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조중훈의 부탁으로 전일본항공(ANA)의 대주주 오사노 겐지가 동성회 정건영을 움직여 김대중을 도쿄 한복판에서 납치했다? 사건을 대충 무마하려고 했던 미국 정부 (feat. 문명자)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후 나는 다짐했다. 기자생명을 걸고 이 사건의 진상만큼은 우리 국민 앞에 명명백백히 드러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은 피해자인 김대중 씨를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민족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킨 박정희 정권을 민족 앞에 심판해야 한다는 분노 때문이었다.

자기 나라 야당 대통령 후보를 다른 나라도 아닌 일본 땅에서 대낮에 납치해다가 바다에 수장하려는 정부가 일본인들의 눈에 대체 어떻게 비쳤을 것인가. 게다가 67년 7월 박정희 정권은 유럽에 있는 한국 지식인들을 마구잡이로 납치해다 대규모 간첩단으로 몰아 이른바 '동백림 사건'을 일으킨 전력이 있었다. 이것이 중세의 해적떼들의 소행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황민사상에 물든 일인들이 '조센징은 어쩔 수 없어'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박 정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그런데 사건 발생 후 일본 정부의 태도가 상당히 야릇했다. 처음에는 '김대중 측의 자작극', '북괴의 공작' 등 엉뚱한 소리를 하다가 한국 정부의 주권 침해 행위를 어물쩡 넘어가려 한다는 언론의 거센 비판에 부닥치자 일본 정부는 "진상을 조사한다" , "주범을 잡는다"하며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일본 정부의 목소리는 눈에 띄게 작아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박정희가 돈으로 다나카의 입을 막았다"는 루머가 분분한 실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73년 10월 대한항공 서울-뉴욕 간 항로 개설 교섭차 뉴욕에 온 조중훈 사장이 한 미국 주재 한국관리에게 떠벌린 무용담이 몇 다리 건너 필자의 귀에 들어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PP(박정희)의 부탁으로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을 만나 김대중 사건을 해결했다."

여기서 오사노란 일본 국제흥업 사주 오사노 겐지를 가리키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전일본항공(ANA)의 대주주이기도 했다. 조중훈은 자신이 사건을 그렇게 무마했으므로 PP의 앞날이 승승장구할 것이며 그런 공을 세운 자신의 앞날은 또 얼마나 양양할 것인가 하고 기염을 토했던 것이다.
그 후 필자는 또 다른 한국의 재계인사로부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기업인들 간에도 김대중 납치 사건과 관련한 조중훈의 행적은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한 정보였으나 철저한 확인이 필요했다. 상대는 일본 수상과 대한항공 사주가 아닌가. 법정에서까지 완벽하게 상대를 이길 수 있을 증거 확보가 필요했다.
73년 11월 김종필 국무총리는 일본을 방문해 다나카에게 45도 각도로 머리를 숙였다. 김대중 사건을 둘러싼 한일 간의 마찰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는 행사였다.

그러나 그들이 마무리했다고 해서 역사조차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한일 간의 검은 뒷거래에 대한 본격적이 추적에 들어갔다. 우선 사건 발생 후 조중훈 씨의 일본 출입국 기록을 확인했다. 그 결과 조중훈 씨는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8월 16일부터 9월 21일 사이 수차례에 걸쳐 도쿄를 오간 것으로 확인됐다. 문제는 일본에서 조중훈 씨의 행적이었다. 그는 어디서 누구를 만난 것인가.

나는 조중훈이 떠벌린 말 중에 등장한 오사노 겐지의 인적사항을 조사했다. 조중훈과 오사노는 의형제 사이라고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오사노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반 국영기업인 대한항공 주식을 10%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조중훈씨가 오사노를 통해 다나카 수상에게 1억엔을 헌금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중훈이 다나카 수상에게 접근하려 할 때 오사노가 중개역할을 맡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나는 73년 8월 16일 도쿄에 온 조중훈씨의 행적을 탐문한 끝에 그가 도쿄 아카사카 거리로 직행했음을 알아냈다. 일본 국회의사당 주변의 아카사카 거리에는 요정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일본 정.재계 요인들은 각기 자신의 단골집들을 가지고 있다. 오사노 겐지의 단골집은 '가와사키' 그런데 이런 요정의 마담들은 기자들이 찾아와서 단골손님에 대해 물어도 절대 입을 열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심지어 은퇴한 후에 죽을 때까지도 손님들의 비밀을 보장하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한 목격자에게서 8월 16일 조중훈씨와 오사노가 가와사키에 갔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나는 가와사키의 마담에게 물었다.

"오사노 사장이 작년(73년) 8월경에 여기 오셨었지요?"

그녀는 정계 거물들을 상대하는 아카사카의 마담답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능숙하게 잡아뗐다.
"48년(서기 1973년) 장부는 창고 깊숙이 박혀 있어 찾아보기가 힘들고.. 그러니 작년 8~9월 경에 누가 왔다 갔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오사노 상은 종전 직후 한 번 왔다 갔을 뿐, 그 후에는 기억이 없는데요."

