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의 훌륭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빔비사라 왕은 아들에게 유폐당해 옥사당했고, 기독경에서 하느님을 신실하게 따르던 욥은 오히려 시련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표면적 인과관계로는 현생의 고통들을 다 설명할 수 없다 - 배후의 질서, 또는 전생의 인과관계를 고려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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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융의 <존재와 상징>에 등장하는 유대인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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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경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신실하게 따르는 욥에게 오히려 시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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빔비사라(산스크리트어: बिम्भिसार, 기원전 558년 ~ 기원전 481년[1][2] 또는 기원전 5세기 후반[3]) 또는 슈레니카(Śreṇika), 세니야(Seṇiya)[4][5]는 마가다 하리얀카 왕조의 왕(기원전 543년 ~ 기원전 492년[6] 또는 기원전 400년[7])이다.[8] 그는 밧티야의 아들이었다.[9] 그의 왕국 확장, 특히 동쪽의 앙가 왕국을 합병한 것은 이후 마우리아 제국 확장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여겨진다.[10]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그는 미래 우주 시대의 24대 티르탕카라 중 초대 티르탕카라(파드마나바 / 마하파드마)라고 한다.[11] 그는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마하비라의 사마바사라나를 자주 방문했다.[12]
불교 전통에 따르면 그는 또한 그의 문화적 업적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석가모니의 훌륭한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7세기 중국 승려 현장에 따르면 빔비사라는 라자그리하라는 도시를 건설했다.[6] 그는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에 의해 유폐되어 옥사했다.[10]
아자타샤트루
अजातशत्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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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다 국왕 | |
재위 | BC 494년 ~ BC 461년 |
전임 | 빔비사라 |
후임 | 우다야바드라 |
앙가 부왕 | |
재위 | ? ~ BC 494년 |
군주 | 빔비사라 |
신상정보 | |
출생일 | 기원전 509년 |
출생지 | 라즈기르 |
사망일 | 기원전 461년 |
사망지 | 인도 |
국적 | 마가다 왕국 |
왕조 | 하리얀카 왕조 |
부친 | 빔비사라 |
모친 | 코살라 데비 |
배우자 | 바지라 |
자녀 | 우다야바드라 |
종교 | 불교 또는 자이나교 |
군사 경력 | |
주요 참전 | 코살라 정복(기원전 492년 ~ 기원전 476년) 마가다-밧지 전쟁(기원전 484년 ~ 기원전 468년) |
아자타샤트루(산스크리트어: अजातशत्रु)는 마가다 왕국 하리얀카 왕조의 제2대 왕이다. 본래 아버지인 빔비사라의 명령으로 앙가 지역의 부왕으로 파견되었다가 기원전 494년 마가다 왕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인 빔비사라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며 이후 하리얀카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생애
아버지인 빔비사라와 마찬가지로 불교와 자이나교 등의 신흥 종교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당시 마가다를 위협하던 리차비족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기원전 490년에 파탈리푸트라라는 이름의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마가다 왕국의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위하여 고대 인도 최초로 투석기를 군대에 도입하였으며, 기존의 전차에 낫을 달은 라타 무살라라는 신무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1] 이 신무기들을 이용해 리차비와 밧지 등의 36개의 소국들을 합병시켜 국력을 강화한 마가다 왕국은 당시 마가다 왕국의 경쟁국이었던 코살라 왕국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기원전 476년에 코살라 왕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하면서 마가다 왕국은 십육대국 시대의 최강국으로 군림하게 된다.
https://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725
부처님이 머무신 8개 도시 <17> -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가하⑤
감옥에 갇힌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안거를 보내고 계신
가지굴산을 향해 예배를 올리니
천안통으로 그의 고통과
비극을 모두 아신 부처님은
목건련과 부루나 존자를 보내…
마가다 왕국의 수도 라자가하는 참으로 놀라운 도시이다. 당대 최고의 사상가와 철학자, 논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곳이자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 당신의 두 발로 다시 찾은 곳이다. 마가다 왕국을 다스리는 빔비사라 왕은 이곳에서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한 것이다. 또한 그는 교단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를 기증하였고 교단을 든든하게 보호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을 불법에 귀의하도록 이끌었다. 빔비사라 왕은 평생에 걸쳐 많은 보시를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왕비 케마의 출가를 허락한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시이자 신심이었다. 그 외에도 빔비사라 왕은 자신과 왕실의 주치의였던 의사 지바카를 부처님과 교단의 주치의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공덕을 지은 빔비사라 왕은 어떤 복을 받았을까?
