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과 책의 역사: BC 7세기경 세워진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인 아시리아 (오늘날의 이라크)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과 BC 3세기경 건립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생각하면, 오늘날 이라크와 이집트가 후진국인 것은 참 기묘하게 느껴진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책은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던 길가메시 서사시로 기원전 2100년경 쓰여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기원전 1500년경 쓰여진 이집트 사자의 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기원전 1500년경 집필된 베다경이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BC10~5세기에 집필된 주역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은 장서 최소 1만권에서 최대 130만권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은 4세기경 세워진 고구려의 경당, 가장 유명했던 도서관은 1만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고려 시대의 보제사에 속한 부속건물인 장경전, 가장 오래된 책은 서기 755년경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일본 최초의 도서관은 8세기 나라시대에 세워진 쇼코칸이며, 가장 오래된 책은 8세기 초에 동대사에서 사용된 불경인 토다이지 금동대불경; 중국 최초의 도서관은 기원전 3세기경 세워진 한나라의 국자감, 가장 유명한 도서관은 당나라 시대의 장안도서관; 오늘날 세계최대 도서관은 3,300만권을 보유한 미국 의회도서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은 모로코에 있으며 859년에 설립되었다
도서관과 책의 역사: BC 7세기경 세워진 인류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인 아시리아 (오늘날의 이라크)의 아슈르바니팔 도서관과 BC 3세기경 건립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생각하면, 오늘날 이라크와 이집트가 후진국인 것은 참 기묘하게 느껴진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책은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던 길가메시 서사시로 기원전 2100년경 쓰여졌다;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기원전 1500년경 쓰여진 이집트 사자의 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기원전 1500년경 집필된 베다경이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BC10~5세기에 집필된 주역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은 장서 최소 1만권에서 최대 130만권으로 추정되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은 4세기경 세워진 고구려의 경당, 가장 유명했던 도서관은 1만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고려 시대의 보제사에 속한 부속건물인 장경전, 가장 오래된 책은 서기 755년경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일본 최초의 도서관은 8세기 나라시대에 세워진 쇼코칸이며, 가장 오래된 책은 8세기 초에 동대사에서 사용된 불경인 토다이지 금동대불경; 중국 최초의 도서관은 기원전 3세기경 세워진 한나라의 국자감, 가장 유명한 도서관은 당나라 시대의 장안도서관; 오늘날 세계최대 도서관은 3,300만권을 보유한 미국 의회도서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은 모로코에 있으며 859년에 설립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책으로는 **《길가메시 서사시》(Epic of Gilgamesh)**가 가장 많이 언급됩니다. 이 작품은 기원전 21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메르 문명에서 유래한 고대 문학 작품입니다. 최초의 판본은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기록되었고, 그 후 여러 번 편집되고 보완되었습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길가메시 왕의 모험과 삶을 다룬 서사시로, 인간 존재의 의미, 죽음, 우정, 신에 대한 탐구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이야기합니다. 이 작품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문화를 반영하며, 인류 최초의 문학 작품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
주요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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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인간 존재, 죽음,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 신과 인간의 관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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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서사시 형태로, 긴 이야기 속에서 여러 모험과 교훈을 담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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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 원본은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로 기록되었으며,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남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이집트의 죽음의 책(죽음의 서), 인도의 베다, 중국의 주역 등도 고대의 중요한 문헌들로, 고대 문명의 중요한 지혜와 문화를 담고 있지만, **《길가메시 서사시》**가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4%EC%8A%88%EB%A5%B4%EB%B0%94%EB%8B%88%ED%8C%94_%EB%8F%84%EC%84%9C%EA%B4%80
아슈르바니팔 도서관
체계적으로 장서를 갖춘 세계 최초의 도서관이다. 전문적인 참고 도서관이며 왕의 명상을 위한 개인 장서로 구성되었다. 니네베의 아슈르바니팔 왕궁에서 출토된 점토 설형 문자판에는 아시리아에서 펴낸 길가메시 서사시, 창조의 서사시원문, 고대 문학작품등이 새겨졌다.
