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 권력을 등에 업은 유태인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반독점법을 통해 록펠러과 JP모건을 압박했다; 모건은 루스벨트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 " 상당히 위험한 혜성이 나타났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로스차일드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 정권의 의회 역시 푸조위원회 (1912-13)를 열어 모건을 압박했다; 푸조 위원회는 독일 유대인 이민자인 뉴욕 출신 변호사 새무얼 언터마이어(Samuel Untermyer)에게 조사와 신문을 맡겼다. 이 유대인 변호사는 반독점 전문 변호사로 그동안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과도 싸우고 J.P.모건과 관련된 사건에서 피어폰트에 대항해 변론한 이력이 있었다; 피어폰트가 사망한 그해, 연방의회는 푸조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연방준비법을 통과시키고,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를 설립했다; 1912년의 타이태닉호 침몰은 JP모건의 음모인가?

 아로가 쓴 글을 참조해서 쓴 기사인가? ㅋ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64


운좋게 침몰선 승선 연기…푸조 청문회 참석 후 급격하게 기력 상실



존 피어폰트 모건은 타이태닉호(RMS Titanic)를 사랑했다. 타이태닉은 J.P.모건이 대주주로 있는 해운 트러스트 IMM(International Mercantile Marine) ​산하의 영국 여객선 회사 화이트스타라인(White Star Line)에 의해 건조되었다. 당대 최신형 초화화 유람선인 타이태닉은 경쟁사인 영국 큐나드라인(Cunard Line)의 도전에 맞서 제작되었으며, 미국인 소유의 영국 국적인 복잡한 구조였다. 운영은 영국회사 화이트스타라인이 맡았다.

피어폰트는 IMM 계열사인 화이트스타라인의 브루스 이스메이 회장이 타이태닉호와 올림픽호를 건조하겠다는 계획을 승인했다. J.P.모건은 두 척의 거대한 쿠르즈선이 접안할수 있도록 뉴욕시에 로비해 허드슨 강의 부두를 30여m 확장시켜 놓았다. 피어폰트는 1911년 5월에 타이태닉호가 건조되고 있는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조선소를 찾아가 배를 직접 구경하면서 자신을 위한 전용 객실을 지정해 놓았다. 전용객실은 갑판에 설치되었으며, 넓은 침실과 무도회장이 설치되었다.

피어폰트는 모건그렌펠의 파트너와 함께 타이태닉의 첫출항에 동참할 예정이었다. 당시 70대 초반의 이 노인은 은행 경영을 아들 잭에게 맡겨놓고 프랑스 동남부 휴양도시 엑스레뱅(Aix-les-Bains)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타이태닉 처녀 항해에 탑승하지 않았다. 휴식을 더 취하기 위해 연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타이태닉은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스햄프턴 항을 떠나 15일 북대서양 상에 떠다니던 빙하 조각과 충돌해 침몰했다. 피어폰트는 다음날 휴양지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안도감보다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에 비통해 했다. 바다에 표류하던 생존자는 경쟁사인 큐나드라인의 카르파티아호(RMS Carpathia)에 의해 구조되었다.



피어폰트는 타이태닉 승선을 피해 목숨을 연장시켰지만, 그 후 그의 인생은 타이태닉 그 자체였다. 거대한 금융자본가는 빠르게 침몰해 갔다.

언론들은 타이태닉의 침몰을 보도하면서 피어몬트에 초점을 맞추었다. 피어폰트가 큐나드와의 경쟁에 혈안이 되어 안전을 무시했고,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화려한 전용객실을 꾸며 놓았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구명보트도 부족했고 망루에 망원경도 없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회사는 유빙 출현 예보도 무시했다.

타이태닉 사고는 피어몬트가 설계한 IMM을 침몰시켰다. 이 트러스트는 파산 위기에 빠졌다가 끝내 루스벨트 라인에 매각되었다.


