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1815년 영미전쟁

 

1812년 영미전쟁

 

미국에서도 점점 불만이 고조되었는데 직접적인 원인은 당시 미국 선원의 수준이 좋은 편에다 같은 영어를 썼기 때문에 때론 멀쩡한 미국인들조차 강제로 영국 해군에 징집당하는 황당한 경우도 일어난다는 것이었다.[6] 당연히 미국 정부는 분노했고 영국과의 관계는 다시 막장으로 치닫게 되었다.

 

...

 


그러나 양국은 정작 전쟁에 대한 준비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았다. 우선 영국은 대부분의 전력을 나폴레옹 전쟁으로 유럽에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신경쓰기 어려웠다. 게다가 정작 선전포고를 한 미국도 영국과 친하고 교류도 많이 하는 연방주의자들의 근거지인 북부가 전쟁에 반대했고, 민병대는 주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였다. 이 시기는 아직 미국 연방정부가 힘이 매우 약하고 미국인들 사이에서 '하나의 나라, 하나의 국민'이라는 소속감이 형성되기 전이었다.[7] 이런 미지근함이 어느 정도였냐면 국경 근처 민간인들은 서로 이웃사촌이라는 생각이 강하여[8] 전쟁이 시작되자 이곳 민간인들은 "우리 잘 지내는데 왜 그래"라고 반응할 정도였다. 나이아가라 근처 양군 지휘관들은 전쟁 직전까지 심심할 때 만나 마시고 카드 게임도 했다고 한다. 이런 점들 때문에 미국은 전쟁을 선언하고도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육군이 고작 7천명에 군함도 14척 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최악은 영국과 인디언에 대한 전쟁을 선동했던 정치가들이었는데 이들은 전쟁을 선동하면서 정작 상비군 확대나 전쟁 노력을 결집시킬 연방정부의 권한 강화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철저히 반대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전쟁 준비가 아닌 전쟁 선동 정치가들의 궤변과 허풍을 기반으로 시작된 영국령 북아메리카 침공은 그야말로 대참사로 끝나게 된다.

 

한편 미국의 선전포고 이후 영국은 아직 미국의 선전포고 소식을 듣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국 선박에 대한 강제적인 수색 명령의 수위를 낮추며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주영 미국 대사관은 이를 알고 있었음에도 중요성을 못 느껴 본국에 전달하지 않았고 결국 미국과 영국은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 

 

https://ko.wikipedia.org/wiki/%EC%9B%8C%EC%8B%B1%ED%84%B4_%EB%B0%A9%ED%99%94 

1814년 8월 24일, 블래던스버그 전투에서 미국군을 물리친 후에, 로버트 로스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워싱턴 시를 점령하고, 많은 공공 시설을 불태웠다. 백악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의 공공 시설물들이 대규모로 파괴되었다. 

 

 ...

 



반면 영국은 나폴레옹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자 병력을 아메리카로 돌릴 여유가 생겼고 나중에는 블래든스버그 전투에서 레드 코트들이 미 육군을 격파한 후 무방비 상태에 놓인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를 기습해 불태워 버렸다. 독립 이후 미국의 수도외국 군대에게 점령당했던 것은 이때가 유일하다. 미국은 백악관미국 국회의사당을 비롯한 여러 관청이 불타는 수모를 겪었다. 이때 매디슨 미국 대통령의 아내 돌리 매디슨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초상화와 기밀 서류를 안고 영국 육군이 백악관에 도달하기 직전에 급히 탈출했다.

영국군은 수도를 점령했으니 전쟁도 끝나겠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미국은 각 들이 거의 독립적인 국가 수준이었고 수도가 점령당해도 자기 고장만 안전하면 괜찮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패배감도 느끼지 않았고 워싱턴 D.C.를 수복하기 위한 마땅한 반격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영국군 내부에서는 길어지는 전쟁에 불만이 폭주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태라 전쟁이 점점 더 길어지자 그냥 없던 걸로 하자는 내용의 겐트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교통통신 사정상, 실제 전투는 조약 체결 뒤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전투가 루이지애나뉴올리언스 전투인데 루이지애나상륙하려 한 영국군을 상대로 미군이 맞선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앤드루 잭슨이 이끄는 미 육군은 단 62명(혹은 83명)의 사상자가 나온 반면 영국 육군은 무려 2,034명[9]의 사상자가 나왔다.[10] 이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물을 끼고 대포를 보호할 방벽 등을 쌓으며 수비적 위치에서 기다리는 미군에 비해 이를 넘을 장작단과 사다리 등을 제대로 챙기지 않고 공격한 영국군의 실책, 그리고 측면 포대 점령이 늦춰진 것이(=측면 포대들이 열심히 말뚝딜을 퍼부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과로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전쟁영웅으로 부상했고, 후일 대통령이 되는 기반을 닦았다. 

 

...

 

4.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이유[편집]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 군사대국이며 육군과 해군은 양과 질 그 모든 면에서 미군을 크게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니 전쟁을 해도 영국이 이기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결국 영국은 승리하지 못했는데, 이는 대내외적으로 영국이 전쟁을 수행할 여건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내적으로 영국은 앞서 말했다시피 나폴레옹 전쟁에서 소모된 막대한 인력과 전비로 인해 애초에 미국과 또 다시 전쟁을 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이와중에 기나긴 전쟁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친 대중병사들의 곪아가는 불만과 장교에 대한 프래깅 행위는 폭주하고 있었으니 영국 입장에선 외부의 적보다 내부 관리부터 신경써야 할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포섭해 미국과의 전쟁에 요긴하게 써먹으려고 했던 것도 애초에 이들의 숫자가 적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있어 전쟁을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수단은 되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도 매우 넓은 미국 동부 지역 일대를 육해군으로 평정하고 봉쇄하는 것은 총력전을 각오하지 않는 한 애초부터 무리였고 그동안 유럽에서의 정규전에 익숙했던 영국군이 미국식의 게릴라전에 익숙하지 못했던 것도 전쟁에 악영향을 끼쳤다.