종전 직후에 한 번 왔다 갔다니! 해도 너무한 여성이었다. 나는 작전을 바꾸었다. 일본 기자들을 통해 가와사키의 한 종업원 여성과 사귀었다. 그녀와 인간적으로 친해진 후 그녀를 통해 오사노와 조중훈이 73년 8월 16일 가와사키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액수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거액의 뭉칫돈이 조중훈으로부터 다나카에게로 흘러갔음이 분명했고 나는 그 흐름을 찾아야 했다. 일본 정치인들의 생리로 볼 때 그 돈이 현금일 것만은 분명했다. 거대한 현금 뭉치의 흐름을 확인하기 위해서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돈이 나왔을 가능성이 있는 곳, 즉 한국과 거래관계에 있는 모든 회사들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필자에게는 사립탐정을 고용해 조사를 시킬 만 한 돈도 없었다. 이 때 나의 취재를 도와 준 사람들은 정의감에 불타 진실을 한번 캐보자고 나선 일본인들이었다.
그들이 근 4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 나는 비로소 검은 뭉칫돈의 출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로 그 곳은 외환은행 도쿄지점이었다. 돈의 흐름을 감추기 위해 외환은행에서 돈을 빼 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예단 때문에 조사를 제일 뒤로 미루었던 곳이 바로 정답이었다. 뭉칫돈의 총액은 무려 3억 엔! 이 돈은 도쿄 지점에서 최고액권 지폐로 인출됐는데 예상과는 달리 한꺼번에 3억 엔이 아니라 1억 엔씩 세 번에 걸쳐 인출됐다는 새로운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인출일은 8월 16일. 이 날은 김대중 사건 이후 조중훈이 오사노와 처음 대면한 날이었다. 두 번째 인출은 이후부터 9월 중순 사이의 어떤 시점이었고, 세 번째 인출은 9월 21일이었다.

뭉칫돈의 인출 시점은 조중훈씨의 일본 출입국 기록과도 일치했다. 조씨는 8월 16일에 일본에 와서 오사노를 만난 후 8월 18일 서울로 돌아갔고, 그 후 8월 18일부터 9월 21일 까지 각각 1억 엔씩을 오사노 혹은 다나카 수상에게 건넸을 것으로 판단되었다.

다음 문제는 장소였다. 조중훈과 다나카는 어디에서 만난 것일까. 조중훈이 미국에서 떠벌렸다는 얘기 중에 그 해답이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였다. 필자는 다시 하코네와 씨름하기 시작했다.
하코네는 일본의 유명한 별장지다. 나는 하코네에 오사노 겐지 소유의 별장이 있는지를 조사했다. 일본 재계의 유력자인 오사노 겐지는 하코네에 자신의 호텔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하코네 코라 호텔이었다. 나는 다시 오사노가 하코네 코라에 온 날짜를 탐문했다. 그 결과 73년 9월 21일 조중훈과 오사노, 그리고 다나카 수상까지 모두가 하코네 코라 호텔에 숙박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오사노가 조중훈과 다나카 수상을 대면시킨 장소는 바로 하코네 코라였던 것이다.

76년 초 나는 청와대에 근무하는 한 인사로부터 박정희와 조중훈의 만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대중 납치사건 직후인 73년 8월 15일 박정희는 조중훈을 청와대로 불렀다고 한다. 박정희는 72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가 당선될 것으로 보고 그 쪽을 적극 지원했는데 뜻밖에 다나카가 당선되는 바람에 다나카측에는 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조중훈을 불러 "조 사장이 그쪽에 인맥이 있으니 나를 좀 도와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이는 사실 조중훈에게 김대중 사건의 해결을 위해 다나카를 매수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중훈은 다음 날 부리나케 도쿄로 가서 오사노를 통해 이 뜻을 전하고 일본돈 1억 엔을 건넸다. 그리고 8월 18일 귀국하자마자 바로 청와대로 가 이 사실을 박정희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9월 21일 드디어 하코네에서 다나카를 만나 외환은행에서 인출해 상자에 넣은 김대중 사건 정치적 해결 사례금 2억 엔을 다나카에게 건넸다.

이렇게 3억 엔을 들여 다나카 매수공작에 성공한 후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그의 말대로 승승장구했다. 경쟁사 하나 없는 독점재벌로 족벌 경영의 극을 치닫다가 결국 거듭되는 항공기 추락 사고로 조중훈씨 부자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오늘의 현실을 보니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런 걸 가리켜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하는 것인가.

하여간 이것이 바로 김종필이 다나카에게 머리를 숙이고 김대중 사건을 정치적으로 마무리하기 전까지 물밑에서 오고갔던 한일 간의 검은 뒷거래의 진상이다.
발표해도 될 만큼 물증과 증인들이 확보됐다고 판단한 77년 초 나는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 기사는 당시 발행부수가 1맥만 부에 달하던 일본 최고의 시사주간지 [주간포스트]에 실렸다.

