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무려 14개국을 손 쉽게 꿀꺽할 수 있었던 이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프랑의 화폐가치가 떨어진 프랑스는 아프리카 식민지 14곳에 새로운 통화, 세파프랑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세파프랑의 세가지 장점 (1) 통화패깅, (2) 수출경쟁력 강화, (3) 지배력강화; 프랑스인 인사를 꼭두각시로 삼아 아직도 아프리카 구식민지들을 지배하는 프랑스 양키들; 14개국 중 유일하게 세파프랑에 저항했던 아프리카 기니

 


프랑스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무려 14개국을 손 쉽게 꿀꺽할 수 있었던 이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플레이션에 시달려 프랑의 화폐가치가 떨어진 프랑스는 아프리카 식민지 14곳에 새로운 통화, 세파프랑을 강요하기 시작한다; 세파프랑의 세가지 장점 (1) 통화패깅, (2) 수출경쟁력 강화, (3) 지배력강화; 프랑스인 인사를 꼭두각시로 삼아 아직도 아프리카 구식민지들을 지배하는 프랑스 양키들; 14개국 중 유일하게 세파프랑에 저항했던 아프리카 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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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66583

 

[올 어바웃 아프리카] 낙수효과 기대 불구 아프리카 경제 발전 미미

지난 1월7일, 불어권 아프리카의 단일 통화인 ‘세파프랑(CFA프랑)’에 반대하는 집회가 코트디부아르 수도인 아비장,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 말리의 수도 바마코, 부르키나파소 수도인 와가두구와 유럽의 브뤼셀, 파리, 런던 등지에서 열렸다. 그들은 세파프랑의 종식을 주장했다. 세파프랑은 아프리카 대륙 내 과거 프랑스령(領)이었던 대부분의 불어권 국가에서 통용되는 단일 통화다. 세파프랑 폐지론자들은 이 통화를 신식민주의의 상징인 동시에 프랑스 식민 지배의 자취로 여긴다. 그들은 이 통화를 사용하는 국가들이 프랑존(Zone Franc, 프랑화 자유교환국가)에서 탈퇴를 하는 것이 종속 관계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독립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프리카 지도자들도 국민들을 향해 세파프랑을 비판하거나 프랑존 탈퇴를 거론하기도 한다. 이러한 발언을 통해 간접적으로 프랑스를 비판해 자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함이다. 식민 지배를 받은 경험이 있는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고 있는 반감처럼 다수의 아프리카 사람들은 여전히 식민 종주국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발언을 통해 지도자들은 그 자신이 반제국주의자, 반식민주의자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준다. 일종의 포퓰리즘적 발언이다. 그들의 발언은 인권유린, 언론 탄압, 부정선거 등 반민주적인 행위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로부터 받은 비판과 제재에 대한 일종의 항의다. ‘주권’을 거론함으로써 외세의 비판을 피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에서 약 70여 년간 통용된 이 단일통화가 정치적 이슈로 꾸준히 등장하며, 왜 ‘신식민주의’ 혹은 ‘신제국주의’ 상징으로 불리는지 그리고 단일통화제도가 어떻게 도입됐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세네갈의 한 은행에서 은행원이 세파프랑(CFA 프랑) 화폐를 세고 있다. ⓒ 연합뉴스

프랑존과 단일 통화의 탄생 배경



세파프랑은 브레튼우즈 협정이 발효된 1945년 12월26일 프랑스에 의해 만들어졌다. 세파프랑은 현재 서아프리카 8개국(베냉,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말리, 니제르, 세네갈, 토고), 중앙아프리카 6개국(카메룬, 중앙아프리카공화국, 가봉, 적도기니, 차드)에서 통용된다. 프랑존에 소속된 코모로 제도는 세파프랑이 아닌 코모로 프랑을 사용한다.



‘프랑존’은 지역별로 3개로 구분된다.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 15개 국가 중 8개의 국가로 구성된 서아프리카 경제 및 통화 연합(UEMOA), 6개의 국가로 구성된 중앙아프리카 경제 및 통화 공동체(CEMAC), 그리고 개별적으로 세파프랑화를 사용하는 코모로 제도(諸島)다. 각 지역에서 통용되는 화폐는 서아프리카 중앙은행, 중앙아프리카 중앙은행 그리고 코모로 중앙은행에서 지역별 통화 발행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 은행은 프랑스 은행에 종속돼 있다.



프랑존은 탈식민화로 아프리카 국가들의 자치권이 인정되기 시작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만들어졌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아프리카 지역에서 프랑스의 지배력을 유지하기 원했고, 이를 위해 탄생한 계획이 바로 ‘프랑존’을 만드는 것이었다. 즉,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제 통합과 발전을 위함이 아닌 과거 프랑스령이었던 아프리카 국가에서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며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탄생한 것이다.



