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과 김대중이 당한 고문들

 

이해찬 전 총리는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세 차례나 투옥되며 신군부와 공안 당국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수준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특히 2026년 1월 25일 그의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가 평생 짊어지고 살았던 고문 후유증과 당시의 참혹한 상황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그가 겪은 주요 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요 고문 사례와 내용

그는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당시 남산 중앙정보부(또는 합수부)로 끌려가 가장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 고춧가루 물고문: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그 위에 고춧가루를 탄 물을 부어 질식 직전까지 몰아넣는 고문입니다. 이는 호흡기를 태우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극도의 공포를 유발합니다.

  • 무자비한 구타와 '통뼈'의 손상: 그는 평소 체격이 건장하고 뼈가 튼튼해 '통뼈'라는 별명이 있었으나, 고문 기술자들은 그가 실신할 때까지 각목과 주먹으로 전신을 구타했습니다. 당시 "이해찬이 남산에서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 잠 안 재우기 및 심리적 압박: 며칠 밤을 꼬박 새우게 하며 허위 자백을 강요받았고, 이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감각이 마비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2. 고문의 흔적과 후유증

그는 고문에 대해 평소 말을 아끼는 편이었으나, 그 상흔은 평생 그의 몸과 정신에 남았습니다.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그는 훗날 회고록 등에서 "남산 근처만 가도 당시의 비명 소리와 공포가 떠오른다"며 평생 '남산의 악몽'에 시달렸음을 고백했습니다.

  • 신체적 쇠약: 2026년 별세 당시에도 측근들은 그가 젊은 시절 당한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골병이 들었다"며, 그 후유증이 노년의 건강 악화와 결합되어 치명적이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혹독한 탄압을 받은 정치인 중 한 명으로, 여러 차례 심각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습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건들이 그의 생애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1. 주요 고문 및 가혹행위 기록

  •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합동수사본부):

    •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지하 취조실에서 60일 동안 잠 안 재우기, 구타, 고문을 당했습니다.

    • 당시 기록에 따르면, 옷을 모두 벗긴 채 고문 직전까지 몰아넣거나 15시간 이상 쉬지 않고 심문하는 등 정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가혹행위가 이어졌습니다.

    • 이때의 고문으로 인해 함께 체포되었던 아들 김홍일 의원은 평생 파킨슨병과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기도 했습니다.

  •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 일본 도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었을 때, 선박 위에서 몸이 묶인 채 바다에 던져질 뻔했습니다. 이때 그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간절히 기도하며 버텼다고 회고합니다. 직접적인 '심문 고문'은 아니었으나, 살해 위협을 동반한 극심한 정신적 고문이었습니다.

2. 고문이 남긴 흔적

  • 다리 절음: 1971년 의문의 교통사고(암살 기도 의혹) 이후 고문과 투옥 생활이 겹치면서 다리가 불편해졌습니다.

  • 정신적 트라우마: 그는 자서전에서 고문당하던 순간을 "인간의 존엄성이 처참하게 파괴되는 과정"이라고 묘사하며, 그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종교와 철학에 의지했다고 밝혔습니다.


💡 이해찬 회고록과의 연결고리

이해찬 전 총리가 1980년에 당했던 고문도 결국 **"김대중이 배후라고 자백하라"**는 신군부의 압박 때문이었습니다. 즉, 김대중 전 대통령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인물들까지도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뽑아내기 위해 무차별적인 고문을 당했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문을 가했던 가해자들을 나중에 어떻게 대했는지(용서와 화해) 그 뒷이야기도 궁금하신가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당시 고문과 사형 선고의 기록 이 영상은 1980년 신군부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했던 과정과 그 당시 자행된 고문의 실상을 잘 보여줍니다.

 

 

 

2.3. 언론의 왜곡보도[편집]

신군부가 장악한 여러 언론들은 해당 사건을 '용공사건'으로 몰아간 한편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형성에 열을 올렸다. 방송 쪽에선 KBS는 8월 2일 <한민통의 정체>, MBC는 9월 11일 <한민통과 김대중>이란 보도특집 프로그램을 각각 방영했고 심지어 <경향신문>도 9월 11일자 특집기사를 내보내 김대중을 '선동과 권모술수로 얼룩진 마키아밸리즘의 화신'으로 폄하했다. 나머지 신문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결같이 '약속 잘 뒤집는 거짓말쟁이'나 '계략, 선동의 명수', '대통령병 환자' 등으로 폄하했고 이는 호남을 제외한 전 국민에게 김대중의 부정적 이미지만 뇌리에 새기는 후폭풍을 낳았다.

