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특수부대 인터뷰로 보는 체첸 전쟁, 그리고 전쟁의 참혹성
체첸의 어느 작은 마을. 얼굴에 복면을 하고 중무장한 러시아 특수부대 팀이 불시에 기습했다. 그 마을에 여성 자살 공격조가 숨어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동뜨기 직전의 새벽에 마을의 어느 집에서 러시아 특수팀은 3명의 체첸인 여자들을 손쉽게 제압한다. 그들은 러시아 군기지로 여자들을 끌고갔다.
러시아 특수팀은 3명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40살의 여자가 다른 여자들에게 러시아인과 체첸인 사이의 흉폭한 전쟁 속에 자신들을 희생하도록 사상을 주입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남은 2명의 여자들은 최근에 모집된 자살 테러 지원자였으며, 한명은 불과 15살이었다.
"그 나이든 여자는 처음에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지난 주에 했던 인터뷰에서, 특수팀의 상급 장교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그녀를 묶어서 전기로 지졌더니, 우리에게 좋은 정보를 제공해줬다. 그 다음 우리는 그녀의 머리를 쏴버렸다. 그 시신을 야외에 옮긴다음, 다리 사이와 가슴 위에 포탄을 얹어놓고 200그램의 TNT 덩어리 몇개를 붙여논 뒤에 터트렸다. 시신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모든 증거도 사라졌다. 문제될 것은 물론 없었다."
이 모든 작업은 흔히 '분쇄 (pulverisation)' 로 알려졌다. 흔적없이 산산조각을 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다른 2명의 여자들도 다른 팀에 넘겨져 심문받았으며, 그들 역시 '분쇄' 되었다.
해당 내용은 10년이 넘게 체첸 지역의 반군을 색출한 러시아 특수팀의 장교 2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어낸 내용이다. 그들의 진술은 2차대전 이래 가장 잔혹한 전쟁 중 하나인 체첸 전쟁에서 러시아 특수팀 (일명 살인분대 'death squads') 이 체첸 영내에서 어떻게 활동했는 가에 대해 알려준다. 러시아 특수팀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간 서방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체첸 지역에서 40여차례 작전을 수행했는 데, 단순히 반군 용의자 뿐만 아니라 그들과 동조한 시민들도 조직적으로 검문, 납치, 고문 그리고 처형했다고 말했다. 반군에 대한 정보는 대개 고문을 통해 얻어냈는 데, 해머로 갈비뼈를 부러뜨리거나, 전기로 지져버리거나 혹은 남자끼리 서로 동성애를 하게 만들어서 실토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정보를 뽑아낸 뒤에는 죽인 뒤에 구덩이에 던져버리거나 '분쇄' 해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일들은 일부 극단적인 병사의 돌출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해당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팀 전체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방식이라고 한다. 그들은 상급자로부터 그들이 임무중에 발생한 문제로 인해 책임을 물을 일이 없다는 확고한 보장을 받는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는 공개적으로는 고문과 즉결처형을 비난하며, 체첸에서 발생한 전쟁 범죄에 자국군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는, 특수팀 장교 안드레이와 블라디미르는, 크레믈린은 체첸에서 발생한 일에 눈을 감고 있다고 말한다. "이 전쟁에 약간의 관심만 있는 고위층이라면 우리가 하는 일을 모를리가 없다." 안드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테러리스트들을 쓸어내는 것이다."
두 장교는 자신들이 테러리스트의 위험을 성공적으로 억제했으며, 특수팀의 활약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한다. 안드레이는 전쟁 중에 중상을 입었었는 데, 그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최소한 10명의 여성 자폭 요원을 처리했다고 한다. 한번은 부상당한 체첸 여자 저격수를 잡았는 데, 그를 묶어서 탱크의 무한 궤도로 밀어버렸다고 한다.
그는 또한 러시아군이 수행했던 가장 잔혹한 복수극에도 참여했다. 2002년에 러시아 FSB 정보 요원 2명이 죽었는 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특수팀은 공격에 가담하거나 동조하거나 협조한 200명의 체첸인들을 처리했다.
다른 작전에서, 안드레이의 부대는 체첸인들이 야전 병원으로 사용하던 은신처에서 수십명의 부상당한 반군들을 발견했다. 몇명은 여자 친척들이 돌봐주고 있었다. "심문할 가치가 있는 반군은 데려갔고, 나머지는 여자들과 함께 처형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이 테러리스트를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1994년에 처음 체첸을 침공하고, 대테러 작전이 종료된 2009년 4월까지의 15년 동안, 체첸인들은 10만이 넘게 죽었다. 수도 그로즈니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푸틴의 과격함은 그에게 강한 인기를 만끽하게 하였다.
