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보다 더 악랄했던 전두환 (feat. YWCA 위장결혼 사건) / 이 사건을 묵인방조한 미국

 
이때 참여한 재야인사들은 윤보선함석헌, 전직 국회의원이던 양순직, 박종태임채정, 문동환, 김상현, 한명숙, 백기완, 최열, 김경남 등이었다.

윤보선과 함석헌은 고령인 관계로[3] 서면조사로 대체했으나 나머지 핵심 주도인물인 14명은 용산구 국군보안사령부[4]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끌려간 백기완은 고문으로 여러 차례 혼절을 거듭하더니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당시의 고문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흥미로운 것은 미국의 반응이다. 미국 국무부는 윤보선의 민주화 운동 행보를 예의주시했고 윤보선이 참여한 민주화 관련 사건 때마다 논평을 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이는 '신군부의 고의적 유도설'과 결부되어 묘한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윤보선은 사건 수사에 협력할 테니 동료들의 형량을 낮춰달라고 탄원하여 형량이 감경되었으며, 이후 윤보선은 신군부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쪽으로 돌아선다. 사실 이 때 윤보선의 나이는 이미 80이 넘은 데다가 전두환이 윤보선에게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민주화를 이룰 테니 협력해 달라고 설득하여 결국 윤보선이 넘어가고 말았다고 한다. 이후 윤보선은 재야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20892

 

함석헌(1901-1989)은 4.19혁명 10돌을 맞은 지난 1970년 4월 19일 <씨알의소리>라는  월간지를 창간하여 박정희 정권 하의 사이비 언론에 맞서 '언론의 게릴라전'을 펴나갔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얼어붙은 야만의 시대에 그는 "자유언론 없으면 죽음"이라는 일념으로 "돈도 되지 않는 잡지를 사재를 털어서" 시작했다.

그러나 <씨알의소리>는 1호를 내자마자 곧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강제 폐간을 당한다. 그 후 함석헌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13개월 만에 승소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집요한 탄압으로 <씨알의소리>는 폐간과 복간을 거듭한다.

오는 4월 19일은 <씨알의소리> 창간 48주년이다. 그동안 <씨알의소리> 편집위원으로는 장준하, 안병무, 이태영, 이병린, 송건호, 법정, 천관우, 김동길, 김용준 등이 있었다. 박선균(1938- )목사는 박정희 정권시절부터 <씨알의소리>의 발간 업무를 일선에서 담당하다고 모진 고난과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함석헌의 생존 시절부터 <씨알의소리>의 수난을 눈으로 직접 보고 온몸으로 겪은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런 박선균 목사가 오는 4월 19일 <씨알의 소리> 창간 48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한다. 그가 함석헌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57년으로 벌써 61년이 된다. 지난 60평생 오로지 외길만을 걸어온 박목사와 지난 한 달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오른쪽 박선균
  오른쪽 박선균
ⓒ 박선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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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풀이다!' 그 말에 꽂혔고, 큰 용기를 받았다"

- 고등학교 재학 중인 지난 1957년 장준하(1918-1975) 선생의 잡지 <사상계> 3월호에 실린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글을 처음 접하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나는 1956년도에 강원도 평창 산골에서 중학교 담임선생님의 쪽지 한 장을 들고 무작정 상경했다. 운 좋게도 혜화동에 있는 상이군인정양원이라는 곳에서 말단 직원으로 심부름을 하면서 야간 고교를 다닐 때였다.

하루는 선배의 책상에 꽂혀있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봤다. 그것을 펼쳐보니 글이 모두 한문 투성이인데 유일하게 함 선생님의 '할 말이 있다'는 글만 순 한글이었다. 다른 글을 읽기가 어렵고 선생님의 글은 한글이니까 읽기 시작했는데, 감동에 감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었고, 그 글을 노트에 전부 옮겨 적기까지 했다. 선생님의 그 글에서 어린 학생의 가슴을 흔들어 놓은 말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할 말이 있다'하는 나보고 '네가 누구냐?' 하는가? 내가 누구임을 말하리라. 나는 세례요한도 아니요, 남강도 아니지만 또 이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다.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이 내가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천지가 무너지면 무너졌지 암만 준다 해도 내가 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 말에 이어서 이런 말도 있었다.

'나는 또 무슨 종교의 거룩한 직원도 아니다. 중도 목사도, 감독도, 신부나 주교도 아니다. 모가지를 열네 번 잘리면 잘렸지 신부 목사는 절대 아니 된다... 나는 또 교육자도 학자도 아니다... 나는 또 예술가도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것이 없어 못한다. 할 수 있다면 이 원통한 속을 몇 천 년을 두고 억눌리고, 짓밟히고, 물리고, 찢기고, 지지우고, 째우고, 하다하다 못해 허리가 잘린 이 한, 이 아픔, 설음을 한번 하늘땅이 떠나가게 울었으면 좋겠는데, 속에선 타건만 이 목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못되는 사람이다. 그저 사람이다. 민중이다. 민은 민초(民草)라니 풀 같은 것이다. 나는 풀이다!'

'나는 풀이다!' 하는 이 말씀이 내게 꽂혔고 큰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 이 글의 주인공은 도대체 누구신가? 그때부터 '함석헌'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의 마음속에 새겨졌다고 할 수 있다."

