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교황청 / 바티칸 은행의 비리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25648.html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 월급을 받았을까? 로마 바티칸 교황청의 재산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요한 바오로 2세가 사후 공개된 영성록(유서)에서 "나는 처분할 아무런 재산도남기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새삼스럽게 교황의 재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바티칸의 재정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채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에 바티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교황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과거 교황이 월급을 받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세르지오 세바스티아니 교황청 재무심의처장은 "그렇다고 본다.왜 안받겠느냐?"라고 우회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세바스티아니 추기경은 바티칸 공보실을 통해 곧바로 자신의 발언을 철회했다. 교황의 월급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정보든 공식적으로 밝힐 수 없다는 바티칸의 신호였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은 매년 여름 세입ㆍ세출액을 공식 발표함으로써 바티칸의 재정상황을 공개한다.

바티칸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03년에는 수입이 2억360만유로에 지출이 2억1천300만 유로로 약 1천만 유로의 적자를 냈다.

재정적자 상황에 대해 세바스티아니 추기경은 7년간 풍년 끝에 7년간 대기근을겪은 구약성서의 내용을 언급하며 바티칸이 7년간 좋은 시절을 보낸 후 힘든 시기를겪고 있다고 둘러 말했다.

하지만 얼마 안되는 세입ㆍ세출액만 놓고 바티칸이 보유한 재산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바티칸의 의식은 호화롭기 짝이 없고, 성베드로 대성당과 로마의 다른 성당들은 황금과 예술품들로 장식돼 있다. 추기경들은 값비싼 예복을 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바티칸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금 보유고,예술품, 증권, 부동산 등을 합해 대략 10억∼120억 유로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실 바티칸의 재산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에 "바티칸의 것들은 사고 파는 대상이 아니며, 모두에 속한다"고 말한 바있다.

전통적으로 바티칸은 기부금, 임대ㆍ대출 수입, 우표와 동전 판매, 금융 거래등을 통해 돈을 번다.

여기에 교황청의 자선활동과 재정적 손실을 충당하기 위해 전세계 천주교인들이각 교구에서 자유로이 바치는 헌금인 베드로 헌금도 있다. 지난 2003년 이 헌금액은5천580만달러에 달했다.

가장 베일에 싸여 있는 바티칸 재산의 운용처는 일절 계좌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 바티칸 은행인 IOR이다.

지난 1942년 교황 비오 12세가 설립한 이 은행의 소유권과 수익에 대한 권리는물론 교황에게 속한다.

이 은행은 몇 차례 돈세탁, 사기, 마피아 연관설 등과 관련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적이 있다.

이탈리아 암브로시아노 은행을 파산시키고, 목을 매 자살한 은행가 로베르토 칼비도 바티칸 은행과 깊은 연관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사망 전 그는 "내게 무슨일이 일어난다면, 교황이 사임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폴 카시미르 바티칸 은행 총재가 사임했지만, 칼비를 죽음으로 몬 배경은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다.

1978년 즉위 33일 만에 서거한 요한 바오로 1세도 미심쩍은 바티칸의 재정문제를 조사하려 했다가 살해됐다는 소문이 여전히 나돌고 있다.

(로마 dpa/연합뉴스)

 

 

 

 [바티칸은행_비리_의혹_후일담] 1978년 바티칸의 개혁을 추구한 교황 요한 바오로 1세가 즉위한 지 약 1개월 만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훗날 본인을 콜롬보 패밀리 추종세력(Associate) 출신으로 소개한 러키 루치아노의 조카 앤서니 레이몬디가 자신이 바티칸은행 내 비리를 밝히려는 교황을 독살하는 데 가담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 사람의 말이 신빙성이 있는지 없는지,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1979년 마피아-마르친쿠스 대주교-바티칸은행의 수상한 관계를 취재하던 이탈리아 기자가 살해된다. 1982년엔 바티칸은행 비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려진 암브리시아노 은행장 로베르토 칼비(Roberto Calvi) 런던에서 목을 맨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일명 신의 은행가(God's Banker)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칼비는 누군가에게 교살되어 숨이 끊어진 뒤 목이 매달린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를 살해한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다. 이 살인사건의 유력한 배후로 상술한 시칠리아 마피아 고위 간부 칼로가 꼽힌다.

 

 

4.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편집]

요한 바오로 1세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급성 심근경색이었지만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다.

