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을 사랑한 명예일본인 윤서인 vs.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인 호사카 유지 / 창씨개명의 진실 / 창씨개명에 대한 과도한 차별 부풀리기 역시 조선인들의 일제쇠말뚝 날조설과 같이 역사왜곡
강용석이나 윤서인이나 호사카 유지나 그나물에 그밥인 것들!
서인이가 창씨개명 설명할 때 사용한 자료는 그냥 전부 다 나무위키네 ^^;;; 서인이는 공부를 잘 안하나봐?
5.2. 실질적으로 불이익은 경미하였다는 입장[편집]
창씨개명이
강제적 성격이 있었다는 사실과 은 일부 사실일 수 있으나, 실질적인 차별이나 불이익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별개의 문제로 객관적인
사료를 토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여태까지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 및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위 입장처럼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다면 엄격한 처벌을 적용했다는 것처럼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사 등 역사적 사료들을 톺아보면 그 정말로 불이익이
있었는가 의문을 가지게 된다. 아래는 실제 일제시대였던 1940년대에 발행된 매일신보에서 발췌한 창씨개명에 불이익을 적용하지 않은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들이다. 형광펜이나 화살표로 특정한 지점에 조선식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나열된 것 이외에도 수많은 사료들이 있으며, 여기에서 더 많은 자료를 확인할 수 있다.
5.2.1. 취직[편집]
-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직장을 얻을 수 없고, 이미 다니는 직장에서도 해고되며, 만약 해고되지 않으면 상관과 함께 해고하였고, 그 직장을 폐쇄했다?1941년 경성중앙방송국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 - 매일신보1941년 보통문관합격자명단 - 매일신보
- 1941년 경성중앙방송국(JODK)에 아나운서로 채용된 합격자 6명[19] 중 2명 이원구, 허점옥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식 이름을 가진 채 아나운서에 합격했다. 경성중앙방송국은 현대의 KBS[20]에 해당하는 방송국이다. 아나운서의 직업 특성상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시청자에게 알리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였을텐데, 이러한 직책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인을 임명하였다는 것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이 직장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의 논리에 어느 한 부분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식 이름을 유지한 자를 고용한 이 경성중앙방송국은 폐쇄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경성중앙방송국은 해방 이후까지 건재하다가 이후 한국방송공사로 명맥을 이어간다. 심지어 한국방송공사는 아예 대놓고 창립일을 경성중앙방송국의 창립년도인 1927년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즉 KBS의 존재자체가 해당 주장이 사실무근이라는 하나의 증거인 것이다.
- 또한 보통문관(현대의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해당)에도 박교남, 임행작 등 최소 2명의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가 임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직장을 얻을 수 없는데 심지어 공무직, 그것도 오늘날 7급에 해당하는 직책에 조선식 이름을 쓰는 사람을 선발했다는 이 기사는 당시에 정말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 대해 철저한 배제와 억압이 있었는가 되짚어보게 하는 사료다.
5.2.2. 교육[편집]
-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 할 수 없다?
-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교사는 해고하고,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했다?1941년 경기공립중학교 합격자명단 - 매일신보1941년 만주국교원시험 선내(조선출신[21])합격자 발표 - 매일신보
- 조강언, 이순구, 김인환, 진철수 등 조선식 이름이 상당 수 합격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합격자 명단은 각 연도별, 지역별, 각급 학교별로 수천 개가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심지어 이 경기공립중학교의 경우에는, 수도 경성에 소재하여 조선총독부의 직속 감독을 받는 학교로, 만약 창씨개명 거부자를 차별하여 학교에 입학할 수 없게 하려고 했다면 당장 직속 학교부터 시행했어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자료는 1941년이 되도록,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들도 여전히 총독부 직속 학교의 입학 전형에 차별 없이 응시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합격자 선발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는 객관적 증거다. 따라서 창씨개명 거부자가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 무근이다.