- 그 후 중앙신학교에서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와 함석헌의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의 감회는 어땠나?
"앞에서 말한 대로 고교시절 함 선생님의 이름 석 자를 마음에 담았다. 그 후 선생님에게 편지를 드렸더니 뜻밖에도 선생님으로부터 답장이 와서 또 한 번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그 후 교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진학할 학비가 없어 고민하고 있던 중, 중앙신학교에서 농촌지도자를 양성한다는 신문광고를 봤다.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농장에서 일하는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내가 갈 곳은 여기밖에 없다는 마음을 갖고 중앙신학교에 입학했다.

1959년 내가 중앙신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안병무 박사는 독일 유학을 가시고 안계셨지만, 그때 나는 함석헌 선생님이 중앙신학교에서 특강을 하시는 줄은 전혀 몰랐다. 어느 날 강의시간표에 함석헌 선생이 들어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야, 이 학교에 잘 들어왔구나! 하나님의 뜻이구나!'하고 너무 감격하여 눈물이 절로 났다.

내가 함 선생님의 강의를 처음 들었을 때, 선생님은 무슨 다른 교수님들처럼 노트라든가 메모 한 장 없이 강의하시는데 보통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고, 그때 왕양명(王陽明)의 시 한편을 칠판에 써놓으시고 약 2시간가량 강의하시던 모습을 기억한다.

險夷原不滯胸中 험하고 평평한 것이 원래 마음에 걸림이 없으니
何異浮雲過太空 뜬구름이 허공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요.
夜靜海濤三萬里 고요한 밤, 바다의 파도 삼만리를 가고
月明飛錫下天風 달이 밝은데 지팡이 휘두르며 하산할 때 하늘 바람이 일더라. (함석헌 역)

- 지난 1970년 4월 19일 함석헌이 <씨알의소리>를 창간했을 때, 왜 정년이 보장되고 안정된 중앙신학교 정규직 교원 자리를 그만두고 어떻게 비정규직이고 임시직인 <씨알의소리> 편집장을 맡게 되었나?
"정확한 것은 내가 <씨알의소리>에서 일하게 된 것은 1970년 창간 때는 아니고, 1971년 7월 <씨알의소리> 복간 때이다. 많이 알려진 대로 <씨알의소리>가 창간이 되고 2호를 계약된 인쇄소가 아닌 다른 인쇄소에서 인쇄했다는 이유로 문공부에서 폐간 처분을 받았다. 함 선생님은 13개월의 법정투쟁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가 확정되었던 때다. 이때는 내가 중앙신학교직원을 이미 사임하고 실업자로 있었던 때였다.

내가 왜 중앙신학교(아래 중신) 정규직에서 사임을 했는가는 긴 사연이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1965년 안병무 박사가 독일에서 귀국하여 학장이 되었고, 함석헌 선생님도 중신에서 전임강사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 외에 허혁 박사, 박순경 박사 등 당시 유명한 교수들이 중신에 모여서 타 신학교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던 신학교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접고, 안 박사, 허 박사, 함 선생님 등이 중앙신학교를 떠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내게 나가라는 이는 없었다. 그 때 나는 중신의 교무서무를 다 맡고 있었고, 대학국어강의도 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나 나는 안 박사나 함 선생님이 안 계시는 중신에는 더 이상 있을 마음이 없다 생각했다. 젊은 기분에 아무런 대책 없이 사표를 던지고 실업자로 있을 때, 안병무 박사가 나를 함 선생께 추천해 주셨고, 함 선생님은 기꺼이 받아주신 것이다."

<씨알의소리> 창간호
  <씨알의소리> 창간호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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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석헌의 어떤 면에서 그렇게 매료되어 평생을 함석헌과 관계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인지?
"내가 평생을 함석헌과 관계된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두 번 그만두었다가 다시 반복해서 복귀된 일이 있다. 첫 번 그만두게 된 것은 내가 목사 안수를 받게 되는 관계로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나는 '안수 받지 말라' 하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안수 받는 것도 좋다'하셨다. 그래서 2년간은 다른 분이 <씨알의소리> 편집을 맡았다. 물론 내가 없는 사이 선생님이 '선균이가 와야 하는데' 하시면서 나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을 알고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씨알의소리>로 말한다면 내가 제일 오래도록 맡아서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선생님께 매료됐다기 보다, 나는 선생님을 절대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선균이는 나와 같아서'라고 선생님이 말하시는 걸 듣고 내가 어떻게 선생님과 같다는 말씀인가를 생각했지만, 선생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이 세상에 완전한 인간은 없다'는 명제처럼 함석헌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목사님이 본 함석헌의 한계는 무엇이었는지?
"두 가지만 말하겠다. 첫째는 너무 조직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지 조직적이지 않다는 점이 장점이면서도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조직 아닌 조직을 가져라' 하시는 말씀이 옳은 말씀이지만, 그 점에서 선생님의 실패는 의미 있는 실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해가 된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 1957년에 함석헌 선생님이 천안의 씨알농장 일만 이천 평을 기증받으신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용은 전혀 기증이 되지 않았다. 정만수 장로가 선생님 앞으로 등기를 해드리겠다는데도, 선생님은 아무 이름으로 있으면 어떠냐 하시면서 법적으로 정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서 십여 년 간을 희생 봉사한 동지들의 땀방울을 건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세상은 바꿔지지 않는다"

