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땀을 쥐게 하는 흥미진진한 글 - “더 있다간 생체실험으로 죽겠구나” 사선 넘어온 북한군[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676357

 

북한군 병사의 탈출기 〈1〉

2024년 8월 높은 장벽과 철조망 7개, 지뢰밭을 통과해 한국으로 귀순한 북한군 병사 출신의 강민국 씨.

2024년 8월 높은 장벽과 철조망 7개, 지뢰밭을 통과해 한국으로 귀순한 북한군 병사 출신의 강민국 씨.

그는 여단 병원에서 도망쳤다. 더 있으면 시체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뼈밖에 안 남은 몰골의 강민국은 9년 넘게 군에서 복무해 이제 제대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은 고참 병사였다. 하지만 남은 1년을 버틸 수 없었다.

하루에 3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쉬는 날도 없이 공사판에서 버티던 강 씨는, 열흘 전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실려 왔다. 하지만 병원에서 딱히 해주는 것은 없었다.

엊그제 군의관이 들어왔다. 링거라도 맞아야 한다고 했다. 술병, 맥주병 상관없이 끓는 물에 넣었다가 꺼내면 링거 병이 된다. 강 씨에게 온 병은 마침 투명한 병이었는데, 주사액을 본 강 씨는 경악했다. 병 안에 숱한 부유물들이 둥둥 떠다녔다. 저 이물질들이 혈관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싫습니다. 놓지 마세요.” 저항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강제로 링거를 맞았다. 그날 저녁부터 고열이 심하게 나기 시작했다.

다음날 군의관이 다시 들어왔다. 또 링거를 들고 왔다. 그리곤 “오늘은 좀 더 정제를 잘해서 이물질이 거의 없어. 이거라도 맞지 않으면 넌 죽어”라고 말해주었다. 전날 링거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또 맞았다.

“내가 여기에 있다간 생체실험 대상이 돼서 죽겠구나.”

강 씨는 2년 전에도 다리에 종기가 생겨 군단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한 달 동안 병원에서 33명의 군인이 죽어 나갔다. 모기에게 물렸다가 부어서 죽은 병사, 자창을 치료 못 해 팅팅 부어 죽은 병사 등등 병명은 각자 달랐지만, 원인은 하나뿐이었다. 항생제가 없기 때문이다.

집에 전화해서 항생제를 살 돈을 전달받은 병사는 장마당에서 항생제를 구입해 맞을 수 있었다. 그때 강 씨도 집에서 보내준 돈으로 항생제를 사서 나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집이 갑자기 가난해져서 돈을 보낼 수 없기 때문이다.

2년 전 숱한 군인들이 병원에서 죽는 것을 본 트라우마가 머릿속에 그대로 있는 상황에서, 이번엔 자신이 죽을 차례가 온 것이다. 병원에서 놔주는 링거가 뭔 진 몰라도, 별 효과가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살려면 도망쳐야 했다. 집에 가봐야 치료할 능력도 되지 않고, 또 탈영병이라고 처벌받을 것이 뻔했다.

“그래. 이판사판. 남조선밖엔 갈 곳이 없구나. 가다 죽으나, 있다가 죽으나 뭔 차이가 있겠는가.”

그때는 몰랐다. 삼엄한 감시의 눈을 피해 5m 높이의 장벽, 고압선 3개가 포함된 7개의 철조망, 교묘하게 숨겨진 감지선 하나를 넘고, 그리고 또 지뢰밭을 통과해야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2024년 8월, 그는 자유를 향해 떠났다.

1990년대 중반 북한의 한 지방병원. 맥주병을 링거병으로 쓰고 있다. 그때나 30년이 지난 지금이나 북한의 열악한 의료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동아일보 DB
1990년대 중반 북한의 한 지방병원. 맥주병을 링거병으로 쓰고 있다. 그때나 30년이 지난 지금이나 북한의 열악한 의료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동아일보 DB

● 고성으로 가는 길

군사분계선으로 가려니 일단 강원도 고성까지 가야 했다. 병원에서 제일 가까운 친척 집에 찾아가 북한 돈 3만 원을 빌렸다. 쌀 3~4㎏을 살 수 있는 액수였다.

길에서 남쪽으로 가는 화물자동차를 탔다. 북한엔 돈을 받고 사람을 태워주는 버스 역할을 하는 ‘써비차’들이 있다. 고성까지 2만 원을 내라고 했다. 군인이라고 예외는 없었다. 차를 타도 끝이 아니었다. 고성은 최전방 지역이라 특별 통행증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화물차에 오른 강 씨는 주변을 관찰했다. 허름한 군복을 입은 대위가 보였다.

군복 꼴을 보니 가난한 병종의 군관임이 틀림없었다. 이런 사람은 적은 뇌물에도 넘어간다. 강 씨는 대위에게 다가가 차고 있던 전자시계를 내밀며 “고성에 일 보러 가는데 여행증이 없으니 도와 달라”고 했다. 그 시계 구입가는 북한 돈 2만 원. 쌀 3~4㎏ 정도 살 수 있는 액수다. 군관이 시계를 훑어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단속초소가 나타났다. 여행증 검열을 하려 적재함에 오른 군인에게 군관은 자신의 공무 여권을 보여주며 강 씨는 자기가 데리고 가는 부대원이라고 소개했다. 북한에서 군관들이 스폰서 역할을 할 대원들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너무 일상적인 일이다.

초소 군인은 별 시비를 걸지 않고 지나갔다. 이들도 뇌물 받는 데선 프로들이라, 사람을 보자마자 견적을 낸다. 돈이 나올만한 사람에게 시비를 걸어야지, 가난한 군관을 건드려봐야 뇌물도 없고, 입만 아프다는 것을 안다.

