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공내전 시기 부저항 명령으로 만주를 일본에 넘겨준 장쉐량 (장제스가 아니다); 그는 국민당이 일제와 협력했다는 오명을 쓰게 만들었다; 더욱이 장쉐량은 마오쩌둥의 공산당에 넘어가 시안 사건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공산당에 넘겨준 원흉; 아무도 제기하지 않는 가능성이지만, 대중국 영국 연합 원조 기금(British United Aid to China Fund) 명예의장을 역임했고, 장제스의 부인이자 장쉐량의 애인이었던 쑹메이링이 영미 자본의 지령으로 장쉐량을 설득해 시안 사건을 일으키고, 공산당에 힘을 실어준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더라도, 자신의 남편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납치를 당한 직후 찍힌 사진에서 쑹메이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는 점에서, 최소한 그녀는 장쉐량에 동조적인 입장이었다

 

4.1. 엇갈리는 평가[편집]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인물. 중국공산당 측의 평가는 대단히 우호적인데 반해 중화민국 계열이나 한국 역덕 커뮤니티에서의 평가는 매국노, 저능아 수준의 악평을 받는다. 거진 원균이나 무타구치 렌야에 비견될 정도의 트롤러로 비판을 받는다.

특히 시안 사건으로 중국 내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는 시안 사건을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하여 그를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루어내 항일 전쟁에 공헌한 애국자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사실 장쉐량이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뭐든간에 시안 사건이 아니었다면 중국공산당이 소멸되었을지도 모르니 어찌 보면 당연지사였다.[13]

반면 중화민국중국국민당에서는 그야말로 역적 취급. 공산당과 일본제국의 프락치라 취급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행적 덕분에 한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훗날 장제스는 "8년간 들인 공(공산당 토벌 작전)이 불과 2주일 만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라고 치를 떨었다.

또한 장쉐량은 행적 외에도 인격과 역량, 인간상의 측면에서도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린다. 장쉐량은 특유의 귀공자스러운 곱상한 외모로 인해 공산당 측의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같은 매체에선 한없이 영웅으로 미화되고 있다. 반듯하고 올바른 청년 혁명가 그 자체로, 거의 정의의 용사 급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반면 비판 측에서 장쉐량을 평가할 땐 외모와 정반대로 인격이 비열하고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악평이 많이 나온다. 한 마디로 호부견자라는 것이다. 호탕한 성격을 가졌으며 허허벌판이었던 동북지방을 공업화시키고 중국 최대급의 세력을 일궈낸 아버지 장쭤린의 그릇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평가다.

장쉐량은 전형적인 후진국 독재자스러운 면모, 비유하자면 김정일, 김정은과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파티를 신나게 벌이다가 수틀리면 부하를 잔인하게 사살하거나 아편,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모습이 많았다. 후술되겠지만 장쉐량은 특유의 기이한 행보를 많이 보였다. 대표적으로 만주사변에서의 대응이나 시안 사건에서의 괴이한 행적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일각에선 방탕한 사생활 및 아편 중독 때문에 머리가 망가져 대국을 그르친 것은 아닌가 하고 추측을 할 정도다.

장쉐량 본인은 육성 회고록에서 '군인으로서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으나, 이 일에 대해서는 양심에 있어서 떳떳하다. 1936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주저 않고 다시 시안 사건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여 이 사건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육성 회고록은 장쉐량이 아직 연금 상태였던 1990년대 초에 녹음된 것이며 본인이 컬럼비아 대학에 기증했다. 양안 관계로 인해 이 자료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회고록에서 장쉐량은 장제스가 중국을 통일할 인물이라고 생각했기에 풀어 주었으며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

마오쩌둥의 잔인한 행보를 되돌아보면 만주를 다시 수복하고 일본군을 쫒아내면서 대륙을 통일했어도 머지않아 장쉐량도 숙청했을 확률이 높았다. 따라서 공산당 측의 국공합작 및 장쉐량 포섭 제안엔 진심이 전혀 담겨있지 않았으며 장쉐량을 자기 입맛대로 속이고 이용해먹기 위한 쪽이라는 데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공산당이 당면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장쉐량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항일을 핑계로 공산당 토벌을 중단시킨 것. 또한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장쉐량 역시 항일에 그닥 관심 없는 이기적인 군벌로서 굳이 공산당과 싸우며 손해를 보기 싫은 등의 이해관계가 매우 일치했다. 장쉐량은 입으로는 항일과 동족 간 화합을 내세우며 애국자 행세를 했지만, 실상 그는 제대로 된 항일은 커녕 발목만 잡았으며 일관되게 자기 영지인 만주 수복에만 관심을 보여왔다. 그런 장쉐량은 공산당의 낚시질에 너무나도 잘 낚여들었다. 물론 공산혁명이 목적인 공산당의 입장에서야 이 일련의 행보는 매우 합리적이다. 항일을 내세워 국공합작 낚시질로 토벌을 피하고, 그 와중에 항일전쟁은 나몰라라하며 세력만 키운 것이 국민당에겐 손해겠지만 공산당에겐 결정적 승리의 기반이 된 것. 그러나 장쉐량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국민당과 장제스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세계관에서 살아갔으며 국민당 소속의 군벌일 뿐 딱히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런 장쉐량이 공산당의 사탕발림에 속아넘어간 끝에 마리오네트가 되어 공산당 좋은 짓만 다 한 것은 장쉐량의 현실인식능력이 매우 처참하고 유아적이라는 방증이다. 결국 장쉐량은 저우언라이가 빨간펜 첨삭지도 해준 대로 시안 사건이라는 전무후무한 깽판을 쳤고, 공산당은 어마어마한 이득을 보았으며, 중화민국은 중일전쟁에 빨려들어가 일본에 끝없이 박살나며 수습 불가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4.2. 만주사변과 부저항 장군[편집]