잔혹함은 이 전쟁의 양측 모두에서 발견되는 데, 이슬람 공화국 체첸을 꿈꾸는 반군들도 러시아군 포로를 상대로 같은 행동을 한다. 한 러시아군 포로는 전기톱에 썰려나가는 장면이 체첸군이 찍은 영상에서 포착되었다.
전쟁이 가혹해지는 동안, 체첸 반군들은 모스크바의 축제나 시장에서 시민을 상대로 자폭 테러를 하였다. 2002년의 모스크바 극장 테러에서 18명의 체첸 여자 자폭조를 포함한 129명의 체첸인들이 800명의 인질과 대치하다가 러시아군의 독가스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들이 행한 가장 처참한 행동은 베슬란의 초등학교 인질극이다. 2004년에 발생한 이 인질극에서 334명의 인질들이 죽었는 데, 절반 이상이 어린애들이었다.
이토록 잔혹함이 횡행하는 공간은 살인분대가 활동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안드레이는 그의 부대가 한번은 러시아 인질들을 고문하는 몇개의 비디오를 소지한 체첸인을 잡았다고 한다. 그중 하나는 그가 그의 동료들과 12살의 여자애를 강간한 뒤에 손가락 3개를 총으로 쏴버리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모두 미쳐버렸다." 안드레이는 말한다. "그를 날려버렸고 그는 땅바닥에 누웠다. 일어나라고 소리쳤는 데 그가 수갑 때문에 몸을 못일으킨다고 했다. 나는 수갑을 풀라고 지시했지만 무슨일인지 열쇠가 먹지 않았다. 나는 더 열받게 되서 부하들에게 상관없이 처리하라고 했다."
"부하들이 구석에서 도끼를 발견해서 그것으로 그의 팔을 잘라버렸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소리쳤다. 더 심문한다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바로 머리에 총을 쏴버려다."
안드레이는 그가 상대한 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짓눌러버려야 할 바퀴벌레 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들이 수행한 행위에 대해 한점 가책이 없다고 말했지만, 종종 부하들이 너무 지나친 경우가 있다고는 말했다.
"부하 중의 한명이 좀 문제가 있었는, 데, 그는 포로들의 귀를 수집했다. 그는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는 데 자기 집에 보내고 싶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행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한 잔혹함은 모스크바가 전직 반군들로 구성된 친러시아 체첸 특수부대에게 작전 수행을 넘김으로써 그쪼으로 전달되었다. 람잔 카디로프가 지휘하는 체첸인 부대 역시 납치, 고문, 처형에 있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블라디미르는 자신의 부대가 2005년에 16명의 반군을 체포해서 고문하고 처형했다고 말한다. 특수팀 지휘관은 종종 자기 부대를 이끌고 주둔지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여 민간인들을 상대로 한 허위의 반군 색출 작전을 폈다. 그런 정보가 없음에도 반군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면서 소탕 작전을 하는 것이다. 먼 곳이기 때문에 언제든 상부에는 둘러댈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을에 들어서서 의심스러운 자들을 찾아서 처리했다. 우리는 테이프로 묶거나 수갑을 채워서 끌고 왔다. 만약 그곳에 반군이 있다면 사살했다. 만약에 전투가 있다면, 우리는 죽은 숫자만큼 사람들을 처형했다."
블라디미르와 부하들은 그들의 먹이감을 '자이치크' 라고 불렀다. 러시아에서 연인들 사이에 호칭으로 쓰이는 '작은 토끼'라는 말이다.
"한번의 작전에 투입되는 인원은 부대원 중에서 극히 일부였다. 우리가 붙잡아 온 자들 중 종종 완강한 놈들이 있긴 했지만 적절하게 다루면 결국엔 모두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불었다."
"우리는 주로 쓰는 방식이 몇가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막대기나 통나무로 두들겼다. 매우 효과적인 방식 중에 '그랜드 피아노'라고 있는 데, 포로가 된 놈의 손을 묵은 뒤에 해머로 손가락을 하나씩 뭉개버려다. 더럽고 힘든 일이다. 만약 이런 일을 즐긴다면 인간이 아니겠지만, 실토하지 않는 저런 쓰레기들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달리 어쩔 수는 없다."
해머는 종종 무릎 슬개 뼈를 박살내거나 남자끼리 동성애를 하게 만드는 데 쓰였다. 이 장면은 종종 비디오로 촬영되서 체첸 반군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위해 퍼트리기도 한다.
