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위대한 백인, 존 브라운

 

...만약 내가 부유한 자, 권력자, 지식인, 소위 '위대한' 사람들과 그 지인,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아내, 아이들, 그러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법정에서 내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은 행동을 취하며 고통을 겪고 희생을 치렀더라면 누구나 그 행위를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처벌은커녕 보상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법정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 적어도 신약으로 보이는 - 성서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바로 그 성서야말로 내게 가르치길,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며, "너희도 함께 갇힌 듯 지금 갇혀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며, 너희도 몸을 가진즉 학대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라"(히브리서 13:3)고 하였다.

나는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내가 아직 어리석어서 그런건지, 하나님이 어찌 사람의 외모를 따지신다는 소리인지 난 당최 모르겠다.[14] 내가 순순히 인정한 바와 같은 내 일련의 행위는 하나님의 소외받는 빈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정의를 위하여 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고 이 노예제의 나라에서 내 자손은 물론이요, 사악하고, 잔인하고, 불의한 제도로 인하여 인간된 권리를 무시당하고 있는 수백만의 피에 내 피를 또한 더해야 한다면 그렇게 될지어다!

존 브라운의 마지막 변론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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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초상 (1859)

미국노예 해방 운동가.

2. 생애[편집]

1800년 코네티컷주 토링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미국 독립 전쟁에 복무한 군인 출신이었으며 작은 피혁공장[5]을 운영하던 아버지는 비밀리에 노예들의 탈출로를 제공하는 강성 노예해방주의자였다. 또 브라운은 엘리주 라이트[6]라는 사람이 가르치는 학교에 다녔는데 그 역시 강경한 노예해방주의자였고 노예들의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그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노예해방론자가 된 것으로 보이지만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결정적으로 강경노예해방론자가 된 것은 12살 때 한 흑인 소년이 노예라는 이유로 주인에게 삽으로 맞는 장면을 본 다음부터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으나 질병으로 인해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그 외에도 그는 허드슨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도 자주 어울렸고 여성 인권에도 관심이 많아 여성 운동가들의 연설에도 자주 참여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이들이 동등한 민권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의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독립하여 펜실베이니아에서 피혁공장을 차려 큰 돈을 벌었지만 돈을 버는 것보다는 노예해방운동을 지원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오하이오, 메사추세츠, 뉴욕 등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노예해방운동을 독려했지만 이 과정에서 부인과 가족들을 병으로 잃고 재정적으로 파산하는 등의 고통을 겪었다. 1849년엔 뉴욕 노스 엘버에 노예해방론자 게릿 스미스(Gerrit Smith)가 기부한 땅에 세워진 흑인 거주지에 정착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아직 준주였던 캔자스는 노예주가 되느냐 마느냐로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처음 그들은 투표를 통해 캔자스가 자유주가 될 것이라 낙관했지만 이웃한 미주리주의 지원을 받은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조직한 자칭 '민병대'들이 노예제 반대론자들을 습격하는 일들이 계속 벌어졌다. 이른바 '피 흘리는 캔자스'(Bleeding Kansas)라 부를 만큼 어두운 시기였다. 이에 비해 자유주들의 대처는 미적지근했고 이런 상황 속에 존 브라운은 이들의 "비겁한" 대응에 크게 실망하여 1851년 미국 길리어드 동맹(United States League of Gileadites)이라는 탈주 노예들이 주축인 비밀결사를 만들기에 이르게 되었다.

양측의 강경 지지자들이 캔자스에서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 캔자스로 이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존 브라운 역시 1855년 마차에 총기와 탄약을 실은 채 아들들과 사위들을 데리고 캔자스 오서와터미(Osawatomie)로 이주했다. 미주리발 친노예파[7]들의 캔자스 습격은 계속 이어졌고 결국 존 브라운도 습격을 받아 자신의 집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존 브라운도 직접 지역 주민들을 모아 민병대를 결성해 친노예파 약탈대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존 브라운은 계속해서 캔자스를 습격하는 미주리 약탈대와의 지리멸렬한 싸움을 이어갔다.

