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차 50대 기자의 막노동 취업기 by 나재필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list.aspx?SRS_CD=0000016138
이런 기획이 참신한 이유는
막노동이라는 뻔한 노동 분야를
기자라는 전통적인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관점에서
서술했기 때문이다.
"저기 공구함에 가서 깔깔이하고 복스 알 니부(nibu) 사이즈로 가져와요."
건설현장 초짜시절, 한 배관 기술자(기공)가 난생처음 들어보는 공구 이름을 대며 일을 시켰다. 깔깔이라면 군인들이 야전상의 속에 덧입는 방한복(방상내피)을 말하는 건가? 건설 현장서 깔깔이를 찾을 리가 없는데 뭐라는 거지?
적잖이 당황한 마음에 공구함 쪽으로 걸어가면서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베테랑 근로자에게 물어보면 됐지만 '그것도 모르냐'며 핀잔 들을까 봐 스스로 해결하려 한 것이다. 난 서둘러 공구를 찾았고 의기양양하게 내밀었다.
"뭐 하자는 거야? 깔깔이를 가져오라니까, '깔깔이 바'를 왜 가져오면 어떡해. 복스 알도 엉뚱한 사이즈로 가져오고. 이봐, 이쪽 일 처음이야? 바빠 죽겠는데, 같이 일 못 해 먹겠네."
우락부락 신경질을 내던 그는 내가 가져간 복스 알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기공이 보지 못하게 서둘러 자리를 떴다. 난 속으로 욕을 한 보따리 쏟아냈다.
"나이도 대여섯 살 아래인 놈팡이가 반말로 찍찍거리네. 깔깔이 모른다고 남들 앞에서 면박을 주고.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야? 모르면 가르쳐주면 되잖아. 넌 처음부터 그렇게 잘했냐? 자슥아~"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말한 '깔깔이'는 나사를 풀거나 죄는 데 사용하는 래칫핸들이었고, 복스 알(소켓렌치) 사이즈는
6.35㎜(1/4")를 뜻하는 일본말이었다. '깔깔이 바'는 짐을 고정할 때 쓰는 자동바를 말하는데 멈춤쇠(걸쇠)의 작용에 의해
한쪽으로만 회전을 전하고 반대 방향으로는 운동을 전하지 않는 톱니바퀴로 래칫 휠이라고도 한다. 이후에도 공구 이름과 건설 용어를
몰라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
"노가다판은 '제3의 학교'다. 사회에서는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극한 체험은 물론 인생사도 공부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먹고, 자고, 싸고'가 달라진다.
사실 막노동의 민낯을 드러낼 때 이 부분이 가장 불편하다. 내가 일하는 대기업 공사현장은 일반 현장과 달리 안전하고 합리적인데, '먹고, 자고, 싸는' 방식만큼은 똑같다. 원초적이고 적나라하다.
살기 위해 먹는 밥
점심은 보통 함바식당을 이용한다. 함바(일본어 はんば, 飯場)는 건설 현장 안에 지어놓은 간이식당으로 함바집, 현장식당, 건설현장식당이라고도 부른다.
보통은 소속 업체에서 지정해준 식당 두세 곳에서 장부에 사인한 후 먹거나, 식권을 받아 이용한다. 두 끼나 세 끼를 준다.
식권을 주지 않고 단가(일당)에다 식비(1만 원 정도)를 포함하기도 하는데 이럴 땐 자비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당근(중고 마켓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식권을 거래하는 경우도 있고, 노동자끼리 사고팔기도 한다. 함바집은 식권을 이용하면 3500원 가량 하지만
현찰로 내고 먹으면 6000원이다.
메뉴는 한식 뷔페로 매일 반찬과 국이 바뀐다. 가성비로 따지면 결코 나쁘지 않다. 대부분의 식당 업주는 음식을 갖고 장난치지
않는다. 막일하는 사람들에게 끼니는 힘의 원천이기에 자칫 부실하게 나오면 금세 입소문이 돌아 장사하기 곤란해질 수도 있다.
이 때문인지 반찬을 고민한 흔적들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맛있는 집이라고 해도 반복해 먹다 보면 물리기 마련이어서 함바집을 한 곳만 다니지 않는다. 이럴 땐 식권 한 장을 가지고 빵 한 개-음료와 교환해서 먹기도 한다.