1954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대륙 내 국가들의 독립이 진행되는 동안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프랑존에서 탈피하는 자국의 통화 독립은 쟁취하지 못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국가들은 독립 이후인 1959부터 1962년 사이 프랑존에 관한 협약을 체결했다. △프랑스 재무성은 세파프랑과 코모로 프랑의 모든 외화와의 환전을 무한대로 보증 △프랑스 프랑(현재는 유로)과의 교환은 고정환 적용 △프랑존 내에서는 자본이동과 송금에 대한 자유를 보장 △단, 세파프랑을 사용하는 지역은 외환 거래의 50%, 코모로 프랑은 65%를 프랑스 중앙은행에 예치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혹은 유로화가 이들 지역의 통화에 대한 보증 역할을 담당하므로 이 지역 투자자들에게 아프리카 화폐에 대한 신뢰와 안정을 줄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후진 경제구조와 선진 통화제도



사실 단일통화 목적은 경제 통합의 대표적인 방법으로, 그 예로 유로존을 들 수 있다. 단일통화제도는 경제규모가 어느 정도 비슷한 선진국에서 채택되는 제도다. 유로화의 경우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차례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2년에 와서야 시행할 수 있었다. 프랑존 국가들은 유럽보다 수십 년 이상 앞서서 선진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후진적인 경제 구조를 갖고 있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선진적이라 할 수 있는 통화제도를 도입한 상충적 상황에서 과연 경제발전은 가능했을까.



2014년 국제통화기금(IMF)은 가장 부채가 많은 국가 35개를 발표했다. 코트디부아르를 제외한 나머지 14개 프랑존 국가들이 이에 속했다. 사실 세파프랑은 화폐가치가 프랑스에 의해 보증되기 때문에, 후진국의 화폐임에도 대외공신력을 확보할 수 있다. 14개국 국가들이 화폐로 통일돼 있어 경제규모가 적다는 단점을 극복해 경제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낮은 인플레이션을 유지하면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사하라 부근의 다른 국가에 비해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적도 있었다. 안정된 화폐제도가 경제발전에 유리하게 작용돼야 하지만, 세파프랑은 불어권 아프리카 경제 사정에 부합되지 않았다. 후진적 경제구조에 알맞지 않은 세파프랑은 자국 경제에 비해 화폐가치가 높게 평가돼 아프리카,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가격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단일통화제도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프랑존 국가들이 후진적 경제 상황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 단일통화 즉, 세파프랑은 아프리카 국가들의 저개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경제적 종속 관계



앞에서 언급했듯 세파프랑은 과거 프랑스 프랑을 기준으로 가치가 결정됐으나 2002년 이후 유럽연합의 단일통화인 유로화와의 고정 환율을 적용한다. 1세파프랑은 0.002유로, 즉 1유료는 655세파프랑이다. 화폐 가치는 프랑스에 의해 보증을 받는다. 두 통화간의 관계로 인해 낙수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나, 유럽의 경제 발전은 아프리카 경제 발전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과거 프랑스가 수출을 증대하고자 할 때 자국 화폐 프랑스 프랑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면 상대적으로 외화들은 평가절상됐다. 프랑스 화폐의 평가절하를 통해 발생하는 이점을 세파프랑의 경우 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아프리카 국가들의 주요 수출 품목들은 커피, 면화, 바나나 등 농산물이기 때문에 가격에 따라 수요가 증대되는 품목이 아니므로 수출 증대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입품 가격은 상승해 결과적으로 경상수지 적자 및 국가 부채의 증대를 가져온다. 2002년 이후, 세파프랑과 유로화의 종속 관계로 인해 프랑존 국가들의 경제는 자국 혹은 프랑존의 경제 상황보다 프랑스 경제 뿐 아니라 유로존의 상황에 의해 더욱 영향을 받고 있다.



자국 통화는 주권과도 관련이 있다. 자국 통화는 국가, 국기와 더불어 주권독립국가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주권국가는 자국 통화에 대해 외세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통화 정책을 결정해야 한다. 세파프랑은 통화 정책, 더 나아가 경제 정책의 자율권이 보장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세파프랑을 사용하는 국가가 아닌 프랑스만이 통제권을 갖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세파프랑의 존재는 불어권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적 독립을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미완성의 독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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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은행에 있는 많은 돈은 정확하게 아프리카를 착취하는 데서 오고,
프랑스는 아프리카 제국 없이는 세계적 지위를 잃게 될 것
- 자크 시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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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 공화국 초대 대통령
아메드 세쿠 투레


2.2.1. 프랑스의 보복[편집]
전술한 국민투표에서 프랑스령으로 남는 것을 선택한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1960년에 무더기로 독립하게 되지만, 이 투표에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독립하는 것을 선택한 유일한 나라였던 기니는 그 자긍심을 안고 새로운 프랑스 공동체에 대한 참여를 거부한 유일한 프랑스 식민지로 남게 되었으며, CFA 프랑 사용 역시 거부하며 고유 화폐 단위인 기니 프랑을 화폐로 쓰게 된다.

기니가 독립한 지 고작 며칠 후에 드골은 "이것(기니의 독립)은 단지 며칠만 지속된 다음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며 기니가 '식민지의 지속으로 우리와의 협력을 받아들인 다른 아프리카 민족에게 나쁜 선례가 되었다'고 주장하며 다른 프랑스어권 국가들에 '프랑스를 배척하면 너희도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 차원으로 기니에 대한 보복을 결정하고는 '프랑스가 기니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모조리 파괴하도록 했는데, 드골은 기니에 대한 예산 등의 원조를 중단한 것은 기본에 기니의 경제와 민정, 보건을 담당했던 공무원, 행정관, 판사, 교사, 의사, 기술자, 사업가 등 기니에 상주하던 프랑스인 4천여 명을 모조리 철수시키도록 지시했다.