무사히 고성에 도착한 강 씨는 장마당부터 찾아갔다. 이제부터 한국까지 가려면 먹을 것이 있어야 했다. 수중에 남은 1만 원으로 북한에서 만든 과자 1㎏과 담배 두 갑을 살 수 있었다. 인근 뒷산에 올라갔다. 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에겐 고성에서 근무했던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저기 보이는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남조선이란 정보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로로는 갈 수가 없으니, 도로가 보이는 산비탈을 타고 내려갈 생각이었다.

날이 너무 더워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금방 갈증이 찾아왔다. 하지만 생사가 결정되는 출발선에 서고 보니 육체적 고통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북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써비차. 인원과 거리에 비례해 요금을 받고 적재함에 사람을 태운다. 동아일보 DB
북한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써비차. 인원과 거리에 비례해 요금을 받고 적재함에 사람을 태운다. 동아일보 DB


● “탈영병 잡으러 갑니다.”

2024년 8월 17일 밤. 어두워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로가 보이는 산비탈을 따라 걸으면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걸어보니 너무 힘들었다.

금강산은 사실상 돌산이다. 어둠 속에서 바위를 넘고 또 넘으며 가다 보니 도무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도로 옆으로 뻗은 철길로 내려왔다. 아직 분계선까진 많이 남아있으니, 여기엔 경비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쯤 걸어갔을 때 갑자기 앞에 무장을 한 군인이 전짓불을 켜며 불쑥 나타났다. 그는 부소대장급인 상사 견장을 단 강 씨를 보더니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위기의 순간이 되니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어, 나 저기 저 동네에 있는 모 부대 부소대장인데, 저기 앞에 민경 초소에 탈영병 잡으러 가. 우리 소대원의 친구가 민경 초소에 있는데, 거기 놀러 간다고 하고 나타나지 않았어. 낼 판정 받아야 하는데, 너무 급해서 새벽에 지휘관들이 찾으려 나설 수밖에 없어.”

새벽에 탈영병을 잡으러 간다는 말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번엔 군인이 “배낭 좀 봅시다”라고 했다. 배낭 안의 손전등을 봤다면, 새벽에 손전등도 켜지 않고 가는 그를 의심이라도 할 법하지만 이 군인은 처음부터 과자 봉투와 담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담배 한 갑을 꺼내 주자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짓불 때문인지 저기서 한 명이 또 다가왔다. 남은 담배 한 갑을 보더니 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이때 또 한 명이 나타났다. 이번엔 순찰을 도는 중대장이었다. 강 씨는 배낭을 발로 차 옆으로 밀어놓았다. 손전지가 발견되면 재미없을 것 같았다.

중대장이 또 누구냐 물어서 강 씨는 아까 했던 거짓말을 다시 되풀이했다. 갑자기 담배를 받은 군인이 나서서 열심히 강 씨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담배를 받았다는 것을 말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중대장이 “어떻게 생긴 병사냐”고 물어서 학교 다닐 때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열심히 설명했다.

중대장이 그의 설명을 들으며 자주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를 강 씨는 안다. 북한군 부대들엔 워낙 탈영병들이 많아서, 지휘관들에겐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일이 중요한 임무였다.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찾아다녀야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던지 중대장은 갑자기 강 씨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중대 본부로 끌려갈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중대장은 “아무리 급해도 여긴 밤에 돌아다니면 안 되는 곳”이라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인상착의를 잘 들었으니 혹시 그 탈영병이 여기로 지나가면 잡아서 보내주겠다”라고도 했다. 천운이었다. 강 씨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돌아서서 왔던 길로 다시 걸었다.

그들이 안 보이게 되자 그는 이번엔 도로를 건너 반대쪽으로 갔다. 밤에 보니 도로 좌측은 논이어서 거기로 에돌아가면 될 듯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거기는 논이 아니라 갈대숲이었고, 깊은 수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몸이 쑥 빠지더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릴수록 그의 몸은 점점 더 수렁에 들어가 어느새 목까지 잠겼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절망 속에서도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보려고 열심히 손을 휘저었다. 연꽃인지, 갈대인지 모를 뿌리가 손에 잡혔다. 하나를 잡고 끌어당기니 뽑혔다. 이번엔 여러 대를 손으로 모아 조심조심 끌어당겼다. 더 이상 몸이 빠지지 않았다. 뿌리가 뽑히면 그도 죽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끌어당기기를 한 시간 넘게 반복한 끝에 겨우 몸을 뽑아낼 수 있었다. 수렁에서 나온 그는 다시 도로를 건너 산으로 올라갔다.

온몸이 젖어 기진맥진한 그는 산에 올라가 돌 틈에 몸을 숨기고 쓰러졌다. 어차피 곧 날이 밝을 것이니 여기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 밤에 또 움직일 계획이었다. 배낭을 꺼내보니 과자가 죽이 돼 먹을 수 없게 됐다. 이제 식량마저 떨어진 것이다.

한국에서 자유로운 삶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강 씨.
한국에서 자유로운 삶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강 씨.


● 또다시 마주친 잠복초소

2024년 8월 18일. 동해에서 해가 떠올랐다. 이제 따뜻한 햇살에 옷과 몸을 말리고 잠을 자면 됐다. 해가 떠오른 지 30분쯤 지나 잠이 들까 했는데 갑자기 말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그가 숨은 바위틈 바로 30m 위에 북한군 잠복초소가 있었다. 두 명의 군인이 잠복 초소에서 나오더니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들은 잠복초소에 있는 이불을 꺼내고, 겉옷을 벗어 햇볕에 말리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삐쭉 섰다. 밤에 그가 조금만 더 올라갔다면, 올라오다가 소리만 냈다면, 여기가 아닌 저기에 자리를 잡았다면…. 그가 그 돌 틈에서 주저앉은 것은 천운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1분 1초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잠을 자다가 소리를 낼까 봐 그날 낮엔 하루 종일 쥐 죽은 듯이 돌 틈에 박혀 있었다.

