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유일하게 남아공이 핵무기를 자진해서 포기한 이유 1) 소련붕괴 후 (흑인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대내외적 위협 약화 2) 아파르트헤이트로 인한 국제사회의 왕따에서 국제사회로의 편입 필요성 3) 넬슨 만델라 흑인정권 엿먹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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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 핵무기를 가졌다가 포기한 나라는 모두네 곳입니다. 우크라이나, 카자아스탄, 벨라루스,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죠. 하지만 이중 남화공은 완전히 예외적인 존재입니다. 다른 세 나라는 소련이 해체되면서 핵무기를 우연히 물려받은 나라들입니다. 반면 남화공은 스스로 개발한 핵무기를 자발적으로 폐기한 세계의 유일한 사례입니다. 앞으로도 두 번 다시 일어나기 어려운 특별한 결정이었죠. 남화공은 왜 핵무기를 만들었고 왜 포기했을까요? 도대체 남화공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음악] 남화공의 핵무기 개발은 1970년대에 본격화됐습니다. 하지만 그 기반은 훨씬 이전부터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남화공은 세계 1, 2위를 다투는 우라늄 매장국으로 떠오릅니다. 미국과 영국이 남화공의 고품질 우라늄을 사용했고 그 대가로 남화공은 원자력 관련 기술과 경험을 얻게 됩니다. 1969년 행정수도 프리토리아 외곽의 우라늄 농축 시설이 세워집니다. 남화공 정부는 이곳에서 극비리의 핵무기 개발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10년 뒤 첫 번째 핵폭탄이 완성됩니다. 이후 여섯 개가 더 제작되어 총 일곱 개의 핵무기가 만들어졌고이 중 여섯 개는 실제로 조립까지 마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흐릅니다. 9년 프레데릭 데클레르크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 그의 첫 결정 중 하나가 핵무기의 해체였습니다. 일곱 개의 폭탄은 모두 분해되었고 핵물질은 다시는 무기를 쓸 수 없게 재철이 되었습니다. 이듬의 남화공은 핵확산 금지 조약에 가입하고 국제 원자력 기구와 감시 협약까지 맺었습니다.이 과정에서 받은 직접적인 압박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죠. 세계는 어리둥절했지만 남화공은 단호했고 일사 천리였습니다. 이렇게 남화공은 스스로 비핵 국가가 되었습니다. 남화공이 핵무기 보유국이었음을 처음 알게 되신 분이라면 아마 가장 먼저 드는 의무는 이것일 겁니다. 남화공이 과연 그 정도의 과학 기술력을 가진다라가라고 말입니다. 사실 남화공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으로부터 경수로를 도입하면서 원자력 기술의 기초를 따졌습니다.
  • 처음에는 민간용 원자로였습니다. 하지만이 경수료를 운영하면서 우라늄의 농축 방식과 연료 사이클에 대한 실질적인 경험을 쌓을 수 있었지. 나아가 남화공은 독자적인 농축 기술까지 개발했고 그 기술력은 미국과 유럽의 핵 연류를 수출할만큼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또 주유 대학에는 이미 물리학과 핵공학 박사 과정이 있었고 유럽과 미국에서 유입된 과학자들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190780년대 아파르트 에이트 체제 아래에서 남화공 정부는 과학과 군사의 국가 예산의 45%를 집중 투자했습니다. 그 덕분에 남화공은 로켓, 레이더, 화학 무기까지 만들 수 있었고 그 기술력은 결국 핵무기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 남화공은 핵폭탄을 만드데 있어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단순한 건형을 선택했습니다. 히로시마에 투화된 리틀 보이와 같은 거죠. 고농축 우라늄 두 조각을 총처럼 강하게 충돌시켜 핵폭발을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기술적으로 만들기 쉬운이 핵폭탄에 집중에 실패 위험을 줄인 거죠. 남화공의 핵개발에는 마지막 퍼즐처럼 기워지는 또 하나의 조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과의 협력 의혹입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많은 핵 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이 기폭 장치나 설계 부분에서 기술 자문을 했을 가능성을 제기해 왔습니다. 남화공만큼은 아니지만 이스라엘도 당시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나라였습니다.
  • 그래서 두 나라는 동병 상년의 처지로 비공식적인 동맹 관계였습니다. 특히 1979년 인도양 상공에서 포착된 벨라 사건은 이스라엘과 남화공이 공동 핵실험을 버렸다는 유력한 정황으로 꼽힙니다. 핵폭발을 암시하는 이중 성광은 미국 위성에 감지되었고 미국 내부 보고서도이를 핵실험으로 판단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남화공의 핵개발은 단순한 자력 개발이 아니었습니다. 풍부한 후라늄, 정부의 집중 투자, 독자 기술 확보에도해 외부의 안목적 지원까지 더해진 복합적 결과물이었습니다. 남화공의 핵무기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 두려움입니다. 197, 80년대 흑인과 유색인종을 법으로 분리하고 차별하는 아파르트 헤이트 정책으로 제4에는 남화공에 등을 돌렸습니다.
