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와 정승화 전 참모총장 관련 일화 / 김종필이 직접 밝힌 관상가 백운학의 놀라운 예지력

 

4. 기타[편집]

대한불교조계종 36대 총무원장을 지낸(법명이 같은 다른 스님입니다.) 승려 원행(圓行)이 쓴 논픽션 <탄허 대선사 시봉 이야기>나 <10.27 법난>에 따르면 정승화 참모총장이 불교 신자였던 당시 오대산 월정사에서 머무르던 탄허를 종종 찾아뵙고는 했는데, 탄허는 평소 정 총장이 자신을 찾아올 때면 "당신은 너무 우유부단하니 본분에만 충실하면 된다. 나와 그렇게 약속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1979년 10.26 사건이 벌어진 다음날 탄허는 제자 원행을 시켜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전화 좀 걸어 보라고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원행을 직접 서울로 보내 정 참모총장을 만나서 "오대산에 한 번 다녀가든지 전화를 한 통만 해 달라." 하고 전하게 했다. 하지만 원행은 참모총장 공관 앞에서 군인들에게 막혀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으므로 끝내 정 총장은 탄허를 만날 수 없었다.

두 달 뒤에 12.12 군사반란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전두환에 의해 국군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강제 연행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승화는 자신의 측근이었던 군법사 한 명을 월정사로 보내 '감옥에서 공부하고 싶으니 탄허가 강의한 화엄경을 보내 달라.'고 탄허에게 부탁했지만, 탄허는 "그 사람은 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가서 그 사람더러 '왜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느냐'고 내가 묻더라고 전하라. 그는 이미 실기(失機)[5]했다." 하고 거절하며 돌려보냈다고 한다. 이듬해 1980년 10.27 법난이 벌어졌고, 정승화 전 총장은 불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





60년대 초반에 2명의 유명한 관상가(觀相家)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백운학(白雲鶴)과 우종학(禹鍾鶴). 백운학은 종로 보령약국 뒤의 한옥 집에서 살고 있었다.
 
필자의 형님도 이분에게 관상을 보았고, 역시 적중했다. 우리형제의 미래도 큰 부분은
다 적중했다. 그의 장기는 단기판단보다는 장기판단에서 빛을 발한다.
10년후에 그의 말은 적중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작은 부분에 관심이 많은데, 생각의 크기 만큼 점괘는 나오는 법이다.
점괘가 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점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5·16 의 핵심리더이며 전 국무총리 였던 JP의 회고다.
“혁명 전 일요일인가 석정선이 찾아왔기에, ‘너 혁명 같이하자’ 그랬더니 ‘난 못 하겠다’고 해.
그래서 ‘알았다. 못 해도 좋으니까 일절 말 내지 마라’ 그랬지. 석정선이 운송사업을 했는데
사고가 자꾸 나서, 나한테 유명한 관상쟁이한테 가보자고 하더군.”
 석정선은 JP의 육사 8기 동기생. 그는 김종필과 함께 정군(整軍)운동을 했다.
두 사람 모두 강제 예편당했다. 두 사람은 백운학을 찾아간다. 백운학은 종로5가 제일여관의 안채를 빌려 쓰고 있었다.
 “백운학이 누군지 난 몰랐지. 차례가 와서 석정선은 대청마루에 올라가 백운학 앞에 앉았고,
나는 관계없으니까 저쪽 복도에 앉아 있었지. 근데 백운학이 석정선은 안 보고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됩니다!’ 하고 소리를 쳐. 내가 ‘뭐가 되느냐’ 했더니 ‘허~’ 웃는 거라.
‘천하(天下)를 뒤집으려는데 됩니다.’ 그러는 거야.”
 천기누설(天機漏泄)이다. JP는 즉각 반응했다. “‘아니 여보, 사람 죽이지 말라’고 딱 잡아뗐어.
그래도 계속 ‘허허’ 하고 웃데.”
 백운학의 신통력은 이어진다.
 “그러곤 석정선한테 ‘당신, 그거 바퀴 달린 거 팔어. 이번엔 사람 죽여.’ 이러데.
내가 오싹했어. 석정선이 운수업 하는 걸 알았던 거지. … 혁명하고 내가 백운학을 데려다
저녁을 먹였는데…. ‘88세 넘기겠어요.’ 그러드만. 내가 ‘그러면 천수를 다하는 거지’
하고 웃었던 기억이 나네. 근데 백운학이는 일찍 죽었어.”

...