그렇게 낮 동안 잠을 자지 못하고 지내다가 다시 밤이 되자 산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낮에 산 아래를 보니 남쪽으로 연결된 도로가 보였다. 도로는 관리가 되지 않은지 꽤 오래돼, 양옆으로 풀이 키 높이로 무성했다. 도로에 바짝 붙어 풀을 헤치며 가기 시작했다. 밤이지만, 둥근달이 떠서 사방이 잘 보였다.

500m쯤 갔을 때, 갑자기 앞에 시꺼먼 물체가 나타나 깜짝 놀랐다. 야간 잠복을 나와 잠을 자는 군인이었다. 9시도 채 되지 않았지만, 낮에 농사니 뭐니 고역을 치르며 기진맥진해 야간 근무에 나오자마자 곯아떨어진 것이 뻔했다. 잠을 자던 군인도 인기척을 듣고 벌떡 일어났다. 여기서 주저하면 끝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견장을 보니 입대한 지 3년쯤 돼 보이는 군인이었다. 20m쯤 떨어져 자는 병사가 한 명 더 보였다. 9년의 ‘짬밥’이 본능적으로 나왔다.

“야, 어느 부대야.” 초저녁에 갑자기 웬 상사가 나타나 호통 치니 상대가 움츠러들었다.

“누구십니까.” “나 저 앞에 민경 초소 부소대장이야.”

호통을 치면서 상대의 복장을 보니 상의는 얼룩무늬 군복을 입었지만, 모자와 하의는 낡은 누런 군복을 입었다. 이건 복장 위반 사항이다. 게다가 무기도 없다. 근무에 나와 잘 때 누가 훔쳐 갈까 봐 총을 근처에 숨겨두는 병사들이 많다. 상대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강 씨는 몰아붙였다.

“너 근무에 나와 이리 자는 거 분대장이 알아? 그리고 복장이 이게 뭐야? 총은 또 어디 가고. 너희 부대 이거 안 되겠네. 조국은 널 믿고 있는데, 넌 여기서 잠이 와?”

풀이 죽은 병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부소대장 동지, 여긴 밤에 못 갑니다. 돌아가십시오.”

강 씨는 병사를 한 번 더 째려보고 뒤로 돌아 걸었다. 떨어져 자고 있던 한 명은 그때까지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잠을 자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얼마쯤 돌아오다가 다시 산에 올랐다.

병원에서 떠날 때부터 강 씨는 하늘을 향해 수없이 기도했다. 종교가 뭔지 전혀 모르지만, 절망적인 상황이 되니 하늘을 보며 “살려 달라. 무사히 남조선에 가게 해 달라”는 기도가 계속 나왔다. 어쩌면 그 기도가 통했을까. 밤에 두 번 단속됐는데 모두 빠져나오는 기적이 일어났다. 산에 올라가니 드디어 멀리 분계선의 철책 불빛이 보였다. 여기서 하루 더 머물며 정찰해야 하겠다고 판단했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관광 도로와 철도의 모습. 강 씨는 저 도로를 기준으로 이동해 한국으로 왔다. 동아일보 DB
금강산으로 향하는 관광 도로와 철도의 모습. 강 씨는 저 도로를 기준으로 이동해 한국으로 왔다. 동아일보 DB


● 장벽과 고압 철조망

2024년 8월 19일. 몸을 숨기고 산 아래 도로를 감시했다. 하루 종일 도로로 차 한 대가 지나갔을 뿐 조용했다. 멀리 해변에서 시작돼 산을 타고 구불구불 올라간 콘크리트 장벽이 보였다.

장벽을 어떻게 넘을지 생각해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벽이 있다고 돌아갈 순 없었다. 어차피 앞을 막아서는 것은 다 넘어가리라 결심하고 떠난 몸이 아닌가.

어둠이 깔리자, 그는 낮에 봐뒀던 코스를 타고 다시 움직였다. 한참을 가니 드디어 장벽이 나타났다. 막상 앞에 가보니 높이가 5m는 돼 보였다. 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공사 잔해들이 주변에 널려있었다. 도무지 넘을 방법이 없어 장벽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참 내려갔는데, 장벽 아래에 물이 빠지도록 만든 배수구가 보였다. 배수구에 들어가 보니 쇠살창이 설치돼 있었다. 혹시나 해서 시도했는데, 머리가 살창 사이로 들어갔다. 머리가 들어가면 몸도 빠질 수 있을 것이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드디어 쇠살창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그가 당시 몸에 뼈만 남아 45㎏도 채 되지 않는 상태가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만 살이 쪄도 불가능했을 일이다. 다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배수구를 지나 장벽의 반대쪽에 도착하니 두 사람 정도 나란히 걸을 정도 너비의 순찰로가 나오고, 순찰로 옆에 고압 철조망이 두 개 있었다. 1만 볼트의 전기가 흐른다고 해서 악명이 자자한 ‘만선’ 철조망이었다. 북에서 분계선에 전기철조망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군인은 없는지라, 강 씨도 떠날 때 이미 각오했던 일이다.

주변에서 나뭇가지를 찾아 철조망에 대봤더니, 전압이 어찌나 센지 마른 나뭇가지를 통해서도 손바닥에 찌릿하고 전기가 흘렀다. 땅에서 맨 아래 전기선까지 높이는 10㎝ 정도였다.

군에서 배운 대로 강 씨는 나뭇가지 두 개를 이용해 전기선을 20㎝ 정도 들어 올린 뒤, 그 아래 땅을 파고 조심스럽게 통과했다. 1.5m 앞에 있는 두 번째 철조망도 같은 방법으로 통과했다.