이런 와중에 리캄튼(Lecompton)의 친노예파들이 1856년 5월 21일 난데없이 캔자스의 해방론자 중심지인 로런스를 습격하여 신문사 둘을 파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로런스의 주민들은 다행이 아무도 죽지 않았고 되려 약탈을 벌인 도당 중 한 명이 반격에 죽었으나 리캄튼의 보안관이 직접 이 약탈대를 조직했을 뿐더러 친노예파 약탈단을 운영하던 벤저민 F. 스트링펠로우[8]가 "이게 다 아무튼 북부 침략자들 때문이다!"란 망언을 신문에 기고하는 기가 막힌 꼴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에 비해 해방론자 무장 조직들은 적극적인 반격을 펼치지 않았다. 존 브라운은 이러한 "비겁 행위"에 크게 격노하여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이 노예쟁이 마을에 쳐들어가겠다!'는 발상을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존 브라운은 지역 주민과 자신의 아들을 포함해 10여명의 습격대를 즉석에서 결성해 친노예파 정착지였던 파터와터미 크릭(Pottawatomie Creek)을 공격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을 근처에 진을 치고 24일 해가 진 후 습격을 감행해 특별히 큰 반격을 받지 않고 파터와터미 크릭에 '무혈'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존 브라운은 이 마을에 있던 "전문 노예 추노꾼 및 친노예파 약탈꾼" 5명을 색출해 브로드소드로 썰어 죽여 버렸다. 마을 주민의 오두막에 친노예파 민병대 지도자들이 모여있다는 첩보를 어디서 구한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존 브라운은 이걸 알아내서 해당 오두막을 습격했다. 모여 있던 인원 중 둘은 존 브라운이 심문 후 결백하다 판단하여 풀어줬으나, 나머지는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때 살해된 인물 중 한명은 밖에 나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존 브라운의 아들과 민병대원 둘이 쫓아가 죽였다. 이것이 파터와터미 학살 사건(Pottawatomie massacre)이다.

이 사건은 여러모로 큰 논란거리가 되었는데 반격에 소극적이던 폐지론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쾌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나 전투 중에 쏴죽인 것도 아니고 비무장 상태의 오두막을 냅다 처들어가 다짜고짜 5명을 썰어 버린 것이 너무 잔혹했고 상당히 분열되어 있던 북부 측과 달리 남부는 아주 당연히도 "북부 침략자들의 침략이다!"라고 입을 모아 비난했기에 폐지론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여론이 악화되는 부작용[9]을 낳기도 했으며 링컨을 위시한 노예제 반대파 정치인들은 급히 존 브라운과의 관계를 부정해야만 했다.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이 사건을 두고 "끔찍한 질병에 대해 끔찍한 처방을 내렸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어쨌든 먼저 처들어온 놈이 친노예파 지도자들이었고 존 브라운이 썰어넘긴 5명 전부 캔자스 습격에 가담했거나 그를 도왔기에 존 브라운은 그에 대해 "정당"하게 반격했다는 명분이 성립되었으므로 이 사건에 대해 처벌을 받을 일은 없었다. 물론 이 파터와터미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미주리에서 친노예파 약탈대가 추가로 결성되어 캔자스를 습격하는 빈도가 더 늘어났는데 존 브라운도 이에 맞서 민병대를 조직해 미주리 발 약탈대들을 때려잡았다. 이 와중에 미주리의 발드윈 시티에 처들어가서(블랙잭 전투) 이전에 존 브라운의 집을 태워버렸던 헨리 페이트를 사로잡는 복수를 하기도 했다.