"이 일을 하려면 매우 확고하고 강인한 사람이 필요하다." 블라디미르는 말한다. "이 일을 하는 사람은 항시 자원자여야 한다. 누군가를 고문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상당히 압박이 강하기 때문이다."
안드레이가 덧붙인다. "이 일의 핵심은 전문성으로, 우리가 한 일의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지휘관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증거를 남기지 말라고 요구한다. 우리는 만약 우리가 잡힐 경우에 목이 메달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이해한다."
"우리는 살인자가 아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학살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감행할 수 있는 잔혹한 테러리스트들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한 군인들이다. 그들은 죽여버리는 것 외에는 도저히 통제할 길이 없는 짐승들이다. 여기에는 휴머니즘 적인 우아함이 발을 붙일 만한 곳이 아니다. 그곳에 있어본 사람 만이 이를 이해할 것이다. 나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 한점 후회가 없다. 나의 양심은 깨끗하다."
출처 : http://www.timesonline.co.uk/tol/news/world/europe/article6168959.ece(아카이브 링크로 대체-http://archive.is/kfBC4)
체첸 전쟁 이후 체첸 반군이 러시아군에 대한 공포전략을 위해 만들었던 많은 스너프 필름 중 하나이며 VHS 테이프로 암시장을 떠돌다가 디지털화된 후 LiveLeak에 올라와서 2000년대 초반에 전세계의 네티즌들을 충공깽에 빠뜨렸다.
2023년 기준으로는 영상이 인터넷에서 삭제되어서 풀버전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시 체첸 영상을 전문적으로 올렸던 정체불명의 유저 'Warlord47'이 오그리쉬와 LiveLeak 운영진과 모두 갈등을 빚고 해당 영상에 저작권 클레임까지 걸리는 바람에 올라온 영상들은 빠르게 지워졌으며 이 때문에 제대로 탐구될 시간이 많이 없었고 본 문서에도 여러 버전의 체첸클리어 영상에 대한 설명이 어지럽게 섞여 있다. 따라서 본 문서의 제목에서 설명하는 체첸클리어는 로스트 미디어에 해당한다. 물론 러시아 방송국들이 저작권을 주장하기도 하고 실제로 튼 적도 있으니 어디엔가는 여전히 존재하긴 할 것이다.
한국에선 체첸클리어라고 부르지만 영미권에선 'Chechclear'로 주로 부른다.
체첸은 1991년 독립을 선포했으나 3년 뒤 러시아가 침공해 체첸 전쟁이 발발했다. 제2차 체첸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여전히 캅카스 일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이에 불만을 가진 체첸군 출신들이 캅카스 일대 각지에서 유격전을 벌였는데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비슷한 게릴라 전법을 사용했다. 그렇게 러시아를 골치 아프게 했는데 해당 영상은 이때의 영상이다.
'체첸클리어'는 본 영상의 제목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이슬람 반군의 모토이자 구호였다. 번역하면 '체첸 정화 운동의 일환'으로서 구체적으로 체첸 인종청소를 뜻하는 문구다. 이러한 종류의 인종청소는 전세계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쉬워서 실제로 인종청소를 시도했던 르완다의 후투족 지도자들이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도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심지어는 그 옛날 나치들도 절멸수용소 부지를 밀어버리고 절멸수용소 관련 인원들을 일부러 참혹한 동부전선이나 유고슬라비아 쪽으로 보내어 소모하는 식으로 은폐를 시도했지만 체첸인들은 이러한 의도를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그래서 체첸군의 학살 영상들은 모두 '체첸클리어'로 불리며 이 영상들 중 유명한 스너프 필름으로는 다게스탄 참수 영상이 있다.
촬영 시기는 1999년으로 추측된다.

이븐 알 하타브로부터 와하비즘과 전술을 전수받은 샤밀 바사예프가 2,000여 명의 체첸군을 이끌고 러시아에 이슬람 신정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1999년 8월 다게스탄 공화국을 침공해 제2차 체첸 전쟁이 발발했다. 1996년에 러시아군 참수 의혹을 받았던 '살라웃딘 테미르불라토프(Salautdin Temirbulatov)' 주도의 체첸군 200명이 투흐차르(Tukhchar) 마을 점령을 시도했다. 200명이란 물량 공세에 제13내무군 부대와 BMP-2와 함께 검문소를 운영하고 있던 소수의 러시아군은 전부 포위당해 버렸는데 이때 마을에 있는 러시아군을 총 지휘하던 바실리 중위는 피격되지 않은 모든 BMP-2 장갑차로 강 건너에 체첸군이 있는 참호와 포위선 돌파를 시도했지만 결국 BMP-2가 파괴되었고 병력은 와해되었다. 살아남은 러시아군 13명 중 7명은 겨우 살아 도망쳐서 마을에 숨어 버렸고 나머지 6명은 포로로 잡혔으며 곧 상상도 할 수 없는 지옥이 펄쳐졌다.