철조망 사이엔 모래를 깔아놓은 ‘흔적선’이 있었다. 발각되면 안 되기 때문에 첫 번째 철조망을 통과한 뒤 구멍을 메우고, 지나온 흔적도 손으로 잘 다듬어 놓고, 두 번째 철조망 구멍도 또 메웠다.

전기철조망 두 개를 통과한 뒤 마지막 철책 지역까지 향해 냅다 달렸다. 전기철조망과 민경이 관리하는 최후의 철책까지 거리는 4㎞ 정도 떨어져 있다.

마지막 철책은 전등들이 켜져 있어 불빛을 보며 가면 됐다. 하지만 중간 지역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그의 키를 넘는 나무와 풀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동남아 열대 우림과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전등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 가다가 나무가 나타나면 타고 올라가 방향을 재확인했다. 나무에 올라가 확인하는 것을 열 번쯤 반복하니 드디어 철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풀을 헤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은 목이 마른 것이었다. 8월의 고온 속에서 하루 넘게 물을 먹지 못했다. 가끔 물웅덩이도 나타났다. 하지만 물이 휘발유가 덮인 것처럼 번들번들했다. 침을 뱉어봤더니 퍼지지 않았다. 그런 물은 썩은 물이라 마실 수 없었다.

북한이 지난해 강원도 고성에 새로 설치한 장벽의 위성사진. 오론쪽 철길과 고속도로 지역이 강 씨가 온 루트다. 출처 Jacob Bogle 웹사이트.
북한이 지난해 강원도 고성에 새로 설치한 장벽의 위성사진. 오론쪽 철길과 고속도로 지역이 강 씨가 온 루트다. 출처 Jacob Bogle 웹사이트.

북한이 지난해 새로 건설한 장벽. 고성의 바닷가까지 장벽이 연결돼 있다. 출처 NK NEWS.
북한이 지난해 새로 건설한 장벽. 고성의 바닷가까지 장벽이 연결돼 있다. 출처 NK NEWS.


● 5중 철조망과 지뢰밭

그가 도착한 마지막 철책 지역은 약 1m 간격으로 철조망이 다섯 겹 설치돼 있었다. 전등도 많이 달아서 주변이 환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약 5m 높이의 감시탑이 있었는데, 거기에 군인이 올라가 아래를 감시했다.

강 씨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감시탑으로 기어갔다. 감시탑 바로 아래엔 그늘이 져 있었다. 밝은 불빛을 보는 군인은 발아래 어두운 지역을 잘 보지 못할 것이라 타산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언에 목숨을 맡겨 보기로 한 것이다.

감시탑 위의 군인은 한국 노래를 흥얼흥얼 부르고 있었다. 강 씨도 그 노래를 안다.

“친구여. 꿈속에서 만날까~” 노랫소리가 높아지면 강 씨도 슬금슬금 움직였다.

드디어 첫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여기 철조망은 전기철조망보다 더 빡빡했다. 땅과 마지막 선의 높이는 불과 5㎝ 정도였다. 나무꼬챙이를 받쳐 놓고 손에 피가 나도록 땅을 팠다. 통과했다. 지나온 땅은 손으로 흔적이 남지 않게 다시 고르게 했다. 두 번째 철조망도 같은 방법으로 통과했다.

“괜스레 힘든 날, 겁 없이 전화해.” 두서없이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뚝 끊긴다. 강 씨도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다. 이번엔 중얼중얼~. 그러다가 콧노래. 다시 한국 노래….

세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번 철조망은 땅을 팔 수가 없었다. 땅이 있어야 할 곳에 유리와 못을 잔뜩 박은 콘크리트 블록들이 깔려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헤치고 왔지만, 이번은 도무지 통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철조망 중간에 갇힌 강 씨는 “여기서 죽는구나”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또 앞으로 기다릴 삶을 떠올려도, 그때보다 더 절망스러운 일은 없을 듯하다. 그는 미친 듯이 땅을 팠다. 블록이 얼마나 깊은지는 몰라도 그래도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쳐야 했다.

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일어나는 법이다. 블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블록은 통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15㎝·40·50㎝ 되는 블록을 땅에 박은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블록을 겨우 빼냈는데, 교묘한 복병이 숨겨져 있었다. 블록 바로 앞에 땅 위 5㎝ 높이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실선이 설치돼 있었다. 자칫 발견하지 못했을 수 있었지만 천만다행으로 그의 눈에 보였다.

블록을 뽑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면 실선을 건드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선이 전기선인지도 알 수 없어 뚫어지게 관찰하니 알루미늄선이 아니라 철선이었다. 그러면 전기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건드리면 감시탑에 신호가 전달될 것이 뻔했다.

지난해 파주 맞은 편 북한 지역에 새롭게 정비를 마친 철조망과 감시탑. 고성에서 강 씨가 통과했던 감시탑과 구조가 같다. 동아일보 DB
지난해 파주 맞은 편 북한 지역에 새롭게 정비를 마친 철조망과 감시탑. 고성에서 강 씨가 통과했던 감시탑과 구조가 같다. 동아일보 DB
강 씨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방법을 찾아냈다.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모아 철선을 두껍게 칭칭 감았다. 건드려도 흔들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성공했다.

철선을 넘어 네 번째 철조망에 도착했다. 이 철조망엔 전기가 흐르고 있었다. 앞서 고압 철조망을 두 개나 넘은 경험이 있기에, 이것도 나뭇가지로 들어 올리고 땅을 파서 넘었다.

다섯 번째 철조망은 2.5m의 가시철조망이었는데, 위에 원형 철조망이 타래로 감겨 있었다. 빠져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위로 기어 통과하려고 철조망을 쥐고 힘을 주는 순간 삑~하는 소리가 났다. 철조망을 고정한 기둥과 쇠줄이 마찰하면서 나는 소리였다.