존 브라운이 항상 승승장구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는 존 라이드가 지휘한 미주리 민병대에 맞서 오서와터미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오서와터미가 홀랑 타 버리고 존 브라운 자신도 아들을 잃는 큰 패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큰 열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을 잃어가면서 싸운 존 브라운의 용맹함은 북부 폐지론자들 사이에서 큰 칭송을 받았다.

이후 로런스 마을이 다시 2700여명의 미주리 민병대에게 공격받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당연히 존 브라운은 여기에도 참전하여 방어를 도왔다. 반노예파 민병대와 친노예파 민병대는 로런스 마을을 두고 서로 요새를 쌓고 대치하였는데 결국 대규모 전투가 벌여지기 직전까지 갔다가 새로 부임한 캔자스 주지사가 당장 이 두 민병대가 해산하지 않으면 주 정부 병력을 동원해서 전부 때려잡아 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아 무마되기에 이르게 되었다. 캔자스 주지사들은 이 두 민병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대가로 즉각적인 해산을 명령했고 미주리와 캔자스 양측의 민병대들은 이를 받아들여 자진 해산했다.

물론 이와 별개로 작은 무력 충돌은 계속되었는데, 결국 캔자스를 자유주로 두기로 정치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며 캔자스의 경계 충돌 사태가 일단락 된다. 하지만, 존 브라운은 이에 대해 아주 불만이 많았다.[10]

존 브라운은 1859년 남부 지역 깊은 산에 해방노예의 나라를 세워 노예해방의 전진기지로 삼을 계획을 세웠고 결국 무기조달을 위해 10월 16일 흑인 다섯 명과 아들 셋을 포함 21명을 데리고 당시 버지니아주에 위치해 있던[11]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의 연방정부군 병기고를 습격하여 점령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이번에는 연방 정부를 습격한 것이었기에 아무도 눈감아 줄 수 없었다. 연방정부군은 즉각 주변 연방군 부대와 지역 민병대를 소집해 존 브라운의 '결사단'을 토벌하였다. 이때 바로 로버트 리(당시 대령)가 휴가를 나와 있다가 난데없이 소집되어 토벌대 지휘를 맡았다. 로버트 리 자신은 노예제를 열렬하게 옹호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명령에 응해 토벌을 지휘했다.[12] 이때 브라운의 아들과 해방 노예를 비롯한 결사대원 10명이 전사하였으며 브라운 자신은 체포되었다. 체포된 브라운을 감시한 부대원들 중엔 스톤월 잭슨젭 스튜어트가 있었다. 법정에 넘겨진 브라운은 그 해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처형 장면을 지켜본 군중 속에 바로 존 윌크스 부스가 있었다.

그의 사형을 반대하는 탄원이 국내외에서 쏟아졌고 그를 탈옥시키려는 지지자들의 시도도 있었지만 그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13]
...만약 내가 부유한 자, 권력자, 지식인, 소위 '위대한' 사람들과 그 지인,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아내, 아이들, 그러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법정에서 내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은 행동을 취하며 고통을 겪고 희생을 치렀더라면 누구나 그 행위를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처벌은커녕 보상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법정은 하나님의 법을 존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 적어도 신약으로 보이는 - 성서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바로 그 성서야말로 내게 가르치길,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며, "너희도 함께 갇힌 듯 지금 갇혀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며, 너희도 몸을 가진즉 학대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라"(히브리서 13:3)고 하였다.

나는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내가 아직 어리석어서 그런건지, 하나님이 어찌 사람의 외모를 따지신다는 소리인지 난 당최 모르겠다.[14] 내가 순순히 인정한 바와 같은 내 일련의 행위는 하나님의 소외받는 빈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정의를 위하여 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고 이 노예제의 나라에서 내 자손은 물론이요, 사악하고, 잔인하고, 불의한 제도로 인하여 인간된 권리를 무시당하고 있는 수백만의 피에 내 피를 또한 더해야 한다면 그렇게 될지어다!

