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야마 겐지: 지배계급 위해 움직이는 국가를 대부분 ‘내 나라’로 착각; 국가는 추상적 대상이 아닌 지배계층, 즉 '자본가'의 것;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다면서 왜 도쿄에는 짓지 않나? 돈이 말라 있는 시골 사람들 국가가 나눠주는 ‘사탕’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것; 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은 권력과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

 https://m.khan.co.kr/feature_story/article/201508212156105#c2b

 

2015.08.21 21:56 입력
글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사진 안선영 사진작가

지배계급 위해 움직이는 국가를 대부분 ‘내 나라’로 착각

집단에 눌려 잃어버린 ‘개인’ 되찾아주는 게 나의 문학

우리는 개인의 결정이 모여 전체의 입장을 정하는 민주주의 시스템 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 동안 개인이 품어오는 희망의 무게는 바람빠진 풍선처럼 가벼워졌으며, 불안에 흔들려 왔다. 나의 선택이 나의 삶을 책임질 수 있을지 그 의심의 부피 역시 커져버렸다.

광복 70주년이다. 그 어느 때보다 공익캠페인에서는 국가를 위하는 마음, 국가를 위한 희생을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국가를 추구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서구를 중심으로 세계는 불평등이 도를 넘고 있으니 해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이고, 한국 역시 불평등의 가속화 속에서 더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리고 있다.

역사, 문명의 진보는 순응하지 않는 개인의 결정에 의해 진전되어 왔다. 그렇지 않았으면 바뀌어지지 않았을 왕정이었고 정교일치였으며 봉건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과연 전체를 ‘나’의 뜻으로 진전시키고 있는지?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휘청이는 개인의 마음을 살펴보기로 했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일본 작가 마루야마 겐지에게 그 현상을 물었다. 그는 파도처럼 밀려드는 조직, 사회, 국가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실려 부표처럼 떠다니는 개인의 선택에 끓어오르는 안타까움을 토했다.

마루야마 겐지와의 대담은 지난달 6일 그의 자택에서 이뤄졌다. 도쿄에서 기차로 3시간 반 걸려 도착한 나가노현 시나노오오마치(信濃大町)역으로 그는 직접 마중을 나왔다. 트럭을 몰고 위아래 블랙진을 걸쳐 입은 풍모는 소설가라기보다는 시류에 안주하는 해무 같은 나른함을 거둬내려는 로커의 이미지였다.

마루야마 겐지가 일본 나가노현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968년 고향으로 돌아가 문단과 거리를 둔 채 집필과 정원 관리에 몰두해왔다.

마루야마 겐지가 일본 나가노현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그는 1968년 고향으로 돌아가 문단과 거리를 둔 채 집필과 정원 관리에 몰두해왔다.

▲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잘못됐다”고 제동 거는 국민
국가가 추상적 대상이라지만
결국 인간, 한국에선 ‘자본가’

▲ 원전이 그렇게 안전하다면서
왜 도쿄에는 짓지 않나?
돈이 말라 있는 시골 사람들
국가가 나눠주는 ‘사탕’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는 것

▲ 작가들이 독자를 위로한다는 건
일시적 안심을 주는 값싼 위로
‘마음 연못’에 작은 돌 던져
조그만 파문이라도 낼 수 있다면
문학으로서 충분히 성공한 것

▲ ‘내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것’
그게 뭔지 꾸준히 자문해야…
내가 지키고 바라봐야 할 한가지
‘권력과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


안희경(이하 안) = 선생님의 작품에는 여러 유형의 인물이 나옵니다. 애달픈 이들이 주인공이고 가족, 생계, 이웃의 손가락질에 짓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이들이 그 주변을 에워쌉니다.