기니에서 철수하는 프랑스인들은 기니인 공무원들의 업무를 방해하기 위해 정부 문서와 청사진, 매뉴얼 등의 기록들을 불태우거나 본토로 가져갔고, 기니의 프랑스 정착민들도 이에 따라 기니에서 철수하는 2개월 동안 사무실에 설치한 가구와 전화, 전구를 걷어가거나[6] 전화선, 수도의 상하수도 배관도 철거하거나 군 시설, 병원, 학교 등 식민지 시절에 만들어놓은 건물들을 보이는 즉즉 폭파, 방화하는 등 사회기반시설들을 파괴했다. 심지어는 이도 모자라 기니 사람들이 써야 할 서양식 약을 기니 사람들에게 단 한 알도 주지 않고 모조리 불태웠다는 극악무도한 이야기까지 전해진다.[7]

결국 프랑스의 만행으로 기니는 국가 재건에 필요한 많은 기반들을 잃었고, 프랑스의 자본이 모조리 빠져나가며 기니의 경제는 붕괴해버린다. 프랑스 본토에서도 이 철수를 '위자료 없는 이혼(un divorce sans pension alimentaire)'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으며, 이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다른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은 기니에 대한 프랑스의 치졸한 보복에 겁을 먹고는 오늘날에도 프랑스에 복속된 처지가 되었다.

심지어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기니 출신 군인들의 연금 지급을 전면 중단하고는 기니의 유엔 가입까지 막으려고 했고[8], 이걸로도 만족하지 못하며 1960년 초에 '대량의 위조지폐를 유통시켜 기니의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어 투레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기니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유도해 투레를 몰아내게 한다'는 취지의 '퍼실 작전(Operation Persil)'을 시행해 기니에 막대한 양의 고품질 위조지폐를 살포했는데, 이 작전은 전직 프랑스 비밀경호국 요원 모리스 로베르(Maurice Robert)가 회고록에서 '이 작전은 진정한 성공이었고 이미 나쁜 상태에 있던 기니 경제는 회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고 언급할 정도로 이미 프랑스의 공작으로 악화된 기니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프랑스는 이와 함께 '기니의 야당 인사들을 무장시키고 이들을 준군사 조직으로 조직시키고는 이들에게 내전을 일으키게 해 궁극적으로 투레 정권을 전복시켜야 한다'는 계획도 짰고, 이것도 모자라 아예 '기니에 불안정한 분위기를 조성하고는 이 틈을 타 기니를 침공해 투레를 전복시켜야 한다'며 세네갈과 코트디부아르와의 국경 인근에 캠프와 무기 보관소를 설치하고 현지 용병을 주둔시키기까지 했으나, 물자를 수송하던 비행기를 세네갈에서 압수당하는 바람에 들통나서 1960년 4월에 기니 정부가 이 작전을 공식적으로 불평하며 퍼실 작전의 실체가 폭로되었고, 결국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갓 독립한 국가였던 세네갈 정부도 프랑스 정부에 퍼실 작전에 대한 항의 서안을 보내고 프랑스 국내에서도 이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며 결국 프랑스 정부는 퍼실 작전을 포기했다.

드골의 후임 대통령이 될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총리는 1962년에 프랑 존을 떠나는 것을 고려하는 아프리카 식민지 출신 국들에게 "세쿠 투레의 경험이 펼쳐지도록 합시다.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기니 정치가 자살 행위이며 아프리카 전체의 이익에 반한다고 느끼기 시작했습니다."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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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나치 독일 괴뢰 정부 비시 프랑스 치하에 들어갔다. 비시 프랑스 치하의 지부티는 이탈리아군과 함께 동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지만 이탈리아는 1941년 모든 동아프리카 식민지를 영국군에 점령당하고 철수했으며 1942년 비시 프랑스령 지부티는 영국에 점령당한다. 1944년에는 영국이 지부티를 자유 프랑스에 반환했다. 종전 이후에도 지부티는 지리적인 이점으로 인해 프랑스가 마지막까지 독립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지역이었고 실제로 프랑스령 해외식민지들 중에서 마지막으로 독립했다. 1967년 6월 14일 프랑스령 아파르족·이사족 자치령(Territoire français des Afars et des Issas)[7]으로 또다시 개칭됐고 1977년 6월 27일 비로소 독립하게 됐지만 프랑스는 오늘날까지도 지부티에 계속 군대를 주둔시키며 홍해를 출입하는 국제 해운에 대해 통제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고 있다. 이런 탓에 이 나라의 정치, 군부의 권력층들은 프랑스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8]

지부티와 에리트레아는 영토 분쟁 중이다. 2008년 4월에 에리트레아가 침입했고 2008년 6월에 총격전이 일어나 서로 몇십 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지부티에 주둔 중인 프랑스가 물자 및 의료지원을 해줬지만 직접 개입은 하지 않았다. 그 뒤 국제사회의 중재로 2010년 6월에 에리트레아가 점령지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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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와 전쟁을 벌이는 에리트레아