- 20세기를 살다 간 함석헌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 일이, 왜 21세기 오늘을 사는 후진들, 젊은이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이런 문제는 나 같은 사람이 답변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지만, 하나만 말씀드린다면,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아주 혁명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함석헌은 종교에서 말하는 회개나 깨달음의 세계를 지나서 인간의 근본적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세상은 바꿔지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삶과 사상은 오고 오는 어느 세상에서도 절대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함석헌이 좁게는 한국역사, 크게는 세계역사에 남긴 유산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내 생각은 이렇다. 함 선생님이 남기 유산은 한 마디로 말해서 씨알사상이나 씨알정신이라고 본다. 선생님은 살아 생전에는 사상이란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상보다는 '정신'이란 말을 더 좋아하시고, '바통'이란 말씀을 의미 있게 강조하셨다. 1976년 4월호 <씨알의소리>에 '누가 이 참의 바통을 받을 것인가?'라는 함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이제 죽을 날이 가까웠기 때문에 요새는 그 생각만 한다. 바통, 아무래도 넘겨줘야 하잖아? 한 바퀴 다 달리고 마지막이 가까워지면 저 사람이 보기 쉽게 바통을 내 들어야 한다. 나도 변변치 않은 거지만 '바통이 이거라고 분명히 볼까' 하고 지금 이 말을 한다... 그러니까 뛰기는 실컷 뛰었다가 바통 넘겨주지 못하면 소용없고, 저 사람도 아무리 뛴다 해도 바통 받아 쥐지 않고 뛰면 소용이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네가 받아라... 지금 내 마음에도 조금 분명해지니까 자주 이러는 거야요... 나는 이거 흔들었으니까 생각 있는 사람 바짝 붙잡아요!'

그래서 함 선생님이 남기신 유산이 뭐냐? 바통이 뭐냐? 하면 그것은 바로 '씨알정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려면 한이 없지만 간단하게 말한다면 선생님이 남기신 말씀 중에 '살림살이' 12가지와 '우리가 내세우는 것' 8가지, 그리고 선생님의 전집 속에 씨알정신이 녹아져 들어있다고 본다."

- 지난 1970년대 함석헌의 영향을 받고 함께 따르던 이 땅의 지식인들 중에서 오늘 날에는 오히려 이념적으로 정반대쪽에 서게 된 분 들이 꽤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고 보시는지?
"그것은 함석헌의 씨알사상이나 정신이 무엇인지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해보면 모두가 함석헌을 존경한다, 잘 안다 하지만 존경하는 것은 몰라도 잘 안다든 것은 수박 겉핥기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이나 정신에 철저했다면 잘못될 수가 없다."

집요하고도 철저했던 탄압... '자유냐? 죽음이냐?'

-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 아래서 언론의 마지막 보루였던 <씨알의소리>가 어떻게 탄압을 받았으며, 어떻게 저항을 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
"탄압의 역사를 말한다면 시간이 모자랄 것이지만, 떠오르는 몇 가지만 말해 보겠다. 당시 '씨알의소리사'는 함 선생님 자택 안쪽에 조그만 사무실이 있었는데, 정보부 담당자와 기무사 담당자 그리고 용산서 담당형사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원효로 4가 70번지 선생님 댁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고 누구든지 자유롭게 드나들었고 막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씨알의소리> 탄압은 집요하고도 철저했다.

첫 번째로 기억되는 일은 1971년 10월호 <씨알의소리>에 함 선생님의 글 '군인정치 10년을 돌아본다'가 실렸는데, 이글은 지금 읽어도 눈을 뗄 수 없는 명문인 동시에 당시 군사정권의 폐부를 찌르는 글이었다. 표지 상단에는 '싸우자! 죽자! 다시 살자!'라는 구호가 있다. 이 책이 출판되어 간신히 독자들에게는 발송은 되었으나 시중 서점에 나간 것은 감쪽같이 모두 증발해 버렸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정보부가 모두 사갔다는 말이 돌았다.

다음으로 1971년 12월호 <씨알의소리>가 나왔을 때 동아일보 광고란에 '자유냐? 죽음이냐?'라는 제목으로 <씨알의소리> 광고를 냈다. '자유냐? 죽음이냐?'는 따로 글을 쓴 것이 아니고, 미국의 독립혁명 지도자 헨리 패트릭(Henry Patrick)의 연설문 제목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 광고가 나간 후 그 때 같이 일하던 문대골 업무부장이 잡혀갔다. 그때 문 부장은 선생님 같이 한복을 입고 다녔다. 그래서 나는 보이지 않았고, 문 부장이 뚜렷했기 때문에 잡혀갔다. 그는 일주일 이상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난을 받았다. 그때 만일 문 부장이 '자유냐? 죽음이냐? 는 자신이 기획한 것이 아니고 박선균이 한 것이라'고 했다면 내가 오늘 이렇게 멀쩡하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생각을 할 적마다 문 부장께 감사하고 있다(문대골 목사는 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그리고 1972년 4월호 <씨알의소리>는 창간 2주년 기념호였다. 여기에 함 선생의 '같이살기 운동을 일으키자'는 글과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지의 수난사' 등 중요한 글들이 많았다. 당시 비밀리에 인쇄를 마치고 청계천 어느 제본소에서 제본을 하고 있는데, 직원으로 있던 박상희씨가 전화로 문대골 부장이 제본 중 연행되어 갔고, 제본을 못하고 압수 상태에 있다는 연락을 했다.