테미르불라토프는 BMP-2가 파괴된 장소에서 포로로 잡힌 5명을 참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영상을 보면 블라디미르 카우프만(Vladimir Kaufmann)이라고 알려진 19살의 러시아군 포로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부분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참살당하고 말았다. 이 영상에 나오는 체첸군과 카우프만의 대화를 번역한 글이 있는데 카우프만이 체첸군에게 화약고와 무기 위치를 알려주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칼을 든 체첸군은 망설이지만 영상을 찍는 체첸군과 주위에 있던 체첸군이 부추기면서 카우프만을 구타하자 처음에 칼을 들었던 체첸군이 나서서 결국 카우프만을 참수한다.
이 사건과 이후에 터진 러시아 아파트 테러 사건은 푸틴이 체첸을 공격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체첸클리어와 달리 다게스탄 참수 영상은 16분짜리 풀버전이 인터넷에 여전히 꽤 돌아다니고 있다. 영미권에서는 주로 다게스탄 참수보단 Tukhchar Massacre로 부르며 위키백과에 별개의 문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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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첸 군인이 바로 살라웃딘 테미르불라토프(Salautdin Temirbulatov)다. 테미르불라토프는 원래 소련 시절 협동농장 트랙터 운전수로 이 때문에 '트랙터리스트'란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소련 시절엔 모범 노동자로 지역 소비에트의 일원이었던 인물이지만 소련 붕괴 이후 체첸 반군 지휘관이 되어 상술된 각종 학살을 저질렀고 1996년 제1차 체첸 전쟁 때부터 학살 스너프 필름을 만들고 다녔다. 해당 비디오는 FSB의 수중에 떨어졌고 이를 근거로 FSB는 테러리즘과 살인 혐의로 테미르불라토프에 대한 체포 영장을 발부하였다. 1999년 제2차 체첸 전쟁 이후부터 러시아 방송국들이 테미르불라토프가 만든 비디오를 텔레비전에 방영하면서 그는 러시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전범이 되었으며 러시아 여론은 격노하여 체첸 전쟁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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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클리어 영상을 본 뒤 극도로 분노한 모습의 블라디미르 푸틴 |
2000년 3월 특별군사작전에서 체첸 반군 지휘관 테미르불라토브는 체첸의 두바 유르트 마을에서 주민들에게 자신의 부하들에게 식량과 쉴 곳을 제공하라고 강요하던 중 체포되었고 1996년 4월 러시아 병사 세르게이 미트랴예프 처형을 비롯한 4건의 살인, 튀르키예 사업가를 납치하여 25만 달러의 몸값을 뜯어낸 사건, 1997년 러시아군 육군중령 아나톨리 모구트노프[1] 납치 사건을 비롯한 수차례의 납치 및 반란군에 복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당시 러시아에서 사형제가 시행 중단되었던 관계로 2001년 2월 살인의 책임을 물어 종신형이 선고되었는데 처형 동영상을 다른 체첸 지휘관 몰래 돈 받고 팔려고 했다. 그 이유는 은퇴 자금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체포된 많은 체첸 반군들은 재판도 없이 비밀리에 처형되었으나 테미르불라노프는 이미 너무 유명해진 관계로 러시아 정부가 일종의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선전용 재판에 회부하면서 그나마 약간 더 연명할 수 있게 되었다. 어쨌거나 재판정에 선 테미르불라토프는 미트랴예프를 죽인 사실은 인정했으나 나머지 혐의는 부인했으며 미트랴예프를 죽인 것에 대해서는 그가 자신의 사촌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였기 때문에 체첸의 전통에 따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검사는 이 주장을 부인했다. 종신형 선고에 유족들은 분노하여 그 야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라고 항의했지만 그는 연쇄살인범 안드레이 치카틸로가 복역했던 러시아 남부의 악명 높은 교도소로 보내졌고 1년 뒤 교도소에서 증발해 버렸는데 정황상 옥사를 가장해 살해된 것이 명백해 보인다.