- 약 30,000개의 점토판, 총 1,500종 문학작품 소장
- BC. 648년 바빌론의 신전에 소장되어 있던 점토판을 이관
- BC. 647년 아수르에 있는 티글라트 필레세르의 도서관에서 이관
- 궁 내 수많은 주제실(방)구성 각 방의 주제별 자료 배열 및 보관
- 문학보다 학문중심적이고 역사관계자료(역대 왕 전기 및 제왕에 관한 기록)/ 상거래 관련 계약, 증서(법적 결정관련자료)
- 의학/도시, 산, 들(물리자료)/신화. 전설/과학(천문학, 점성술, 생물학, 수학, 자연사) 등이 기록됨
인도의 베다경(Vedas)은 고대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전들이자, 힌두교의 성스러운 문헌입니다. 베다는 그 자체로도 매우 오래된 문헌이며,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걸쳐 여러 단계에 걸쳐 집필되었습니다.
베다는 기본적으로 네 가지 경전(4개의 베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베다는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각각의 베다 경전은 그 시대의 주술적 의식, 철학적 사유, 신화, 의례, 윤리적 규범 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베다의 종류와 집필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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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베다(Rigv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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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500년경으로 가장 오래된 베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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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베다는 1,028개의 **찬트(송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고대 인도 사회에서 신에게 바치는 찬송과 기도가 주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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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베다는 가장 먼저 작성된 경전으로, 주술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을 강하게 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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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주르베다(Yajurv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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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00년 사이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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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주르베다는 제사 의식과 관련된 내용이 많습니다. 주로 의식의 순서와 제사의 기도문이 포함되어 있으며, 제사나 의례에 필요한 절차와 기도문을 기록한 경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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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베다(Samav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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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00년경에 집필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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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베다는 음악적 요소가 강조된 경전으로, 리그베다의 찬송을 음악적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 특징입니다. 음악과 관련된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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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르바베다(Atharvave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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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00년경에 집필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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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르바베다는 주술적이고 마법적인 성격을 가진 경전으로, 질병 치료, 마법, 주술적 의식, 그리고 일상적인 삶의 문제들에 대한 기도와 주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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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의 구성과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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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 문헌의 형성은 대개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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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 경전은 구술 전통에 의해 수백 년 동안 구술로 전해졌고, 그 후 기원전 5세기경부터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베다는 문자로 기록되어 후세에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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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다는 인도 고대의 문화적 유산을 기록한 중요한 문헌이므로, 이 시기의 사회, 철학, 종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집니다.
결론
베다경은 기원전 1500년에서 기원전 500년 사이에 걸쳐 형성되었으며, 초기 리그베다가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이후 다른 베다들이 차례로 발전하고 집필되었습니다. 베다는 고대 인도인의 종교적 신념, 의식, 문화적 가치를 담고 있어, 오늘날까지도 힌두교와 인도 문화의 핵심적인 문헌으로 간주됩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6%AC%EC%95%84_%EB%8F%84%EC%84%9C%EA%B4%80
무세이온(Musaeum, Mouseion)[1] 산하의 부설 기관(자료실)인 제1도서관과 세라페이온[2] 산하의 부설 기관인 제2도서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무세이온 산하의 제1도서관은 신전의 부설 기관(자료실)으로 건립되었으나 학문적 중요도나 유명세는 무세이온을 넘어섰다.
당대 최고의 학자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고, 전 세계의 학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초빙하는 등 세계 최고의 도서관을 만들 목표로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3세기경 건립된 이후 고대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대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헬레니즘 시대 학문연구의 중심이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잠시 번영하였다가 이후 쇠퇴하였다. 각지에서 초청된 학자 100여 명이 자연과학, 문헌학을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기원전 30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립을 시작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완성하였다.