 

3. 역사[편집]

에리트레아는 4세기에서 6세기 동안 번영한 고대 악숨 왕국의 주요 항구가 있던 지역이다. 950년경에 에리트레아는 초기 에티오피아 제국과 연합을 이룬 자치국이었다가 16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에 에리트레아의 통치권을 놓고서 에티오피아 제국, 오스만 제국, 티그라이 왕국, 이집트, 이탈리아 사이에 각축전이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1890년에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 당시 수도 아스마라 주민의 절반이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기지로 사용되었던 에리트레아는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 6개 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가, 1941년부터는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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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독립 전쟁

그러다가 에리트레아는 1952년경에 에티오피아 제국의 1개 주로 병합되었다. 1962년 11월 14일 에티오피아가 에리트레아를 합병하자 이슬람 중심의 에리트레아 해방전선(ELF)과 기독교도 중심의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 Eritrean People's Liberation Front) 등은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ELF의 조직원들이 1977∼1978년, 1985년에 대거 에리트레아 해방전선-인민해방군(ELF-PLF)이나 EPLF에 합류함으로써 ELF의 군사조직은 와해되었으며, 1980년대 후반에는 ELF-PLF도 EPLF로 거의 흡수되었다. 한편 이들 분리주의 저항 단체들은 수단 중국, 소말리아, 시리아, 사우디아라비아, 튀니지, 리비아 등 각국의 군사,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에티오피아군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Eritrean War of ...
1980년 AKM 소총과 56식 소총을 들고 에티오피아군과 교전하는 에리트레아 인민해방전선(EPLF) 게릴라 병사들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폐위와 1991년 멩기스투 정권이 붕괴되고, 에티오피아 반란 연합세력이 아디스아바바를 점령하는 등의 혼란을 틈타 EPLF는 1991년 5월 수도 아스마라를 탈환한 뒤 에리트레아 독립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1993년 5월 24일 독립을 선포하였다. 4년 이내에 새 헌법을 제정해야 하는 국회는 1993년 6월 초대 대통령으로 EPLF의 사무총장인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를 선출했다. EPLF는 1994년 유일 합법정당인 민주정의인민전선(PFDJ, People's Front for Democracy and Justice)으로 개편되었다.

에리트레아가 독립하면서 에티오피아는 내륙국이 되었고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는 항구 사용을 두고 갈등을 겪었다. 결국 항구 이용 문제와 바드메 소유권을 두고 에티오피아와 1998년~2000년까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지도 하에 본격적인 에티오피아-에리트리아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에서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를 상대로 선전했지만 결국 스케일에서 밀려 전쟁 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수준에서 전쟁을 끝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에리트레아와 완전히 적대관계가 된 에티오피아는 2000년대에서 2010년대 초중반까지 바다를 접한 다른 아프리카 이웃국가들인 지부티 케냐로부터 항구를 빌려 쓰고 있었다가 2018년 평화조약을 맺고 바드메를 돌려주는 대신 마사와, 아사브 등 에리트레아 항구에 대한 사용권을 에리트레아 정부로부터 다시 허용 받았으며,[8] 양국의 관계는 많이 호전되었다. 다만 에티오피아와 전쟁을 치른 역사적 배경 때문인지 에리트레아 국민들의 에티오피아에 대한 감정은 한국과 일본,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체코, 폴란드와 독일처럼 국민감정 상 좋지 않은 편이다.

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이스라엘 미국,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에게 밀리면서 안 그래도 열세였던 공군 전투기 다수를 상실하면서 패색이 짙었으나, 반대로 우크라이나 리비아의 지지 및 에티오피아 내부 여론의 반발을 잘 활용하여[9] 외교적으로 영토를 잃지 않고 유엔의 중재로 2000년 12월 종전하였다. 이후 유엔 평화유지군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국경지대에 폭 25km의 임시안전지대(TSZ)를 설치하고 양측을 감시하고 있다.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이 벌어진 이후 2003년 3월 국경위원회(EEBC, Eritrea-Ethiopia Boundary Commission)가 양국간 국경의 소도시인 바드메(Badme)를 에리트레아 영토라고 결정하자, 에티오피아는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양국간 국경 획정 작업이 중단되었으며, 양국 간의 대화는 끝나고 말았다. 2005년 10월에도 국경에 분쟁이 해결되지 않고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에티오피아는 TSZ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공중 정찰을 금지시켰고 또다시 국경지역에는 군사적 긴장 상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군사적 긴장 상태로 인해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분쟁으로 재정 수입은 감소하고 군사비 지출이 급증하여 오랜시간 동안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으며, 10만 명에 달하는 수단 공화국 국경지대의 난민과 7만 5천 명의 에티오피아 추방 난민은 에리트레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2004년 4월에 에리트레아 내에서의 인권 상황이 악화되었고, 다당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프리카 성장촉진법(AGOA, Africa Growth Opportunity Act) 수혜 대상국에서 에리트레아를 제외시켰고 현재까지도 에리트레아인들은 하루하루를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대통령은 아프리카 각국의 분쟁에까지 개입해 테러단체와 반군 세력들까지 지원을 하는데, 실제로 소말리아에서 알 샤바브 연계 테러를 지원한 혐의로 UN에서 에리트레아에 대해 제재를 가하고 있다.

