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시킨 루소의 사회계약론; 정부는 복잡한 공무를 수행하고 그런 일은 똑똑한 사람만이 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소수로 구성된 귀족정이 가장 알맞다고 주장

 

4. 오해[편집]

4.1. 루소는 전체주의의 시조인가?[편집]

버트런드 러셀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서양철학사』에서, "루즈벨트처칠로크의 후예, 히틀러는 루소의 후예"라고 말한다. 로크는 →고전적 자유주의→근현대 영미권 정치학→루즈벨트와 처칠로 이어지고, 루소는 →칸트헤겔→전체주의→히틀러로 이어졌다는 것으로, 루소는 전체주의의 시조라는 것이다. 러셀은 루소가 설파한 '일반의지론'이 근현대적 의미의 급진적 민주주의를 정립하여 중우정치의 위협을 키웠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사회계약론』에서 루소가 "각 회합원은 자신의 모든 권리와 함께 공동체 전체로 완전히 양도된다", "이것은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 양도여서, 최대로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며 어떤 회합원도 요구거리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한 것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 문장은 '추상적인 권리'인 일반의지에 복종하라는 말이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특정한 정치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만약 루소의 주장이 정치권력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이었으면, 정부에 반대하는 집회[38]를 왜 루소가 강력하게 주장하겠는가? 물론 정부가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면 그 법을 따르겠지만, 정부가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지 못하면 집회에서의 투표를 통해 정부 자체를 바꿔라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며, (심지어 그 집회가 상설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정부가 개인의 모든 자유를 통제하려고 하는 전체주의와 상반된 개념이다.

무엇보다도 루소는 『에밀』의 사회교육에 관련해서, 청년기(15~20세)에 '동정심'을 먼저 강조하고 이후에 성년기(20세 이후)에서 '시민의식'을 말함으로써, 둘 사이에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39] 루소의 정치철학도 이렇게 '동정심에서 발전한 시민의식'으로 살펴본다면 그런 시민의식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자신이나 다른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전체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신과 동류인 인간이 고통 겪는 것을 보는 것에 대한 선천적인 혐오감에서 발생하여, 우리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 서 보게 하는 보편적이고 인류애적 감정이 바로 루소가 말하는 동정심이기도 하고,[40] 그러한 인류애적 감정에 기반해 그 고통을 함께 극복하고자 협력하는 '전체의 힘'은, 부분에 대한 '강요'가 아니라 부분(개인)의 '자발성'에 달려있기 때문이다.[41]

사실 러셀의 주장은 한동안 영미철학자들 사이에 무비판적으로 전승되면서 루소에 대한 고질적인 편견을 만드는데 일조했으나, 최근 수십년간 루소전공 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반박되어오면서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긴 하다. 학자들에 따르면, 루소는 근대의 전체주의에 기여했다는 비난을 받아 왔지만, 루소가 전체주의만큼 혐오스러워한 것은 없었을 것이라 말한다. 루소가 살아 있었을 때 루소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사상이 전체주의의 반대 방향, 즉 아나키즘으로 향하는 것으로 보았고, 잘해야 '괴물 같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루소가 목적한 바도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있지 않다. 루소가 의도한 것은 근대의 경찰국가가 자행하는 감독과 사상 통제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고, 대신에 그는 '공동체의 선에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을 상상했었다. 그는 인민들의 분리된 자아를 일종의 집단적 자아로 승화시키면서 그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극복할 동기를 부여하려고 했을 뿐이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체주의를 말하려는 건 결코 아니었다. 루소는 동시대 인물 중 그 누구보다도 개인의 자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사람이었다.[42]

4.2. 루소의 사상은 직접민주주의인가?[편집]

