰 업무와는 상관없는 전투조종사들이었다』
『내가 격추한 비행기가 KAL기라면 정말 머리 숙여 용서를 빌겠다』
―지금 활동은 자유로운지. FSB(연방보안국: KGB 후신)으로부터 제약은 받고 있지 않는가.
『활동에 제약받지 않고 있다. KGB역시 변화와 격동의 시대여서 그런지 별 제약을 가해 오지 않았다. 물론 초창기는 으레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다. 사건 발생 10년이 지난 뒤부터는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아무런 제약도 없고 해외여행에도 지장이 없다』
―해외여행은 한 적 있는지.
『1993년 사건 발생 10주년을 맞아 독일에 갈 기회가 있었다. 이즈베스티야紙 주선으로 독일 쾰른, 함부르크에 갔었다. 일본에서도 초청 움직임이 있었는데 웬일인지 연락이 없다』
―아직도 정부가 제대로 대우를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솔직히 말해, 미국 같았으면 나는 국민들의 영웅이 됐을 것이다. 내가 받은 것이라고는 훈장뿐이다. 훈장에는 명령 완수에 대한
영웅 훈장이 아닌 단순히 우주 훈련자에게 주는 훈장에 불과한 것이었다. 정치 군인들이 모두 짜 맞춘 듯하다. 그래서 더욱 속상하고
괴롭다』
오시포비치는 이제 평범한 농민으로 전락한 자신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전투기 조종사로서, 퇴역 후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최소한의 명예를 간직하지도 못한 채 결국 너무도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데 분을 참지 못했다.
―한국에서 유가족이나 누군가가 초청을 한다면 갈 것인가.
『물론이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국민 모두에게 당일 발생한 모든 진실을 밝히고 싶다. 이번에 보도를 통해
제 신상이 자세히 나가리라고 본다. 저의 진실된 마음을 그대로 전해 주기 바란다. 만약 내가 격추한 비행기가 정말 269명을
태운 KAL 여객기였다면 유족들에게 머리 숙여 용서를 구하겠다』
오시포비치는 A4 용지에 자신의 심정을 적었다.
「유가족들 여러분 죄송합니다. 내가 격추한 비행기는 여객기가 아니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탑승객이 있고
여객기였다면, 내 행동은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군인으로 명령을 수행한 것은 당연하지만 말입니다.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만약 탑승객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다른 행동을 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오시포비치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드림」
그는 친필 사인까지 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표시했다.
인터뷰는 한나절 이상 계속됐다. 점심 시간이 되자 부인은 「♥메니」라 불리는 러시아식 만두와 야채 샐러드를 차려두고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리고 보드카와 맥주 등을 내놓았다. 러시아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이 식사하며 알코올 40도가 넘는 보드카를 권했다.
부인은 나와 자신의 자리에만 술잔을 두었다. 그리고 보드카를 가득 따랐다. 7년째 술을 끊은 남편에게는 보드카를 주지 않았다.
부인은 『그가 오랫동안 맘고생을 한 대가로 몸이 피폐해졌다』며 『지금은 금주금연으로 건강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진실이 다 밝혀질 때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것』
부인과 둘이서만 보드카를 석 잔 이상 마셨다. 예의상 한 잔만 마시겠다고 했더니 『코샤크 기병대들이 터전을 잡고 있는 이곳 전통이
그렇지 않다』며 석 잔을 연거푸 권했다. 취기가 약간 돌자 기자는 아예 「요르쉬」라고 불리는 「러시아식 보드카 폭탄주」를
마셨다. 한국 기자들은 폭탄주를 즐겨 마신다며 폭탄주 시범을 보였더니 관심을 보였다.