만주사변 당시 동북군에게 내렸던, '저항하지 말고 관동군에게 협조하라'라는 부저항 명령 때문에 만주 전역을 일본에게 빼앗긴 점에 대해서도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이 '부저항'이란 꼬리표가 아직도 유행할 정도다. 흔히 원균 하면 누구든 칠천량 참패를 떠올리듯, 장쉐량 하면 '부저항 장군'으로 통하는 급으로 낙인이 찍혀 버린 것이다.

장쉐량은 질은 처참했으나 어쨌든 규모만은 거대했던, 정규군만 30만명 규모의 최대 군벌세력인 동북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00명 수준의 관동군 침략에 무대책으로 방관했다. 요충지가 시시각각으로 함락됨에도 상황 파악은 하지 않고 늘상 있던 국지도발에 불과할 것이라 치부하며 외교적 협상에만 지나치게 목을 맸다. 기도 메타에 올인하며 그야말로 우유부단하고 지리멸렬한 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공업력의 코어였던 만주를 순식간에 실함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장쉐량이 군벌로서 동북 지방은 팽개친 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화북 지방의 땅따먹기에 골몰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행보라고 욕을 먹는 부분이다.

장쉐량은 수하들의 봉천 복귀 권유도 무시하고[14] 동북군의 기량이 처참하게 몰락하는 것도 방치한 채[15] 주력 부대 절반을 베이핑에 박아두고 있었다. 동북 지방에 잔류한 부대는 질이 형편없었고 만주의 상황이 심각함에도 주력부대는 북경에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방관에 더한 부저항 지시 때문에 그나마 전투력이 있는 동북군들도 제대로 된 대응이 되지 않은 채 처참하게 박살이 나버리거나 관동군에 고스란히 항복했으며 전쟁 발발 이후 고작 몇개월 만에 만주가 날아가 버린 것이다. 중국은 만주 상실로 인해 중국 최대 규모[16]의 수많은 중공업 시설과 군수품 생산단지, 전략적 요충지를 날려먹음으로서 전쟁 동력에 크나큰 데미지를 입게 되었다. 거의 중국을 팔아먹은 매국노로 봐도 될 정도의 행적이다.

시안 사건 당시 장쉐량이 내세운 명분이 동족끼리 싸우지 말고 일제에 대항하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항일투사 코스프레는 실컷 하는 인간이 정작 일본이 침략해 왔을 때 내렸던 명령은 일본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었으니 어이가 없을 따름이다. 장쉐량이 적극적으로 나라를 망칠 의도가 있지 않고서야 내릴 수가 없는 미스테리한 명령이다. 장쉐량 본인도 '당시 일본의 의도를 몰라서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나의 책임이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았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책임을 인정했다.

시안 사건에서 내세웠던 장쉐량의 항일 명분은 정말 코스프레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장쉐량은 일본은 무서워하면서도 훈련 등의 군대 강화 노력 역시 도외시했다. 아버지 장쭤린폭사시킨 게 일본인데 복수를 위한 군비 강화와 군제개혁은 커녕 일본 영사에게 친일 약속이나 해대며 군벌의 생존을 위한 줄타기만 하던 게 장쉐량이었다.

이 때문에 만주사변 막바지인 1931년 말 관동군의 남하 상황에서 국민정부의 항전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쉐량의 선택은 오로지 후퇴 뿐이었고, 관동군은 진저우에서 무혈입성했다. 더더욱 어이가 없는 것은 장쉐량이 국민정부의 중앙군 북상 제안을 얼버무리는 식으로 거절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화북 세력권이 침탈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물론 만주사변 이후 시점에선 장쉐량과 동북정권이 꿔다놓은 보릿자루만도 못한 한심한 능력을 보인 탓에 일본이 굳이 장쉐량과 협상해 줄 이유가 없었다. 줘패고 땅이든 이권이든 강탈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즉, 부저항과 굴종으로 일본을 달래고 정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쉐량의 생각은 그저 망상에 불과했다.