다행히 힘을 많이 주지 않았던 데다, 한국 노래에 심취한 병사의 취향 덕분에 발각되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구멍이 큰 틈을 찾아 몸을 밀어 넣었다. 장벽의 쇠살창도 여윈 몸 덕분에 넘었는데, 이것도 머리만 들어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성공했다. 대신 철조망의 가시에 군복과 살이 수없이 뜯겼다.

마침내 그는 보초병의 발밑에서 다섯 개의 철조망을 모두 벗어났다. 아직도 한국 노래를 흥얼거리는 보초병을 향해 속으로 외쳤다.

“그래, 너는 여기서 한국 노래나 불러라. 난 한국에 간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9번의 ‘데스게임’을 넘어온 그에게 남은 마지막 미션은 지뢰밭 통과였다.

(23일 공개될 2부에서 이어집니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676392?type=journalists

지난해 8월 분계선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한 전 북한군 상사 강민국 씨.
지난해 8월 분계선을 넘어 한국으로 귀순한 전 북한군 상사 강민국 씨.
(22일 공개된 1부에 이어.)

강민국은 지뢰밭 앞에서 잠시 고민했다.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운명을 맡겨야 하는 일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달이 밝았다는 점이었다. 떠날 때는 분계선을 넘을 때 비가 오거나 날이 흐려 어둡기를 원했는데, 막상 장벽과 철조망을 통과해 보니 달이 밝아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면 분명히 여러 번 실수를 했을 것이지만, 달이 밝아 철조망을 관찰하며 통과할 수 있었다.

지뢰밭을 달빛 아래 조용히 관찰하니 짐승들이 다닌 발자국들이 보였다. 며칠 전 내린 폭우와 이후 이어진 고온의 날씨로 땅이 빨리 말라 단단해지다 보니 발자국이 또릿하게 보였다. 이것도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였다면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짐승 발자국을 따라 이동했다. 적어도 짐승이 지나갔다면 선으로 연결된 대인지뢰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목함지뢰는 어쩔 수 없으니 운에 맡겨야 했다. 강 씨는 이동 방향을 산 아래 도로로 정했다. 아무래도 도로엔 지뢰가 그리 많이 묻혀 있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이동할 때 그는 네발걸음으로 움직였다. 네 발로 가면 무게가 분산돼, 두 발로 가다가 지뢰를 밟는 것보단 안전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한참을 철조망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도로가 나타났다.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지 16년도 넘었던 때라 도로에도 풀이 울창하게 자라 있었다. 그런데 도로라고 지뢰가 매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도로 가운데 흙이 깔린 곳을 만났는데, 위에 대전차 지뢰가 잔뜩 설치돼 있었다. 대전차 지뢰는 사람의 몸무게엔 터지지 않는다는 상식을 알고 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통과했다.

얼마쯤 더 가니 도로가 굽은 구간이 나타났다. 거기서부턴 북한 초소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이제부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철조망을 통과해 네 발로 정신없이 2㎞쯤 왔는데, 불쑥 차단봉이 나타났다. 북한에서 만든 엉성한 차단봉도 아니고, 또 글씨체도 북한식이 아니었다.

‘드디어 남조선에 왔구나.’ 그때의 감격을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달빛 아래 차단봉 옆에 있는 CCTV가 보였다. 중국 영화에서 CCTV를 봤기에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나를 보고 있구나’ 싶어 벌떡 일어났다. 이제부턴 네 발걸음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군복도 털면서 CCTV 앞을 괜히 서성거렸다. 빨리 나를 발견하라는 나름의 신호였다.

그는 북한에서 9년 동안 보초를 서본 군인이었다. 차단봉 건너편에서 근무에 나온 군인이 졸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가 보초선을 통과하면 누군지 모를 한국 군인이 처벌을 받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막 도착한 한국에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군인이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웅얼거리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정지. 정지”라고 했다. 하지만 강 씨는 정지가 무슨 말인지 몰랐다. 북한에선 ‘섯’이라고 하지 정지라고 하진 않는다.

한국 사회에 나온지 1개월쯤 지난 뒤의 강 씨 모습. 아직까진 여윈 흔적이 엿보인다.
한국 사회에 나온지 1개월쯤 지난 뒤의 강 씨 모습. 아직까진 여윈 흔적이 엿보인다.

● 처음 본 한국군

한참을 기다리다가 더는 기다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차단봉을 넘어 걸어갔다. 좀 가다 보니 철조망과 통문이 나타났다. 그 앞에 서니, 스피커 소리가 더 긴박해졌고, 잘 들렸다.

“지금 대상은 불응하고 있다. 접근하면 사격하겠다. 귀순 의향 있으면 손을 들라.”

대상이 뭐고, 불응이 뭐고, 귀순이 뭔 말인지는 몰랐지만, 사격과 손들라는 말은 알아들었다.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스피커가 “대한민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고 했다.

통문이 열리더니 10여 명의 군인이 쏟아져 나왔다. 그를 땅에 눕히더니 뒤로 손을 묶었다. ‘이게 환영이냐’는 생각이 스쳤다.

“동행자는 없습니까. 추격조는 없습니까.” “없습니다.”

“필요한 것 없습니까.” “물을 좀 주세요.” 누군가 물병을 가져다 입에 대주었다. 벌컥벌컥 마시고 또 마셨다.

나중에 들은 바지만, 한국군은 그가 북한 지역에서 움직일 때부터 적외선 카메라로 지켜봤다고 한다. 하지만 네 발로 움직이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 지역에 도착해 벌떡 일어서서야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두 손을 묶인 와중에도 강 씨는 한국군을 관찰했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이 너무나 멋진 군복이었다. 신발도 멋진 소가죽 군화였다. 김일성광장에서 열병식을 하는 군인들도 이들처럼 잘 입진 못했다.