그 때 마침 장준하 선생이 사무실에 계셔서 그 소식을 듣고 나는 장 선생님과 같이 택시를 타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장 선생이 현장에 도착하면서 "어느 놈이 <씨알의소리>를 압수 하느냐?" 소리 지르니까 형사들이 비실비실 달아나 버렸다. 장 선생님은 나에게 말하기를 '아무래도 제본을 제대로 하기는 어려우니 일단 용달차에 그대로 싣고 우리 집으로 옮기자' 해서 당시 사시던 동대문 부근으로 인쇄만 된 <씨알의소리>를 옮겼다. 그 후 장 선생님 가족이 총동원되어서 접지만 하고 <씨알의소리>를 재단도 못한 채 독자들에게 발송한 적이 있다. 수난의 잡지 그대로다.

이야기가 좀 길어지지만 한두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다. 1973년 3월호 이야기다. 함 선생님은 여기에 '참 지도자의 모습'이라는 대 논설문을 쓰셨다. 한 가지 미리 알려드리는 것은 1973년부터는 장준하 선생이 중간에서 <씨알의소리> 문제로 정보부와 협상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탄압 속에 비밀 인쇄를 계속하는 것도 어렵고, 정보부에서도 우리가 최대한 협조를 할 터이니 <씨알의소리>를 인쇄하기 전 한 번만 보게 해 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함 선생님도 검열을 받으면서 <씨알의소리>를 계속내야 하는가? 고민하셨지만, 장 선생님께 일단 협상을 맡기기로 했다. 편집위원들과도 상의를 한 끝에 정보부와 싸우면서라도 <씨알의소리>를 내는 것이, 아예 없애는 것보다는 낫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그 구체적 일은 편집장인 나에게 떨어졌다. 결국은 <씨알의소리>의 인쇄소는 대광인쇄소로 결정 되었고, <씨알의소리>가 발행되기 전 정보부가 먼저 한번 보고 문제가 있는 구절은 협상을 통해 하기로 결정이 난 것이다.

이런 때 함 선생님의 '참 지도자의 모습'이란 글이 나왔다. 당시 정보부 담당자는 김영균이라는 사람이었다. 김영균은 어느 날 나를 만나 선생님의 글에 붉은 줄을 새빨갛게 칠해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이 글은 각하를 겨냥한 글이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전 면삭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전면 삭제라면 협상이 아니지 않느냐? 했지만 김영균은 이것은 자기 선에서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언뜻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어서 김영균에게 '지도자란 말이 문제라면 목자라고 하면 어떻겠는가?' 했더니 그도 생각하더니 그것은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문제는 함 선생님이 승낙하실 지가 의문이었다.

함 선생님도 씁쓰레 하시더니, 결국 지도자가 목자로 바뀌어서 나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 명설교집에 함 선생님의 이 글 '참 목자의 모습'이 들어갔다고 한다.

다음으로 1973년 11월호 이야기다. 편집회의를 통해 그동안 정보부를 통하여 받은 사전검열은 전면 거부한다고 통고하고, 그동안 전면 삭제되었던 글(장준하의 민족외교의 나아갈 길, 천관우의 언론인이 본 오늘의 언론자유, 이태영의 야당 집 마누라, 변찬린의 산에 부치는 글, 함석헌의 우리는 왜 이래야 합니까? 등)을 한데 모아 한권의 책으로 편집하여 발행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내면서 틀림없이 이번에는 내가 잡혀갈 것이다 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유신헌법이 통과되어 인심을 썼던 것이다.

<씨알의소리>가 탄압과 검열자들과 싸우면서 1980년 4월 창간 10주년 기념일을 맞아 전국순회강연회를 계엄령 속에서도 강행했다. 당시 계엄령이 제주도는 제외되었는데 1980년 5월 17일 제주학생회관에서 서남동(1918-1984) 목사님과 함 선생님의 강연이 끝나고 함 선생님은 서귀포 독자들이 모시고 가고, 서 목사님과 나는 호텔에 투숙했다. 그런데, 밤 12시가 되자마자 전두환 정권은 제주도까지 확대계엄령이 내렸다면서 서 목사님을 잡아갔다. 말하자면 전두환의 철권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박정희 시대가 끝났으니 이제는 정치적 봄이 오지 않을까 했지만, 아니었다. 성경에 나갔던 한 마귀가 일곱 마귀를 데리고 들어와서 그 사람 형편이 전보다 더 나빠졌다는 말씀처럼, 전두환 시대는 박정희 시대보다 상상을 초월했다. 내 생각에도 가장 정치적으로 무서웠던 때가 그때라고 생각한다.