[다나카, 오사노 겐지, 조중훈의 하코네 회담에 의혹 있다] (77년 3월 11일자)와
[김대중 사건 무마 공작자금 3억과 밀약 내용을 폭로한다] (3월 18일자)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가 실린 [주간 포스트]는 5백만 부가 팔렸는데 한국 내에서도 비밀리에 돌려 읽혀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기사를 쓰고 나니 마치 백두산 꼭대기에 올라선 듯 한 느낌이었다. '대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3억 엔' 기사는 내 이름으로 나간 기사이지만 결코 내 개인의 기사가 아니었다. 아직도 그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는 수많은 협력자들의 열성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선 취재비용부터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김대중 사건이라는 거대 사건과 씨름하는 동안 취재비용은 우리 집을 저당 잡혀 대출받은 은행빚으로 충당되었다. 내가 미국 동료들과 함께 운영하는 통신사 유에스 아시안 뉴스 서비스의 계약사로부터 통신료가 들어오면 은행빚을 갚고 그 후 다시 은행 대출을 받아 취재비로 사용하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이런 속에서 남편 최동현의 고생은 극심했다. 동양통신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던 그는 미국 망명 후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하다가 브로커 라이센스를 따서 그 당시 워싱턴에서 한국식으로 말하면 복덕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복덕방도 잘 되질 않았다. 남편이 집을 사겠다는 교포를 데리고 이곳저곳 열심히 집을 보여주고 난 후 막상 계약단계가 되면 어디서 들었는지 고객의 입에서 "부인이 문명자 기자시라면서요?" 하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민 올 때 소양교육을 통해 미국에 가면 절대로 만나서는 안 되는 반한인사 제 1호가 문명자라는 것을 귀가 닳도록 들은 사람들이 바로 그 문명자 기자의 남편을 중개인으로 해서 집을 사려 하니 겁이 덜컥 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남편은 한국 교포 상대 영업은 포기하고 주로 베트남이나 필리핀 사람을 상대로 부동산 중개소 일을 하게 되었다.

3억 엔 기사가 나가자마자 일본 정계가 시끄러워졌다. 다나카는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했다. 나는 답했다.
"좋소, 법정에서 만납시다."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사회당 소속의 안타구 의원은 하토야마 외상에게 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과 필자를 증인으로 채택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워싱턴 주재 일본대사관측은 나에게 일본 국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나는 답했다.
"김대중 납치 사건 무마비 3억 엔 사건에 대해서는 일본 경찰이 모두 알고 있는데 사건을 취재한 기자가 일본 국회에까지 진상을 증언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게다가 내 기사가 나간 후 김대중 납치 사건 발생 당시 미국무성 한국 과정이었던 도널드 레이너드 씨는 일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한일 간의 3억 엔 수수설에 대해 "주한 미대사관의 정보보고에 의해 우리(미국)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답변함으로써 나의 기사를 확인해 주었다.

사실 국무성 한국 과장은 서울의 주한 미 대사관, 도쿄의 주일 미 대사관 등 각지의 대사관에서 일일보고로 올리는 한국관계 정보를 총괄해서 받아보는 자리다. 더구나 당시는 미 CIA가 청와대를 도청해서 말썽이 된 시점이었으니 그가 공개한 정보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두말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일본 국회가 발칵 뒤집혔다. 국회의원들은 연일 일본 외상에게 미국측에 사태의 진상을 확인해서 보고하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미 국무성이  다급해 졌다. 번스 미 국무장관은 주일 미국대사관에 다음과 같은 훈령을 보냈다.

"미국은 김대중 납치 사건이나 기타 일본 내에서의 한국의 부정한 활동에 대해 일본 국회의원들과 의견 교환을 할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본 외무성에 분명히 밝힐 것. 레이너드 전 한국 과장의 언급은 개인 자격의 논평으로 국무성은 일체 논평하지 않겠음."
그러나 뒤에 일본 국회의원들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이 미국을 방문해 레이너드 한국 과장에게 진상을 확인 했을 때 그는 다시금 분명히 한일 간의 3억엔 수수설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뒤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이미 76년 3월 25일 미 하원 국제 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개최한 비밀청문회에서 '3억 엔 문제'를 증언 했다고 한다. 결국 이 기사를 쓴 후 나는 박정희, 조중훈, 오사노, 다나카 등 그 누구로부터도 고소당하지 않았다.

레이너드는 국무성 한국 과장에서 물러난 후 다른 자리로 가지 못하고 관직에서 영구히 은퇴했다. 이 같은 불이익을 예상하면서도 양심을 걸고 부정을 폭로했던 레이너드와 같은 미국인이 있었음을 한국민들은 영원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에 민간정부가 들어서기를 열망했는데 아쉽게도 그것을 보지 못하고 93년 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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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건영

 

동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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