만주 사변 이후에도 장쉐량은 자기 세력권 보존과 병력 아끼기에만 몰두하며 군벌스러운 행태만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장쉐량은 시안 사건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상관인 장제스를 납치, 구금하여 공산당 토벌 중단과 일본과의 결전을 강요하였다. 결국 공업력과 공세 역량을 성장시키며 전선을 유지하다가 1940년 이후에 만주를 수복하려 했던 장제스의 대전략은 어긋났으며, 그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게 되었다. 후스가 당시 중국이 일본과 싸울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다고 지적한 것처럼 개전시점이 완전히 어긋나 독소전에서의 소련과 같은 참담한 패전을 수도 없이 겪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섬멸 직전의 위기에 몰려 위태로웠던 공산당이 살아남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되었고 중일전쟁 이후 공산당이 승리하는 발판이 되었다.

장쉐량의 저자세 외교는 극히 호전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일본 군부에 더더욱 극도의 저자세 외교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을 가져오고 말았다. 일단 장쉐량의 동북정권은 근본 자체가 일본에 의존적이었다. 동북정권이 만주, 화북을 아우르는 거대 군벌로 성장하는 데에 일본의 지원이 핵심적 역할을 했고, 이건 부친 장쭤린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쭤린은 지속적으로 일본에 이권을 뜯겨왔고, 종국에는 반쯤 조종당하시다시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장쭤린은 여기에 저항하다가 일본에 폭사를 당해버렸다.

그러나 동북정권은 창업자의 폭사라는 전무후무한 사태를 목도하고도 복수는 커녕 여전히 일본에 굴종하며 장제스와 일본 사이에서 간을 볼 뿐이었다. 동북정권의 수뇌부엔 친일 성향의 인물들이 수두룩하게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징후이 같은 원로들은 만주사변 당시 관동군에 적극 협력하며 만주국 성립 이후 총리가 되기까지 했다. 또한 장쉐량은 소련 등의 열강에 처참하게 깨지는 동북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관계를 이어오고 있던 일본에 대한 외교적 협상 외의 다른 해결책을 전혀 모색하지 않았다.

다만 관동군은 일본 본국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광인처럼 날뛰는 상태였으므로 부저항과 협상, 외교적 시도는 전혀 먹히지 않는 상황이었다. 통제는 커녕 일선 지휘관들이 개인의 공적을 위해 자기 맘대로 도발과 침공을 일삼고 정부가 거기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기나 하던 게 일본이었으니 말이다. 최소한 야욕에 불타던 관동군은 절대로 만주 침략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때문에 부저항 지시를 내려봐야 관동군에 자동문을 열어주기만 할 뿐, 결과적으로는 만주를 송두리째 넘기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장쉐량의 무사안일주의와 극도의 부저항주의가 중일전쟁의 커다란 주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전쟁만 하면 마치 썩은 짚단 마냥 무너지는 중국군, 전쟁만 하면 늘어나는 영토와 쏟아져들어오는 이권, 전리품, 일본 내부에서도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중국과는 전쟁 안 하는 게 바보다'라는 확전 여론만 팽창시켰으며, 결국 중일전쟁이 시작될 무렵 일본 본국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고 만다.

즉, 장쉐량이 두번이나 국민당의 발목을 잡은 것은 장제스와 중화민국 정부의 중국 본토 상실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이러니 중국 공산당이 장쉐량을 칭송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공산당 측의 사관을 본인의 조선민족주의적 성향에 맞게 체리피킹하는 김용옥도 장쉐량과 시안 사건을 대단히 고평가하고 있다. 중국 민족의 좌우 분열을 그치게 하고 단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게 만든 영웅적 행적으로 평가하는 식이다. 아마도 장쉐량이 재만 조선인들을 학살한 이야기를 모르고 있는 것 것으로 추정된다.

4.3. 장쉐량은 도대체 왜 그랬나?[편집]

4.3.1. 아편 중독설[편집]

만주사변 당시의 대일 부저항을 두고, 장쉐량이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한참 전부터 장쉐량은 아편에 중독된 상태였고, 이 때문에 건강이 크게 망가져 있었다. 외모만 봐도, 동북역치 ~ 만주사변 때와 시안 사건 이후 연금 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확연하게 차이난다. 이런 건강 문제 때문에 장쉐량이 판단력이 흐려져서 '부저항'이란 결정을 내린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장쉐량이 수하들의 봉천 복귀 권유를 무시하고 만주가 아닌 베이징에 박혀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아편 중독설 외에도 지나친 여색 혹은 연극 관람에 빠져 있었다는 설과 장티푸스를 치료 중이었다는 설, 혹은 장티푸스를 핑계로 아편 중독을 치료했다는 설들이 존재한다.

4.3.2. 장제스의 의도 설[편집]

近來對日外交性情緊迫, 彼國朝野上下公然密謀侵佔我東北(彼方謂為滿蒙), 勢甚積極, 不可終日.
근래 대일 외교의 형세가 긴박합니다. 일본은 조정과 재야 상하를 가리지 않고 공공연히 우리의 동북(그들 말로는 만몽)을 침공할 것을 밀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 또한 적극적이며 끝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당시에 장쉐량이 장제스에게 보낸 전보문 중 일부분, 차이잉원 정부에서 공개.