"영국 인민은 오직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크게 착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오직 의회 구성원을 선출하는 동안만 자유롭다. 선출이 끝나면 그 즉시 인민은 노예이고,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라는 루소의 말은 직접 민주주의를 표현하는 말로 유명하다. 다만 루소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루소는 인민의 '대표'를 원하지 않지만 '간사[43]commissaires(지도자 or 입법자)'는 허용한다. 게다가 루소는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지도자의 명령은 주권자가 자유롭게 반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한에서 일반의지로 간주될 수 있다. 이런 경우 보편적 침묵으로부터 인민의 동의를 추정해야 한다."[44], "침묵은 암묵적 동의로 추정되며, 법을 폐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 주권자는 법을 끊임없이 비준하는 것으로 가정된다."[45] 즉 지도자의 명령에 반대하지 않는다면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는 없으며, 인민들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집회에 나설 때서야, 인민들은 그 자신의 정부를 바꾸기 위해서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직접 민주주의적 집회에 대해 많은 분량을 들어 설명하면서 집회가 법적으로 상설화되어야 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루소에게 있어서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가 진정한 의미에서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은, 최초의 계약을 구성할 때 또는 타락한 정부나 법을 전복시킬 때 같이, 지금으로 치면 특수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따라서 루소의 사상을 단순히 '직접 민주주의'라고 단정지을 수만은 없다.

또한 루소는 '주권(=일반의지≒투표권)'과 '정부'를 구분하면서, 포괄적인 법의 제정(입법)은 '주권'이 하게 하고, 개별적인 법의 적용(행정[46])은 '정부'가 하게 한다. 이는 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할 때야 성립한다. 즉, 정상적인 상황에서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는 '주권'에만 관련된 것이지, 정부(행정)에 관련된 것은 아닌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입법권에서 인민이 대표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나, 행정권에서는 인민은 대표될 수 있고 대표되어야 한다." [47] 실제로 루소는 〈산에서 쓴 편지〉에서 "이제 국가(=주권[48])와 정부는 아주 다른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정부 가운데 가장 좋은 정부는 귀족정부이며, 주권 가운데 가장 나쁜 주권은 귀족주권입니다."[49]라고 말했다. 여기서 루소가 말하는 '귀족정'이란 소수로 구성된 정부를 뜻하고, '민주정'은 인민 모두로 구성된 정부를 뜻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민주정의 경우, 인민 전체가 정부의 구성원이 되면 서로가 서로의 재판관이 되므로 그런 정부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정부는 복잡한 공무를 수행하고 그런 일은 똑똑한 사람만이 할 수 있으므로, 정부는 소수로 구성된 귀족정이 가장 알맞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주권(≒투표권)은 반대이다. '최초'의 사회계약에서 모두가 기꺼이 합의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계약은, 구성원 각각이 전체의 부분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일반의지에 반영할 수 있는 권리, 즉 주권이 있을 때야 성립할 수 있으므로, 사회계약의 원리에 따라서 자신의 '시민적 자유(선택)'를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최상의 주권은 '민주주권(인민주권)'이 되고, 사회계약의 원리를 무시한 채 소수의 특권만을 강조하는 주권인 '귀족주권' [50]은 가장 나쁜 주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즉 정부나 법관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결을 내린다면, 최초의 사회계약이 깨진 셈이므로 그 타락한 정부와 법을 전복시키기 위해, 그러한 정부에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가 적용된다. 즉, 정부가 법 앞에서의 평등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는 꼴이 되므로,(상호 복종은 평등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평등이 깨지면 상호복종도 깨지므로) 그들은 '법을 위탁받은 사람'이 아니라 법 위의 특권층이 되고, 인민들은 직접민주주의적 집회를 통해 그러한 정부를 갈아엎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루소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입법과 행정(사법 포함)을 구분한다. 로크와 다른 점은 입법 과정에 '일반의지'와 '인민주권'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51] 즉, 루소의 직접 민주주의는 입법에만 적용된다. (반면에 고대 아테네에서는 입법 뿐만이 아니라 행정과 사법까지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를 통해서 결정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투표에서 져서 사형당했던 것.)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이 모든 법을 일일이 정해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루소에 따르면, 입법에 있어서 보통의 경우에 인민들은 간사(지도자 or 입법자)의 명령에 따른다. 인민들은 침묵함으로써 암묵적 동의를 하는 것이다.[52] 이는 인민들이 정부에 대해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때(지도자에 대한 불만이 쌓였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가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루소는 그 직접 민주주의적 투표를 통해서 '자의적으로 법을 행사하는 그 정부'의 구성원을 바꾸어 정부를 쇄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로크의 경우, 모든 사람은 법을 지켜야 한다. 심지어 통치자조차도 말이다. 그래서 로크에 따르면, 정부가 법에 근거하지 않고 비합법적으로 행동한다면, 시민들은 법을 지키지 않은 그 정부를 무력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다.)