문제는 함바집을 이용하지 않는 경우다. 주변에 함바 외에는 편의점밖에 없다. 선택지가 없다. 도시락을 싸오는 사람도 드물거니와
사내에서의 무단 섭취는 허용되지 않는다. 고육지책은 편의점 도시락이나 김밥, 햄버거, 컵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뿐이다.
하지만 편의점 음식이란 게 편의성은 부각되지만 집밥의 개념이 아니지 않은가. 이를 며칠 내내 먹으면 입에서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맛이 났다. 때로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인지, 먹으니까 사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식탁도 부족하고 좌탁도 없어 로비 바닥에
주저앉아 먹는 이도 있다.
심지어 화장실 지척에 자리를 틀고도 먹는데 입(口)과 입(入)-출(出)이 혼재된 장소여서 만감이 교차하는 식사다. 노동자들에게
바닥은 단순히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닥은 일터이자 쉼터이기도 하고, 때론 먹고 자는 곳이 되기도 한다. 인생 밑바닥이
아니라 일상 언저리서 만나는 밑동이다.
밥 포기하고 차가운 바닥서 쪽잠 자기도
간혹 실내가 아닌 야외 작업장에 나갈 때도 있는데, 이런 날의 점심은 평상시보다 특별하다. 보통 컵라면을 먹지만 이곳에선 라면을
직접 끓여 먹는다. 레시피는 따로 필요 없다. 어묵을 뭉텅뭉텅 썰어 넣고, 파를 가위로 어슷하게 잘라 넣으면 끝이다.
김치 하나만 있어도 라면은 스스로 배고픔을 뛰어넘어 하나의 요리가 된다. 진한 국물을 흡입할 때는 여느 해장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황홀경이다. 황태국물 같기도 하고, 때론 홍합탕 같기도 한 시원함은 노동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데 손색없다. 그 국물의 온도는
남몰래 옷섶을 적시던 눈물의 온도와 같다.
어떨 땐 250℃ 드럼통 위에서 삼겹살이나 고구마·감자를 구워 먹기도 한다. 막일꾼에게 가끔 주어지는 호사다.
노동자들은 바닥에서 쪽잠(짧은 틈을 타서 불편하게 자는 잠)을 잔다. 점심시간의 경우 많게는 2시간을 주는데 어떤 근로자는 '밥'을 포기하고 '잠'을 택한다. 이 짧은 휴식은 노동자들에게 오후를 견디게 하는 에너지다.
대기업 공사현장은 여름 외에 잠잘 곳을 제공하지 않는다. 샵장(현장 내 일정장소에 꾸미는 작업장)이나 몽골텐트, 계단, 공사구간 내 취침은 퇴출감이다(참고로 여름엔 차광막이 설치된 콘크리트 바닥에 비치의자가 한정수량만 주어진다).
휴대용 매트리스를 가져오는 사람도 제법 있지만 대다수는 간이의자에서 졸거나 안전요원의 시선 밖에서 새우등처럼 굽은 채로 선잠을
잔다. 볕 좋은 날엔 공장 밖 잔디에서 그대로 눕고, 날 궂은날엔 그 어딘가의 바닥에서 꿈을 꾼다. 그 차가운 콘크리트 질감은
평생 가장 안 좋았던 날의 온도와 같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가 목적지인지 모르는 몽매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배고프니까 먹고, 피곤하니까 쓰러져 잔다. 혼자라면 눈치라도 보겠지만 이곳에서는 남들이 그렇게 하니 모두 그렇게 한다. 공사판은 오로지 사람을 위한, 사람에 의한, 사람의 공간으로 돌아간다.
등 굽은 현장노동자의 소확행
▲ 건설현장 야외에 설치된 컨테이너박스 화장실. ⓒ 나재필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충격 받은 건 출(出)의 문제다. 액면 그대로 배설 얘기다.
대기업 공사현장에는 가동구간과 비가동구간에 화장실이 있다. 실외는 컨테이너를 여러 개 겹쳐 만든 구조인데 양변기가 설치돼 제법 신식이다. 그런데 낙서가 볼썽사납다. 1970~1980년대 중·고등학교 남학생들 화장실에서나 봄 직한 음화(淫畫)와 삼류 저질 문구가 문짝에 그려져 있다. 이름하여 'WXY 낙서'(나체를 그린 음란 낙서')다.