통념과는 달리 장쉐량은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으며, 부저항은 오히려 장쉐량 본인이 아니라 상관 장제스의 의도였다는 주장이 제시되고 있다.[17]
다만 이런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한 것이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을 무시하는 상태였고, 만주의 독립세력으로 컨트롤이 거의 되지 않았다. [18] [19] 세금도 안 보내고 온갖 명령을 다 씹던 치사한 인간이 부저항만 장제스가 시킨대로 했다는 주장은 합리적이지 못하다. 만에 하나 부저항이란 명령이 내려왔다 한들 장쉐량이 매번 하던 것처럼 명령을 무시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 부저항은 철저하게 장쉐량 본인의 의중에 맞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또한 위의 전보문은 장쉐량이 일본의 야욕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설명해주지만, 장제스가 부저항이란 명령을 내렸다는 근거는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윗 문단의 주장은 장쉐량을 추켜세우고 장제스를 깎아내리고자 하는 중국 공산당 측의 입맛에 맞는 내용이며[20] 통념을 반박하기는 커녕 전형적 음모론에 가까운 것이다. 또한 '장제스가 부저항하라고 장쉐량에게 시켰다, 모두 장제스 때문이다'라는 주장이 오히려 기존의 통념이며, 현대 중국 공산당이나 중국인들의 일반적 상식에 가깝다. 그런 내용의 책들이 한국의 서점에 깔려 있고 도올 같은 대중 지식인이 TV에서 그걸 정설인 것마냥 강의하는 것이 현실이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와의 내전[21], 초공작전까지 중지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군대를 북상시켰다. 만주사변이 아니었다면 광저우 정부는 더 이상 살아남지 못했을 것인데 만주사변에 대응하느라 모든 것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22] 또한 국제연맹에 일본의 침략을 제소함과 함께 장쉐량의 단독협상 시도를 막으려 했다.[23]
부저항과는 전혀 맞아떨어지지 않는 움직임이다. 장제스가 장쉐량에게 부저항 지시를 내렸다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으나, 증거가 딱히 없는 상황이다.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근거라곤 장쉐량의 비서장 궈웨이청의 회고 단 하나 뿐이다. 장제스가 전화를 통해 장쉐량에게 부저항하라는 지시를 몇번이고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사료 등으로 보충되지 않는 개인의 주장에 불과하며, 장제스는 신중한 대응과 지속적인 보고를 요청했을 뿐 사태 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 상태로서 지시를 내릴 만한 여건이 전혀 안 되어 있었다. 만주사변 이전에도 장쉐량은 독립왕국의 군주 격으로서 장제스는 그저 장쉐량의 여러 행동을 묵인할 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장쉐량 스스로도 NHK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저항은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주 사변 이전까지 장제스의 대일방침이 충돌을 삼가며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었고[24], 장쉐량의 판단이 이런 방침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고 가정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간첩혐의자에 대한 총살이었던 나카무라 사건 등 이전까지 일본이 저지른 도발과 연대 규모 병력의 기습으로 본격화 된 만주 사변은 차원이 다른 사건이다. 도발에 넘어가지 말라는 방침이 일본의 자작극에 반응하지 말고 전쟁 위협을 회피하란 것일 수는 있겠으나, 이미 전쟁을 걸어온 일본군에 자동문을 열어주며 총 한 발도 안 쏴보고 두들겨 맞으면서 만주를 넘겨주라는 내용일 리는 없다. 남경에서 내부수습에 정신을 못 차리던 장제스가 만주의 사정이 파악이 되었을 리도 없고 일본이 도발을 해오는지 전쟁을 걸어오는지 파악하고 적절한 대처를 내려야 했던 건 장쉐량이었다.

4.3.3. 전근대 봉건영주 마인드 설[편집]

만주사변부터 시안 사건까지 장쉐량이 저지른 일련의 행적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기 땅 지키는 것에만 관심 있는 봉건제 영주, 사실상 만주왕의 자세로 이해하면 대체로 설명이 된다.
1. 만주땅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내 영지다. 만주를 통치하는 것은 당연한 내 권리다.
2. 근데 장제스가 (내가 열하사변에서 날려먹은) 만주 수복을 하나도 안 해주고 벽지에 쳐박고선 공산당과 싸우라고 한다.[25]
3. 어? 또 졌네? 열받네? 내 군대 다 날려먹고 만주에도 못 돌아가고 나만 억울하네?
4. 마오쩌둥 : 이봐, 장쉐량! 장제스는 항일은 안하고 동족이나 죽이는 놈이잖아? 우리 싸우지 말고 같이 항일 하면서 만주도 수복하자.[26]
5. 와!! 내 맘 알아주는건 마오쩌둥 너밖에 없어! 빨리 장제스를 납치한 다음 만주로 쳐들어가자고 협박해야지!