2018년 9월 30일에 에리트레아는 유엔 제재를 해제해달라고 요청했다. #

2023년 2월 10일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에리트레아 대통령은 티그라이 전쟁 당시에 에리트레아군이 약탈, 강간, 학살 등의 인권 침해를 저지르거나 본인이 티그라이 전쟁에 개입했다는 보도를 전부 '에티오피아의 평화 과정을 방해하려는 허위 정보 캠페인'이라고 일축했다. #

4. 인권 탄압[편집]

행복한 독립 축하 행사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에리트레아는 세계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비밀스럽고 접근하기 어려운 국가 중 하나입니다.

국제앰네스티 에리트레아 조사관 클레어 베스턴(Claire Beston)이 2013년 5월 9일에 남긴 말 #[10]
개인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살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에리트레아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기꺼이 죽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역사를 통틀어 전체주의 정권처럼 그들의 미래를 훔치고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는 어둡고 억압적인 정권 아래서 계속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기를 택할 것입니다.

메브레(Mebre)라는 가명을 쓴 에리트레아인이 2017년 5월에 남긴 말 [11] #

에리트레아는 1993년 에티오피아에서 독립한 이후 인민해방전선 의장으로서 고국의 독립을 이끌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가 에리트레아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이래 30년이 지난 2023년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는데, 대통령이자 여당 대표, 국회의장직을 겸직해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한을 가지게 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12]는 자신이 해방시킨 동포들에게 북한에 준하는 수준의 잔혹한 학정을 저지르고 있다. # 독립 이후 현재까지 지속되는 에티오피아와의 분쟁으로 수만 명의 에리트레아인이 사망했고,[13] '자의적인 체포와 구금'은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로 인해 에리트레아는 북한, 시리아, 투르크메니스탄[14], 적도 기니와 함께 현존하는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로 여겨지며, 이를 넘어 엔베르 호자 치하의 알바니아와 함께 북한의 수준에 가장 근접한 독재국가로까지 꼽힐 정도이다. 오죽하면 에리트레아의 가장 널리 알려진 별명이 무려 아프리카의 북한.

즉, 에리트레아는 철권 억압 통치를 통해 에리트레아 국내의 내전 발발을 억누르는데 성공했을지 몰라도, 억압적인 통치로 그 이상 발전을 할 수가 없는 문제를 안고 있는데, 특히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민주주의를 실현할 생각도 없는 상황이며 알자지라 기자에게 "에리트레아에는 민주주의라 불리는 상품이 없다"라는 인터뷰를 했고[15] 심지어 자신은 언론 탄압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에리트레아는 세계 최악의 언론 탄압국으로 꼽힌다. 에리트레아는 2001년 9월 17일에 에티오피아와의 국경 전쟁을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며 PFDJ에 공개 서한을 쓴 'G-15'[16] 15명 중 11명[17], 언론인 10명, 수백 명의 민간인들(여성 포함)을 재판은 커녕 아무런 혐의도 적용하지 않고 구금한 후 바로 2일 뒤인 2001년 9월 19일에 '국가의 통합과 이익'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모든 민영 언론사를 폐쇄하고 다수의 언론인을 체포하며 정부 정책과 대통령을 찬양하며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국영 언론만 남겨놨다. 2022년 기준으로도 16명의 언론인이 수감 중이라고 하고, 이에 수많은 언론인들이 외국으로 탈출했다.

현재 에리트레아에는 외국의 특파원들은 단 하나도 없으며,[18] 그 대신 특파원들은 인근 국가인 에티오피아로 파견하여 취재하고 있다고 한다. 모든 기사는 에리트레아의 유일한 국영 언론사이자 군부가 실권을 가진 Denden Media가 보도하는데, 내용은 주로 대통령의 행적을 찬양하는 것으로 구성되는데, 만약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려면 투옥과 고문을 각오해야 하며, 미디어 간행물을 공개하기 전에는 미리 정부에 제출해 승인을 받아야 한다. 당국으로부터 면허를 받지 않은 언론인은 활동할 수 없으며, 허락되지 않은 외국 간행물을 인쇄, 유포하면 처벌을 받게 된다. 그나마 2013년에 반체제 단체가 아스마라에서 지하 신문 인 Echoes of Forto를 만들어 배포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에리트레아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언론자유지수 최하위권을 항상 놓치지 않는 나라이기도 하다. 언론자유지수는 100점 만점으로 평가하며 점수가 낮을수록 언론 통제가 극심하다는 의미인데, 2022년 기준으로 13.92점을 받으며 최하점을 기록한 북한을 간신히 제치고 19.62점(180개국 중 179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에리트레아가 언론자유지수 최하위를 기록한 횟수는 2023년 기준으로 총 10회로, 북한과 완전히 똑같다.[19] 북한은 외지인들이 '북한은 지하에서도 반체제 인사가 없을 것이다'라고 착각하게 만들 정도로 반체제 인사가 있다는 소식을, 심지어 체포 소식까지 전혀 보도하지 않을 정도로 언론 통제가 극심한 나라인데 그런 북한과 언론 통제가 동급으로 간주될 정도면 에리트레아의 언론 통제가 얼마나 극악한지 알 수 있다. 다만 2023년에는 27.86점을 기록하여 180개국 중 174위로 순위가 약간 오르긴 했다.[20] 이 때문에 에리트레아는 "아프리카 최대의 기자 감옥"이라고 불린다.