  • 백인만이 투표권을 가졌고 흑이는 거주지도 제안받고 같은 학교나 병원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이 인종차별 체제를 유지하던 남화공 정부는 UN에서 투표권까지 박탈당했고 올림픽 출전도 금지되었으며 외국 자본과 기술 협력도 줄줄히 끊겼습니다. 그런데 우군 하나 없는 상황에서 더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안골라와 모잔비크가 독립한 뒤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 정권이 들어선 겁니다. 남화공의 위임통치령이었던 남미아에서도 좌파 민족주의 단체가 무장 투쟁을 버렸습니다. 특히 안골라에는 최대 5만 명의 구바군이 주둔했고 이들은 남미비아 국경을 넘어 남화공 근처까지 진출해 있었습니다.
  • 남화공의 산업 지대와 전략 요충지가 공격받을 수 있는 거리였죠. 그럼에도 미국은 직접 개입하지 않았고 서방도 남화공을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안골라 보비크에 이어 남미비아까지 적대적인 흑인 공산 정권으로 넘어갈 경우 남화공은 지정학적으로 완전히 포위당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남화공으로선 단순한 이념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를 등해 업은 흑인 다수의 혁명 바로 이것이 그들의 공포였습니다. 그것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남화공 백인들의 권력과 재산을 모두 빼앗길 수 있는 실존적 위협이었지요. 이때 떠오른 카드가 바로 핵무기였습니다. 남화공은 실제로이 무기를 사용하려고 만든 건 아니었습니다.
  • 그보다는 우리에게 이런 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흘려서 서방이 무시할 수 없게 만들고 위기 때는 미국이 개입하게 만들겠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핵무기를 협상 카드로 쓰고 싶었던 것입니다. 프레데릭 클레르크 대통령이 핵은 제한된 억지력을 위한 것이라고 훗날 다시 밝혔지만 당시에 남화공 백인 정부로선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이 벼랑 끝에서 만든 핵무기를 왜 이렇게 쉽게 포기했을까요? 거기엔 우선 국제 정세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표면적인 이유죠. 1980년대 후반 세계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소련은 점점 심을 잃었고 동유럽 공산 국가들이 연달아 무너졌습니다.
  •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냉전 체제는 사실상 종식되었고 얼마 후엔 수월 자체가 해체되었습니다. 남화공이 처음 핵무기를 만들던 1970년대의 국제 환경관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위협이 약화된 것입니다. 아프리카 대륙도 변했습니다. 과거 남화공을 둘러싸고 있던 공산주의 확산 위협도 하나 둘씩 사라졌습니다. 남화공, 쿠바, 안골라, 미국 사자 협정으로 구바군이 단계적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안골라 전 역시 휴전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독립한 남미아엔 온건 민주정부가 틀어섰습니다. 이로써 남화공을 오랫동안 공포에 몰아나왔던 공산주의 흑인 혁명의 위협은 실질적인 힘을 잃었습니다.
  • 핵무기의 존재 이유 자체가 흔들리게 된 거죠. 이렇게 되자 핵무기는 더는 남화공을 지켜주는 무기가 아니라 외부와 내부 모두에게 부담만 안기는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두 번째는 국제사회 편입의 필요성입니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듯 남화공은 한마디로 1970년대 이후 국제 사회의 왕따였습니다. 이런 고립은 인종 차별 하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라는 점도 외면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남화공이 인종 차별을 철패하고 민주정부로 전환하더라도 핵무기를 그대로 가진 채 정권만 바뀌는 건 국제 사회에 큰 불안이었습니다. 새 정부가 핵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고 군부가 독자 행동에 나설 위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데클레르크가 직권하면서 남화공원 체제 전환과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됩니다. 세계에서 정상 국가로 인정받으려면 단순히 인종 정책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국제 사회가 믿을 만한 조치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고 그게 탈핵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남화공의 핵무기를 포기한 더 깊은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1990년대 초 남화공은 아파르트 에이트를 끝내고 민주화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백인 정권은 넬슨 만델라를 석방했고 다인종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핵무이었습니다. 곧 정권을 이어받을 흑인 정부에게 핵폭탄만큼은 절대로 넘기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 핵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백인 정권이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마지막 수단이자 그 자체로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핵무기를 흑인 정부가 갖는 순간 남화공은 아프리카 최초의 흑인 핵보유국이 될 수 있었고 국제사에서 흑인 정권의 위상은 비약적으로 높아질 수 있었습니다. 백인 정권은 그것을 참을 수 없었던 거죠. 또 다른 우려도 있었습니다. 당시 백인들은 흑인들이 핵무기를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불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과연 핵무기를 안전하게 유지하고 통제할 수 있을까? 기술적 사고나 오작동 통제 시스템의 붕괴는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 여기에 더해 핵무기가 또 다른 흑인 국가나 테러 조직이 손에 넘어갈 가능성까지 백인 정권은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핵이 언젠가 백인 사회를 향한 보복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자신들이 과거에 간한 폭력이 핵하는 형태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인 정권은 핵무기를 없애기로 했습니다. 정권 이양 전에 자신들이 아직 통제권을지고 있을 때 모든 핵폭탄을 해체했고 저장 코드와 설계도 기술 자료까지 완벽하게 폐기했습니다. 당연히 해체 작업은 흑인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진행되었습니다. 세계는 남화공이 스스로 핵을 없앴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냈습니다.
  • 평화를 위한 모범적인 결단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핵은 백인의 것이고 흑인에게는 넘길 수 없다는 인종적 선극기가 있었습니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가 다가오자 백인 정권이 더는 가질 수 없는 힘을 흑인들에게 줄 바엔 아예 없애는 쪽을 선택한 셈입니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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