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회 일본 커넥션, 쿠데타 정권과 친한파



* 기시 노부스케와 CIA (데이비드 록펠러) 커넥션

- 기시는 전쟁이 끝난후 고향 야마구치현에 은둔해 있다가 전쟁범죄 혐의로 체포되었다. 허나 도조가 목이 달아난 것과는 달리 경제통이었던 기시나 코다마 요시오는 써먹을 궁리가 있다고 봤는지 GHQ는 도조가 처형된 다음날에 이들을 불기소 처분하고 공직추방조치만을 취하게 된다. 물론 이것도 공짜는 아니었다. 기시와 코다마는 일본이 점령지에서 약탈한 보물들과 자신들만이 알고 있던 국가기밀정보를 넘기는 조건으로 사법거래를 해 풀려난 것이다.

-   전범 용의자 출신의 기시가 총리의 자리에 오를수 있었던건 무엇보다 풍부한 자금력 덕분이었다. 기시가 이시바시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될 당시에 이시바시 내각의 간사장이었던 미키 다케오가 기시와의 정치적 스탠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찬성한 것도 기시의 풍부한 자금력과 인맥을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기시의 금맥(金脈)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되었다.  첫째, 철강업계였다. 기시는 알다시피 상공관료의 거두였고 나가노 시게오, 후지이 헤이고 등 철강업계의 실력자들과는 태평양 전쟁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둘째, 경단련, 일본상공회의소를 비롯한 경제단체이다. 일본 경제계의 집행부와도 같았던 이들 단체에도 기시의 인맥이 적잖이 포진해 있었는데 우에무라 고고로, 후지야마 아이이치로 같은 인물들이 대표적이었다. 경단련 부회장, 회장을 오랫동안 역임하며 재계의 정치자금조성을 주도한 우에무라는 기시와는 농상무성시절부터 함께 일했던 사이였고 기시의 문경지우라고 까지 일컬어졌던 후지야마 아이이치로는 일본 최대의 설탕재벌인 동시에 일상 회장을 역임하며 '친구' 기시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다. 셋째는 닛산의 아이카와 요시스케, 구하라 광업의 구하라 후사노스케 등 기시와 동향인 야마구치현 출신 재벌들이었다. 아이카와와 구하라를 필두로 한 이른바 조슈(長州) 재계인들은 이토 히로부미 이래 6번째의 조슈 출신 재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스미토모 그룹이었다. 스미토모 화학 회장이면서 사장회인 백수회(白水会)의 좌장이었던 도이 마사하루는 기시와 동경대학 법학부 시절부터 수석경쟁을 하며 교우를 가졌던 사이였다.  여기에 더하여 기시는 해외 유전 개발을 비롯하여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한건 물론이고 코다마 요시오, 사사카와 료이치 등을 통하여 우익세력에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리고 후일 드러난 사실이지만 심지어 CIA로부터도 자금을 지원받았다.

* 기시는 1984년 통일교 회의장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 교세를 한창 확장하던 통일교의 뒤를 밀어준 사람이 기시였다. 1973년 11월 23일에 통일교 본부에서 찍은 사진. 기시는 생전 문선명과 돈독한 관계였는데 (당시 통일교 본부가 입주했던 저택의 원래 소유주가 기시였다.), 이것이 훗날 외손자의 명을 빨리 재촉하는 화근이 되었다. (시 노부스케는 통일교의 활동을 묵인하는 대신 통일교는 기시 노부스케를 포함한 자민당에 표와 선거자금을 지원해줬다.)

* 거물 우익, 픽서였던 야쓰기 가즈오, 사사카와 료이치, 코다마 요시오같은 인물들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나오는 것이 기시 노부스케와 관계도이다. 쇼와의 요괴라는 별명에 걸맞게 기시는 양지, 음지를 가리지 않고 방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 친분이 있는 한국인으로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이후락[32], 친일파 정치깡패였던 박춘금, 롯데그룹 창업주인 신격호 회장이 있었다. 신 회장은 기시 노부스케 뿐 아니라 사토 에이사쿠, 아베 신타로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리고 신격호의 차남인 신동빈 회장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와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김성곤 커넥션

- 서울 지하철 공사를 수주한 미쓰비시

- 기시와 박정희 양측을 위한 로비 자금 때문에 공사 자금이 몇 배 부풀려졌다.

- 기시가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총리를 움직여 일본의 식량관리법을 개정하고, 1300억엔 가치의 103만톤에 달하는 쌀을 한국에 무상 원조함; 이 일본쌀을 박정희 정부는 국내쌀로 둔갑하여 시장에 판매하여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임.

- 기시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1등급 수교훈장 받음. 

- 기시의 만주국 시절  '만주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모방하여,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명명함. 박정희의 유신 정권은 메이지유신의 그 유신에서 따왔다. 박정희는 기시에게 보낸 친서에서 유신지사들을 존경한다는 투로 적음.