시운(時運)은 대사(大事)를 이루게 한다. 천운이라고도 한다. 5·16 거사가 그랬다. 변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민심은 새 질서를 요구했다. 이를 드러내주는 절묘한 장면이 있었다.
1961년 4월 말이었다. 나는 거사를 위한 비밀 준비를 진행 중이었다. 병력 투입을 위한 부대별 출동 계획이 완성돼 가던 때였다. 일요일 아침, 육사 8기 동기생인 석정선이 청파동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사업이 잘 안 되는데, 백운학이한테 좀 같이 가자”고 했다.

백운학은 관상을 잘 보기로 이름난 역술인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국회의원 당선과 장·차관 취임을 맞혔다고 해서 정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낭산(郎山) 김준연의 3대 국회의원(1954년) 당선을 예언했다고도 알려졌다. 나는 “안 가”라고 손사래 쳤다. 그러자 석정선이 “야, 네가 지프차가 있잖니. 그것 좀 태워 달라는 소리다”고 했다. 나는 지프차에 석정선을 태우고 집을 나섰다.

석정선은 정군운동을 같이했다. 그해 2월 나와 함께 군복을 벗었다. ‘16인 하극상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서였다. 60년 9월 영관급 장교 16명이 최영희 합참의장을 찾아가 정군의지를 따져 물은 사건이었다. 예편 뒤 나는 혁명 작업에 뛰어들었다. 석정선에게도 거사에 참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나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 못하겠다”며 빠졌다. 나는 “비밀을 지키라”고만 단단히 일렀다. 이후 석정선은 자동차 두 대를 사서 운수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사업은 자잘한 사고가 자꾸 났다. 그 때문에 백운학을 찾아갔다.

백운학은 종로 5가 제일여관 안채를 빌려 쓰고 있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술집 마담처럼 보이는 여자 손님 네댓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례가 돌아와 석정선이 방으로 들어갔다. 백운학은 안방에 책상을 놓고 앉아 있었다. 나는 마루에 걸터앉아 지켜봤다.

백운학이 석정선은 보지 않고 자꾸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대뜸 날 향해 소리를 쳤다. “됩니다!” 밑도 끝도 없는 됩니다였다.

“뭐가 됩니까?” 내 물음에 그가 큰 목소리로 답했다. “아, 지금 준비하는 혁명….”

“아, 여보쇼! 누굴 죽이려고 엉뚱한 소리를 하쇼!” 나는 백운학 입에서 흘러나온 혁명이란 단어에 화들짝 놀랐다. 행여 누가 들을까 무서워 딱 잡아뗐다. 백운학은 그런 나를 보고 허허 웃었다.

“지금 때가 됐습니다. 다들 원하는 일입니다. 국민 모두 변화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마음 놓고 하십시오. 아무 놈도 말리지 못합니다. 됩니다!” 그는 웅변하듯 말했다.

1962년 2월 동남아 6개국 순방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과 석정선 정보부 2국장.
내 얼굴 어디에서 혁명의 기운이 묻어났기에 관상가가 이를 꿰뚫어 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운학의 얘기에서 나는 민심을 읽었다. 관상은 운명의 정기를 추적한다. 그들의 예견은 민심 흐름과 유리되지 않는다.
한 달 전쯤인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혁신계 좌파단체가 주도하는 야간 횃불시위가 있었다. 데모대 수백 명이 손에 횃불을 들고 명륜동 장면 국무총리 집을 향해 행진했다. 이들은 “데모규제법, 반공특별법을 철폐하라”고 외쳤다. “장면 정권 물러나라”는 구호도 나왔다. 시위대는 경찰차를 부수고 민간인 차량을 탈취하는 난동까지 벌였다. 그 시위는 사회 혼란과 정치 무능의 상징이었다. 그 불안의 그림자가 국민 마음속에 짙게 드리워졌다. 장면 정권은 불안과 혼란을 정비할 능력이 없었다. 시위 이튿날 윤보선 대통령이 여야 인사를 불러 긴급 회담을 벌였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장면 총리, 곽상훈 민의원 의장, 백낙준 참의원 의장, 김도연 신민당 대표, 유진산 간사장, 현석호 국방장관, 양일동·조한백 의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중대한 비상사태라는 데 공감했다. 하지만 아무런 해법을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3·23 청와대 회담을 계기로 정치권은 극심한 정쟁과 분열로 치달았다. 여야는 혁신계의 무정부적인 일탈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점에선 일치했지만 뿌리 깊은 불신과 의심에 구체적인 대안을 도출할 수 없었다. 대다수 국민은 침묵하는 다수다. 그들에게 이 정권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았다. 사회 모든 면이 변혁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백운학의 소리가 민심의 또 다른 반영이라고 여겼다.