존 피어폰트 모건이 신문기자들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화를 내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존 피어폰트 모건이 신문기자들이 사진을 찍으려 하자 화를 내고 있는 모습 /위키피디아



타이태닉 사고와는 별개로 워싱턴 정가에서는 금융자본가의 독점에 대한 비난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금융자본가는 탐욕의 화신으로 규정되었다. 언론들은 금화 더미 위해 배부른 장사치가 만족해 하는 풍자만화를 실었다. 그 중심에 피어폰트가 있었다.

의회에서 찰스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 하원의원이 금융자본 공격의 선두에 섰다. 1927년 대서양을 처음으로 단독 비행에 성공한 비행사 린드버그의 아버지다. 린드버그 의원은 금융자본이 역대 트러스트 가운데 가장 악랄하다며, 머니 트러스트(money trust)란 용어를 사용했다. 머니 트러스트는 언론들에 의해 공식 용어로 정착되었다. 린드버그 의원은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을 조사하자는 결의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독점 자본과 독점 기업에 대한 민주당에서 팽배했다. 민주당 좌파 진영은 트러스트가 잔혹하고 비효율적이며 기업가 정신을 갉아 먹는다고 주장했다. 그 대표자는 뉴저지 주지사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었다. 민주당의 집중 공격에 공화당도 갈라졌다.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지지했는데, 언론과 민주당의 비난이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어가자 공화당 내에서도 트러스트를 규제하자는 측과 규제하지 말자는 측으로 나눠졌다.

1912년 대선의 핵심 이슈는 거대 독점자본의 규제였고, 피어몬트의 J.P.모건이 타깃이 되었다. 그해 11월 선거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우드로 윌슨은 공화당 후보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동시에 의회에서는 하원 금융통화위원회 산하에 소위원회를 설치해 금융산업 독점 실태를 조사토록 했다. 소위의 명칭은 하원의원 아르센 푸조(Arsène Pujo) 이름을 따서 푸조 위원회(Pujo Committee)라고 불렀다. 신임 윌슨 대통령도 금융개혁을 부르짖었고, 의회는 소수의 금융자본을 이 잡듯이 뒤지겠다는 태도로 나왔다.


뉴욕 핸해튼 36가의 모건 도서관 /위키피디아
뉴욕 핸해튼 36가의 모건 도서관 /위키피디아



푸조 위원회는 독일 유대인 이민자인 뉴욕 출신 변호사 새무얼 언터마이어(Samuel Untermyer)에게 조사와 신문을 맡겼다. 이 유대인 변호사는 반독점 전문 변호사로 그동안 존 록펠러의 스탠더드오일과도 싸우고 J.P.모건과 관련된 사건에서 피어폰트에 대항해 변론한 이력이 있었다. 피어몬트는 이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언터마이어는 피어몬트 이외에도 유대인 금융인 제이컵 시프 등을 청문회로 불러 심문했다.



피어몬트는 1912년 12월에 청문회에 섰다. 75세의 노뱅커는 모건 금융왕국을 아들에게 맡기고 현업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피어몬트는 워싱턴에 아들 잭과 맏딸 루이자, 변호사 등 16명을 대동했다. 의회로 들어가는 연도에는 피어몬트를 보기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청문회가 열렸다. 피어폰트는 유대인 변호사 언터마이어와 마주했다.

언터마이어는 집요하게 심문했다. 언터마이어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주는 근거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피어몬트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인격이다”고 대답했다. 피어폰트는 대답을 이어나갔다. “인격이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 돈으로 인격을 살수 없다. 내가 신뢰하지 않는 사람에겐 하느님 나라의 채권을 가지고도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그는 금융업을 천한 직업으로 몰아붙이려던 변호사와 민주당 사람들에게 일격을 가했다. 재산이나 자본을 근거로 대출을 주지 않고 사람의 인격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는 그의 발언은 J.P.모건의 귀족적 뱅커스타일을 대변했다. 그의 대답이 뉴욕증시에 전달되자 주가가 급등했다. 금융인들의 자존심을 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그의 말을 위선으로 받아들였다. 사기와 협박으로 일관해서 금융제국을 일궈놓고 신사인척 한다는 것이었다.