KAL 007기가 피격된 지 20년이 지났다. 오시포비치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가 격추시킨 비행기는 미군 정찰기가 아니고 KAL
007편 점보였음이 부인할 수 없는 물증으로 확정되었다. 남은 의문은 왜 KAL 조종사들이 INS를 끄고 나침반 비행을 하여 소련
영공으로 들어갔는가이다. KAL 007기를 격추한 소련 전투기조종사 오시포비치조차 1983년 9월1일 새벽 어떤 비행기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는지 그 진실을 모르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가해자의 무지, 또는 변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시포비치는 무엇 때문에,
왜 러시아(사건 발생 당시 소련)가 여객기 격추 사실을 사실대로 발표하지 않고 진실을 공개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기자는 2년 전 2001년 사할린을 방문, KAL 007기 문제를 취재한 적이 있다. 州道(주도)인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의 네벨스크까지 가 KAL기 희생자 추모비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러나 추모비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희생됐던
일본군을 추모하기 위해 일본 측이 조성한 공동묘지가 있는 곳 한켠에 위치해 있었다. 마음도 아프고 속도 상했다. 눈에 띄지도 않는
추모비가 그날의 비극을 상징하고 있는 것도 가슴 아팠거니와 아무도 돌보지 않고 이제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오시포비치와 인터뷰를 마치고 준비해 간 선물과 약간의 사례금을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오시포비치 부부와 작별을 고했다.
『아마도 20년 전 피격 사건의 진실이 모두 공개되는 순간,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시포비치가 인터뷰 중 한 말이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KAL 007機는 운명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확인할 수 있었다. 오시포비치氏는 KAL기가 꼬리날개에 달린 조명등을 켜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만약 KAL 조종사가 이 조명등을 켜 놓았더라면 오시포비치氏는 밤하늘에 환하게 비치는 꼬리날개의 KAL 로고 표시를
보고 민간 여객기라고 확신하여 관제사의 격추 명령에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고, 007의 운명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月刊朝鮮 趙甲濟 기자는 1984년 4월호의 「KAL에 칼을 댄다」는 심층취재 기사에서 이 문제를 이렇게 제기했었다.
「달은 하현이었고 수평선 위 60도 각도에 있었으며 야간의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 보고서는 또 「KAL기의 수직 꼬리에 달린 로고(社章) 조명등은 보통은 켜지만 켜고 안 켜고는 기장 마음대로다」고 했다. 이
문제는 KAL 조종사들 사이에 한동안 화제가 됐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ICAO 보고서는 잘못 적고 있다. 「로고 조명등」은 보잉
747, DC10, A300 등 대형기의 꼬리날개에만 있다. 수직 꼬리에 크게 그려진 KAL 마크를 양쪽의 수평 날개에 붙은
조명등이 비춰 주면 야간비행 때 환하게 보인다. KAL에선 3년 전 이것을 켜지 말도록 조종사들에게 지시했다. 『전구수명을
아끼자』고 그랬다는 말도 있고 『정비 부서 쪽의 요청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고공에선 충돌 위험이 없으므로 켤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도 있다. 항법등과는 달리 이 조명등을 켤 법적 의무는 없다. 일부 조종사들은 그러나 회사의 소등 지시에
반대했었다고 한다.
『비행기 회사에서 만든 것은 그대로 작동하는 게 원칙이다』는 반론이었다. KAL은 007機 피격 뒤부터는 이 조명등을 다시 켜도록
했다. 『만약 그때 KAL 007기가 로고 조명등을 켜고 있었더라면 소련 요격기들은 6~8마일 바깥에서도 민항기임을 알았을
터이고 KAL기를 스파이기라고 한 그들의 거짓말은 더욱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철면피 같은 소련 요격기 조종사도 너무나 뚜렷한
KAL 표시를 보고서는 생각을 달리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로고 조명등이 켜졌더라면 사건의 파국을 막아 주었을지도…. 당시의
어둠에선 요격기 조종사가 2000피트 위에 있는 KAL기의 동체에 쓰인 글씨를 판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판독 가능 거리에
접근했을 때는 이미 발사 명령을 받은 뒤여서 그런 문제엔 신경도 안 썼을 터이고…』
이런 부질없는 상상을 하는 것은 나뿐만 아닌 듯하다>●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