빔비사라 왕의 첫 번째 과오
놀랍게도 빔비사라 왕은 친 아들의 손에 폐위되어 감옥에 유폐된 후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전륜성왕이라고 칭송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위풍당당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극적인 최후였다. 수없이 많은 공덕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빔비사라 왕은 왜 이토록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미처 헤아리지 않고 저질렀던 작은 과오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빔비사라 왕은 바라나시를 병합하기 위해 코살라 왕국의 데비 공주와 정략결혼을 했다. 데비 공주는 혼인을 하면서 지참금으로 바라나시 지역을 마가다 왕국에 가져왔고 덕분에 양국의 백성들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정복전쟁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빔비사라 왕을 전륜성왕이라고 칭송하였다. 하지만 데비 공주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기지 않자 빔비사라 왕은 아름다움으로 명성이 자자한 케마를 두 번째 왕비로 맞았다. 케마에게 반한 왕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총애하였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좌절과 슬픔에 빠져있었을 데비 공주는 새로운 왕비에게 푹 빠진 빔비사라 왕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을까.
사람의 마음을 그것도 가족이나 배우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대부분 무심한 가운데 이루어진다.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나를 이해할 것이라 여기며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쌓이다보면 오해와 불신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상처를 주는 사람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지 헤아리지 못한다. 케마 왕비를 총애하면서 첫 번째 왕비인 데비 공주의 마음을 보듬고 헤아리지 않은 것, 이것이 빔비사라 왕이 사소하게 생각하고 범한 과오였다.
빔비사라 왕의 두 번째 과오
빔비사라 왕의 각별한 총애는 케마 왕비를 오만하게 만들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자부심과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있던 케마를 변화시킨 것은 부처님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는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법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것일수록 사랑하는 사람도 함께 좋아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빔비사라 왕은 케마 왕비가 단 한 번만이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자존심 때문에 남 몰래 죽림정사를 찾은 케마 왕비는 그곳에서 부처님을 만났고 단 한 마디의 법문도 듣지 않은 채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부처님이 그녀를 위해 보인 짧은 신통력이 그 동안 케마를 지배해왔던 오만한 허상과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산산조각 냈던 것이다. 케마 왕비는 빔비사라 왕의 바람대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을 넘어 출가를 원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왕비의 출가 선언을 들은 빔비사라 왕의 마음은 오히려 무거웠다. 결국 빔비사라 왕은 케마 왕비의 출가를 허락하고 그녀를 황금가마에 태워 죽림정사로 보냄으로써 부처님과 교단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고 백성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빔비사라 왕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케마 왕비의 출가를 축복했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붙잡아 둘 수 없는 상황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 구멍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서였을까. 빔비사라 왕은 여러 여인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빔비사라 왕이 방황하는 동안 취한 여인 중에는 왕실의 후궁도 있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빔비사라 왕의 후궁은 그의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그는 후궁의 신분이 낮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왕비의 몸에서 태어날 왕자만을 기다렸다. 결국 빔비사라 왕은 후계자를 얻기 위해 세 번째 왕비를 맞는다. 그녀가 바로 베데히 성의 공주, 베데히 왕비이다. 부처님께 귀의했으면서도 끝내 혈통과 출신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지 못한 것, 이것이 빔비사라 왕의 두 번째 과오였다.