귀족이나 명망 높은 학자라든가 특권층이 제1도서관의 주 이용자였다. 브루케이온(Bruchium, Brucheion), 즉 왕실 지구에 소재한 제1도서관은 학문 연구소의 기능도 했다.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100여 명의 교수가 배치되어 있었고, 오늘날의 대학 캠퍼스처럼 정원, 공용식당, 열람실, 강의실, 회의실 등의 시설이 있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서적들과 중동, 유럽의 여러 가지 고서들, 연구 자료,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을 때 로마 병사들의 방화로 큰 손실을 입었다. 이때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고, 기원후 3세기까지도 로마 치하에서 존속하였지만, 3세기 초 카라칼라의 무세이온 탄압으로 알렉산드리아 교육의 중심지는 이하의 세라페이온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기원후 260년대까지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으나, 무세이온과 도서관은 270년대, 특히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의 제노비아로부터 알렉산드리아를 빼앗은 272년 전후, 또는 늦어도 3세기 말[3]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4세기나 5세기에도 '무세이온'이라는 장소에 대한 언급은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지만, 이는 다른 무세이온이나 다른 어딘가에 일시적으로 재건된 무세이온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세라페이온 부속 도서관도 있었으며, 이를 편의상 무세이온 부속 도서관과 구별해서 '제2도서관'으로 부르기도 한다.
공공도서관 느낌이었다. 대출 여부는 미지수.
기원전 43년, 페르가몬 도서관이 20만권에 달하는 책을 이관해줌으로 확장되었다. 세라페이온은 3세기 초부터 무세이온을 능가하는 교육 시설이 되었고, 세라페이온 부속 도서관도 무세이온 부속 도서관에 버금가거나 그를 능가하게 되었다.
세라페이온이 언제 파괴되고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3세기 말까지 무세이온은 이미 거의 몰락했으므로, 아래의 "몰락" 절에서 3세기 이후에 다루는 것은 상당 부분 세라페이온의 몰락일 수 있다.
세라페이온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시절인 4세기 후반, 391년의 다신교도 성전 출입 금지 칙령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사료는 작성자의 관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다신교도 측 사료에 따르면 이때 기독교도 군중들이 세라페이온을 파괴했다고도 한다.
과거의 자료를 수집하는 것 이외에도 여행과 숙박, 정보, 급여를 제공하는 교류의 역참 역할을 했으며, 연구 기관으로서의 경험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비평 등의 철학적 사고관 또한 발달되었다. 이러한 비평 등이 활발해지며 검증된 책들은 학자들에 의해 보다 더 정확한 복사본과 이모본으로 제작되었다.
보유했던 장서의 양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최소 1만 권에서 70만 권, 100만 권, 130만 권까지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나, 당대의 도서관들에 비해 그 규모가 매우 방대했다는 것만은 모두가 동의한다. 이러한 문서들로 대표되는 지식 수준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꽤나 진취적이고 진보적이어서 놀라움을 동반한다.
- 에라토스테네스: '기원전 3세기 지구의 반지름을 측정함'. 그의 저서 《천문학》.
- 히파르코스: '기원전 2세기, 신성과 혜성을 관측, 1080개의 항성에 대하여 밝기를 6등급으로 분류하여 항성 목록 작성을 시도하였으며, 각각의 별 위치와 밝기를 표현하였고 세차 운동을 발견하여 태양년과 항성년을 더욱 정확하게 구할 수 있게 하였음'
- 칼리마코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문학사라고도 할 수 있는 《피나케스》를 저술하였고 〈아이티아〉를 비롯한 많은 시작품을 남겼다 '
- 유클리드: '기원전 3세기 기하학자, 각종 연구 자료 '
- 히로피러스: '기원전 3세기, 뇌가 장이나 신체를 조종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약을 만들기 시작함'
- 베로소스의 《세계사 전집》: 저술 시점까지 43만 2천년간의 인류 역사를 기록한 도서
- 아폴로니우스: 행성 운동의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임을 증명함. 아폴로니우스의 《원뿔 곡선론》 저작 원본.
- 소포클레스가 만들었지만 지금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비극 작품 수십 편.
-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 중 하나인 아이스킬로스는 생전 90여 작품을 발표했다고 전해지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면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7편뿐이다.
약 2000년 전에 이러한 인문학, 과학 사실들을 발견하고 연구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었고, 이 곳의 장서들이 온전히 보전되었더라면 지금보다 과학 발전이 훨씬 가속화되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이 단지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관찰'만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어렵기에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자세한 사항은 과학적 방법 문서 참조.
살펴보면 고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었음을 말하는 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고대 로마 시절 카이사르, 아우렐리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일련의 파괴 행위가 기록되어 있으며, 7세기 이슬람 세력이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을 때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기록[6]도 남아 있다.