마루야마 겐지(이하 마루야마) = 제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세상에서 가장 약한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에요. 대부분 주인공은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천일의 유리>는 스티븐 호킹과 같은 병을 앓는 소년이 천일 동안 겪는 이야기인데, 그 소년도 실존 인물이지요. 그 약한 위치에서 사람들을 바라봄으로써 인간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그립니다. 인간은 의외로 타인을 주시하지 않아요. 특히나 도시에 사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습관에 빠지죠. 하지만 이런 시골에 살다보면 인구가 적으니 자연스레 눈길이 사람을 쫓아요. 저 길에 어느 할머니가 혼자 지나가면 ‘저 할머니는 어디로 뭘 하러 가나’, 병을 지닌 소년이 비틀비틀 걸어오면 ‘가족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에 빠지죠. 인간의 부조리, 불합리한 입장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 하는 이들에게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감동을 그려내는 게 문학이 추구하는 최대의 목적이 아닐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할 가치가 내게 있는가’라는 물음에 빠지게 되는 인물들을 통해서,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 그쪽을 향하는 것이 문학이겠죠.

안 = 소설 문장 한 줄 한 줄이 시각적으로 그려지며 전체가 하나의 시처럼 밀도가 높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회구조의 모순을 갈고리로 찍어 올리듯 꿰고요. ‘전자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는 근대의 고기잡이법에 휘둘리고 있는 사나이들(어부)은 모두, 빚을 갚기 위해서 …(<물의 가족> 중)’와 같은 표현에는 왜 보통 사람들이 현대의 편리 속에서 계속 고통에 빠지는지 새겨져 있죠. 우리는 가난하거나 실패하면 ‘스스로 노력을 안 해서 그렇지’라고 위로하고, 다시 경쟁 속으로 들어갈 명분을 찾는데요. 구조의 부조리를 꺼내드는 시선의 배경은 무엇입니까?

마루야마 = 그걸 설명하려면 제 성장 과정을 이야기해야 해요. 소학교(초등학교) 3학년 때 특수학급이라고 해서 몸이 약한 아이나 정신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모아놓은 학급에 들어가게 됐어요. 저는 건강한데 배정받았습니다. 나중에야 이유를 알았어요. 운동회 때 ‘유희’라고 학생들끼리 손 잡고 춤추는 시간이 있는데 바보같이 느껴져 집에 가버린 적이 있죠. 열 살짜리가 학교 말을 듣지 않은 거예요. 또 전쟁이 끝나고 황실 왕족이 죽었을 때 도쿄를 향해 머리를 숙이라고 했어요. 그 사람이 대체 누구냐 물으니 선생님께서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설명해 줬는데, 저는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곤 또 집에 가버렸죠(웃음). 결국 정신적으로 이상한 아이로 찍혀서 특수학급에 간 겁니다. 우리 학급 학생들은 모두 결핵을 앓거나 정신장애를 갖고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제가 건강하니까 급우들을 보살피는 의무를 줬습니다. 겨울에 석탄난로를 때잖아요. 당시 일본은 가난했어요. 석탄을 하루에 한 자루만 줬습니다. 금방 타버리죠. 그러면 선생님이 저를 불러요. 가서 훔쳐오라고(웃음). 석탄보다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요. 우리 급우들은 감기만 걸려도 목숨이 위태로우니까요. 그분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다른 반 학생들이 우리 친구를 괴롭히면 제가 막 때려줬어요. 선생님은 또 모른 척했고요. 얼마 후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약한 존재를 감싸는 습관이 생겼나봐요. 내 몫은 잊더라도 다른 이에게 뭔가 주려는 습관 말이에요.

안 = 지금도 학교에서는 왕따와 폭력이 이어집니다. 빈부 차이가 확연한 구도시와 신도시 사이에 있는 학교들에는 또 다른 질서가 있기도 하죠. 가난과 결핍에 대한 분노가 오히려 만만해 보이는 약자에게 집단으로 향하는 질서 말이에요. 열등감과 자기 과시는 하나의 뿌리라고 하잖아요. 아이들도 약하면 밟힐까봐 폭력적인 자기 방어를 합니다. 인간의 본성, 어떻다고 여기세요?