컨스티튜션이 프리깃 답지 않은 거대한 함체에 고화력의 무장을 갖춰 단함전투에서 영국 프리깃을 압도한 것도 그렇거니와 전열보병 전투에 익숙했던 영국군 지휘관들이 미국에선 독립전쟁 시기 대륙군을 계승한 미군의 게릴라식 저격전술에 말려들어 가장 먼저 자기들이 저격을 맞고 죽는 바람에 지휘체계가 붕괴된 것도 큰 타격이었다. 당시에는 이런 지휘관 저격행위가 비신사적인 행위로 여겨졌다. 장교들은 귀족으로 분류되어서 몸값을 지불하거나 포로 교환용으로 생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실제로도 높은 생존율을 보였다. 그래서 장교가 전사한다면 일부러 작정하고 죽이고 쏘는 것이 아니라 보통 눈먼 총탄에 전사하는 경우였다. 유럽 내의 전쟁에서는 평민들도 귀족을 죽이기보다 생포하려고 들었는데 귀족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것이 아니라 귀족 포로는 공훈이고 돈이 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신분제가 남아있던 유럽에서나 통하던 이야기고 (명목상) 계급, 정확히 귀족계급이 없고 포로를 돌려보내고 돈계산을 받기보다 당장의 국가 멸망의 위기가 눈앞에 닥쳤던 미국에선 통하지 않는 이유였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독립전쟁 당시에서 영국군 장교를 저격해 죽이곤 했다. 지휘관을 죽여 지휘체계를 무너뜨리는 현대적 저격 개념은 훗날 남북전쟁에서도 계승되어 휘트워스 소총을 사용한 저격수라는 전문 보병 병과가 생겨났다.

 

 ...

 



미영전쟁은 현대에는 캐나다에서 주로 재조명되는 편이다. 물론 당시엔 영국의 식민지였지만 지금의 캐나다 내에서 싸움이 많이 벌어진 것도 있고 캐나다가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독립한 탓에 역사적으로 극적인 사건이 별로 없어 전쟁이 미국이나 영국보다 캐나다에서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 실제로 전쟁 초기에 본국이 나폴레옹을 상대하느라 유럽 대륙에 묶여 있던 기간에는 영국령 북아메리카가 거의 자력으로 막아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래저래 캐나다의 국뽕애국 버프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전쟁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캐나다 측에선 미국의 선제 공격을 받고도 결국 을 지켜냈으니 이를 본인들이 승리한 전쟁으로 여긴다. 특히 미국의 수도를 잠시 점령하고 유일하게 백악관을 불태워본 군대를 가진 나라라는 상징성 때문에 캐나다의 역사를 배우는 캐나다 학생들에게 국뽕 맛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핵심 컨텐츠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캐나다인들이 "우리 캐나다가 옛날에 미국으로 쳐들어가서 수도를 점령하고 백악관도 불태워봤음!" 이라고 자랑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은 캐나다인들이 이렇게 자랑을 하는 말을 하면 이에 질세라 "그건 캐나다 니네들한테 털린게 아니라 영국이랑 싸운거였거든??"이라고 응수하고 그러면 캐나다인은 다시 "아니, 그 때 그 양반들이 우리 조상님들이니까 캐나다인이지. 그럼 너네 미국 독립전쟁은 영국인이랑 영국인이 싸운거였음?"라고 반박하는 게 정해진 수순이다. 물론 캐나다에서도 토론토가 공격을 당하는 등 피해를 전혀 안 입었던건 아니다.

그런데 2010년대 후반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핑계로 캐나다산 철강에 고율 관세를 매기려 하면서 "옛날에 캐나다가 우리 백악관으로 쳐들어와서 불태워 버린 적도 있었으니 적국이지!" 라고 드립을 치자 캐나다에서는 "느그 미국은 우리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 시절에 있었던 전쟁을 왜 우리한테 뭐라고 하냐?"면서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유리할 땐 캐나다 역사, 불리할 땐 영국 역사(...)라고 외치는 셈이다. 

 

...

 



미디어에선 비중있게 취급하는 전쟁은 아니지만 의외로 정치사적으로는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선 이 전쟁으로 반영 감정과 미국인으로서의 애국심이 고취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친영주의자들이 다수였던 연방당은 반역자 정당이란 인식이 박혀 이후 중앙정계에서 몰락하고 와해되어 버린다. 민주공화당 매디슨먼로 대통령이 연이어 당선된 것은 이런 기조를 대변한다. 또 이 전쟁 이후 미국은 유럽 국가가 다시 아메리카 지역에 손을 뻗치게 되는 것을 경계하게 되었고 후일 먼로 독트린이 나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전쟁 이후에도 캐나다는 한동안 미국의 북부를 위협하는 존재로 받아들여져 국경 문제에서 충돌하기 일쑤였고 남북전쟁 이후 아일랜드계 미국 민병대가 캐나다를 공격한 페니언 침공[17]과 같은 충돌은 영국과의 협상으로 국경이 정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영국의 태도에 실망한 캐나다가 본국으로부터 정치, 외교적 독립을 추구하는 계기가 된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