- 위 주장에 따르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교사를 해고하였다면 그 일관성에 따라 신규 채용도 당연히 금지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1942년에는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 설립한 학교의 교사를 선발하는데에도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를 다수 채용하였다. 만약 창씨개명 거부자를 채용한 학교를 폐교한다는 방침이 있었다면 만주고 조선이고 조선식 이름을 아예 채용하지 않았어야 하거나, 채용했다면 학교를 폐교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해당 자료는 교사 채용 명단에 명백히 조선식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1941년까지도 교사의 채용에도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가 상당수 채용되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존재한다.
5.2.3. 생활[편집]
-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이 철도국 및 운송점에서 취급되지 않았다는 기록은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인 승객이 모든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었다는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이 병원 치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주장은 일부 병원에서 차별적 관행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강제적인 배제가 이루어졌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하다.1942년 치과의사시험합격자 명단 - 매일신보
- 의료진이 일본식 성명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폐원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실제로 1942년 치과의사시험 합격자의 명단인데, 조선인에게도 공공 서비스 중에서도 매우 고급 기술인 치의학을 전공하고 치과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이 1941년까지도 열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조선인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면, 치과의사 자격 취득 시험을 응시하게 하고 자격을 취득하게 하여 잠재적으로 일본인의 치아 건강을 맡기는 것은 그 목적과 완전히 모순된다. 심지어 그 논리대로라면 조선식 이름을 유지한 조선인은 더더욱 제재했어야 한다. 하지만 위의 1942년 치과의사시험 합격자의 명단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인이 되고자 하더라도 창씨개명이 필수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개연적이다.
5.2.4. 기타[편집]
- 창씨개명 거부자는 공무에 종사할 수 없었다?1942년 전조선순사부장 체험좌담회 명단 - 매일신보
- 1942년에 전조선(조선 전체)의 순사부장들이 모여 경험담을 공유하는 좌담회에 관한 기사의 일부분이다. 이 중 평양경찰서의 김래승 순사부장, 신의주경찰서의 김구향 순사부장이 조선식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순사부장직을 여전히 유지하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과 일본인 순사부장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만약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 불이익이 주어졌다면 일본인 순사부장들에게는 물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순사부장들마저도 이들과 거리두기를 했어야 개연적인데 기사의 내용을 보면 그러한 위화감이 없이 좌담회의 내용 중심으로 기사가 서술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불이익이 과연 있었는가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지점이다. 또한 위에서 주장이 사실이라면 평양경찰서와 신의주경찰서는 진작에 각각 폐쇄했어야 했으나, 폐쇄는 커녕 오히려 좌담회에 참석할 정도로 당당히 직업활동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 자료이다.
- 거부자는 불령선인, 비국민, 무국적자로 간주되었다?1941년 조선총독부 직원록 (9페이지) - 국립중앙도서관
-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조선총독부 직원록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조선식 이름들이 다수 보인다. 만약 조선식 이름을 유지한 자를 불령선인, 비국민이나 무국적자로 간주하였다면 이들은 총독부는 커녕 일반 직장에도 취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들이 총독부의 공무원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였다는 역사적 증거물로부터 해당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5.3. 광복 이후[편집]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해 창씨 개명 이전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22]을 찾아볼 수도 있다.[23] 모든 호적에 일괄로 정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수기 호적인 시절에도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한 정정은 그냥 도장으로 다 찍어놓은 점이 이채로운 부분.한때 한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동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성을 갈기 싫은 사람들은 가네다(金田), 아키야마(秋山) 등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썼다.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귀화를 결심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문서 참고.
다만 손정의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에선 결혼하게 되면 보통 아내가 남편의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그 반대) 성씨로 바뀌는 것에 착안해 일본인인 자기 아내를 손씨로 바꾸어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 한자 + 인명용 한자 + 상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개명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 한자 + 인명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 한국인 중에 일본식 성씨, 예를 들어 山田, 金田, 松山 등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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