그해 7월호 <씨알의소리>를 만들 때까지도 <씨알의소리>가 없어지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무슨 이유로 폐간한다는 공문 한 장도 없이 <씨알의소리>, 안병무의 <현존> 그리고 <뿌리 깊은 나무> 등 170여 개 잡지를 단칼에 잘랐다고 언론에 발표해 버렸다. 따라서 함석헌 선생의 붓을 꺾고 입을 봉하고 암흑 세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타까운 일이다. '함석헌 선생의 마지막 인생의 8년, 그때 만일 <씨알의소리>가 살아있었다면 친히 강의하신 노자(老子)81장은 정리 되었을 것이고, 그 밖에 얼마나 놀라운 글들이 쏟아져 나왔을까?' 그 생각을 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

1988년 12월 노태우 정권시절 <씨알의소리>가 2차 복간이 되기는 했으나 함 선생님은 이미 글을 쓰실 수 없는 상태였다. 서울대병원에서 대 수술을 받으시고 두 번째 병원에 입원해 계셨다.

나는 '8년 만에 쓰는 편지'란 초안을 준비해 가지고 선생님께 드렸더니, 선생님은 그 글을 읽으시고 '씨알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는 친필글씨를 남겨주셨다. 이글이 '씨알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오는 4월 19일 (목)오후 3시 씨알회관 3층에서 <씨알의소리> 창간 48주년 기념강연회가 열린다. 이 강연회가 주중인 낮보다는 차라리 저녁이나 혹은 주말에 열린다면 더 많은 씨알이 참석할 수 있어서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기념회를 간단히 설명해주자면.
"이번 창간기념강연회는 앞으로 50주년도 다가오고 있기에 조촐하게 하자는 생각이다. 주말이나 저녁시간도 좋지만 이번 창간강연회는 4.19혁명 58주년과 <씨알의소리> 창간 48주년이라는 날짜의 의미도 크다고 생각해서 4월 19일로 한 것이다.

씨알회관은 2호선 전철 홍대입구역 1번 출구를 나와서 오른 쪽으로 직진, 100미터 코너에 옛청기와주유소 건물을 돌아 다시 직진, 200미터 오른 쪽 길 건너 아만티호텔 뒤편 작은 건물 세 번째에 씨알회관이 있다. 주소는 월드컵북로 5길 21이다.(링크) 강연 주제 및 강사는 다음과 같다.

1. "씨알의 소리와 권부의 소리" -문대골 목사 (함석헌 기념사업회 이사장)
2. "한글정신과 씨알정신" - 박선균 편집주간
3. "영으로 만나는 함석헌" - 김진 상임이사(함석헌 기념사업회)


강연회 후 씨알들과 식탁의 친교시간을 갖는다."
                   

* 박선균 목사는
1938년 강원도 평창 호명리에서 출생하여, 중앙신학교(현 강남대 전신)와 명지대학교에서 신학과 국문학을 공부했다. 1971년 함석헌 선생의 부름을 받고 7년여 간 <씨알의소리> 편집장을 했고, 또한 미아리 빈촌에서 20여 년 간 목회활동을 했다. 그 후 중국산동성 과기대학 한국어과 설립에 참여하여 한국어를 중국학생들에게 가르쳤다. 현재 2017년부터 <씨알의소리> 편집주간을 다시 맡고 있다. 저서로 <금지된 씨알의소리>(1987년), <씨알의소리 이야기>(2005년)를 낸 바 있고, '청용과 거북의 꿈', '예수와 다른 예수교', '빛은 광주로부터', '씨알정신운동의 뿌리', '폭력아, 물러가라!' 등 다수 글을 발표한 바 있다.


 

 

 

https://www.hani.co.kr/arti/well/news/986119.html

 

■ 인간 함석헌…“공감능력 뛰어난 투사”

함석헌은 일제 치하와 독재 시절을 거치는 동안 여러번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다녀와서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선 의기의 인물이다. 1950~70년대 서슬 퍼런 독재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때도 함석헌의 강연장엔 수만명이 모여 그의 포효를 들으며, 민주화의 꿈을 되살렸다.

제자들은 “함석헌은 투사의 면모뿐만 아니라 공감능력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중앙신학교(강남대 전신)에서 함석헌을 만났고, 1970년 이후 함석헌의 집에서 함께 살며 <씨알의 소리>를 만들었던 박선균 목사는 함석헌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 중 한명이다.

“선생님은 일체의 지시 없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했다. 원효로 70번지인 선생님 댁은 문을 닫는 법이 없었다. 늘 열어두었기에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었다. 정보과 형사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지위가 높다고 특별 대우하는 것도 없고, 아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세끼를 먹었지만 선생님은 한끼밖에 드시지 않으면서도 그 한끼를 우리와 한 밥상에서 똑같이 드셨다.”

1970년대 함석헌이 집회나 목요기도회에 나가는 날이면 경찰 20~30명이 집 앞길을 봉쇄했다. 그때 동지들은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한번도 경찰에게 욕설을 뱉거나 폭력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게 박 목사의 전언이다. 함석헌이 오산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이 학내 시위를 벌이며 교사들에게 뭇매를 때릴 때도 자신을 때린 학생을 미워할까 봐 눈을 가리고 있었을 만큼 증오심 없이 살고자 했던 함석헌은 말뿐만 아니라 실제 삶도 비폭력·평화주의로 일관했다는 설명이다.