빔비사라 왕의 세 번째 과오
베데히 공주를 세 번째 왕비로 맞았을 때 빔비사라 왕의 나이는 이미 마흔을 바라보고 있었고 왕위에 오른 지는 30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그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사이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들, 아바야 왕자는 어느덧 장성하였지만 빔비사라 왕은 여전히 왕비에게서 후계자를 얻는 것에 점점 더 집착했다. 날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겼던 그의 현명함과 지혜는 훌륭한 혈통을 지닌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다는 세속적인 욕망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국 빔비사라 왕은 예언가들과 점술가들을 불러 과연 아들이 태어날 것인가에 대하여 점을 쳐보라고 명하기에 이른다. 다행히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예언자들과 점술가들은 빔비사라 왕이 많은 공덕을 쌓고 복을 지어온 덕분에 설산에서 청정하게 수행을 해온 선인이 그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왕비에게 아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장차 왕자로 환생하게 될 선인의 수명이 이제 딱 3년이 남았다는 이야기에 그만 빔비사라 왕의 인내심은 바닥이 나고 말았다. 앞으로 3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빔비사라 왕은 하루라도 빨리 왕자를 얻기 위해 자객을 보내 선인을 죽이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선인의 죽음은 과연 왕자의 탄생을 앞당겼다. 곧바로 베데히 왕비가 임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은 빔비사라 왕의 마음을 좀먹어 가기 시작했고 그를 저주하면서 죽어갔다는 수행자를 떠올릴 때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마침내 베데히 왕비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흠결 없는 혈통과 신분을 지닌 왕자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빔비사라 왕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왕자의 얼굴을 볼 때마다 반드시 복수를 하겠다는 선인의 저주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과오가 만든 라자가하의 비극
왕자가 베데히 왕비의 뱃속에 있을 때 아니면 왕자가 태어났을 때 빔비사라 왕이 진심으로 선인에게 참회를 하며 자신의 행동을 반성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는 반성과 참회라는 쉽고 바른 길을 두고 후환을 피하기 위해 왕자를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선인의 저주가 두려웠던 빔비사라 왕은 아무 반항도 할 수 없는 갓난쟁이 왕자를 왕궁의 높은 창문에서 떨어뜨렸다. 자신의 과오를 억지로 지우기 위해 왕자를 죽이려 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왕자는 목숨을 건졌으나 빔비사라 왕의 과오는 그에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왔다.
왕자가 자라면서 빔비사라 왕은 지난날의 잘못된 행동을 크게 후회하였고 그에게 사랑을 쏟았다. 하지만 빔비사라 왕의 사랑이 깊고 커질수록 왕자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향한 알 수 없는 증오심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증오에 사로잡힌 왕자는 16살이 되던 해, 빔비사라 왕을 칼로 위협하여 폐위시켰고 그를 지하의 깊고 어두운 감옥에 가두었다.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왕실의 잔혹한 비극에 사람들은 경악하였고 빔비사라 왕을 동정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빔비사라 왕은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감옥에 갇힌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이 안거를 보내고 계신 기사굴산을 향해 예배를 올리며 법문을 들려주실 것을 간절하게 청했다. 천안통으로 빔비사라 왕의 고통과 비극을 모두 아신 부처님께서는 목건련 존자와 부루나 존자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목건련 존자와 부루나 존자는 수승한 신통력으로 순식간에 기사굴산에서 라자가하에 도착하였고 왕궁의 삼엄한 경비를 걸림 없이 통과해 지하 감옥에 있는 빔비사라 왕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감옥 안에서 계를 받고 법문을 들은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의 자비로움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다. 결국 빔비사라 왕은 감옥에 갇혀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다가 기력이 다하여 목숨을 잃었다. 일세를 풍미했던 왕이자 대영웅으로 찬탄 받았던 빔비사라 왕의 죽음은 라자가하의 백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라자가하에서 일어난 빔비사라 왕의 비극적인 최후는 정토삼부경 중 하나인 <관무량수경>에 기록되었고 인과응보의 모든 것을 보여준 그의 삶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불교신문3201호/2016년5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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