마루야마 = 인간은 정말 비열해요. 인간은 동물로 태어납니다. 인간으로 죽을 수 있을지는 각자의 노력에 달렸고요. 대부분 동물로 태어나서 동물로 죽죠.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는 교양을 갖춰야 합니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데 취직하기 위해 머리에 지식을 쑤셔 넣는 일은 교양이 아니에요. 그 예를 관동대지진에서 볼 수 있어요. 그때 일본 정부는 대중의 분노가 국가로 향하면 난감하니까 다른 곳으로 돌렸죠. 조선인들을 제물로 던져줬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쳐들어 올 거라고 소문냈어요. 도쿄 사람들은 ‘조선인이 오면 다 죽여 버리겠다’고 했고, 대학 교수들도 나섰습니다. 그때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외쳤던 이는 생선가게 주인이었습니다. 대학 교수와 생선장수, 둘 중 누가 더 교양인일까요? 매우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요즘 인간이 되기 위한 지식, 인간이 되기 위한 교양은 사라졌어요. 국가가 교양과 지식을 강요하죠. 국가의 편의에 부합하는 지식, 국가의 편의에 부합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교양입니다. 국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거 잘못된 거 아닌가’라고 제동 거는 국민입니다. 그러고는 값싼 급여를 받아도, 해고당해도 불평하지 않는 노동자, 전쟁을 할 테니 목숨을 내놓으라 해도 ‘네’ 하는 순응형 국민을 양민이라고 합니다. 식자들은 국가를 추상적인 대상이라고 하는데요.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결국은 인간들이에요. 저 사람과 저 사람과 저 사람이 국가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 있습니다. 국가는 지배계급을 위해 움직입니다. 미국이든 북한이든 그 어떤 국가라도 지배계급 외의 국민은 부수적인 존재, 노예죠. 그런 국가를 대부분의 국민은 자신의 나라라고 착각하고 있죠. 또 국가가 착각하게 만들고요.

안 = 국가가 명확하게 보인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국가는 누굴까요? 경찰? 공무원?

마루야마 = 자본가죠. 한국에서 보자면 재벌이죠. 정치가들도 자본가들에게 당하고 있을 뿐이에요. 일본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그래요.

안 = 현대를 움직이는 힘이네요. 이미 돈의 흐름, 돈의 주인들은 국경을 넘나들며 세계를 움켜쥐고 있으니 우리나라 상표, 우리나라 은행이라고 자긍심 경쟁을 하는 것도 부질없어 보입니다.

마루야마 = 물론이죠. 그 자본에 반하는 사람은 국적불문, 순식간에 말살될 수 있어요. 실제로 죽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말살됩니다. 지배계급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대의명분을 내세우죠. 국가를 없애면 무질서한 세계, 범죄 왕국이 될 거라고 협박합니다.

안 = 그래도 국가가 치안을 유지해주고 세금을 거둬 기간산업을 보완하잖아요. 그런 질서가 있으니 직장도 생기고, 장사도 하고, 또 농부들은 지원금도 받고 그러지 않습니까?

마루야마 = 그것은 국민의 분노를 피하려는 최소한의 사탕(이익) 나누기예요. 몽땅 빼앗으면 폭동이 일어나니까요. 원자력발전소가 그 예죠. 꼭 시골에 지으려 합니다. 도쿄 같은 도시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하지만 시골은 욕망과 감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죠. 말하자면 나라가 돈 주면 무슨 일이든 순응하는 이들이 많다는 겁니다. 돈이 말라 있으니 넘어갈 수밖에요. ‘원자력발전소를 하면 지역에 이러한 점이 좋습니다’ ‘이런 것도 만들어 주겠습니다’라고 사탕을 줘요. 거기에 어용학자가 와서 안전하다고 보증하죠. 그렇게 안전한 것을 세우는데 국가가 왜 그렇게 많은 돈을 쓰겠습니까? 안전하다면 도쿄에 세워도 되잖아요. 시골 사람들도 눈치는 채지만 눈앞에 놓인 현금에 마음을 내주게 됩니다. 후쿠시마 사태로 방사능 오염이 발생하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요.