박재순 목사는 서울대 철학과 1학년 때 서울대에 강연 온 함석헌을 처음 만났다. 1974년 일어난 민청학련 사건으로 5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나와 한신대에 편입한 뒤엔 늘 함석헌의 강연을 쫓아다녔다. 4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휘어진 척추를 펴는 수술을 했던 1976년 당시엔 함석헌이 부산에서 올라와 수술실까지 바래다주기도 했다. 그날 함석헌이 마루에 앉아 시든 나무를 보며 ‘저 나무가 재순이 같다’고 눈물을 훔치더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병원에서 머리에 구멍을 두개 뚫고, 쇠막대기 4개를 꽂아 척추를 억지로 늘린다고 40일간 고정해 놓았다. 친구들이 이런 야만적인 수술이 어디 있냐고 분개할 만큼 큰 고통을 받고 대수술을 할 때, 선생님이 바쁜 상황인데도 아침 일찍 수술실까지 와 줘 큰 위로가 됐다. 나만 그런 사랑을 받은 게 아니다. 그분은 평생 사랑하면서 산 분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69217

 


YWCA 위장결혼식에 참석한 함석헌 (우측)
  YWCA 위장결혼식에 참석한 함석헌 (우측)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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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1901-1989)은 1979년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5시 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주례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YWCA 강당에 도착해서야 그 날의 행사는 사실 위장 결혼식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한 달 전인 10.26 사건 이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발표에 반발해 재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함석헌은 현장에서 들었다. 그래도 함석헌은 "옳은 일을 위해서는 이용당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날 YWCA 강당에 모인 함석헌을 비롯한 전 대통령 윤보선과 해직교수 김병걸, 그리고 백기완, 임채정, 양순직 등은 박정희 유신 독재 체제의 청산과 군의 정치적 중립 등을 요구하는 성명을 낭독했다. 하지만 성명 낭독이 끝나기가 무섭게 경찰들이 강당에 난입했다. 강당은 금방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곳에 모인 140여 명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함석헌 등 주동자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로 끌려갔다. 함석헌은 이곳에서 15일간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다.

당시 보안사에서 "함석헌이 젊은 군인들에게 매를 맞았다. 수염이 다 뽑혔다" 등의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함석헌의 자녀들은 면회도 안 되던 터라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어 애가 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

보름 후에 나온 아버지를 보고 함석헌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몸에 온통 푸른 멍이 든 것을 보고 경악했다. 함석헌의 3녀 함은자(1929-2017)는 당시를 회상하며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며 필자에게 한탄하기도 했다.

친일 콤플렉스가 있는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사상가 함석헌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1970년 함석헌이 창간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는 2호를 내고 폐간됐다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해 승소하고는 유신정권 하에서도 계속 발간됐다.

하지만 전두환은 달랐다. 1980년 전두환은 무슨 이유로 폐간한다는 공문 한 장도 없이 <씨알의 소리>는 물론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발간한 <현존>, 서울대 교수 백낙청의 <창작과 비평> 등 170여 개의 잡지를 하루아침에 강제 폐간했다. 언론대학살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행한 것이다. 그래서 함은자의 말처럼 (무식한) 전두환이 박정희보다 훨씬 악독했다는 말이 나왔다.

YWCA 위장 결혼 사건 후 보안사로 끌려간 함석헌 등 재야 인사들은 불법 구금상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함석헌은 자신이 보안사에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생전에 이야기한 적이 없고 글로 남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몇몇 인사들은 당시 보안사에서 겪은 가혹한 고문 경험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그 중의 일부를 살펴보자. 아래는 지난 1987년 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간한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후 연행되는 함석헌
  YWCA 위장결혼식 사건 후 연행되는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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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명의 군인들이 머리 수술한 부위 일부러 걷어차

이철용은 당시 한국특수지역선교위원회의 실무자였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 현장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어 다음날 오전 11시경 서빙고동에 있는 보안사로 이송되었다. 계엄사에 도착한 후 지하실로 끌려가 군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은 후 곧바로 방으로 데려 가더니 5-6명의 군인들이 군홧발로 온몸을 가리지 않고 걷어차는데, 그들의 표정을 기억해보면 죽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사랑으로 가득 찼던 그들이기에 우리를 원수 잡듯, 개 패듯 달려들어 짓이기는 것이 마치 나라를 위하는 행동인 양 도도하고 원한에 찬 얼굴들이었다.

그런 후 2층 취조실로 데려갔다. 거기서도 검은 테이프를 감은 야구 방망이 같은 것으로 온몸을 얻어맞고 발길질을 실컷 당한 후 조사가 시작되었다. 조사받기 전에 당한 매질로 머리가 찢어져 조사실 옆에 있는 간이병원에 가서 일곱 바늘을 꿰매었다. 그때 그곳에는 김용복 선생(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신학박사)이 기절하여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으며 눈 밑이 찢어져 다섯 바늘가량 꿰매었다. 조사를 받은 후에는 지하 감방으로 다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앉아 있게 했는데 2분 간격으로 군인들이 들어와서 구둣발로 걷어찼으며 특히 머리의 수술한 부분을 일부러 걷어찼다.