2.4. 국제적인 김대중 구명운동과 미국 망명[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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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도소에 구속수감되었을 때 촬영된 김대중의 머그샷.

전두환은 김대중의 사형을 집행할 기세였지만 국제사회는 김대중에 대한 구명을 촉구하면서 전두환을 압박했다. 당시 김대중은 이미 동아시아의 만델라, 동아시아의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알려져 있었고 최종 판결 시 남긴 최후 진술에서 "나는 먼저 죽지만 먼저 죽은 나를 생각해서 이 땅에서 다시는 정치보복이 없도록 해달라"고 한 것이 알려지면서 국제적으로 김대중에 대한 동정여론이 확산되었다. 게다가 재판 과정에서 미국 국무부 법률담당 특보가 직접 참관하는가 하면 CIA 한국지부 관계자가 "우리는 김대중 씨에 대한 당신들의 고발이 매우 억지스럽다고 생각한다."는 말로 사실상 전두환 정권에 대한 경고를 했다.

이 와중에 당선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역시[3] 김대중의 사형을 막기 위해 와인버거 국방장관과 그레그 전 CIA 한국지부장[4]을 파견해 김대중을 구명할 것을 전두환에게 요구했다.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도 김대중의 구명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미국 부통령이 된 앨 고어 하원의원도 김대중의 석방을 촉구하는 항의서한을 전두환에게 발송했다. 독일에서는 빌리 브란트 전 총리가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섰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두 차례 서한을 보내 김대중을 선처해 달라고 촉구했다.

이런 국제적인 압력에 전두환은 결국 김대중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1981년 1월 31일 육군교도소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되고 1982년 3월 2일 다시 20년으로 감형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이 우회적으로 압력을 가하고[5] 심지어 일본[6]까지 북한과의 수교를 주장[7]하면서 전두환을 압박하자 결국 1982년 노신영 국가안전기획부장이 김대중을 석방해 미국, 일본과의 외교관계 마찰을 막아야 한다는 건의를 하기에 이르게 되었다.[8] 평소 노신영의 혜안을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던 전두환은 자신의 고집을 꺾고 1982년 광복절 특사에 김대중을 포함시킬 것을 검토했지만 군부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이 이어지면서 전두환은 노신영과 상의하여 김대중을 미국에 보내기로 결정했고 노신영은 김대중의 아내 이희호를 안기부 안가로 불러서 설명했다.[9] 이를 전해들은 김대중은 미국에 갈 이유가 없다면서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미국으로 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을 탄압하지 않겠다는 노신영의 제안을 듣고 나서야 마음을 돌렸다. 그리하여 1982년 12월 김대중은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어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 자유의 몸이 되었다.

2.5. 귀국과 가택연금, 그리고 사면[편집]

그러나 1985년 1월 8일 김대중은 성명서를 통해 조국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 의사를 밝혔다. 김대중의 주변 인물들은 2년 전인 1983년에 김대중과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필리핀의 민주 투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귀국하자마자 피살된 점을 상기하며 귀국을 말렸지만 당시 대한민국은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비록 민주정의당에게 유리한 불공정한 선거였지만 이 선거는 당시 민주 세력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에[10] 김대중은 귀국을 준비했다.

이에 대한 전두환의 반응은 당연히 극대노. 이를 반영하듯 1월 23일에는 최창윤 청와대 정무비서관이 뉴욕 타임즈와의 회견에서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교도소에 재수감하여 잔여 형기를 집행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문제는 당시 노신영 안기부장과 리처드 워커 주한 미국 대사가 김대중의 귀국 연기 + 한국 정부의 사면 조치를 놓고 조율 중이었으나, 전두환이 워커 대사와의 면담에서 일방적으로 김대중을 재수감시켜 버리겠다는 강경 발언을 해 버린 것이다.[11] 한마디로 전두환이 대놓고 미국을 향해 도발한 셈인데 이에 백악관이 청와대를 향해 내놓은 답은 "김대중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으면 4월로 예정된 전두환의 방미 정상회담 일정을 취소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결국 청와대에서는 최창윤 비서관의 인터뷰가 개인 발언일 뿐이라면서 꼬리 자르기를 시전함과 동시에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가택연금만 시키겠다고 물러섰으나 미국 국무부에서는 한국 내 민주주의 위기를 주제로 한 강연에 김대중을 초청하는 등 계속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마침내 1985년 2월 8일 김대중은 김포국제공항을 통해 약 2년 만에 귀국했다. 놀라운 점은 당시 서울로 향하는 김대중의 곁을 수많은 미국인들이 에워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평범한 미국인이 아니라, 미국 현직 연방 하원의원 토머스 포글리에타(Thomas M. Foglietta)와 에드워드 피앤(Edward Feighan), 지미 카터 행정부 인권담당 차관보였던 퍼트리샤 데리언, 한국 인권문제 운동가 패리스 하비 목사, 한반도 문제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 워싱턴 대학교 교수, 전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 대사인 로버트 화이트, 국제법률가위원회 미국협회 회장 윌리엄 버틀러, 전투적 무신론자로 유명한 언론인이자 평론가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의 여러 미국의 저명인사들이 미국 현지에서부터 김포국제공항 입국장까지 김대중을 에워싸고 이동했다.