요한 바오로 1세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은 그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긴 한 수녀였고, 그녀가 교황의 개인비서인 마기 몬시뇰에게 이를 알렸다. 곧이어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 비요 추기경에게도 통보되었으나 이 이후에 일어난 일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망 사실을 접한 비요 추기경은 교황의 전속 의사들을 부르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그 중 한 명을 지명하여 육안에 따른 검시만 하고 부검도 없이 일방적으로 사인은 급성심근경색이라고 발표하였다. 이 공식적인 발표는 육안으로 심근경색을 사인으로 단정했을 뿐 아니라 사망시각을 오전 5시 30분이라고 하였는데 비요 추기경이 교황의 사망을 통보받은 시각이 오전 5시였다. 여기에 최초 발견자가 수녀가 아니라 마기 몬시뇰이라고 발표하면서 실제 시신 발견 정황을 감춘 데 더해 요한 바오로 1세가 사망 당시 읽고 있었던 서적이 교회 개혁과 관련되어 파면할 대상자 명단이었으나 다른 서적이라고 발표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또한 의사들이 사망을 통보받기도 전에 시신 발견 십 수분만에 이미 교황의 장례 절차가 개시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교황이 생전에 준비해둔 유언장과 각종 서류를 비요 추기경이 독단으로 가져간 뒤, 그대로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서류의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다.

한편 이 비요 추기경은 바티칸 개혁과 관련하여 요한 바오로 1세가 사망 직전에 파면하기로 결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정계는 물론 언론과 신자들로부터도 비난이 잇따랐으며 이탈리아의 유력지에서도 교황의 부검을 실시하지 않은 사실을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부검은 결국 뒤늦게야 실시되었지만 이미 시신이 방부처리된 상태에다가 비공개로 진행하여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러한 상황 때문에 교황의 죽음에 대해서 논란과 의혹이 그치지 않았고 그에 따른 음모론도 제기되었다. 이를 다룬 서적과 영화(대표적으로 위에 나온 대부 3)도 나오고 있으며 실제로 요한 바오로 1세가 바티칸 내의 검은 커넥션과 부패를 척결하려다가 그들에게 독살당한 것이라고 믿는 이들도 많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러한 음모론이 나오게 만든 교황의 사망확인 절차는 그 정도로 엉터리였고 의혹을 초래할만한 수준이었다. 또한 실제로 요한 바오로 1세는 베네치아 총대주교 시절에도 바티칸이 연루된 금융범죄에 대해서 항의하는 등 바티칸 내의 부패척결에 관심이 많았고 교황 착좌 이후에도 실제로 개혁에 착수하여 많은 이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갖게 했다. 이러한 교황의 행보가 바티칸 내 부패 세력에게 위기감을 초래하여 독살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빈센트 지간테 항목도 참조.

이 주장에 의하면 교황 독살의 범인은 비요 추기경, 마르친쿠스 대주교, 암브로시아노 은행장 로베르토 칼비(Roberto Calvi)[5] 등이라고 하며, 이후 요한 바오로 2세가 후임 교황이 되었을 때 비이탈리아인이라서 바티칸 내부 사정에 어두웠던 그가 소련에 맞선 반공주의와 모국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 교회 일치 운동 등에 열정을 쏟은 대신 바티칸 내부 개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 바티칸의 부패가 가속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위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 확인된 바는 없다. 오히려 요한 바오로 1세는 이미 자신의 병세가 위중하여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요한 바오로 1세의 개인 비서였던 존 마기 몬시뇰은 교황이 건강이 너무 나빠 오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실제로 측근에게 암시한 바 있다고 회고했다. 그는 주간지 젠테와의 인터뷰에서 즉위후 며칠 뒤 요한 바오로 1세에게 중요한 종교 행사가 있는 멕시코행 비행기표를 보여주었으나 "로마를 떠나지 않겠네. 곧 가게 될 것이야."라고 말하며 이를 후임자에게 줄 것을 당부했다고 말했다. 몬시뇰 존 마기는 요한 바오로 1세가 사망 전날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흉부 통증을 호소하면서 수녀에게 평소 복용하던 알약을 준비해줄 것을 부탁한 적이 있다면서, 그의 죽음은 자연사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또 요한 바오로 1세가 생전에 자신은 교황이 될 자격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으며 폴란드 출신의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6]을 적격 인물로 꼽기도 했다. 존 마기 몬시뇰은 젠티와의 인터뷰에서 요한 바오로 1세가 "왜 나지?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추기경처럼 다른 좋은 후보들이 많은데, 그 사람은 바오로 6세가 자기 후계자로 꼽았지 않아?"라고 말하곤 했다고 소개했다.
 