거기에 2022년 기준으로도 에리트레아의 인터넷 사용자 수는 25만 명 미만이고, 인터넷 사용률은 고작 6.8%를 기록하면서 전세계 230여개국 중 뒤에서 3위를 기록했다.[21] 참고자료 그렇게 국민들이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 힘든데도 에리트레아는 반정부 의사 표현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SNS 접속을 차단하고 인터넷 카페를 폐쇄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도 없으며, 기독교를 탄압하는 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들 중에서도 상황이 매우 심각한 것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증언에 의하면 한 여자가 복음설파를 했다고 수감자들과 함께 마이 세르와 군사 기지의 화물용 컨테이너에 구금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컨테이너에는 화장실이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 낮에는 찌도록 덥고 밤에는 얼어붙을만큼 춥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곳에서는 종교를 포기할 것을 강요하는 구타행위가 이뤄졌다고 한다. 기사

에리트레아는 가톨릭·루터회·에리트레아 정교회, 이슬람교 수니파만 믿는 것을 허용하며, 이외의 다른 기독교 교파나 교단[22]을 불법화했다. 같은 기독교이며 종파만 다른 것임에도 무조건 불법이며 에리트레아 정부는 한 남성이 허용되지 않은 종파에 전도했다면서 구금한 후 고문하고 굶겼을 뿐 아니라, 짐승처럼 묶어 쓰레기를 먹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피해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나를 고문하기 위해 밖으로 끌고나가 벌거벗긴 채, 낮에는 뜨거운 태양 아래 두었고 밤에는 추위에 떨게 내버려뒀다'고 한다. 출처 물론 에리트레아의 국영 언론은 이들을 'CIA로부터 돈을 받고 활동한다'고 모함하고 있다. 2023년 5월에는 기독교인 청년 103명이 SNS에 올릴 찬양과 예배 영상을 녹화하기 위해 아스마라에 모였다가 모두 체포되어 마이 세르와 교도소에 구금되어 수십 년의 징역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한 상황에 처햏으며, 동시기 기준으로 에리트레아에서 구금된 기독교인은 500명[23]에 달한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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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고문 피해자들이 UN 인권위 조사관들에게 그려보인 고문 장면 1.
(출처: UN 인권위 에리트레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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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트레아 고문 피해자들이 UN 인권위 조사관들에게 그려보인 고문 장면 2.
(출처: UN 인권위 에리트레아 보고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는 국가가 허용하지 않은 종파를 믿는 기독교인 다수를 체포하고는 사막에 위치한 선박용 철제 컨테이너 감옥에 가두어 비인간적인 대우를 일삼고 있고, 심지어는 최소한 1만 명에서 2만 명에 달하는 정치범이 재판도 없이 약 200~300여 개에 달하는 구금시설에 무기한 구금되어 있다고 전해지는데,[24] 이 정치범들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독재에 반대하는 서한에 서명하거나 그의 사임을 촉구했던 관리들이나 장관들, 언론인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사막 지역에 밀집된 수용소에 감방된 정치범들은 감방도 화장실도 없어 불결한 것은 물론이고 너무 많은 사람이 들어차 움직이기는 커녕 잠도 옆으로만 잘 수 밖에 없으며, 빛이 전혀 들어오지 않는 지하 감방에 수감된 죄수들도 상당하다. 게다가 속옷만 입은 채 구금된 죄수들은 화장실도 하루에 한두번만 이용할 수 있고, 이런 상황 속에서 감옥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다. 식사는 하루에 빵 2개가 전부에 물을 마시는 것조차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다. 감옥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소와 재판 없이 갑자기 체포, 구금된 사람들인데, 이렇게 강제 구금된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실종'된 것으로 처리된다.

위아(Wi'a) 군사 캠프 지하 감방에 수감되었던 한 전직자는 국제앰네스티에 "(지하 감방에) 누울 수는 없었습니다. 누워 있으면 피부가 바닥에 달라붙기 때문에 서 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바닥이 엄청 뜨겁습니다."라고 설명했으며, 바렌투 구금센터에 수감된 또 다른 사람은 "방은 가로 2.5m, 세로 3m 정도였고 우리는 33명이었다. 매우 덥다. 문은 닫혀 있고 천장은 약 2m로 낮다"고 말했다. 온도는 약 50도 정도였습니다. 17세 정도의 소년이 곧 죽을 뻔했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문을 세게 두드렸습니다. 그들(간수들은) 우리가 멈추지 않으면 우리 모두를 죽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고 설명했다. #