4.3. 루소는 다수결을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가?[편집]

루소는 자유와 평등에 기반한 최초의 사회계약을 만장일치로 통과하고 나면, 그 이후의 공동체의 선택은 계약 자체의 결과로서 다수의 의견에 따라야 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나와 반대되는 의견이 우세하다면, 그것은 내가 일반의지로 여겼던 것이 일반의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뿐이다. 이것은 일반의지의 모든 특징이 어쨌든 '다수성'에 있음을 보여준다.[53]

하지만 그렇다고 "인민의 공적 심의가 언제나 똑같이 올바르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에게 좋은 것을 원하지만, 자신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인민은 부패하는 법은 없어도 자주 속긴 한다." [54] 여기서 루소는 전체의지와 일반의지를 구별한다.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오직 공익에 대한 의사를 말하는 것이지만, 전체의지는 사익에 몰두하는 개별의지의 합일 뿐이다. 사람들이 마음 속으로 사적인 이익만 추구하면서 뻔뻔하게 공공선이라는 신성한 이름으로 자신을 치장한다면, 그런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결속이 느슨해지고 국가가 약화되기 시작하여, 공익을 추구하는 일반의지는 결국 사익을 추구하는 전체의지에 의해 가려지게 된다.

그러므로 각 개인들의 마음 속에서 공익을 추구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그럴수록 점점 더 그 '투표에서의 다수결'은 일반의지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반의지는 언제나 바르지만, 일반의지를 인도하는 판단이 언제나 밝은 것은 아니다. 인민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야 하고, 때로는 보아야만 하는 방식으로 보게 해야 한다. 인민이 찾고 있는 바른 길을 보여 주어야 하고, 개별의지의 유혹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해야 한다.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보게 해야 하고, 쉽게 인지되는 현재 이득의 유혹과 숨겨져 있는 먼 해악의 위험을 저울질해 주어야 한다." [55] 즉, 투표에 있어서 눈앞의 사익이 아니라 장기적인 미래의 공익까지 추구하게끔 '공중의 계몽'을 해줄 안내자(입법자)가 필요하다.

루소가 『사회계약론』의 제일 마지막 장에서 정치종교를 고려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56]에서이다. 하지만 루소는 국가를 신으로 삼아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강조하는 '시민종교religion du citoyen'의 경우, "배타적이고 폭정을 행하는 종교가 됨으로써 유혈을 즐기는 불관용적인 인민을 만든다"는 점에서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인민은 살인과 학살만을 열망하고, 누구라도 그들의 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죽이면서 그 자신은 성스러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인민은 다른 모든 인민과의 자연적 전쟁상태에 놓이게 되며, 이런 상태는 그들 자신의 안전에 매우 해롭다." [57] 그래서 공익을 추구하는 시민 의식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관용이어야 한다고 루소는 주장한다. 이러한 부분은 루소가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조심했다는 근거가 됨에 충분하다. 그러나 러셀은 이러한 루소의 주장을 거꾸로 받아들이고 그를 전체주의로 몰아감으로써, 루소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키우는데 큰역할을 했다.

4.4.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의 유포자?[편집]

Finally I recalled the stopgap solution of a great princess who was told that the peasants had no bread, and who responded: "Let them eat brioche.
최종적으로 나는 빵이 없다는 농부들의 말에 대한 고귀한 공주의 임시 방편-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이자!-에 대해 떠올렸다.
ㅡ 장자크 루소, 참회록(1978년 출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고백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좀 있는데, 이 글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리키는 것이란 주장은 애초에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장자크 루소는 1766년 회고록을 쓰면서 1740년에 있었던 일화를 떠올린다는 식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슨 정치적 비판을 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술 마시려고 빵을 찾다가 문득 저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브리오슈를 안주로 술마셨다는 이야기. 심지어 회고록을 쓴 시점 기준으로 봐도 1755년에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의 나이는 이 때 12살이고, 프랑스에 시집가기로 결정한 건 1770년으로 책이 나오고도 4년 뒤이다. 그래서 일각에선 루소가 염두에 둔 '고귀한 공주'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마리아 테레지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하는데, 어차피 고증을 살린 이야기가 아니므로 누구라도 알 바는 아니다. 정작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 샬로트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사치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후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생활에서 꽤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빈민들의 삶에도 신경을 썼다니 대혁명 시기에 붙은 나쁜 이미지가 현재까지 내려온 영향도 있다고 볼 수 있다.