존 브라운의 마지막 변론
I, John Brown, am now quite certain that the crimes of this guilty land can never be purged away but with blood.
나 존 브라운은 이 죄악의 땅의 범죄를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피뿐이라고 이제 확신한다.

처형장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며 간수에게 건네준 쪽지이자 유언

브라운의 지지자였던 빅토르 위고는 브라운의 사형 집행으로 인해 "잠재돼있던 균열이 완전히 벌어져 미 연방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3. 평가[편집]

curry tragic pre...
존 스튜어트 커리의 <비극적 서곡>(Tragic Prelude, 1942) 존 브라운(중간의 인물)의 봉기를 기념한 대표적인 벽화이다. 캔자스 터피커에 위치한 캔자스 주의회사당에 있다.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위대한 백인.

자유라는 대의를 위한 그의 열정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내 신념이 작은 촛불이었다면, 그의 신념은 타오르는 태양 같았다. 내 열정은 신념에 묶였지만, 그의 열정은 고요한 영원의 해안까지 뻗어 나갔다. 난 노예를 대변해 말할 수 있었다. 존 브라운은 노예를 위해 싸울 수 있었다. 나는 노예를 위해 살 수 있었다. 존 브라운은 노예를 위해 죽을 수도 있었다.

(흑인민권운동에 같이 참여할 만한 백인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 혹시 존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몰라도."


브라운이 죽은 뒤 북부에서는 브라운을 찬양하는 여론이 형성된 데 반해 미국 남부에서는 마귀 수준의 살인마로 욕을 먹었으며, 북부의 존 브라운 옹호론에 충격을 받아 남부 분리독립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4개월 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브라운은 노예해방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북군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존 브라운의 죽음을 기리는 군가가 만들어졌으니 그 유명한 "John Brown's Body"다.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나자 브라운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John Brown's Body"는 국가행사에서도 불리는 노래가 되었다. 여기에 다른 가사를 붙인 곡이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이고 이것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찬송가에 편입한 곡이 누구나 잘 아는 "영광 영광 할렐루야"라는 후렴구가 붙은 찬송가인 마귀들과 싸울지라(새찬송가 기준 348장, 통합찬송가 기준 388장)다.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노예 해방이라는 목적은 분명 숭고한 것이지만 굉장히 과격했으며 테러리스트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본인의 깊은 기독교 신앙과 타락한 세상에 대한 절망,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한 인물 속에 결합해 있었던 의로운 분노(righteous wrath)를 목숨으로 보여준 인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등 옹호자들은 노예 해방이라는 옳은 대의를 위해 투신한 이상주의자로 보고 비판자들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기도 한다.

4. 대중매체[편집]

아마존 프라임, Showtime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시청할 수 있는 미니시리즈 "The Good Lord Bird"가 존 브라운을 다룬 드라마다.
게임 스플린터 셀의 4편 이중간첩에서는 이 존 브라운의 유지를 받들어 썩어빠진 미국의 체제를 엎어 버리고 미국을 새로 세우겠다는 "존 브라운의 군대(John Brown's Army)"라는 미국 내 테러리스트 조직이 등장한다. 그런데 본부의 컴퓨터에서 볼 수 있는 선언문에서 존 브라운을 애국자가 아닌 혁명가라고 일컫는 것은 그렇다 쳐도 존 브라운이 그 당시 답없던 정부 체제를 엎으려 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왠지 존 브라운의 이름만 팔아먹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다 두목 측근은 백인우월주의자(칼슨 모스)다.

여성 해방노예이자 인권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해리엇(Harriet)>(2019)에서 단역으로 등장한다. 자유주 소재 해방노예 구속이 합법화되는 시점에서 민병대를 이끌고 노예사냥꾼들과 대치하는 묘사가 나온다. 흑인 감독의 흑인 서사 영화에서는 흑인을 돕는 백인 캐릭터는 비중을 주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데 단역 비중에도 불구하고 외적 고증을 전부 살려서 묘사하는 것을 보면 흑인 역사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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