언터마이어는 이런 질문도 했다. “은행이 채권 가치를 유지해야 할 법적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피어폰트는 대답했다. “법적 책임은 없다. 다만 도적적 책임이 있다.”]

유대인 변호사는 “당신이 이 나라의 산업에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질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피어폰트는 “나는 아주 작은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핀잔을 주었다. 언터마인드는 화가 나서 “당신은 은행을 직접 경영하지 않느냐”고 묻자, 피어폰트는 “그렇지 않다”고 깔아 뭉겼다. 심문자를 한방 먹인 것이다. 공식적으로 J.P..모건은 파트너들의 회사였다.



푸조 위원회는 J.P.모건을 비롯해 월스트리트를 샅샅이 뒤졌다. 위원회는 결과보고서에서 12개 대형은행이 미국인 전체 금융자산의 42.9%를 장악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또 대형은행 임원 또는 파트너 180명이 미국 기업 112곳에 341개의 이사직을 차지하며 기업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 냈다. 한 사람이 두곳 이상의 이사직을 중복한 경우도 있었다.

언터마이어가 작성한 푸조위원회 보고서는 금융자본의 경제 지배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냈다. 이에 따르면 미국 금융은 J.P.모건의 피어몬트, 퍼스트내셔널은행의 조지 베이커, 내셔널시티은행의 제임스 스틸먼 등 세 사람이 18개 금융회사를 지배하고, 그 중심에 7개 금융회사가 전체 금융업을 지배한다. 그 정점에 피어폰트가 있다는 것이다. 이 세 명의 금융가가 지배하는 금융자산 총량은 222억 달러에 해당하는데, 후에 그 금액이 미시시피강 서쪽 22개 주의 가치에 맞먹는다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푸조위원회는 소수의 뱅커들이 작당을 해서 금융권을 주무르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다만 ‘금융 도덕성’(Banking Ethics)이라는 모호한 관례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금융권력자들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의해 공동전선을 펴는 것은 확인했지만, 특별한 조직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뉴욕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J.P.모건의 크랙스턴 저택 /위키피디아
뉴욕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는 J.P.모건의 크랙스턴 저택 /위키피디아



푸조 청문회에 참석한 이후 피어폰트는 급격히 쇠약해졌다. 그는 소화장애, 우울증, 불면증,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는 사멉의 모든 것을 아들 잭에게 맡기고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아들 잭은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다는 연락을 받고 의사를 급히 이탈리아로 파견했다. 이 미국의 금융거목은 1913년 3월 31일 이탈리아 로마의 그랜드 호텔 플라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이 전해진 날, 월스트리트는 조기를 게양했다. 76세였다.

피어폰트가 사망한 그해, 연방의회는 푸조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연방준비법을 통과시키고,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를 설립했다.

모건 하우스는 피어폰트의 죽음이 푸조위원회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노령인데다 말년까지 과도한 업무에 시달린데다 스스로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천수를 다했다고 할수 있다.

그가 죽은후 모건 하우스는 존 피어폰트 모건 2세, 애칭으로 잭(Jack)에게로 넘어갔다.


존 피어폰트 모건 부자 /위키피디아
존 피어폰트 모건 부자 /위키피디아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46414#home

상당히 위험한 혜성이 나타났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미국의 금융 황제 존 피어폰트 모건(1837~1913년)이 1901년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그가 위험한 혜성이라고 한 인물은 바로 그해 부통령에서 대통령에 오른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년)다.

루스벨트는 윌리엄 매킨리 당시 대통령이 저격당해 숨지자 백악관을 넘겨받았다. 그는 모건 등 그 시절 월가 실세들의 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실제 루스벨트는 거의 사문화한 반독점법을 꺼내 모건 등 금융자본가들이 설립을 주도한 업종별 독점기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금융-산업의 게임 룰을 바꿔놓기 시작한 인물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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