즉, 중국은 나라가 임금의 소유물이던 시대에서 사회계약으로 맺어진 현대 국민국가로 (국체뿐 아니라 인민 스스로 생각하는 국가관까지 포함해서) 이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국민당과 공산당은 적어도 그 부분에서는 구상이 명확했다.

그러나 장쉐량의 개인적 배경은 다른 군벌들과 비교해서도 혁명사상을 접한 것으로 보이는 그렇다 할 행적이 없었다. 일본에 붙었다 국민당에 붙었다 공산당에 붙었다 하는 모습은 현대 시점으로 평하면 상당히 얍샵하고 치사하지만, 봉건주의의 '자기 세력권 지키기/돌려받기'라는 대원칙을 상정한다면 꽤나 일관적인 셈이다. 비유하자면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가 침공당한 자기 영지를 지켜주지 않고 봉건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황제에게 불만을 품고 깽판을 친 셈이다. 물론 당시가 중세시대도 아니고 각국의 민족지도자들과 애국자, 사상가들이 조국을 지키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치는 와중이었다. 그런데 장쉐량은 유독 800년쯤 뒤쳐진 채 나홀로 중세시대를 살아가며 봉건적 지방 토호의 행보만 보였으니 황당하기는 하다. 그러나 어쨌든 장쉐량은 그렇게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다.

또한 장쉐량이 일본과의 외교와 전쟁에서 '부저항' 이라는 극도의 수동적 태도를 보인 이유도 봉건제 마인드 하나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는 자신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독립국 군주처럼 굴었는데, 국민국가와 다르게 봉건 영지의 영주나 호족은 모시는 주군을 갈아탐으로서 자신의 봉건적 이권을 유지할 수 있다. 장쉐량의 수하 군벌들도 만주국 성립 이후 너나 할 것 없이 친일파가 된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장쉐량이 국민당 정부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눈치를 본 건 구식 봉건 영주로서는 할 수 있을 법한 처신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난 관동군이 침략에 정신이 미쳤을 뿐, 그전까지 장쉐량과 일본은 커넥션도 끈끈했고 만주의 이권을 갖다 바친다면 본격적 친일파로 줄을 갈아탈 만한 여지도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만주 사변 당시 장쉐량이 확전을 극도로 회피하며 단독 협상에 눈이 멀었다고 해석하는 쪽이 자연스러우며, 실제 행적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장쉐량에 대한 평가가 한간 또는 선각자라고 극단적으로 평이 갈리는 것도, 그의 행적들을 이후 국민당원과 공산당원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일 뿐, 그는 그냥 옛날 사람으로서 '옛날 사람이 했을 법한 일'을 했을 뿐이라는 평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1%B9%EB%A9%94%EC%9D%B4%EB%A7%81

1936년 시안 사건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군사 지도자들은 공산당원들에 싸움을 멈추는 데 장제스를 강요하고 일본군에 저항하는 데 국공합작을 형성하는 운동에서 시안의 외부 화청지에서 그를 납치하였다. 쑹메이링 여사는 그들의 요구들로 동의하는 데 자신의 남편을 납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4543570#home

 

 

1948년 5월, 국민대표대회에 참석한 여성 대표들과 환담하는 쑹메이링. 국민당의 대륙 철수 직전이었지만 전혀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장쉐량은 연금지를 타이완으로 옮긴 후였다. [사진 김명호]

지난 일들은 미궁투성이다. 만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벌어진 일도 며칠만 지나면 뭐가 뭔지 모를 일들이 태반이다. 그래서 기록이 중요하다.

2010년 여름,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에서 장쉐량(張學良·장학량) 탄생 11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시안사변(西安事變)의 배경이나 ‘장쉐량과 중공의 관계’ 등 진부한 소재는 주목을 끌지 못했다. 장쉐량의 여인들과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과의 관계에 관심이 집중됐다.

1936년 12월 12일 밤, 1200년 전 양귀비(楊貴妃)가 온천을 즐기던 시안(西安) 교외 화칭츠(華淸池)에 총성이 울렸다. 정변을 일으킨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은 최고 통치권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를 인질로 삼았다. 5년 전 동북을 점령한 일본과의 전쟁을 촉구하며 2차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승낙을 받아낸 장쉐량은 장제스를 풀어주고 제 발로 군사법정에 섰다. 반세기 이상을 죄수나 다름없는 연금생활을 했다.

시안사변은 중국 역사상 최대의 인질사건이었다. 중국의 운명과 세계질서에 엄청난 영향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다. 간략히 소개한다.

 

장쉐량이 아니었다면 장제스의 중국 통일은 불가능했다. 밀월시기의 장쉐량(오른쪽)과 장제스. 1932년 가을, 난징.