여기엔 저속한 조롱이 맞춤법도 틀린 채 희화화된다. 물론 정치인을 씹거나 업체, 동료를 비난하는 내용도 있다. 누군가는 낙서를 하고, 누군가는 댓글을 달고, 누군가는 두 사람을 욕하고, 누군가는 덧칠해 지운다. 지성의 그루터기가 유치했던 옛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육체 속 오물을 배설하면서 비뚤어진 자아까지 배설하는 이 도발은 군상 중 극소수의 짓이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은 생존의 문제인 동시에 하루를 견디게 하는 에너지원이다. 이곳 노동자의 '3잘' 앞에는 '더'라는 부사가 붙어야 한다. 더 잘 먹고, 더 잘 배설해야 하고, 더 잘 자야 한다.
살과 뼈를 마모시키며 달려가는 막일은 소모전이 아니라 온몸을 불사르는 백병전이다. 그러기에 '잠'과 '밥'은 그야말로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
나는 노가다를 신성한 밥벌이라고 생각한다. 제 몸 태워 온기를 전하는 연탄불처럼, 제 몸을 돈과 바꾸는 일은 심지어 거룩한 살신(殺身)처럼 느껴진다. 기자로 벌이했을 때보다 돈의 용처가 확실하고 행복의 총량도 커진다.
주말에 비가 내렸다. 빗방울이 베란다 창문을 타고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태양을 삼킨 적당한 어둠은 속마음을 감추고 은밀한 휴식을 취하기에 더없이 좋다. 원 없이 자고, 원 없이 먹을 수도 있고, 원 없이 늘어질 수도 있으니 한량(閑良)의 시간이다.
일주일에 아주 적게 부여되는 이 게으름은 땀 흘린 자의 특권일 수도 있다. 한껏 느려진 시계 초침을 보며 평소에 못 잔 잠, 평소에 못 누린 음식, 평소에 못 누린 꿈을 꿀 수 있다. 이런 날엔 '새우'가 되는 꿈을 꾸지 않는다. 등 굽은 나약한 노동자가 아니라 허리 펴는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대부분의 기레기는 언론사 경영진들이 만드는 종족이다. 기사 쓰는 본분을 잊게 하고, 돈 벌어오는
세일즈맨으로 전락시키는 장본인은 사주다. 그들은 '월급 받으려면 월급보다 더 벌어오라'는 지상명령을 내린다. 나 또한 그런
생태계를 수도 없이 목도했다. 돈 벌어오는 기자는 승승장구하고, 기사 잘 쓰는 기자는 멸족하는 행태가 기레기 사육장을 만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취직한 다음 착실하게 일한 결과 과장, 부장, 사장, 회장이 된 다음 하나 더 올라가니 송장이
되더라는 우스개가 있다. 나 또한 기자생활 27년 동안 편집국장, 논설위원까지 지내며 정점을 찍었으나 남은 건 송장 같은
육신이었다. 어느 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정글을 떠났다."
댓글 중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니 공사현장이 별로 변한 게 없어 보입니다. 코로나 발생하기 전까지는 저도 공사현장에서 일을 했었는데요. 코로나 기간동안 막노동 퇴직금 받고 잘 썼던 기억도 납니다. 공사현장에 일하면서 느꼈던 건,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로 취급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용직 노동자 스스로 자신을 하대하는 게 참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요. 더러운 화장실에, 아무대서나 잠을 청하면, 스스로 자존감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자님께서 공사현장 노동자들, 그 중에서도 일용직 노동자들에 관한 글을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특히, 일용직 노동자들은, 그 어디에도 대변하는 단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알기론 존재하기는 한데, 존재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공사현장에서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안전수칙 미준수가 아니라, 현장의 노동 강도를 꼽고 싶습니다. 빠르게 작업을 진행해야 하고, 한 공간에서 여러 공정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하는 게 사고가 많이 나는 이유로 꼽고 싶습니다. 그리고 피로가 쌓일 수밖에 없는 노동강도와, 그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져 사고가 발생하는 걸로 저는 판단했습니다. 기자님의 용기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나라 건설현장의 문제점을, 노동자 입장에서 잘 써주셨으면 합니다. 현재는 일을 하지 않고 있지만, 기사를 읽으면서 절고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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