그런데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3세기에나 이슬람교도들이 파괴했다는 내용이 담론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7] 그래서 18세기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이슬람이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기록은 기독교의 프로파간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게다가 각각의 자료에 기록된 파괴 정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 시기에 기록된 대화재 기록이다. 플루타르코스, 겔리우스, 마르켈리누스, 오르시우스 등의 고대 역사가들은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커다란 화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의 장군이었던 아킬라스가 바닷길을 막으며 카이사르의 통신을 끊으려고 하자 카이사르는 스스로 배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불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번져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도적인 방화는 아니고 카이사르의 실수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플로루스와 루카누스는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에 화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불이 일어난 곳은 해변의 일부 가옥들 뿐이었다고 한다.
부분적인 소실 혹은 파괴가 아닌, 전체적인 파괴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뚜렷하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 번의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 도서관이 붕괴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파괴 행위가 일어나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후원하는 지역 왕조가 더 이상 복구 및 유지비용을 댈 수 없게 된 것을 주된 이유로 들고 있다.[8] 자금이 부족한 도서관은 점점 관리가 소홀해졌고, 학자들이 하나둘 떠나간 것에 의해 서서히 몰락했다는 것이다.
일단 도서관의 위치가 호수(마레오티스 호)하고 바다(지중해) 사이에 있어서 누군가 끊임없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습기 때문에 문서가 쉽게 상하는 곳인 데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주요 자료들은 보존성이 낮고 대부분 화재나 습기에 취약한 파피루스 문서들이었다.
자료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려면 반복적인 필사 작업이 요구되는데, 학자들이 떠나가면 이 작업을 담당할 사람이 없으니 자료가 소실되는 것이다. 물론 필사 작업 자체는 노예를 동원할 수 있지만 그들을 교육하고 작업을 검수하는 것은 학자들의 담당이었다.[9]
도서관에 머물며 업무를 보던 수많은 학자들은 지역 왕조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도서관 유지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이 끊긴다면 도서관의 몰락은 자연스러운 결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글은 반드시 파괴가 외적으로 인해 생기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10], 그러니까 내부에서의 파괴를 고려하지 않았다. 또 도서관이 당대인들에게 크게 인식되어야지 도서관 후원의 중요성이 생기는데, 후원이 안 되었다는 것은 도서관이 그만큼 영세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 또한 간과한다. 즉 도서관의 완전 파괴가 아니라 당대인들에게 인식의 정도가 큰 도서관을 영세한 도서관으로 만든 파괴를 고려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의 지적이 많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과 위의 서서히 도서관이 사라졌다는 주장을 합해 고려해보면 도서관이 갈수록 영세해져서 후원할 중요성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서서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641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이슬람의 장군 암르 이븐 알 아스가 도서관을 끝장내버린 건 사실이지만[11], 그 이전부터 도서관은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고 5세기의 신학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적고 있다.
이런 식의 파괴라면 한순간에 파괴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는 이미지가 나온 이유,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파괴라는 이미지가 나올 수 있는 환경, 마지막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에 있었다는 역사적 맥락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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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iotheca Alexandrina |
1974년,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에서 도서관 건립의 아이디어와 필요한 부지를 제공했으며, 1990년 도서관 건설을 위한 시공사 및 자본을 선정한 후, 1995년 착공하여 2002년 완공 및 개장하였다.
이집트 10파운드 지폐 뒷면에 들어가 있다.
- 현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위상을 가진 곳은 미국 의회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한다해도 미의회도서관만 살아남으면 복구는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물론 대부분의 자료가 디지털화된 오늘날에는 큰 의미는 없다.
- 현대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국립도서관과 이집트 국립문서보관소가 그 역할을 맡고 있는데 역사는 꽤 오래되고 장서량도 많지만 미국 의회도서관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사한 사례로 고려 시대의 보제사에 속한 부속건물인 장경전을 들 수 있다. 2층 규모의 건물로 1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당대 지식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혜가 보제사에 모여 있다"라는 말까지 했다.최근 청소년들 사이에 인기 톱을 달리는 유튜버 나동현 씨는 본명보다 ‘대도서관’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대도서관은 시뮬레이션게임 ‘문명 시리즈’에 등장하는 건축물로, 정식명칭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의 건설 여부가 게임의 승패를 결정지을 만큼 중 요한 건축물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어떤 곳이었을까? 동양권에서는 다소 낯설지만, 서양권에서는 지금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지혜의 아이콘이자 인류 문명의 보고寶庫로 여긴다. 기원전 331년, 동서양을 아우른 정복자였던 알렉산더(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지금의 이집트 북부 지중해 인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를 세울 것을 명한다. 그 도시가 바로 ‘알렉산드리아’였다. ‘이곳을 전 세계 무역과 학문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것이 알렉산더의 야심이었지만, 그는 도시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낸 도서관의 내부와 외부 모습이다.