“이 사건이 없었더라면 중공의 소멸은 시간문제였다. 항일전쟁도 지연되고, 제2차 세계대전 역시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 독일은 중국의 우방국이었다. 독일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75미리 대포와 저격용 조준경, 생화학 무기의 생산은 불가능했다. 시안사변으로 항일전쟁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양국의 합작에 금이 갔다. 1940년 일본·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독일이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의 괴뢰정부를 승인하자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연합국에 가입한 중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위대한 중화 민족과 게르만 민족이 친구에서 적으로 변한 것이 유감이다. 시안사변만 발생하지 않았다면 세계지도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시안사변은 장막 속에서 벌어진 한편의 유희였다. 시베이(西北) 군벌 양후청(楊虎城·양호성)과 재벌 쑹즈원(宋子文·송자문), 중공의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을 비롯해 국공 양당의 특무대장 다이리(戴笠·대립)와 리커농(李克農·이극농)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명연기를 펼쳤지만 조연에 불과했다.

주역이 장쉐량과 장제스·쑹메이링 부부이다 보니, 수십 년간 온갖 풍문이 나돌았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풀어준 게 아니다. 쑹메이링을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다 보니 장제스는 저절로 풀려났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이 남편을 인질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시안 공항에 내렸을 때 함박웃음 짓는 사진이 남아 있다. 사지에 빠진 남편을 걱정하는 여자의 모습이 아니다. 마중 나온 장쉐량을 바라보는 모습이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반가워하기는 장쉐량도 마찬가지였다. 원래 연인 사이였다.”

1992년 1월, 54년 만에 자유를 획득한 장쉐량은 일본 여류 작가의 방문을 받았다. 청년 시절 얘기를 하던 중 의외의 말들을 쏟아냈다. “나의 여성편력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열네 살 때 친척 여자애가 나를 유혹했다. 어찌나 재미가 있던지 무릉도원에서 노는 것 같았다.” 스쳐 지나간 여인들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별난 여인들도 많았지만, 그들 덕에 여자가 못되게 굴기 시작하면 남자보다 더 고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장쉐량이 만난 여인들은 총명하고 좋은 교육을 받은 미인들이었다. 한결같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장쉐량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쳤다. 여자 때문에 망신당한 적이 없고, 여인들의 애정과 지혜로 인해 생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기까지는 민국 4공자 중 으뜸이었던 장쉐량의 인격이나 재능, 용모와 지위도 한몫을 했다.

화교 학자에게도 장쉐량은 십여 명의 여인들에 관한 구술을 남겼다. “한평생 유감은 없다. 한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자를 따라다닌 적은 거의 없지만 한두 명만은 예외였다.” 누구라고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홍콩학자 한 사람이 쑹메이링과의 관계를 대놓고 물었다. 장쉐량은 “쑹메이링은 나의 지기(知己)였다. 청년 시절 정기적으로 만났던 여인이 열두 명 정도 있었다”며 말을 돌렸다. 가장 좋아했던 여인이 누구냐며 부인의 이름을 거론하자 머리를 흔들었다. “그 사람은 내게 가장 잘해준 사람이지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다. 가장 좋아했던 여인은 지금 뉴욕에 있다.”

 

  중국계 언론들이 발칵 뒤집혔다. 당시 전 중국은행 총재 페이주이(貝祖貽·패조이)의 부인 장스윈(蔣士雲·장사운)과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이 뉴욕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분명했다. 2001년 가을, 장쉐량이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일기와 서신들이 공개되면서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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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월, 장제스가 하야(下野)하자 국민당 원로들이 장쉐량의 석방을 요구했다. 당총재직을 유지하며 정보기관을 장악하고 있던 장제스는 장쉐량을 극비리에 타이완으로 이송했다. 폐허가 된 가오슝의 옛 일본군 포병기지에 연금돼 있던 장쉐량. [사진 김명호]

인간은 지난 일들을 가공할 줄 안다. 없던 일들을 만들어내고, 엄연한 사실을 뭐가 뭔지 모르게 둔갑시키는 묘한 재주가 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다.

사실을 밝혀낼 줄도 안다. 다만 장쉐량(張學良·장학량)과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 장쉐량과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는 예외였다. 당사자들이 일기와 서신, 구술등을 남겼지만, 궁금증을 풀어주기에는 부족했다. 세월이 흐르자 공산당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밝혀졌다. 그래도 먹는 것과 남녀관계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민족이다 보니 “도대체 쑹메이링과는 어떤 사이였느냐”는 문제만큼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남들은 알 필요도 없는 일”이고, 결정적인 증거도 남기지 않았지만, 추측이 가능한 흔적마저 지워버리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장쉐량의 연금생활은 1937년 1월 1일부터 시작됐다. 첫번째 연금지는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고향인 시커우(溪口)의 뒷산이었다. 쑹메이링은 장쉐량의 연금을 가볍게 생각했다. 장제스가 “저놈이 공산당과 내통하고, 나를 감금해 협박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죽는 날까지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할 때도 흘려 들었다.

하루는 장제스가 싱글벙글했다. “장쉐량이 위장병에 걸렸다. 증세가 심해 죽을지도 모른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한숨을 내쉰 쑹메이링은 상하이의 소문난 명의를 장쉐량의 연금지로 파견했다. 며칠 후 인편에 편지도 보냈다. “귀한 몸에 몹쓸 병균이 침투했다니 염려된다. 조만간 위원장과 함께 시커우에 가겠다. 봄바람 맞으며 자연을 즐기자.”