거기에 방탄복과 방탄모, 야시경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강 씨는 북한군 생활 9년 동안 방탄복이나 야시경을 본 적이 없다. 소총도 번쩍번쩍한 것이 녹을 열심히 닦아내기에 급급한 북한군의 낡은 자동보총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거기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키는 대체로 강 씨보다 한 뼘씩 컸다. 강 씨도 부대에서 키가 큰 30% 축에 들어갔는데, 한국 군인들은 훨씬 키도 크고, 체격도 좋았고, 피부에서 기름기가 돌았다.

‘아, 나를 마중하느라 키가 큰 군인들을 골라내서, 차려 입히고 나온 거겠지.’

강 씨는 자기 몰골을 살펴봤다. 가뜩이나 낡은 군복이 다 찢겨 있었다. 갑자기 기가 죽었다.
군인들이 그에게 안대를 씌우더니 차에 타게 했다. 차에서 에어컨이 나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맞아본 에어컨 바람이었다.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풀렸다.

‘이렇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이 더위에 저런 군복과 방탄복을 입고도 견딜 수 있었구나.’

그가 한국에 도착한 시간은 2024년 8월 20일 새벽 2시경이었다.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단풍도 아름답다. 한국의 자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는 강 씨.
따뜻한 가을 햇살 아래, 단풍도 아름답다. 한국의 자유로운 삶을 즐기고 있는 강 씨.

● 죽을 받아 들고 눈물 흘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22사단 본부. 도착해 안대를 풀어주었다. 본부의 군인들도 똑같은 군복차림이었고 다들 키가 컸다. 그제야 자신을 맞은 군인들이 일부러 골라 뽑아온 사람들이 나온 것이 아닌 줄 알았다.

들어가자마자 코로나 검사부터 했다. 여성 군의관들이 새벽에 나오게 만들어 짜증 났는지는 몰라도 딱딱한 인상으로 그를 검사했다.

‘나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 생각은 곧 풀렸다. 한 장교가 필요한 것이 없냐고 물어서 “배가 고프다”고 대답했다. 이틀 동안 꼬박 굶었다. 실은 병원에서 탈출하고부터 거의 먹지 못했다.

장교는 “준비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이어 “몸을 씻고 싶다”고 하자 그를 목욕탕에 데리고 갔다. 씻고 나오니 한국군 운동복을 주었다.

목욕하는 사이 식사가 준비됐다. 그가 한국에 오면서 가장 기대한 것이 첫 식사였다. ‘그래도 고기는 주겠지’라고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죽 한 그릇이 달랑 나왔다. 처음엔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교의 말이 눈물이 쏟아졌다.

“오래 굶었다가 갑자기 먹으면 탈이 나니, 일단 죽부터 먹으면서 점차 식사량을 늘여야 합니다.”

‘나는 남조선을 해방하겠다고, 남조선 괴뢰군을 때려잡겠다고 10년을 군사복무 했는데, 이들은 나를 동포로, 형제로 맞아주는구나.’

멀건 죽 속에서도 뭔가 씹혔다. 썩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전복이었다. 죽을 먹고 아침에 다시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차가 늘어선 도로. 포장 상태가 너무 좋아 흔들리지 않는 도로가 눈에 보였다.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북한군에서 운전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3월,  ‘다음학교’에 다니면서 어린 친구들과 함께 대입준비를 하고 있는 강 씨.
올해 3월, ‘다음학교’에 다니면서 어린 친구들과 함께 대입준비를 하고 있는 강 씨.

● 운전병으로 입대하다

강 씨는 18세였던 2015년 북한군에 입대했다. 학교 다닐 때 학급반장도 하는 등 공부를 잘했지만, 어머니는 군에 가라고 했다.

“너는 출신성분이 걸려 간부가 될 순 없으니, 군에 가서 평생 써먹을 기술이나 배워라.”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중앙당 간부를 하던 할아버지는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당의 의료 정책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산골로 추방됐다. 아버지가 열심히 노력해 동해안의 한 도시로 이사를 왔지만, 거기까지였다.

부모들이 열심히 로비한 덕분에 강 씨는 입대하면서 200달러는 뇌물로 써야 갈 수 있다는 군 운전수 양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양성소 과정은 1년이었다. 1년 동안 10분 정도씩 화물차를 세 번 몰아보고 졸업했다.

전체 양성소 인원은 800명 정도. 1개 대대가 120명 정도인데, 대대마다 1958년부터 생산된 ‘승리58’ 목탄 화물차가 실습용으로 1대씩 있었다. 이 차는 손으로 스타찡(리코일 스타터)을 1~2시간 교대로 돌려야 발동이 걸렸다. 그렇게 겨우 엔진을 돌려도 엔진에 목탄 재가 계속 차서 수시로 차가 멈춰 섰다.

그래도 그가 간 운전사 양성소는 총참모부 직속이라, 군단별로 한 개씩 있는 운전사 양성소보다는 훨씬 사정이 좋았다. 겨울엔 목탄 만들 참나무를 찍어오기 위해 깊은 산에 3시간 넘게 걸어갔다가, 나무를 등짐으로 메고 다시 돌아왔다.

늘 배가 고팠다. 알루미늄 공기에 훌쩍 들어간 옥수수밥, 멀건 소금국, 염장무 3형제 반찬이 1년 내내 제공됐다. 염장무를 아무 양념도 없이 채를 치고, 동그랗게 썰고, 깍두기처럼 썬 것이 염장무 3형제다.

그냥 썰어주면 되지만, 과거 김정일이 군인들에게 3가지 반찬을 무조건 제공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람에 모양만 달리해 그릇에 담는다. 이렇게라도 사진을 찍어 위에 보고하지 않으면 반찬 3가지를 보장하라는 지시를 어긴 것이 된다. 능력은 없는데, 하라고는 하니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다.