다게스탄 참수 영상이 제2차 체첸 전쟁 때 일어난 일이라면 이 영상은 제1차 체첸 전쟁 때 일어났던 일이다. 테미르불라토프는 2000년 3월 20일 3명의 러시아인을 살해한 죄로 체포되었고 2001년 2월 15일 기소되었는데 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사용된 영상 중 하나가 바로 이 체첸클리어였다.
영상에서 칼로 러시아군 포로의 목을 자르는 사람은 체첸인의 편이 되어 함께 싸웠던 유명한 사우디 지하디스트 '이븐 알 하타브'라는 설이 있지만 테미르불라토프의 소행이라는 게 정설이다. 이븐 알 하타브는 탁월한 전술 실력을 가졌지만 체첸의 독립운동을 와하브파로 물들이는 데 한 몫한 인물이다. 영상의 내용은 이러하다.
1996년 4월 12일 테미르불라토프의 부하들이 콤소몰스코예(Komsomolskoye) 지역 밖에서 4명의 러시아군을 붙잡아 온다. 4명의 러시아군들의 나이는 18살, 19살 등 다양했으며 테미르불라토프는 이들 네 사람에게 고문하며 질문을 던진다. 포로로 잡힌 4명 중 2명은 총살당했고 2명은 참수당한다.
흔히 체첸클리어라고 네이버나 구글에 치면 나오는 러시아군의 신원은 아직도 확인된 바가 없다. 예브게니 로디오노프라는 19살의 러시아군이란 설도 있지만 영상에 나오는 군인하고는 별개의 인물이다. 확실한 것은 로디오노프가 참수당한 곳은 다른 곳이라는 점이다.
1999년 러시아 미디어가 이 영상을 구매하여 오직 2채널(러시아의 국영방송 채널. 현재 로시야 1로 바뀜)에서 풀버전을 틀어 주는 기행을 선보였는데 목적은 대대적으로 공개하여 체첸인이 잔인하고 야만적인 것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서방 국가들이 체첸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고 제2차 체첸 전쟁의 명분이 명확하게 생겼다.
인터넷에 고어 영상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한 러시아군의 목을 썰어 처형하는 영상이 15초짜리 영상이 대부분이다. 풀버전에는 체첸군들이 러시아군을 고문하고 능욕하는 장면까지 포함이 되어 있다.
1996년 10월 22일경 촬영된 ogrish chechen이라는 또다른 체첸클리어 영상도 있지만 범인들의 신원과 처형한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틀의 참수란 흔히 생각하는 조선시대 망나니의 참수처럼 큰 칼이나 도끼로 한 번에 목을 쾅 쳐서 자르는 게 아니라 30cm 가량의 단검으로 피해자의 목을 앞에서부터 쓱싹쓱싹 톱질하듯이 썰어 들어가는 방식을 택한다. 이게 이슬람 율법의 동물을 도살하는 자비하 법을 변형하여 인간에게 적용한 것인데 동물 도살되듯 치욕스러운 죽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슬람식 동물 도살 방법은 다음의 조건들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는데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어그로에 대통령부터 이등병까지 전 러시아군이 악에 받혔고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런 영상을 찍은 자들을 추적하는 것은 물론 스페츠나츠를 파견해 모두 잔혹하게 쓸어 죽였기 때문이다. 특히 스페츠나츠 대원들이 영상을 보고는 경악하고 분노하여 체첸 반군을 적극적으로 사살했으며 러시아군은 그 과정에서 이들이 숨어 있거나 연관된 지역의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살육하고 여기에 분노한 체첸인들이 다시 러시아에 테러를 자행하는 악순환이 이어지면서 양측에 큰 상처를 남겼다. 이후 당시 작전을 펼쳤던 스페츠나츠 장교의 술회에 따르면 반군과 관련된 어린아이, 임산부, 여자 할 것 없이 무차별로 도륙했다고 하며 시체까지 TNT로 흔적도 남지 않게 폭파했고 이런 "박멸" 행위만 수행하는 제대가 따로 편성되었다고 한다. 체첸클리어나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도 제1차, 2차 체첸 전쟁 동안 러시아군의 잔혹한 민간인 학살로 생긴 증오가 이슬람과 만나면서 일어난 것이다.
결국 전쟁범죄는 체첸의 여러 테러 행위들처럼 러시아에 두려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공분을 일으키고 국제 여론에도 악영향을 끼쳐 결과적으로 러시아 정부가 체첸 반군의 싹을 말리려고 하도록 유도하였는데 미국에게 호기롭게 9.11 테러를 저질렀다가 끈질긴 도주 생활 끝에 처참한 말로를 맞이한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이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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