타이완 생활에 익숙해진 쑹메이링과 장제스. 1950년대 중반. 장소 미상.

시커우에 온 쑹메이링은 “장쉐량이 뒷산에 있다. 불러서 밥 한 끼 하며 얘기라도 나누라”며 장제스를 졸랐다. 어쩌다 보니 원수지간이 됐지만 변덕이 심한 성격들이라 서로 마주하면 풀릴 것도 같았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배석했던 경호원 중 한 사람이 구술을 남겼다.

“위원장과 장쉐량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반가워했다. 서로 음식을 권하며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최고 지도자와 죄수의 만남이라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했다. 부인이 아니었다면 성사될 수 없는 자리였다. 헤어질 무렵 위원장이 세상 일은 잊고 독서에 전념하라며 장쉐량의 등을 두드리자 부인의 안색이 변했다.”

쑹메이링의 기대는 수포로 돌아갔다. 장제스는 쑹메이링이 끼고 돌건 말건 장쉐량의 연금을 풀어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쑹메이링도 만만치 않았다. 장제스가 그러건 말건 장쉐량과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더 굉장했다. 쑹메이링이 장쉐량과 편지를 주고받건 말건,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줘 본 적이 없는 쑹메이링이 몇 날 며칠 잠도 안 자며 그린 그림을 장쉐량에 보내건 말건, 장쉐량이 보낸 소동파(蘇東坡)의 필적 진본을 가는 곳마다 끼고 다니건 말건 개의치 않았다.

시안사변 22년 후인 1958년 11월 23일,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장쉐량의 만남을 주선했다. 구전되는 얘기가 있다.

“노인이 된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한동안 마주보며 눈시울만 붉혔다. 쑹메이링이 자리를 뜬 후에도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장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느 시대건 정당의 합작은 불가능하다. 20여년 전 시안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당과 국가에 손실이 컸다며 한숨을 내쉬자 장쉐량도 고개를 떨궜다. 장제스는 독서에 더 매진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문에 귀를 대고 얘기를 엿듣던 쑹메이링도 훌쩍거렸다.”

장제스는 죽는 날까지 장쉐량의 연금을 풀어주지 않았다. 1975년 봄, 장제스가 세상을 떠났다. 쑹메이링은 장제스 집안과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뉴욕에 거주하며 타이완 땅을 밟지 않았다. 장징궈(蔣經國·장경국)마저 죽자 장쉐량의 연금을 풀어주기 위해 잠시 타이완을 찾았다.

2001년 10월 14일, 장쉐량이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뉴욕의 쑹메이링 저택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철수할 기미가 안 보이자 관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질문이 쏟아졌다. “장쉐량 장군의 사망을 부인이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대답은 간단했다. “부인은 뉴욕타임스를 거르는 법이 없다. 장군의 사망 소식을 보고 애통해 했다. 거동이 불편해 영결식 참석은 불가능하다. 타이페이에 있는 구전푸(辜振甫· 고진보, 해협교류기금회 타이완 측 대표. 타이완 4대 가문의 한 사람)에게 대신 참석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 쑹메이링은 104세였다. 2년 후, 쑹메이링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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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의 처남 쑹즈원(宋子文. 왼쪽 두 번째)은 장쉐량의 지기(知己)였다. 장쉐량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쑹즈원의 도움을 받았다. 결국은 장쉐량 문제로 장제스와 결별했다. 1943년, 퀘백(Quebec)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캐나다에 도착한 쑹즈원. 오른쪽 두 번째는 부인 장웨이(張樂怡). [사진 김명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일본군에게 아버지와 아들을 잃었다. 일본이라면 철전지 원수였다. 자다가도 일본 소리만 들으면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바라지 않았다. 장쉐량의 불 같은 성격도 잘 알았다. 일본군이 동북 3성을 침공할 경우 장쉐량의 대응을 우려했다. 1931년 8월 16일, 장쉐량에게 간단한 비밀 전문을 보냈다. “앞으로 일본 군대가 어떤 도발을 하더라도 절대 응수하지 마라. 만에 하나, 일시적인 분노로 국가와 민족의 대계를 그르치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난징(南京)의 국민당 요원들도 비슷한 전문을 장쉐량에게 보냈다. 아들뻘인 장쉐량을 깍듯이 모시던 감찰원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도 장제스의 성화에 못 이겨 친필 서신을 보냈다. “중앙정부의 가장 큰 책무는 내란(공산당을 지칭)의 평정이다. 동북의 형제들은 이 점을 이해하기 바란다.” 장쉐량은 베이핑의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부인 위펑즈(于鳳至·우봉지)는 장제스가 보낸 전문을 깊숙한 곳에 숨겼다.