북한군 복무 9년 동안 취사 당번을 수없이 선 덕분에 강 씨의 요리 실력은 주변 친구들에게서 호평을 받는다.
북한군 복무 9년 동안 취사 당번을 수없이 선 덕분에 강 씨의 요리 실력은 주변 친구들에게서 호평을 받는다.

● 목탄차, 쌀겨차, 가랑잎차…

1년 동안 양성소 생활을 마치고 부대에 배속됐다. 그의 대대엔 전투차량으로 등록된 화물차가 8대가 있었다. 하지만 가동할 수 있었던 차량은 그가 복무하던 내내 2대뿐이었다.

나머지는 각목을 이용해 땅에서 띄워 보관만 했다. 이 차들은 전쟁이 나도 가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가동되는 2대를 위해 부품들을 오랫동안 뜯어내 사용했기 때문이다. 바퀴도 철심이 다 드러난 쓰다 버린 폐타이어가 붙어있었다.

지휘관은 “네 차를 몰고 싶으면 부품을 사 와서 끼우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도 빈말임을 누구나 안다. 설령 부잣집 자식이어서 부품을 사서 갖고 와도 고참들이 또 뜯어갈 것이 뻔했다.

그나마 강 씨의 부대는 총참모부 직속이라 괜찮은 부대라서 대대에 가동되는 차 2대를 유지할 수 있었다. 2대로 각종 건설장에 노력 동원도 나가고, 후방 물자도 실어 오고, 김장철에 배추나 무도 실어 왔다.

그가 입대할 땐 북한군 부대에 참나무 숯으로 가동되는 목탄차만 있었는데, 유엔의 대북제재가 심화하면서 화물차들의 연료가 다양하게 바뀌었다. 어떤 연료로 움직이는가에 따라 차에 이름이 붙었는데, 목탄차, 쌀겨차, 카바이드차, 알탄차, 메탄가스차, 가랑잎차 등으로 나뉘었다.

목탄차는 힘이 좋지만, 참나무 숯을 구하기 힘들었다. 쌀겨차는 탈곡한 벼 껍질로 가는 차였다. 장점은 연기가 적게 났고, 힘도 좋았고, 벼 껍질을 구하기 쉬웠다. 가다가 정미소가 있으면 쌀 4㎏ 정도 살 수 있는 돈인 2만 원에 화물차 적재함 가득 채울 수 있는 벼 껍질을 구입할 수 있었다. 대신 조수가 적재함에 타서 쉴 새 없이 난로에 껍질을 넣어야 했다.

비슷한 차가 가랑잎차인데, 아무 가랑잎이나 쓰진 못하고 참나무 가랑잎을 써야 했다. 이 차는 조금만 먼 곳에 가려면 적재함에 가랑잎을 가득 실어야 했고, 조수는 벼 껍질보다 더 열심히 난로에 가랑잎을 넣어야 했다.

알탄차는 알처럼 빚은 무연탄을 적재함의 난로에 넣어 가는 차였다. 카바이드와 메탄 차는 연료 구입비가 비쌌다. 휘발유나 디젤유가 없으니, 위의 대용 연료를 사용했는데, 대신 자동차 부품이 너무 자주 고장 나 한번 갔다 오면 분해해서 그을음을 긁어내야 했다. 이것이 2024년 현재의 북한군 실태다.

연기를 날리며 달리는 북한군 목탄차. 적재함에 실은 난로에 무엇을 때는 가에 따라 목탄차, 가랑잎차, 쌀겨차 등으로 구분된다. 동아일보 DB
연기를 날리며 달리는 북한군 목탄차. 적재함에 실은 난로에 무엇을 때는 가에 따라 목탄차, 가랑잎차, 쌀겨차 등으로 구분된다. 동아일보 DB

● 북한군 지휘관 운전사

북한군 부대들에서 부품과 연료난으로 처절하게 싸우고 있을 때, 그나마 상황이 좋은 차들은 고위 군관들이 타는 승용차였다.

북한군은 일정한 계급 이상인 군관에게 공무용 차를 주는데 이를 직무차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당국이 승용차 부품이나 연료를 직무차에게 특별히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엔 비밀이 있다.

북한에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부유층들은 자식을 군에 보낼 때 승용차를 중고로 사서 보낸다. 북한군 군관들이 타는 차는 중국제 우와즈, 북경, 신비라는 브랜드인데, 북한에서 북경 중고차는 2000달러 정도 하고, 우와즈나 신비는 1500달러 정도 거래가 된다.

이렇게 차를 서서 입대하면, 운전수 양성소를 마치지 않아도 곧바로 여단장이나 사단장 등 고위 군관의 직무차 운전사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군 복무 내내 승용차를 운용하는 연료나 부품 등은 본인이 집에서 돈을 가져와 대야 한다.

대신 좋은 점은 규율 생활도 하지 않고, 동원에도 빠지며, 자기 방에서 편안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제대할 때 지휘관이 대학 추천권을 준다.

차를 살 수 있다는 것은 잘 사는 집 자식이란 의미다. 운전사는 지휘관의 집안 경조사나 먹거리 등도 챙겨야 한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반대급부로 지휘관은 운전사를 얼마든지 휴가 보낼 수 있다. 운전사 두 명 정도만 채용해 교대로 굴리면, 1년에 절반은 집에 가서 놀면서 군 복무를 마칠 수 있다.

이렇게 차를 갖고 입대한 운전사를 채용한 지휘관이 북한군 전체에서 10% 이상은 된다.

그렇다고 국가에서 준 차를 타고 다니는 다른 지휘관은 규정대로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도 다 부유한 집안 자식을 자기 운전사로 채용해서 연료나 부품을 대게 한다. 즉 북한군 고위 간부들의 운전사는 부잣집 자식인 것이다.