장편소설 <물의 가족>을 비롯해 많은 작품이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과 친숙한 마루야마 겐지는 “세상을 조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곳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것”을 작가의 사명으로 들었다. 이미지 크게 보기

장편소설 <물의 가족>을 비롯해 많은 작품이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과 친숙한 마루야마 겐지는 “세상을 조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곳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것”을 작가의 사명으로 들었다.

안 = 다들 결정을 내릴 때는 각자의 의지로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일이 터지면 국가나 조직, 아니면 동료의 생각에 휘둘렸구나라며 배신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죠. 택시를 탈 때마다 당혹스러운 경우는 기사님들이 극단적인 정치 선동을 할 때입니다. 다들 개인적으로는 명민한데,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세상을 편가르는 단순한 사고는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요?

마루야마 = 인간은 세뇌당하기 쉬워요. 특히 국가, 학자, 유명인의 말은 비판없이 받아들이죠. 방송에서 끊임없이 같은 말을 하면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침해당합니다. 일본어에 고코로구미(心組·마음가짐)라고 있어요. 스스로가 마음을 단단히 가지는 것. 반드시 누군가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이래도 괜찮은가’ ‘저 사람이 말하는 것은 진짜인가’ ‘국가가 말하는 것이 옳은 걸까’라고 질문하고 자기 답을 찾는 것을 ‘고코로구미를 단단히 한다’라고 하죠. 안 그러면 순식간에 당해요.

안 = 그러려면 전체 판을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마루야마 = (질문을 자르며) 판이 아니에요. 한 점을 봐야 해요. 제가 오프로드 바이크를 타는데, 절벽으로 치달을 때 빠져나오는 법을 알려줄게요. 급커브를 틀어야 살아요. 아마추어는 무서우니까 이곳 저곳 둘러보며 상황을 잽니다. 하지만 프로는 출구 한 점만을 응시하죠. 전체를 본다고 두리번거리면 시선이 애매해져요.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칩니다. 한 점이 왜 중요한가?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가장 중요한 한 점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그 지점이 우리 마음을 단단히 다잡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지식인 중에 외국 신문, 일본 신문 이 잡듯 읽는 이들이 있어요. 뭔가 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겠죠. 그런데 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몰라요. 우리는 스스로를 찬찬히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세계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잘못하는 것이 서재에 들어가 아무도 안 만나고 골똘히 ‘인생은 이렇다’ ‘인간은 저렇다’ 답을 내리는데, 그 과정에서 답은 왜곡됩니다. 풀 한 포기, 작은 나무 한 그루를 키우면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을 평생 모르고 살아요. 아까 생선장수 이야기했죠? 아침부터 밤까지 생선만 팔았을 거예요. 신문도, 철학서도 안 읽고. 그래도 ‘조선인이 침략해 온다는 소리는 거짓이다’라고 단칼에 답을 내렸잖아요. 전체를 보는 것은 그런 것이에요. 전체를 보고 싶다면 전체를 보지 마라. 한 점을 봐라!

안 = 그 생선장수는 사람을 깊게 만남으로써 오히려 인간이 어떤 존재이고 무엇을 추구하는지 읽어냈다는 거죠?

마루야마 = 국가가 흘려보낸 데마고그에 휩쓸리지 않았던 거예요.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 마음으로 사귄 겁니다.

안 = 한 점, 어디에 찍어야 할까요?

마루야마 =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이것만은 지키겠다 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자문해보고 ‘이것을 양보하면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 하는 것,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을 확보해야죠. 그것으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는 겁니다.

안 = 선생님의 한 점은 어디인가요?

마루야마 = 권력과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뿐입니다.

안 = 어떤 권력이죠?