이런 고문을 하면서 도중에 "내가 각하를 모시고 있던 경호원인데 각하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지랄이냐" "너는 빨갱이보다 더한 놈이다" "각하가 나라를 위해 얼마나 애쓰신 줄 아느냐" "함석헌도 빨갱이다" "유신이 죽은 줄 아느냐" 등의 위압적이며 모욕적인 말로써 기를 죽였으며, 거기서 풀려날 때 "나가서 맞았다는 얘길 하면 다시 와서 죽을 줄 알아라"는 협박을 받았다.


김병걸(1924-2000)은 문학평론가다. 그는 1974년 박정희 유신체제를 비판하다가 서울산업대학교 (구 경기공전)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나는 1979년 11월 25일 오후 포승줄에 묶여 서빙고동 보안사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지하 감방에서 "옷 다 벗어!"하면서 얄팍한 군작업복을 던져 주었다. 속옷을 다 벗고 군작업복으로 갈아입자 내 방으로 5명의 군인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나를 둘러싸고 군화 발길질, 몽둥이질, 고무신으로 얼굴후려치기 등 1시간 정도 사정 볼 것 없이 고문했는데, 엎어지고 나뒹굴고 쓰러져서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그런 다음 정신 차릴 겨를도 없이 빨간색 카펫이 깔린 조사실로 끌려갔다.

수사관들은 조서를 받기 전에 내 머리채를 휘어잡아, 뒤로 휙 젖히며 본 사건의 자금 출처부터 캐었다. 자금 출처가 '이북이냐, 조총련이냐'하는 것이었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감아쥔 내 머리채를 벽에다 몇 번 박아치기하며 "'나는 혁명가입니다'라고 말해봐!" 해서 내가 "아닙니다" 하니 벽에 나를 기대어 세워놓고 군홧발로 짓이기기 시작했다. 얼굴, 가슴, 다리, 옆구리 등을 사정없이 갈겨대었다. 쓰러지면 바로 서게 해서 갈기고 또 쓰러지면 다시 세워 깔아뭉갰다.

그들은 겁에 질린 나에게 "'나는 애국자입니다'라고 말해봐, '나는 민주인사입니다'라고 말해봐, 이 새끼야!"하며 강요했다. 나는 도저히 고통을 이겨낼 수 없어 "아닙니다"해도 군홧발 짓이기기는 사정없이 가해졌다. 2시간 정도를 그렇게 당했던 것 같다.

이렇게 한 후 다음 고문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양 무릎을 꿇어 앉혀 놓고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에 굵은 몽둥이를 끼워 넣고 그 상태에서 허벅지를 군홧발로 지근지근 살이 뭉개지도록 짓밟는 것이었는데, 내가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며 나가자빠지거나 엎어지면 몽둥이로 등, 어깨, 허리 할 것 없이 마구 내리쳤다. 그리고는 "다시 xxx 라고 말해봐!"하는 말에 "아닙니다"라고 대답하면 고무신짝으로 얼굴을 내리갈겼다. 이렇게 해서 두 번 기절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먼저 고문을 가한 후 비로소 조사를 시작했으며, 조사가 끝난 후에는 스스로 걸어갈 수가 없어서 두 명의 군인이 나를 끌어다 내 감방에 데려다주었다.

둘째 날도 첫날과 같은 고문을 한 후에야 조사를 하곤 했는데 조사 과정에서 받은 몽둥이질, 군화 발길질, 고무신짝으로 얼굴 후려치기 등은 이루 다 기억할 수가 없다.

3일간을 이렇게 계속해서 고문조사를 받았다. 그 후 수사 윤곽이 잡히면서 좀 나아졌는데, 그러나 조사를 끝내고 내 지하 감방에 오면 우리를 감시하는 헌병들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감방 앞을 지나칠 때마다 마침 심심한데 잘 되었다는 듯 시비를 걸거나 별 이유도 없이 군홧발로 공차 듯 걷어찼다. 하루 5, 6회 가량 그 짓을 당했다.

이런 치욕과 울분의 일주일 동안은 팔을 마음대로 들어 올릴 수도 없고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서 화장실 갈 때도 부축 받아 간신히 기다시피 다녔으며, 용변 보기도 큰일을 치르듯이 해야 할 만큼 힘에 겨웠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석방된 후 자신들이 당한 고문을 들으니 대부분 내가 당한 이상의 모진 고문을 당했다. 같은 건물 안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밀폐된 방에서 각기 다루어졌기 때문에 서로의 형편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열흘을 지내고 나서부터는 고문을 따로 하지는 않았으나 아침 6시에 기상해서부터 오후 10시 취침할 때까지 식사 시간과 화장실을 가는 외에는 방 안에 바른 자세로 정좌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금만 눈이 옆으로 돌아간다거나 허리가 약간만 굽어져도 참을 수 없는 욕을 당하면서 군홧발로, 몽둥이로 맞아야만 했다.

이때의 나는 손발은 군홧발에 밟혀 시꺼멓게 멍이 들었고 다리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그 자리에 피가 엉겨 붙어 있었으며 온몸에 피멍이 들어 신음과 공포 속에서 지내었다.