지휘관 운전사도 어느 지역인지, 어느 직책인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평양 인근에서 지휘관 운전사를 하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고 소문이 났다. 자기 돈으로 군용차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고, 지휘관 가족까지 운전사가 다 먹여 살려야 한다.

북한에서 권력이 막강하고, 돈이 아주 많은 진짜 부자들은 자식들을 운전사로 보내지 않는다. 어쨌든 직무차 운전사는 10년을 복무해야 하기 때문이다.

진짜 권력층 또는 부자는 자식을 집 근처 부대에서 편안하게 5년 정도 복무하게 한 뒤 입당시켜 대학을 졸업하게 한다. 부모의 권력이 너무 세면 지휘관들이 뇌물을 달라는 얘기도 못 하고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권력이 없는데, 돈이 많으면 아예 소속 중대 정도는 먹여 살린다. 대신 자식은 후방 물자 구입이란 명목으로 집에 와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제대한다.

대한민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강민국 씨. 이제 그는 목숨 걸고 찾은 자유의 의미를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강민국 씨. 이제 그는 목숨 걸고 찾은 자유의 의미를 삶으로 증명해야 한다.

● 로또 맞은 운명

2023년 말 강 씨는 김정은이 지시한 공사에 차출됐다. 김정은이 지시한 날짜까지 공사를 마치지 못하면 누가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휘관들은 군인들을 인정사정없이 일을 시켰다.

강 씨는 수 톤짜리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드는 일을 했는데, 그 넓은 작업장에 중장비가 3대뿐이고, 그마저도 수시로 고장 나거나 부품이 없어 사실상 인력으로 모든 작업을 해결해야 했다.

아침 기상 시간은 새벽 4시. 청소하고 밥을 먹고 5시에 공사장에 나간다. 세수는 어림도 없고, 이를 닦을 시간이 있는 날은 행복한 날이었다.

12시까지 오전 작업을 마치고 점심을 먹는다. 저녁은 6시가 아니라, 그날 과제를 마친 새벽 1시쯤에 제공됐다. 그걸 먹고 이가 바글거리는 모포(담요)를 덮고 3시간을 잤다. 1953년 전쟁이 끝난 뒤 북한군 모포는 딱 3번 바뀌었다. 수십 년을 사용한 모포는 사실상 누더기나 다름이 없지만, 수면시간이 3시간인 환경에선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배불리 먹는 것도 아니었다. 옥수수밥에 멀건 소금국을 먹고 일어서면 그때에야 배고픈 게 느껴졌다. 허약 환자들, 결핵환자들이 속출했지만, 날짜를 맞추지 못하면 떨어질 처벌이 무서워, 군인들에겐 단 하루의 휴식일도 허용되지 않았다.

강 씨는 이런 환경에서 7개월을 버티다가 결국 쓰러졌다. 병원에 가니 내시경도 하지 않고 위경련이라고 했다. 여단 병원 수준에선 수면 내시경을 할 수 없다. 그래서 강제로 내시경을 삼키라고 했는데, 너무 아파 넘어가지 않았다. 수면 내시경을 하려고 하면 사회 병원에 가서 돈을 내야 했는데, 너무나 비싸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북한의 민간병원은 ‘도 인민병원’ ‘군 인민병원’ 이런 식으로 불렀는데, 3년 전부터 간판에서 인민이란 말을 뺐다. 돈받고 치료하면서 인민병원이라고 부르기에 멋쩍어서인지도 모른다.

진단도 받지 못한 채 그는 뭔지 모를 찌꺼기가 떠다니는 수액을 맞다가 결국 탈북을 선택했다. 집에서 약 살 돈을 보내줄 수 있었으면 탈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탈북하는 내내 아픈 배를 쥐어 잡고 이동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팠던 위가 한국에 와서 약 몇 알을 먹으니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북한에 있었으면 진단도 못 내리고 생사람만 잡을 뻔했다.

여러 조사를 마치고 강 씨는 올해 1월 서울 근교 지역에 임대주택을 받고 한국 사회에 나왔다. 불과 10개월 정도 남짓한 한국 생활이지만, 너무나 행복하다. 어디든 다닐 수 있고, 인권을 존중받아 좋고, 배고픔을 몰라 좋다.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대학에 가라고 권했다. 그래서 한국 정착 2개월 만에 ‘다음학교’에 입학해 입시 준비를 시작했다. 다음학교는 남북 청소년이 함께 공부하는 서울시 등록 대안교육기관이다.

이런 준비를 마친 끝에 얼마 전 가천대 물리치료학과에 입학했고, 내년 3월부터 다닐 예정이다. 더 좋은 대학에 가지 왜 물리치료학과를 선택했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가 물리치료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죽을 뻔한 운명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태어나게 됐으니, 자신도 누군가를 치료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였다. 물론 지금의 결심이 옳은 것인지 확신은 없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아직 뭐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어찌 되든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는 세계에서 가장 극악한 감옥에서 탈출한 엄청난 행운아다.

인민의 탈출을 막기 위해 북한은 약 240㎞의 남쪽 국경에 5m 높이의 장벽을 세우고, 8중 철조망을 만들고, 없는 전기를 아낌없이 공급하고 있다. 철조망 밖의 지뢰밭과 장벽 밖의 무수한 감시초소와 잠복초소까지 생각한다면, 감옥도 이런 감옥이 또 어디에 있을까.

탈북하다가 전기에 붙어 죽고, 총에 맞아 죽고, 지뢰를 밟아 죽은 이는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북한이란 감옥에 갇혀 생지옥을 경험하는 2000만 동포들을 생각하면, 강 씨는 로또보다 더한 행운을 얻은 사람이다. 그리고 뭐든 새로운 도화지에 그릴 수 있는 28세일뿐이다. 서울의 하늘 아래에서 오늘도 그의 꿈은 새싹처럼 자라고 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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