마루야마 = 국가권력이죠. 그리고 국가가 초래하는 권위, 또 문학상 제도. 이 모두를 거부합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그늘에서 자라는 식물이에요. 음지식물은 빛을 너무 많이 쪼이면 사그라집니다. 이때의 빛은 명예, 돈이고요. 그럼 음지식물은 단번에 말라요. 소설가 중에는 갑자기 책이 잘 팔리고, 또 여러 상을 받자마자 엉망이 된 경우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안 = 그래도 어차피 우리는 서로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잖습니까?

마루야마 = 물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에요. 하지만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개인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회사, 국가와 같은 집단 속에 편입되어 자신을 잊고 개인을 버려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죠. ‘나’라는 개인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을 되찾기 위한 문학이 바로 저의 문학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을 다시금 묻도록요. (잠시 침묵) 대개의 독자들은 스스로를 잊기 위해 소설을 읽습니다.

안 = 작가들은 독자를 위로할 수 있어 행복하고, 존재 의의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저도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하고요.

마루야마 = 매우 값싼 위로죠. 진정한 위로가 될 리 없어요. 일시적인 안심일 뿐이잖아요. 위로와 일시적인 안심은 전혀 다릅니다. 작가는 독자를 현실 그 자체 속으로 쑥 들이밀어야 해요.

안 = 현실은 버겁잖아요.

마루야마 = 그러니까 힘들 때 술 마시는 것처럼 문학에 손댑니다. 문학이 술 정도의 가치라는 거죠. 진보도 무엇도 사라지고 마지막에는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너덜너덜해지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책을 읽는지 알 수 없게 돼요. 문학이 그래도 되는 건지….

안 = 선생님의 소설에는 어망 속의 물방울이 자신을 비추고 세상을 비추고, 또 그 물방울이 다른 물방울을 비추는 양식이 있습니다. 소설이 그렇게 나와 세상 그리고 타인과의 연계를 비춰주는 매개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요?

마루야마 = 오래전에 사르트르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정치 참여 문학이 유행할 때였죠. 사르트르는 ‘죽어가는 어린아이 앞에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세상에 물었습니다. 작가로서 고백하자면 그 순간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작가의 자만이죠. 그래도 문학은 마음이라는 연못에 작은 돌을 던져주는 작업입니다. 조그만 파문일지라도 일으킬 수 있다면 충분히 성공이라 생각해요. 그것이 작가의 역할이죠.

안 = 작가가 아니라도 각자의 공간에서 누구나 파문을 낼 수 있다면 다양하고 생명력 있는 사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살이에서 겁을 집어 먹어서인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한국어 표현이 떠오르네요.

마루야마 = 일본에서는 ‘튀어나온 말뚝은 맞는다’라고 합니다. 남과 다른 행동을 하면 비난을 받죠. 개인으로 돌아와 나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순식간에 사회적으로 말살당하는 분위기예요.

안 = 그런데도 왜 내 멋대로 살라 하세요(웃음).

마루야마 = 그래도 한번 해 봅시다. 내 인생 사는데 왜 남을 신경 써야 합니까?

안 = 그럼, 밥벌이하기 어렵잖아요.

마루야마 = 그래요. 밥이야 먹고 살아야죠. 그렇다고 영혼까지 팔면 서럽잖아요. 누군가가 내 가장 중요한 부분까지 흔들려고 한다면, 힘이 세건 돈이 많건 부모건 으랏차 밀쳐내야죠. 인간은 본능과 욕망의 노예로 태어나요. 지성, 이성은 원래 가지고 있지 않죠. 동물이야 못된 꾀 같은 걸 부릴 줄 모르니 인간처럼 야비한 짓은 안 합니다. 일은 남한테 시키고 이득은 가로채는 그런 짓 말이에요. 인간은 참 어중간한 만듦새로 나왔어요. 그게 인간의 비극입니다. 인간의 뇌를 설명하자면 세 개의 층으로 말할 수 있어요. 동족도 먹어치우는 파충류의 뇌, 거기에 제멋대로인 원숭이 뇌를 덧쓰고, 그 위에 매우 높은 고도의 지능을 가진 뇌가 놓였습니다. 그러니 그 세 개의 층이 조화를 못 찾죠. 대부분이 가장 위의 뇌는 쓰지 않고 가장 밑의 뇌와 두 번째의 원숭이의 뇌만을 쓰며 평생을 살아갑니다. 왜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은 지능적인 뇌가 인간에게만 주어졌는지는 생물학적으로 여전히 수수께끼예요.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그 가장 위의 뇌를 최대한 쓰며 산다는 겁니다. 인간답다는 표현에는 두 측면이 있어요. 인간은 약하니까 흘러가는 대로 살아야 인간답다고 하는 사람과, 아니다, 인간은 약하지만 강하게 뚫고 나가야 인간다운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죠. 제 생각은 이래요. 진정한 인간다움은 동물로서의 삶을 멈추고 인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뇌를 한껏 쓰는 데 있습니다. 또 하나, 약자인 척하지 않는 것!