5. 평가 및 영향[편집]

루소의 사상이 이후의 사회에 준 영향은 엄청나게 크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을 통해 나타낸 그의 민권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으며, 훗날 로베스피에르 등의 혁명가에게 영향을 주었다.[58] 루소가 근현대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의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방식의 글쓰기는 낭만주의 문학의 서막을 열었으며, 괴테실러 등에게 이래저래 영향을 주었다. 또한 개신교 신학과 문장 양식에 끼친 영향도 크다. 18세기에 이전까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거의 한계에 도달하고 있었는데, 루소의 이성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방식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글은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많은 개신교 목사들이 이를 참조했었다.[59]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는 19세기 낭만주의의 선구로 일컬어지고 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신 엘로이즈》의 영향을 받았다. 그 밖에 애인 사이에 생긴 5명의 아이를 차례차례 버렸다고 고백한 자서전인 《고백록》이 있다.(...)

성선설을 주장해 윤리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윤리 시간에 순자의 성악설을 토머스 홉스, 고자의 성무선악설은 존 로크에 비견하듯이. 맹자의 성선설과 루소의 철학을 비견한다. 다만 루소철학과 맹자의 성선설은 성선만 같고, 이에 대한 관점과 결론은 상이하니 주의하자. 루소는 인간이 문명 국가를 만들기 이전인 자연 상태에서는 선했고 모두가 평등했지만,[60]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악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이 재산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무조건적으로 공동체에 양도한다면 진정한 자유와 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루소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라서 계몽주의자로 엮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 자연권의 강조 등을 통해 이성의 진보만을 믿던 계몽주의와는 궤를 달리 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위에도 언급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교육학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전환을 이룩하게 하여 아동중심 자유교육, 생활중심 교육, 노작주의 교육 등 19세기부터 교육학을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교육사조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도 기존의 고전주의 문학에서 19세기를 이끄는 낭만주의 문학 사조로의 변화를 이끈 선구자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그의 철학적 바탕이 ‘평등’과 ‘자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낮게 보았던 당시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저서 《에밀》 5편에서 "여성에게는 주권이 없으니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다"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가 만인평등 사상을 주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한 모순이었지만, 당시 루소를 포함한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을 평등한 권리를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소의 저서 《에밀》은 최초의 페미니즘 도서로 알려진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도 엄청나게 공격을 받는다. 다만 루소의 다른 저작에서는 여성의 역할을 치켜세워주는 내용도 있으며, 루소가 원래 여기서는 여자를 비하하고 저기서는 남자를 비하해서 상호 비하를 통해 평등적 사유를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라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에드먼드 버크도 루소의 사상을 비판했는데 그의 자연론적 사상을 보면서 "그렇게 평등하다던 원시시대에 왜 인간이 후에 스스로 정부를 만들고 국가를 만드는가?"라고 비판하였다. 하지만 루소는 자신의 책에서 원시 시대의 인간은 혼자서 자기보존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놓이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버크는 이후 루소전문가들에게 두고두고 틀렸다고 지적받게 되지만, 버크의 말은 일반 대중들에게 유명해져서 루소를 공격하는 말의 대표로 종종 쓰이곤 한다.