뿐만 아니라 주한 미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이 김포공항에서 김대중의 신병을 확보하여 직접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가도록 백악관이 사전에 지시한 상태였다. 결국 전두환 정권이 혹시나 김대중을 암살하는 공작을 펼 거라는 우려를 미국 인사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내비친 것이며 제 아무리 전두환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감히 미국의 저명 인사들을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안기부의 방해로 주한 미국 대사관 관계자들이 김포공항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김대중이 맞이한 건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밖에 없었다. 더 큰 문제는 김대중을 미국이 보호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안기부 요원과 경찰들이 미국 인사들에게 무력을 행사하면서까지 김대중 부부를 강제로 버스에 태워 동교동 자택으로 데려갔고[12] 이에 분노한 미국 인사들이 외신 기자들을 향해 "한국 경찰이 김대중을 때리면서 데려가는 걸 목격했다."(토머스 폴리에타), "우리한테까지 폭력을 휘두르는데 과연 3년 후 미국인들이 안심하고 올 수 있겠나?"(로버트 화이트) 등의 인터뷰를 하면서 전두환 정권을 무안의 극치로 몰아넣었다.

특히 로버트 화이트는 전직 외교관으로 미국 내에서도 꽤 저명한 인사였는데 바로 그 사람의 입에서 당시 한국이 사활을 걸다시피하며 준비하던 올림픽까지 엮은 비난이 나온 것에 대해 전두환 정권의 속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한편 김대중이 미국으로 쫓겨난 사이 대한민국에서 민주화 투쟁을 하고 있던 김영삼은 측근들과 함께 김대중을 마중나가려 했지만 상도동의 김영삼 자택 앞에 경찰들을 배치하여 봉쇄한 탓에 결국 김영삼은 나갈 수 없었다. 물론 분노한 김영삼이 경찰들을 향해 전두환 정권을 비난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는데 단지 윗선의 명령을 그대로 이행할 수밖에 없는 하수인이라는 점을 이해해 주는 등 여러 명언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경찰들을 지휘하고 있던 간부들까지도 김영삼이 울분을 토로하는 내내 차마 고개를 못 들고 묵묵히 듣기만 했다. 당시 영상

참고로 이때 미국의 대표적인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가 1985년 2월 18일자 발행판의 표지 특집기사에서 김대중의 귀국을 다루며 붙인 제목이 그 유명한 'A Stormy Homecoming'(폭풍의 귀국)이었다. 뉴스위크가 기사에서 설명한 당시 귀국 상황은 다음과 같다.
한국 정부 당국은 김대중 씨와 부인, 그리고 미국인 고관들을 비행장의 출입 제한 구역으로 몰고 갔다. 거기서 50여명이 넘는 사복 요원들이 야당 지도자를 수행원들과 분리시켜 끌고 갔다. 그들은 미국인 몇 사람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김대중 씨를 엘리베이터에 처박았다. 김대중씨와 부인은 흰색 마이크로버스에 실려 공항 뒷길을 통해 자택으로 압송됐고 자택에 도착한 즉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

앞서 말했듯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 연방 의원이 신체적인 공격을 받은 데다 안기부 요원들이 미국 대사관의 일정까지 방해한 것을 알게 되면서 엄청나게 열받았고 이후 미국 대사관이 이원경 외무장관에게 항의하고 나중에 미국 국무부까지도 직접 항의를 하면서 전두환 정권 출범 이후 한미관계가 그야말로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그러나 이런 압력에도 김대중과 신한민주당은 4일 후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예상을 깨고 67석을 얻어 제1야당으로 급부상했고 이후 이민우 신한민주당 총재가 김대중의 사면, 복권을 강력히 요구하고 전두환 정권 역시 지난 4년간의 통치 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감지하면서 김대중을 전격적으로 연금에서 풀어준다. 단 형집행정지 기간까지 면제하고 동시에 공민권을 회복하는 사면복권 조치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버티고 신한민주당이 한 달만에 결국 물러나면서 정치 활동은 여전히 할 수 없었다. 김대중이 국내에서 완전한 자유를 되찾은 것은 6.29 선언 이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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