 
 
 

2.8.2. 논란[편집]

베네딕토 16세가 자신을 과도기의 교황이라고 말하면서 몇 년만 재임하고 퇴위하겠다고 발언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퇴위라는 이야기도 있다. 교황의 나이 역시 음모론이 나오기엔 이미 자진퇴위가 설득력 있는 고령으로, 2012년 초 이미 500년만에 최고령의 나이였다.[41] 2013년 2월 20일에는 교황청 내부 소식통을 통해 교황이 왼눈 시력을 거의 잃었다는 발표도 나왔다.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베네딕토 16세의 퇴위가 단순히 건강 문제만이 원인은 아닐 것"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워싱턴 포스트>에 의하면 교황청내의 일부 고위 성직자들의 부정부패와 정실인사를 비판하고 개혁하자는 개혁파의 대표적 인물인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를 베네딕토 16세가 중용해서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 일부 고위 성직자들이 개혁에 반대했고, 비가노 대주교는 교황청에서 밀려나 미국 주재 교황청 대사로 쫓겨났다는 것이다.

비가노 대주교를 쫓아내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인물이 타르치시오 베르토네 교황청 국무원장으로 알려졌으며, 일련의 사태가 결국 베네딕토 16세에게 퇴위를 결심하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요컨대, 국무원장과 궁무처장을 겸임한 반개혁파 타르치시오 베르토네가 이탈리아 출신들을 대거 요직에 앉혀 사실상 최고실력자로 군림했으며, 그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출신-교황청 관료-반개혁세력이 온갖 부패와 전횡을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교황은 바티칸 내부에서 사실상 고립되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바티리크스는, 이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교황과 비밀편지를 주고받던 비가노 대주교와, 교황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가 조직적으로 비밀편지를 유출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이는 바티리크스의 배후로 알려진 파올로 가브리엘레 집사가 사상 초유의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8년의 징역형까지 가능했으나 18개월의 징역형만을 선고받고 그나마 2개월 후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사면됐다는 정황에 의해서도 방증됐다. 그리고 사면으로부터 불과 2개월 후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퇴위 의사를 밝혔다는 것도 단순한 건강문제로 인한 퇴위는 아닐 것이라는 유력한 정황[42]. 한편 베네딕토 16세는 2월 17일 정오 축성식에서 "가톨릭교회의 자정을 위해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하기도 했다.

이 문제는 베네딕토 16세가 일절 잘못한 게 없다. 전통적으로 이탈리아 출신들이 다수인 교황청에서 혼자 독일 출신인 게 엄청난 핸디캡일 뿐이었다. 굳이 교황청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 정부나 회사의 임원단 등 특정 조직의 수뇌부는 어떤 형태로든 파벌이 존재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런 점에서 무지하게 불리했을 뿐이었다. 교황청이나 나토군은 여러 나라의 국적을 보유한 사람들이 상주하는 곳이기에 자신들의 출신국이 곧 자동으로 파벌이 되는 그런 집단인데, 교황청의 경우는 이탈리아 출신이 가장 큰 파벌이다. 그런데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에서 비주류 국가에 해당되는 독일 출신이니, 이런 점에서 한없이 불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상가상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43]의 보도에 의하면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청 내의 추문에 큰 충격을 받고 퇴위를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나와 논란이 되고 있다. <라 레푸블리카>에 의하면 바티리스크 사태 이후 베네딕토 16세는 스페인 출신의 훌리안 에란스 등 3명의 추기경에게 바티리스크 사태에 대한 진상조사를 지시했으며, 이들 추기경들이 베네딕토 16세에게 비밀 보고서를 올려 이것을 읽고 난 베네딕토 16세가 퇴위를 결심했다는 것.

보고서의 내용은 심히 충공깽스러운데, 교황청 내에 동성애로 뭉친 분파들이 존재하며 이들은 여기저기서 밀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들이 십계명의 제6계명과 7계명을 어겼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6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므로 이들의 동성애를, 제7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이므로 이들이 바티칸 은행에서 벌인 수상한 금융거래를 가리킨다는 것. 이 기사가 사실이라면 베네딕토 16세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기사에는 보고서가 베네딕토 16세의 사택에 보관중이며 후임 교황에게 전달되어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바티칸은 이 기사에 대해 무대응으로 일관했으나 베네딕토 16세가 재의 수요일 미사에서 "교회 자정을 위한 영적 싸움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한 것이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2011년에 《YOUCAT》이란 이름으로 발간된 청소년·청년용 교리서에서 베네딕토 16세는 다음과 같은 말로 바티칸 내부의 스캔들에 대해 교황이 은유적으로 거론하기도 했다.
최근에 악마의 공격으로 죄가 교회의 내부, 교회의 심장에까지 스며들어 교회 공동체가 깊은 상처를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이를 핑계 삼아 하느님의 눈길을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입니다!

ㅡ 베네딕토 16세, 《YOUCAT》, 최용호 역, 가톨릭출판사, 2012, p.12
하지만 이런 여러 떡밥들도 사퇴의 결정적 이유를 설명하기엔 분명치 않았기에, 이 퇴위 이후에도 여러 얘기가 나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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