또한 고문도 굉장히 잔혹하여 유엔 인권보고서, 앰네스티 등이 에리트레아 난민들의 증언들을 확인한 바에 따르면 몽둥이, 발길질, 채찍질, 쇠창살 등으로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것은 기본에 더러운 물에 머리를 담그거나 고통스러운 자세로 온몸을 묶기도 하고, 손과 발을 등 뒤로 묶고 섭씨 50도 무더위에 맨몸으로 노출시키거나[25] 철로 된 컨테이너 상자에 가두기도 하며, 이런 더위 속에서 2km 거리로 떨어진 수용소를 맨발로 걸어야 하는 죄수도 있고, 몸에 우유와 설탕을 발라 벌레의 공격을 받도록 하는 형벌도 있는 데다가 여죄수들은 성고문까지 당한다고 한다.[26] # 에리트레아는 법으로 고문을 금지한 상태라고 한다.

결사의 자유도 미약하여 코로나 19 이전에는 정부 산하기관이나 정부로부터 활동 승인을 받은 4개 종교 단체의 종교 행사를 제외한 대규모 집회는 허락을 받아야 가능했으며, 심지어 에리트레아의 국민들은 거주지 이전은 물론이고, 해외 여행도 아닌 국내 여행을 하려면 서면 허가와 허가증을 필요로 하며, 허가증 없이 나라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고국을 탈출하려는 사람'으로 몰려 투옥과 고문을 당하고 있다.[27] 참고로 적어도 2009년까지는 에리트레아에서도 국내 여행이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이지만[28], 2010년의 에리트레아의 실태를 다룬 2011년 미국 국무부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부터 에리트레아에서의 국내 여행이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29] 그리고 에리트레아의 국내 여행 제한은 2023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병역 나이인 50세가 지날 때까지는 해외여행이 전혀 허가되지 않으며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사람도 50세 이상이거나 고위층의 가족 정도에만 국한되어 있고, 출국비자 없이 해외여행을 하려는 사람은 징역형을 선고받는 데다가 다른 나라에서 송환된 에리트리아 난민과 망명 신청자들은 일반인이면 3~5년, 군인이면 평생 동안 가혹한 환경 속에서 구금된다. 게다가 이렇게 수감된 사람들의 가족들은 대부분 수감된 가족의 행방을 알지 못하며, 이들은 체포된 후 가족들이 생사 여부를 알려달라고 해도 보안군으로부터 "당신은 요청할 권리가 없다"는 말을 듣는 등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30]

여기에 2017년 5월에 익명의 에리트레아인이 증언한 바에 따르면 에리트레아 사람들의 삶은 '컴퓨터처럼' 프로그래밍되고 구성된다고 하는데, 에리트레아에서 태어난 모든 시민의 삶은 그들이 태어난 시점에서 결정된다고 한다. 에리트레아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은 고등학교 때까지는 어느 정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으나 고등학교를 졸업한 모든 에리트레아 사람들은 성별 관계없이 1년 동안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하고, 이후 대학 입학 시험에 합격하면 '상대적 자유'를 몇 년 더 연장할 수 있으나 대학교에 들어가지 못하면 후술할 '의무병역'으로 '인간에서 로봇으로 변신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거기에 대학교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의무병역'을 무기한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후술하겠지만, 그 '의무병역'도 조선인민군에 준하는 수준으로 열악한 환경이라고 한다.

게다가 에리트레아가 외국인의 입국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외국 언론과 인권단체의 접근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등 지독한 쇄국 정책을 실시하여 북한 이상으로 내부 사정이 외부에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31] 에리트레아가 어느 정도로 폐쇄적이냐고 하면 세계은행도 2012년 이후 에리트레아의 GDP를 집계하는 것을 아예 포기했을 정도였다.[32] 2006년 9월 초에 에리트리아 정부가 국경 지역에서 UN 평화 유지 임무를 감시하는 활동을 제한하고 UN 직원 5명을 추방한한 뒤 UN 자원봉사자를 체포한 것에 대해 UN이 항의한 일도 있던 데다가 # 에리트레아 정부는 모든 외교관, 인도주의 단체, UN 직원 및 외국인 관광객은 아스마라를 떠나려면 최소 10일 안에 정부의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할 수 있게 하고, 심지어는 연료 공급을 차단하여 NGO가 수도 외부로 떠나는 것을 막기까지 한다. 물론 에리트레아에 한국 교민은 커녕 한국인 체류자조차 2021년 기준으로도 단 한 명도 없다.[33]

이런 상황이기에 에리트레아의 세계의 자유 지수 총점은 2023년 기준으로 3점[34]을 기록하여 북한과 동점이다.[35] 다만 독립 직후 기준으로는 그렇게까지 심각한 독재 국가는 아니었던 모양인데, 1993~1994년에는 정치적 권리(이하 PR) 6등급, 시민적 자유(이하 CL) 5등급의 '자유롭지 않은' 국가로 분류되었고, 1995~1998년까지는 PR 6등급, CL 4등급으로 '부분적으로 자유로운' 국가로 분류되었지만 1999년~2000년에 PR 7등급, CL 5등급으로 '자유롭지 않은' 국가로 변경되고는 2001~2008년에는 PR 7등급, CL 6등급을 기록하더니 2009년부터는 변함없이 PR 7등급, CL 7등급을 기록하고 있다.