* 세지마 류조와 박정희, 한국 커넥션

 세지마 류조도 일본 제국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만주군 장교를 했던 박정희와 교분이 있었다. 박정희가 졸업한 2년제 만주국육군군관학교는 4년제인 일본육군사관학교 시험에서 떨어진 일본인들이나 가는 곳으로 졸업 후 일본육사 편입이 가능하였고, 일부 성적이 우수한 조선인들도 만주군관학교 줄업후 일본 육사 편입이 가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 군관 학교 출신들은 일종의 열등의식과 함께 일본 육사 출신들을 경외하는 모습도 보여줬는데 대표적으로 박정희가 국군내에서도 일본 육사 출신에 대해 제법 경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세지마도 박정희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한국에 자주 와서 청와대에서 박정희와 만났다고 한다. 1965년 한일협정은 이런 분위기를 이해해야 하며 만주군 소위 출신인 박정희와 만주국 상공대신이었던 기시 노부스케로 대표되는 양국의 소위 만주국 인맥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물론 말단 소위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만주국 당시 박정희는 실권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긴 했다.

하여튼 관동군 참모 출신인 세지마 류조도 이런 만주국 인맥의 일원으로 한일양국의 우익세력을 잇는 밀사 역할을 하였다.[7] 박정희 정권 시절 세지마 류조는 이토추상사 회장으로 한국시장 진출을 위해서 한국 기업인들과 만나면서 친분을 쌓았다. 예를 들어 재일교포 출신인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는 친구 사이로 지냈고[8], 박정희의 측근인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도 어느정도 친분을 쌓아 "보통 자기를 만나면 누구던 돈달라는 이야기부터 하는데, 사업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이 회장이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세지마 류조의 한국내 인맥을 활용해서 이토추 상사는 1기 서울지하철 공사, 포항제철 장비 납품 등 상당한 이권을 챙길 수 있었다. 

세지마 류조는 박정희 정부와의 만주 커넥션을 바탕으로 일본기업의 한국 진출 교두보 역할을 해 이토추 상사 평사원에서 시작해 회장 자리에까지 오름. 세지마 류조는 역시나 한국과 일본 정재계에 개입했던 야쿠자이자, 미국 CIA의 끄나풀이었던 코다마 요시오와 친분이 있었고 똑같은 우익.


* 세지마 류조가 박정희에게 한 조언

- 일본처럼 종합상사를 만들어라

 

* 세지마 류조와 록펠러계 록히드마틴 커넥션

 이토츄 상사에 재임 후 가장 인맥을 잘 써먹은 사례가 F-104 스타파이터의 항공자위대 계약이 될 것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새로운 방공전투기로 F-104와 F-106을 놓고 고민중이었데, 안정성을 추구하는 쪽은 F-106을 지지하고 보다 빠른 스크램블 속도와 가격을 추구한 쪽은 F-104를 밀고 있었다. 이에 록히드의 일본 대리인을 담당하고 있던 이토츄 상사에서는 세지마 류조의 군 재직당시의 인맥을 활용 전방위 로비를 펼쳐 F-104 스타파이터의 납품을 성사해낸다. 그리고 이때 스타파이터를 팍팍 지지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진주만 공습을 이끌었던 구 일본군 에이스 겐다 미노루 되시겠다. 여기서는 인맥이라고 해서 언급하고 있기는 한데, 이건 록히드 사건의 일부분으로 꼽힐 정도로 흔했던 록히드 마틴의 뇌물 스캔들 가운데 하나이다. 독일과 네덜란드에 각각 1천만 달러 이상을 뿌렸는데, 일본에서는 이토츄 상사를 대리인으로 내세워서 뇌물을 쓴 것이다. 참고로 록히드 스캔들을 다룬 영문 위키 문서에 따르면, 기존에 사용하던 스타세이버의 대체품으로 원래 예정된 기종은 F-104도 F-106도 아닌 그루먼사의 F-11F-1F 슈퍼타이거였다고 한다.


* 일본 우익 = 친한파


* 일본 우익 및 일본 정재계가 한국을 도운 목적

- 일본을 지배하는 록펠러계가 빅터 로스차일드-공산주의에 맞서 한반도를 일본을 지켜줄 전방으로 만들기 위해

- 한국을 일본 경제에 종속된 하청기지로 만들기 위해

1) 이후 65년간 대일무역적자ㅡ 기술, 소재 분야에서 누적됨

2) 일본은 한국에 20억 달러 차관제공으로 86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벌어들임

경제학에서는 위의 가마우지로 물고기 잡는 기술에 비유해서 가마우지 경제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주로 '원자재 또는 부품을 수입 → 소재를 조립·완성 → 완제품 수출'의 과정을 거치는 중간 가공 국가(가마우지)가 원자재와 부품을 조달하는 국가(어부)에게 무역이익(물고기)을 상당수 뺏기는 상황을 말한다. 이는 조립만 가능하고 원자재의 생산과 부품의 공급을 자체적으로 할 능력이 없거나 혹은 열위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입하는 까닭이다.