기원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모습을 상상해서 그려낸 도서관의 내부와 외부 모습이다.
그런 알렉산더의 유지를 계승한 인물이 있었으니, 알렉산더의 부하장군 프톨레마이오스였다. 이집트 총독이었던 그는 기원전 305년, 스스로 왕위에 오르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았다. 이후 17대 275년간 지속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시작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수학·물리학·생물학·천문학·문학·지리학·의학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집대성한 도서관을 만들기로 하고, 이를 의욕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그리스는 물론 아프리카, 페르시아, 인도, 이스라엘 등 세계 각지의 책을 사 모았다. 심지어 알렉산드리아가 항구도시인 점을 이용해 입항한 선박들을 뒤져 책이 나오면 모조리 압수한 뒤, 필사본을 만들어 주인에게 주고 원본은 도서관에 보관했다.
집념으로는 손자인 프톨레마이오스 3세도 뒤지지 않았다. 그는 소포클레스·아이스킬로스·에우리피데스 등 고전비극의 원본을 아테네에서 빌려왔다. 물론 반납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아테네에 막대한 보증금을 지불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원본은 자신이 차지하고 필사본을 만들어 돌려주었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을 각오한 결정이었다. ‘보증금으로 낸 금은 다시 얻을 수 있지만, 책은 세상에 하나뿐인 보물’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세상의 모든 지식이 모인, 오늘날로 치면 구글에 비견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더 이상 단순한 책 창고가 아니었다. 실험실·천문대·식물원·해부실·독서실은 물론 숙박시설까지 갖춘 종합 연구단지였다. 이곳에서 이뤄낸 연구성과들은 지금의 관점에서도 놀랍기만 하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가 둥글 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물론, 지구의 반지름과 둘레까지 정확히 계산해냈다. 헤론은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만들었는데,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것보다 1,7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유클리드는 <기하학 원론>을 저술함으로써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 위대한 과학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갈레노스가 쓴 열다섯 권의 의학서적들은 이후 1,200년 동안 의학의 표준으로 인정받았다.
도서관에 보관했던 파피루스.
도서관에 보관했던 파피루스.
오늘날 우리가 읽는 구약성경도 이곳의 학자들이 히브리어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을 토대로 편찬된 것이다. 이처럼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학자들은 왕조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서로 배우고 교류 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했다.
하지만 한때 70만 권이나 되는 장서를 보유하며 융성하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쇠퇴하면서 차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수백 년간 공들여 세운 도서관이었지만, 무너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원전 48년에 알렉산드리아를 침공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실수로 4만여 권이나 되는 책을 불태웠고, 서기 270년에는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서관 일부가 파괴 되었다. 640년에는 무슬림 정복자 오마르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완전히 파괴시키고 말았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도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소멸한 이후 안타깝게도 서구 문명은 약 천 년 동안 암흑 시대를 맞이한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명맥을 이어 2002년 이집트에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개관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명맥을 이어 2002년 이집트에 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개관했다.