1961년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혁신계 단체의 야간 횃불시위. 수백 명이 손에 횃불을 들고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들은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을 철폐하라는 주장을 펼쳤다. 경찰차를 부수는 등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당시 사회 혼란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보여준다. [중앙포토]
나는 서둘러 백운학의 말을 끊었다. “그만 하쇼. 앞에 앉은 사람이나 잘 봐주쇼.”
그제야 백운학이 앞에 있는 석정선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 사람, 사복 입고 왔지만 중령 아니면 대령 출신인데. 그 바퀴 달린 거 그만 처분하지”라고 했다. 석정선은 자신의 정체를 아는 데 깜짝 놀랐다.

자리를 뜨려는데 백운학이 다시 날 바라봤다. 나는 그에게 “두 번 다시 그 얘기 하지 마쇼”라고 주의를 줬다. 그는 대답 없이 껄껄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이 마치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어. 돼, 돼. 다들 올 게 왔다고 할 거야. 방해할 사람 없으니 해.”

관상쟁이까지 혁명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흉중에 은근한 자신감이 더해졌다. 그 무렵 군대가 혁명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하지만 군 수뇌부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 사고(思考)의 나태와 집중력 부족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었다. 군복 입은 군인들이 다방에 삼삼오오 모여 “혁명해야 한다” 떠들어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5월 16일이 오기 전 거사 계획이 새 나간 적이 있다. 그때도 나는 긴장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백운학이 내게 천기를 누설한 건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다. 5·16 거사를 일으킨 지 얼마 안 된 61년 7월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던 나는 백운학을 저녁자리에 불렀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도 그 자리에 있었다. 혁명 성공을 일찌감치 내다본 인물이니 박정희 의장도 한번쯤 만나볼 만하다고 여겼다. 서울시청 뒤편 다옥동(현 중구 다동)의 요릿집이었다. 시중 들던 종업원 두 명을 잠시 물리고 백운학이 박 의장에게 말했다. “각하, 한 20년은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 그 얘기를 들은 박정희 의장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다음엔 어떻느냐”고 물었다. 백운학은 그 질문엔 입을 다물었다.

자리가 파한 뒤 나가는 길에 백운학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이상한 괘인데요. 그 무렵에 돌아가실 것 같아요.”

나는 그 얘기를 박 의장에게 전하지 않았다. 예사롭지 않은 소리라고 그때도 생각했다. 18년 뒤 10·26 그날이 닥치고 나서는 더 놀랐다.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았다.

비리법권천(非理法權天)이란 말이 있다. 이치(理致)가 아닌 것이 이치를 이길 수 없고, 옳은 이치라도 법에 우선할 수 없으며, 법도 권세를 능가하지 못하고, 그 권세라 할지라도 필경에는 하늘, 즉 민의를 거역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숱한 힘과 원칙들이 종국엔 국민의 마음에 합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할 때 JP가 자주 쓰는 말이다.

...



육종관은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에도 청와대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았다. 일설에는 "박정희랑 결혼하면 육영수가 비명횡사한다"는 예언을 들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렇게 친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어머니 이경령과 육영수 자신의 고집 덕분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경령이 육영수의 사주를 무속인들에게 보이니, 다들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산다"고 풀이했다고도 한다. 육종관이 들었던 예언은 저기서 더 살이 붙는다. 바로 "재취(후처) 자리로 시집가야 잘 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는 두 사람 다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우는 김종필의 회고록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61년 어느 날, 식당에 국회의원 당락과 장차관 하마평을 잘 맞히는 것으로 유명했던 백운학이라 불리는 역술인을 초청하였다. 백운학은 각하, 한 20년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는 말을 하고, 자리가 파하는 자리에 이상한 점괘인데요. 끝에 험하게 돌아가실 것 같아요.라며 말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그대로 실현되어 놀랐다고 한다. 결국 육종관은 육영수의 결혼식에도 찾아오지 않고, 이경령·육영수 모녀와도 완전히 갈라섰으며, 경제적 지원도 일절 해주지 않았다.#

육종관이 사위에게 사과한 건 죽음이 임박할 때였다. 죽기 직전 병문안을 온 박정희에게 "내가 부덕하여 큰 인물을 못 알아봤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육종관은 1965년 12월 26일 아들 육인수 전 의원의 창성동(종로구) 자택에서 숨졌다. 그러나 아버지가 들었던 예언은 끝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딸은 물론 사위마저 정말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아버렸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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