한국의 취약한 부품·소재 산업으로 인하여 완제품을 수출하여도 부품과 소재를 수입하는 나라인 일본에게 실익을 빼앗기게 되는 문제를 지적한 말로, 일본의 경제평론가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가 1989년 <한국의 붕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1999년 경제평론가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 역시 ‘무역수지를 떠받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부품 산업인데 한국은 부품 산업을 육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율 하나에 국가 전체의 흥망성쇠가 달려 있는 외부 의존형 국가경제를 벗어날 수 없다.’고 진단한 바 있다.


* 박정희는 박정희 나름대로 쿠데타로 집권한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 경제발전을 할 필요가 있었고, 북괴의 침입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자금에 의존함.


* 데이비드 록펠러가 한일 수교를 원했던 이유

미국은 무조건 1965년 이내에 끝내라는 시한까지 정해두고 한일 양국을 압박했다.

한일수교는 양국이 공산권에 대항하는 구도로 양국에 하루빨리 수교를 맺으라는 미국의 압력이 가장 컸으며, 일본의 자본과 기술에 한국의 노동력을 결합하면 매우 가난한 한국의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된다는 해외 경제기관들의 조언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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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나카소네 야스히로 커넥션

- 한일이 공조한 1980년 5월 10일 북한의 남침 정보 조작 통해 전두환의 계엄령 정당화

- 일본, 한국으로부터 11억 달러 무기계약 체결하고 무기 사들여 전두환 신군부 지원

- 일본이 지원한 40억 달러로 전두환 정부는 박정희 때부터 쌓아온 무역적자 해소

전두환과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한일정상회담도 세지마 류조가 물밑에서 어느정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런 막후공작으로 나카소네는 1983년 현직 일본 총리로는 최초로 한국을 공식 방문했다. 나카소네는 방한 기간 동안 노신영 외무부장관과의 밀담을 통해 40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으로 집권 초기 전두환 정권에게 활력을 열어줬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내세웠던 논리는 소위 안보경협론이었다. 한국은 소련-북한의 공산권을 막고 있는 방파제 역할을 떠맡으면서 국가예산의 1/3을 국방비로 지출하는 등 허덕이고 있는데, 정작 안보혜택을 보고 있는 경제대국 일본은 아무런 기여도 없이 무임승차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 조건 없이 안보부담금 100억 달러를 내놓으라'는 요구였다. 경제가 엉망이던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일본이 한국의 안보에 기여해야 한다면서 이 주장에 공감했지만, 온건파였던 일본의 스즈키 젠코 총리는 안보경협론은 평화헌법, 전수방위 원칙 위반이라면서 단호하게 거절한다. 전두환 정권은 100억 -> 60억 -> 40억 달러 순으로 계속 액수를 내리면서 어떻게든 차관을 얻을려고 매달렸지만, 재정건전화를 목표로 하고 있던 스즈키 정권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지만 1982년 말 스즈키가 물러나고 강경우익 성향의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고, 바로 이때 양국의 우익 세력을 막후에서 연결하는 세지마 류조가 물밑 협상을 진행해서 결국 5년간 차관 40억달러 지원이 결정된다. 하지만 자민당 정권은 공식적으로는 안보부담금이라는 논리는 거부하고, 단지 우호국을 위한 ODA 지원이라고 포장한다. 그리고 1984년부터 1989년까지 들어온 일본 차관 40억 달러는 SOC 투자 등에 쓰이면서 한국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한국 정재계와 두터운 친분이 있던 세지마 류조에게 물밑 작업을 지시

 이게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62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당시 일본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 의원은 기자들과의 공개인터뷰에서 "박정희와 자신은 부자지간 같은 사이라면서 아들의 경사를 보러 가게 돼서 기쁘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할 정도였다. 설사 오노 반보쿠가 실제로 박정희와 친분이 있었다 한들, 일국의 대통령에 대해 이런 식으로 공개발언하는건 상대를 무시하는 외교적 결례이다. 헌데 웃긴건 이 발언에 당시 한국의 야당들은 크게 반발했지만, 박정희와 집권 민주공화당은 오히려 침묵했고, 일본에선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일본 정치권에선 한국을 자신들의 아래로 깔보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 세지마 류조가 전두환에게 한 조언

- 일본이 나고야를 양보하고 서울을 개최지로 밀테니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조언

박정희가 사망한 다음에는 육사 11기 출신인 권익현 삼성고문이 다리를 놔줘서 세지마 류조는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세력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특히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도 전에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의 국가발전과 체제안정을 위해선 올림픽이나 만국박람회 같은 국가적 거대행사를 유치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려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이것은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잠깐 나온 바 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은 물론 이 조언 하나 들었다고 추진한 것은 아니겠지만, 국격 상승 효과도 있으니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사활을 걸고 결국 성공하게 된다.

-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방한을 주선

 

* 나카소네 야스히로 소속 삼극위원회의 계획

- 한국을 일본에 종속된 하나의 블록으로 만들어 지배

- 한국과 일본을 하나의 세력권으로 묶어 빅터 로스차일드 공산체제에 대항

- 배후에 이후락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음.


* 전두환은 전두환 나름대로 쿠데타로 집권한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 경제발전을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 자금에 의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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