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인도 식민통치에 파견나간 관리들의 고통에 대해
튜링의 부친처럼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은 영국 지배층에게도 힘들었을거 같다. 낯설고 미개하고 위생이나 청결이 오늘날에도 극도로 낮은 인도에서 견뎌야했으니까
앨런 튜링의 아버지인 줄리어스 튜링(Julius Mathison Turing)이 인도 제국 공무원(ICS)으로 근무했던 시절을 떠올려 보면, 당시 영국 지배층이 겪어야 했던 환경적, 심리적 고충이 상당했다는 점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합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면 화려한 '영국령 인도(Raj)'의 지배자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거친 현실이 있었습니다.
1. 치명적인 기후와 질병의 위협
당시 인도에 파견된 영국인들에게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자연환경과 질병이었습니다.
풍토병의 공포: 말라리아,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등은 영국인들에게 치명적이었습니다. 의학이 발달하기 전이라 가벼운 감염이 사망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살인적인 더위: 에어컨은커녕 전기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던 시절, 인도의 고온다습한 여름은 북유럽 기후에 익숙한 영국인들에게 고문과도 같았습니다. 이 때문에 여름만 되면 정부 부처 전체가 비교적 선선한 고산 지대(심라 등)로 이동하는 '공식 피서'가 정례화될 정도였습니다.
2. 고립감과 '패밀리 분리'의 고통
튜링의 가족사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당시 인도에 근무하던 영국인들은 극심한 고립감과 가족 해체를 겪어야 했습니다.
자녀와의 생이별: 영국인 부모들은 인도의 열악한 위생 환경과 거친 기후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본국의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아주 어린 나이(보통 5~6세)에 자녀를 영국의 하숙집이나 친척 집에 홀로 보냈습니다.
정서적 결핍: 앨런 튜링과 그의 형 역시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영국에서 자랐고, 이로 인해 평생 정서적 결핍과 외로움을 겪었습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자식의 성장 과정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심리적 고통이었습니다.
3. '문명화'라는 오만과 낯선 문화에 대한 공포
당시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미개한 곳을 문명화한다'는 선민의식(이른바 '백인의 짐' )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압도적인 머릿수의 인도인들 사이에서 언제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를 품고 살았습니다. 1857년 인도 세포이 항쟁의 기억은 영국인들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아, 늘 현지인들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역사의 두 얼굴 지배층으로서 누렸던 막강한 권력, 하인들을 거느린 호화로운 생활, 높은 급여라는 '특권'이 있었던 반면, 그 대가로 목숨을 건 위생 환경, 가족과의 단절, 고독감을 지불해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튜링의 아버지를 비롯한 당시 공무원들의 삶을 보면, 제국주의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개인들의 고단하고 팍팍했던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도에서 영국에 있는 가족들로 돈을 어떻게 부쳤지?
당시(19세기 후반~20세기 초) 인도 제국 공무원(ICS)이나 군인들이 영국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송금하는 것은 오늘날처럼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륙과 대양을 건너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었죠.
당시 영국령 인도에서 본국으로 돈을 보낼 때 주로 사용했던 3가지 핵심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인도교환은행(Exchange Banks)을 통한 전신환(Telegraphic Transfer)
1870년대 이후 해저 전신 케이블이 영국과 인도 사이에 깔리면서 금융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원리: 영국의 '로이드 은행(Lloyds Bank)'이나 인도의 '런던-델리 은행' 같은 인도교환은행에 루피(Rupee)를 입금하면, 은행이 런던 지점에 전신(Telegram)을 보내 영국의 가족에게 파운드(Pound)로 지급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특징: 가장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튜링의 아버지처럼 고위 공무원들이 가장 애용했습니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 전신 이용료와 송금 수수료가 꽤 비쌌기 때문에 주로 큰돈을 보내거나 급한 일이 있을 때 사용되었습니다.
2. 환어음(Bill of Exchange)과 수표 발행
가장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방식은 은행이나 무역회사가 발행한 환어음이나 수표를 우편으로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원리: 인도의 은행에서 영국의 가족을 수취인으로 하는 환어음을 구입한 뒤, 이를 편지봉투에 넣어 영국으로 가는 우편선(Mail Steamer)에 실어 보냈습니다. 영국의 가족은 이 종이 어음을 들고 런던의 은행에 가서 파운드로 바꿨습니다.
단점(시간): 수에즈 운하가 개통(1869년)된 이후에도 인도에서 영국까지 우편선이 가려면 최소 2주에서 3주가 걸렸습니다. 만약 배가 난파되거나 우편물이 분실되면 돈이 공중에 뜨기 때문에, 대개 똑같은 어음을 두 장 발행하여 서로 다른 배에 나누어 싣는 '안전장치'를 쓰기도 했습니다.
3. 인도 정부 발행 '의회 환어음(Council Bills)'
이 방식은 정부 차원에서 장려한 매우 독특하고 거대한 금융 시스템이었습니다.
배경: 영국 정부는 인도에서 거둔 세금(루피)을 영국 본국으로 가져와야 했고, 반대로 인도에 있는 영국인들은 본국의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했습니다.
원리: 런던에 있는 인도 총독부 의회(India Office)가 파운드를 받고 '환어음'을 발행하면, 인도 무역상이나 개인이 이를 사서 인도 현지 은행에 제출하고 루피로 바꿨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신용을 활용해 개인들이 본국으로 안전하게 자금을 역송금할 수 있는 창구가 되었습니다.
💸 매달 찾아오는 '환율의 피눈물'
당시 인도에서 돈을 보낼 때 가장 큰 골칫거리는 환율이었습니다. 인도는 은(Silver)을 기준으로 하는 '루피화'를 썼고, 영국은 금(Gold)을 기준으로 하는 '파운드화'를 썼습니다.
19세기 후반 전 세계적으로 은 가치가 폭락하면서 루피화의 가치가 뚝 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에서 열심히 루피를 벌어 영국에 있는 자녀의 하숙비와 학비(파운드)로 보내던 튜링의 아버지 같은 공무원들은 "월급은 그대로인데, 영국으로 보내면 반토막이 난다"며 엄청난 재정적 압박과 스트레스를 겪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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