5.1. 근현대 교육에 미친 영향[편집]

『에밀』은 루소가 자신의 저서 중 가장 뛰어나고 중요하다고 여겼던 작품이다. 그러나 "20년의 성찰과 3년의 작업"을 치르게 했던 이 작품은 출간 당시부터 파리 고등법원으로부터 분서령을 받는 등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루소의 책은 더 유명해졌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맥이천(J.A. McEachern)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1762년에서 1800년에 이르기까지 『에밀』은 해적판과 번역본을 포함해서, 약 60여 판이 출판됐다. 이에 따라 『에밀』에서 소개된 방법대로 아이들을 키우려는 시도도 셀 수 없이 많아졌다. 전류와 자기장의 관계를 나타내는 '앙페르의 법칙'을 발견한 프랑스 물리학자 앙페르와 베네수엘라의 독립 혁명 지도자 볼리바르 등도 루소의 저서에서 쓰인 대로 키워진 사례이다.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16세도 언젠가 높은 신분에서 추락할 경우를 대비해서 기술을 가르치라는 루소의 조언대로 아이때 열쇠공 훈련을 받기도 했었다.

또한 후대의 많은 인물들이 『에밀』의 사상에 빠져들었다. 임마누엘 칸트는 매일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로 유명한데, 딱 두 번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이 루소의 저서 《에밀》을 읽다가 놓친 것. 그리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빼먹었은 것이라고 한다. 괴테는 "호주머니에는 언제나 호메로스를, 그리고 머리에는 언제나 『에밀』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폴레옹 또한 자신의 진중 문고에 『에밀』을 꼭 챙겨 다녔다고 한다.

『에밀』은 서구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기념비적인 저작이다. 교육사가 보이드는 『에밀』의 교육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한다. "『에밀』은 18세기의 교육적 저작 중에서 비길 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며, 그것이 교육의 이론과 실제에 끼친 영향으로 판단한다면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교육적 저작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프레빌이나 드블레 같은 교육자는 『에밀』의 영향을 받아 역사책이나 산수책을 새롭게 만들어냈고, 또 다른 교육자들은 루소의 교육관에 동조하면서 무엇보다 어린이를 교육 활동의 중심에 두는 교육을 시도하려고 노력하였다. 바제도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독일의 교육을 개혁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자연 학습, 체육, 수공 교육 등 실제적 활동을 학교 교과에 도입했다. 또한 체벌과 언어 학습에서 기계적인 암기 방식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1774년에 데사우(Dessau)라는 곳에 설립한 '모범 학교(Philanthropinum)'는 어린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공공의 이익 증진,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애국적인 생활을 영위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만들어진 실험 학교이다.

페스탈로치는 루소의 『에밀』을 읽고 감동하여 '왕좌에 있으나 초가에 있으나 모두 같은 인간'이라는 신념으로 어린이 교육에 일생을 바쳤다. 지능, 신체, 도덕의 조화로운 발달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는데, 무엇보다 그는 때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어린이들이 공동으로 학습할 때야말로 공감과 신뢰에 기초한 아름다운 인간애가 나타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민중 역시 교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신인문주의 교육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뢰벨은 페스탈로치와의 만남을 통해 루소의 교육철학에 공감하여 자신의 교육 운동을 전개했다. 무엇보다 그는 억압적인 교육 방식을 물리치고 어린이가 놀이와 노작 활동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독립적이고 협력적인 사회 주체로 성장하기를 원했다. 프뢰벨은 초등학교에 취학하지 전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에 일생을 바쳤으며, 그가 만든 '킨더가르텐'은 오늘날의 '유치원'에 실천적 골격을 제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진보적 교육 운동의 대표자 존 듀이도 루소의 교육철학에 엄청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전통적 지식관이나 학교관을 비판하면서 다양한 실험학교를 설립하였고, 학교 교육의 주된 목적은 민주사회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을 양성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은 주로 『학교와 사회』, 『민주주의와 교육』에 나타나 있는데, 그에 따르면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반대로 학생들의 자발성에만 의존하면 불충분하므로 여러 가지 경험에 참여시킴을써 창조력을 발휘시킬 수 있는 계획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 일을 위하여 학교는 현실사회의 모델일 뿐만 아니라, 사회 개조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이상사회로서 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소는 20세기의 모든 교육 개혁가들에 영향을 미쳤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클라파레드를 비롯해, 페레, 프레네, 일리치, 섬머일 학교의 닐 등 자유롭고 창의적인 교육을 고민한 모든 사람은 루소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의 사유에 루소가 이룩한 성과를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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