[ 연도별 에리트레아의 세계의 자유 지수 ]









여기까지 보면 북한과 정말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독재는 진짜로 북한을 따라한 것이라고 한다. 현숙 폴리 한국 순교자의소리(VOM) 대표의 말에 따르면 에리트레아의 독재 체제는 '에리트레아 대통령이 정치 지도자를 숭배하는 북한 체제를 좋아하고 그것을 자국에서 실행하고 싶어하는 것'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출처 다만 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없다는 것과[36] 정치범의 가족에까지 법적인 연좌제를 적용해 수용소에 가두지 않는 것[37], 모든 어린이들부터 시작하여[38] 노인이 되기까지 강제로 '근로단체'에 가입시켜 단체생활과 비교육적인 세뇌교육을 강요하지는 않는다는 것, 수도에 특별히 선별된 인물만이 살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 보여주기식이 아닌[39] 실질적으로 국민들이 믿을 수 있는 종교가 있기는 하다는 것만큼은 북한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다.[40]

에리트레아 정부도 해외에서 자국에서의 학정이 비판받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한 모양인지 북한과 비슷하게 자국에서의 인권 탄압 폭로들을 전부 '망명자들의 날조'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15년 6월 9일에 UN 조사위원회가 에리트레아에서의 인권 탄압에 대해 다룬 보고서를 작성하자 에리트레아 정부는 교육부와 외무부 명의로 성명을 발표해 에리트레아에서의 인권 탄압 사례들이 '평화롭고, 안정되고, 조화롭고, 인간 개발에 초점을 맞춘' 나라인 에리트레아에 대한 '악랄한 비방 및 무고' '완전히 근거가 없고 가치가 없는 거친 주장' '극단적인 비난과 외설적인 과장법' '인권을 훼손하는 냉소적인 정치적 비극'이라고 적반하장격으로 주장한 것도 모자라 '에리트레아에 대해 긍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려는 이러한 비난과 비열한 시도는 에리트레아와의 점점 더 생산적인 국제 관계를 방해하기 위해 시간과 경쟁하려는 투명한 시도', 심지어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 뒤에 숨어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 구실을 찾는 데 사용할 세력이 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까지도 했다. # 원문

다만 이런 상황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에리트레아는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이라고 한다.[41] 에리트레아에서는 1989년에 마지막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에리트레아가 1993년에 독립되었으니 사실상 독립 이후로 사형 집행을 한 적이 전혀 없던 셈이며, 형식적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도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물론 수용소에서 고문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사망한 사람은 상당히 많을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2008년 기준으로 에리트레아의 비밀 수용소 중 한 곳인 에이라에이로(Eiraeiro) 형무소에 2001년 이래로 수감된 35명 중 무려 15명이 사망했다고 하며,[42] 사법 절차가 생략된 공권력의 초법적 살인도 만연한 상황이라 사실상의 사형 폐지국인 게 전혀 의미가 없다.

물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학정에 대한 에리트레아인들의 저항 운동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라 유럽에 정착한 에리트레아인들은 탈북자들과 마찬가지로 단파 라디오나 인터넷으로 모국에 반독재 방송을 보내거나 서방에 에리트레아의 실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에리트레아 국내에는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독재정권에 대항해 사막과 오지 산간 지대에서 활동하는 소규모의 반정부 게릴라 세력들도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2013년에는 일부 군인이 쿠데타를 발생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정확히는 2013년 1월 21일에 아스마라에서 100~200명의 군인들이 정보부를 습격한 후 국영 TV 방송국 EriTV의 본부를 점거하며 1997년 헌법을 시행하고 정치범과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는데, 메시지가 송출되는 도중에 독립전쟁의 영웅이던 살레 오스만 대령이 이끄는, 대통령궁과 공항을 수비하던 군인들이 쿠데타를 진압했다고 한다. 다만 영국 주재 에리트리아 대사인 테스파-마이클 게라투(Tesfa-Michael Gerahtu)는 쿠데타 시도가 조작된 것이며 어떠한 '불안'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영어 위키피디아

또한 2017년에는 아스마라에서 문자 그대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43] 아스마라의 학생들은 독재와 열악한 생활 조건, 가혹한 노동 생활에 반대하며 2017년 11월 1~7일까지 수백 명 규모의 시위를 열었는데, 시위대는 반정부 플래카드와 슬로건을 이용해 더 나은 생활 조건과 독재자의 퇴진을 요구했고, 대학에 시위대가 집결하며 도시 전역에서 소규모나마 시민들의 집회가 일어났다. 물론 에리트레아 경찰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는데, 학생들을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최루탄을 투척한 것을 넘어 실탄을 발포하며 시위 첫 날에만 28명의 시위대를 살해했고, 시위가 끝날 때까지 경찰은 매일 시위대에게 실탄을 발포했다. 영어 위키피디아의 문서의 제목이 연도 표기 없이 그냥 '에리트레아 봉기(Eritrean uprising)'인 것을 보면 이 시위가 에리트레아 역사상 최초의 반정부 시위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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