나는 17일 만에 보안사에서 석방되었는데 그 후 시내 백병원 원장에게 진찰을 받으러 갔는데 "지금의 이 상태로는 진찰조차 어려우니, 3-4일 집에서 목욕을 하면서 안정하면 가라앉을 부분과 그렇지 않은 문제의 부분이 나타날 터이니 그때 가서 치료해 보도록 합시다"하였다.

1980년 1월 8일 현재에도 30분도 안 되는 시간을 걷거나 버스를 타고 나면 주저앉고 싶을 만큼 괴롭다. X-레이에 나타난 바로는 명치뼈가 회복하기 어려운 절단 상태에 있는 것이라 한다. 다른 동지들의 상태에 비하면 나는 고문 당했다는 소리를 하기가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들이 감옥에서나마 건강만이라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보안사에서 풀려나올 때 "이 안에서 지냈던 일이나 건물 위치, 얻어터진 사실 등은 국가 기밀에 속하느니만큼 밖에 알리면 이적행위가 되니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하면서 침묵하겠다는 각서를 요구했다.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다

박철수는 당시 한신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1979년 11월 24일 YWCA 강당에서 중부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오전 8시경 보안사로 넘겨졌다. 거기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고문당한 사실은 이렇다.

1. '앉아, 일어서'를 수천 번 계속했고,
2. 나로선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으로 '무릎 끓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무릎을 꿇되 앞정강이를 붙인 채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발목을 안쪽 복숭아 뼈가 밖으로 향하게 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었고,
3. 꼬라박기(일명 원산폭격)를 시켜 장시간 견디지 못하고 자세가 흐트러지면 몽둥이로 내리쳤고,
4. 무릎 사이에 알루미늄으로 된 침대 각목을 끼우고 한쪽을 스팀파이프에 고정시켜 꿇어앉은 자세에서 밑으로 누르는 것이었으며,
5. 엎드려 뻗친 자세를 시킨 다음 엉덩이를 몽둥이로 지칠 때까지 후려치고,
6. 고무신으로 얼굴을 후려치거나,
7. 철창에 매달리기를 수십 번 시키는데 만약 힘에 부쳐 땅으로 떨어지면 그 벌로 창살 밖으로 다리를 내밀게 한 후 여러 차례 군화로 발길질을 하였고,
8. '빈대 붙어있기'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벽에 다리와 팔을 최대한 확 벌려 밀착시키고 목은 바짝 뒤로 젖히는 동작을 시켜 기진맥진하게 만들었고,
9. 손바닥 그리고 손등을 몽둥이로 수 십 번씩 내려치거나,
10. 조사받는 이틀 동안 꿇어 앉혀 놓고 눈을 감지 못하게 하거나 다른 고문을 가해 잠을 전혀 못 자도록 했으며,
11. 벽에 등을 붙인 자세에서 양팔을 똑바로 위로 올려서 손바닥을 벽에 붙이게 한 후 한 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는 동작을 시키고
12. 이외에도 '빨갱이 새끼', '간첩 새끼' 등의 욕설을 퍼부어 됐고, 내가 있는 지하실에서 한강 하수구로 곧바로 통한다는 등으로 겁을 주었으며 또한 지하 감방에서 계속 '으악!', '어머니!', '아버지 !' 등의 고문으로 인한 비명이 들려와 정말 죽어나가는 게 아닌가 하여 극도의 불안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이틀 동안을 이렇게 지내고 유치장으로 넘겨질 때 위와 같은 고문 사실을 외부에 알리는 경우엔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각서에 날인하도록 강요했다.


YWCA 위장결혼 관련자들은 이런 가혹한 고문을 받고 풀려난 후에도 고문 후유증과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가혹한 고문과 5.18 헬기 사격

지난 24일 광주지법 201호 형사대법정에서 고 조비오 신부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전두환씨의 16차 공판기일이 열렸다.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김성 전 '5·18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출격 대기 관련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특조위 조사 결과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씨 측 변호인은 이 증언에 의구심을 표했지만 김성 부위원장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 군 기록, 목격자 조사 등을 통해 5월 27일 전일빌딩을 비롯해 이전에도 송암동, 광주천, 조선대 절개지(뒷산) 등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진술했다.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부터 약 6개월 지난 1980년 광주에서 5.18 광주학살이 일어났다. 함석헌을 비롯한 민주화운동가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고, 광주 거리 곳곳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인 만큼 헬기로도 시민을 사격했을 것이다. 그의 만행은 언제쯤 단죄받을 것인가.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당 관계자들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당 관계자들과 함께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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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김종인은 지난 19일 5.18 국립묘지를 찾아 "권력자의 진심 어린 성찰을 마냥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에서 그 시대를 대표하여 제가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라고 사죄했다. 

그가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다. 김종인은 1980년 전두환이 위원장으로 있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재정분과 위원으로 활동했다. 전두환 군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자금과 실무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 공로로 전두환에게서 보국훈장을 받았다.

김종인은 이 자리에서 "저는 신군부가 만든 국보위에 재무분과위원으로 참여했다. 여러 기회를 통해 과정과 배경을 말하며 용서를 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심에 빠진 광주시민들과 군사정권에 반대한 국민에겐 쉽게 용납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라며 "다시 한 번 이에 대해 사죄 말씀을 드린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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