9월 18일, 일본군이 싸움을 걸어왔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명령에 순종했다. 동북을 일본 관동군에게 내주고 동북군을 만리장성 너머로 철수시켰다. 장제스는 “매국노”와 “무저항 장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장쉐량에게 외유를 권했다. “잠시 나가 있어라. 1년만 지나면 수그러든다”

장쉐량과 함께 유럽 순방길에 오른 위펑즈는 장제스가 보낸 전문부터 챙겼다. 런던에 도착하자 스탠다드차터드은행을 찾아가 귀금속과 함께 개인금고에 보관했다. 훗날 장쉐량이 연금에 처해지자 위펑즈는 이 전문을 쑹즈원에게 보여줬다. 장쉐량의 안위를 누구보다 걱정하던 쑹즈원은 동생 쑹메이링을 통해 “장쉐량을 죽이면 전문을 공개하겠다”며 장제스를 협박했다.

쑹메이링은 유럽에서 귀국한 장쉐량을 장제스에게 안내했다. 장쉐량은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환대를 받았다. 무솔리니는 배울 게 많은 사람이다. 무솔리니를 본받자. 한 개의 정당에 한 명의 영수가 우리 체질에 맞는다. 최고 통수권자인 위원장이 항일전쟁을 지휘하면 무조건 복종하겠다”며 시종실 주임자리를 원했다. 장제스는 거절했다 “공산당부터 섬멸시킨 후에 생각해보자.”

서북군 지휘관 양후청. 1936년 12월 12일 밤, 장쉐량과 함께 시안사변을 주도했다.

장제스는 장쉐량을 옌안에 웅크린 홍군 토벌 부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총사령관은 장제스였다. “시안(西安)으로 가라. 내 대신 홍군 섬멸작전을 지휘해라.” 시안과 옌안은 지척간이었다. 당시 시안 일대는 국민당 원로 양후청(楊虎成·양호성)이 지휘하는 서북군(西北軍)의 천하였다. 양후청은 동북군을 거느리고 온 장쉐량의 지휘를 거부하지 않았다.

위기에 몰린 공산당은 리커농(李克農·이극농. 중공의 대표적인 비밀공작 전문가, 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제네바 회담을 막후에서 지휘했다)에게 장쉐량에게 접근할 방법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1984년, 마오쩌둥이 리커농에게 보낸 전문이 공개됐다. “우리는 항일전쟁을 주장하는 장쉐량의 의견에 동의한다. 동북군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싶다. 장제스와 장쉐량을 떼어놔라. 내전을 중지하면, 홍군이 항일의 선봉대 역할을 하겠다. 매국노 토벌도 우리에게 맡기면 성실히 수행하겠다.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직접 장쉐량과 담판해라. 원칙을 양보하지 말고 교섭도 파열 시키지 마라.” 장쉐량과 1차 접촉에 성공한 리커농은 저우언라이와 장쉐량의 만남을 주선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은 귀가 얇고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호의적이다. 저우언라이를 만난 장쉐량은 중공측의 주장에 동의했다. 엄청난 제의를 했다. “동북군에 상주할 홍군 대표를 파견해라. 정보를 교환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함께 토의하자.” 장제스 옹호도 잊지 않았다. “장제스는 항일을 반대한 적이 없다. 항일전쟁에 나설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하자. 항일전쟁을 지휘할 사람은 장제스가 유일하다. 나는 장제스를 만날 기회가 많다. 볼 때마다 항일전쟁을 건의하겠다.” 저우언라이는 이견이 없었다. 장쉐량은 만족했다. 무기구입에 쓰라며 은(銀) 2만량과 미화 20만불을 건넸다. 헤어질 무렵 큰 상자를 저우언라이에게 내밀었다. “홍군에게 꼭 필요한 귀한 물건이다. 내 입당 지원서로 알고 잘 간직해라. ” 상자를 열어본 저우언라이와 리커농은 입이 벌어졌다. 최신 군사지도가 들어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주더·펑더화이와 함께 장쉐량의 입당 문제를 논의했다. 시안의 장쉐량에게 “장쉐량 동지”로 시작되는 편지를 보낸 후 코민테른측에 승인을 요청했다. 코민테른은 장쉐량의 입당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쉐량은 국민당의 2인자다. 장제스와 함께 중국 홍군 최대의 적이다. 우리 정서로는 이해가 불가능하다.” 마오쩌둥은 다시 장쉐량에게 편지를 보냈다. 서두만 “장쉐량 대인각하”로 시작 될 뿐, 내용은 먼저 보낸 것과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

장제스의 정보기관은 눈뜬 장님이 아니었다.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장 다이리(戴笠·대립)가 장쉐량이 비행기를 몰고 시안을 떠났던 사실을 장제스에게 보고했다. “공산당과 접촉한 것이 분명합니다. 체포를 건의합니다.”

그날 밤, 장제스는 쑹메이링의 침실을 찾았다. “장쉐량이 공산당과 손을 잡았다”며 쑹메이링의 눈치를 살폈다. 쑹메이링은 발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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