안 = 이성을 키우는 방법은요?

마루야마 = 자신이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밖에 없어요. 책으로도, 누군가에게 물어서도 배울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지. 타인의 앞에서 의식하는 자신이 아닌, 혼자가 되었을 때 ‘이것이 나구나’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그로부터 이성은 길러집니다.

그와의 대화는 기차 시간에 맞춰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조바심 나는 상황에서 한 가지 덧질문을 했다. “작품도 강렬하고 에세이에서도 모질 정도로 단언하는 말을 휘두르셨어요. 한국 독자들 가운데 선생은 만개했다 봉오리째 떨어지는 동백처럼 황혼이 오기 전 느닷없이 세상을 저버릴 거라 여겼던 이들이 있습니다. 선생의 늙은 몸이 당혹스럽다고 해요.”

선생의 얼굴에 등고선 같은 주름이 물결쳤다. 웃음을 물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너덜너덜해져서 죽을 거예요. 이 세상을 살아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글 쓰다가 아니면 정원 손질하다 털썩 쓰러져 죽고 싶습니다.”

끝까지 맹렬히 살겠다는 선생의 기개다. 숲속 같은 그 집 마당에는 씨앗에서 나와 재목이 된 나무들과 그 둥치를 감고 오르는 음지 덩굴들로 싱싱한 기운이 가득했다. 땅에 붙을 듯 고개 숙였지만, 보라 물망초의 빛깔도 완숙하고.

■ 마루야마 겐지

▲ 66년 첫 작품으로
일 아쿠타가와상 수상
귀향 후 집필에 전념


마루야마 겐지(70)는 소설가로 일본 나가노현 시나노오오마치에 산다. 1963년 도쿄의 무역회사에서 일할 때 부인을 만났으며, 1966년 회사가 부도에 처하자 생계 대책으로 소설 <여름의 흐름>을 썼다. 그 첫 작품으로 ‘문학계’ 신인문학상을 수상했고,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1968년 <정오이다>에서 귀향한 청년의 고독을 그려낸 후 본인도 귀향했다. 이후 문단과 선을 긋고 집필과 정원 관리에 전념한다.

대표작으로 장편소설 <천일의 유리> <물의 가족> <천년 동안에>, 소설집 <어두운 여울의 빛남> <달에 울다> 등이 있다. 그리고 에세이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그렇지 않으면 석양이 이토록 아름다울 리 없다> <소설가의 각오>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을 펴냈다.

마중 나온 마루야마 겐지와 그의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가 먼저 신경숙 작가의 표절 시비에 대해 말을 꺼냈다. 자신의 소설도 거론됐으니 입장을 밝혀달라면서 한국과 일본의 언론이 취재를 왔다고 한다. 한국 언론은 거절했고 일본 언론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일본 문단을 지적하며 작가들이 아름다운 문장, 이야기의 구조 등 너무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작가의 길은 세상을 조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곳까지 스스로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정신이다. 50여년 충실히 작가의 길을 걸어온 그에게서 사상가의 면모가 번졌다.


<통역 김경채 도쿄대 현대사상사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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