지금도 많은 학자들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소멸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아쉬워한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학자들은 그야말로 시대를 앞서간 엄청난 업적들을 남겼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금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우리는 결코 옛것을 ‘낡고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내가 뭔가 안다’고 오만을 부릴 수도 없는 이유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도 따지고 보면 앞 세대의 노력을 토대로 세워진 것들이니 말이다. 지금은 사라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출처 : 데일리투머로우(https://www.dailytw.kr)https://www.dailytw.kr/news/articleView.html?idxno=19258일본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
일본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으로는 **"쇼코칸"(聖庫館)**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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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칸은 8세기, 나라 시대(710–794) 동안 설립되었습니다. 이 도서관은 일본의 첫 번째 공식적인 도서관으로, "텐무 천황"(天武天皇, 재위 673–686년)이 설립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도서관은 당시 국가의 학문적 기반을 마련하고 문서와 서적을 보관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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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칸은 불교 경전을 비롯하여 중국의 고전 문헌들을 보관했고, 특히 **"고대 중국의 유교서적"**을 중심으로 한 자료들이 보관되었습니다. 쇼코칸은 나라 시대의 중요한 학문 중심지로, 일본의 고대 지식과 문화의 보전 및 전파에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
일본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으로는 **"국립도서관"(国立国会図書館, National Diet Library)**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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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연도: 194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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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도쿄에 위치하며, 교토에도 분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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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일본의 국회와 관련된 자료를 보관하며, 일본에서 출판된 모든 도서의 법적 보존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국립도서관으로, 전 세계의 다양한 자료와 일본 역사에 관한 방대한 장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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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1,000만 권 이상의 도서가 보유되어 있으며, 일본의 역사적 문헌과 최신 연구 자료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 일본 연구와 문화의 중심지로 여겨집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책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토다이지 금동대불 경》(東大寺金銅大仏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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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다이지 금동대불 경》**은 8세기 초에 쓰여졌으며, 토다이지(東大寺)에서 사용된 불경 중 하나로, 법상종(法相宗)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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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완전한 책으로, 주로 불교 경전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이 책은 목판 인쇄본으로 제작되었으며, 불교의 교리와 의식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고대 일본 문헌으로는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습니다. 이 두 책은 일본의 신화와 역사, 그리고 고대 일본의 전통과 문화를 기록한 고대 문헌들로, 각각 712년과 720년에 완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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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기》**는 일본의 신화와 고대 역사에 관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책으로, 일본의 제1의 역사서로 간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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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와 신화를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으로, 일본의 제2의 역사서로 여겨집니다.
참고: 일본에서 **《토다이지 금동대불 경》**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책으로, 불경의 성격을 갖고 있으며,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역사적인 가치가 큰 문헌입니다.
한국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으로는 "경주 독서당"(또는 독서원)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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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독서당은 신라 시대에 설립된 교육 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진흥왕(r. 540–576년) 때 설립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당시 신라는 학문과 교육을 중시하여 고대 한국의 지식 보존과 전파를 위해 이 도서관을 설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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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서관은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문학과 역사적 기록 등 다양한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당시 문신들과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고구려의 도서관 "경당"**은 4세기 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경당의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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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시기: 고구려의 장수왕(r. 413–491) 시대에 설립된 것으로 보며, 정확한 설립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로 추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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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 경당은 고구려에서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으로, 도서관의 기능을 하며 학자들과 공무원들을 교육하고, 중요한 문서들을 보관한 장소였습니다. 경당은 고구려의 지식과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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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경당은 국가의 중요한 학문적 중심지로, 당시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현재의 평양시)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경당의 역할:
경당은 고구려의 왕실과 고위 관리들을 위한 교육기관이었으며, 경전과 역사서, 법률 등을 보관하고 교육하는 기능을 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문화와 지식을 보전하는 중요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유교적, 불교적 전통과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저장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구려의 경당은 이후 **백제의 "궁궐 도서관"**이나 **신라의 "경주 독서당"**과 함께 고대 한국의 도서관과 교육 시스템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경당의 역사적 의의:
경당은 고구려의 문화적 우수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고구려의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기관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이 도서관은 고대 한국 문학과 철학, 역사 기록 등 중요한 자료들의 보존과 연구를 담당한 곳으로, 고구려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의 도서관인 경당은 4세기 후반 또는 5세기 초에 설립되었으며, 고구려의 학문과 지식의 중심지로 기능한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책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입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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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8세기, 신라 시대 (대략 755년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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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지: 경주 근처의 불국사에서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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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이 책은 다라니경(주문을 포함한 불경)의 하나로, 불교 의식과 교리, 특히 불사의 법력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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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목판 인쇄본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불경 인쇄본 중 하나입니다. 이 책은 신라 경덕왕(r. 742–765) 시절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교 경전이 목판 인쇄로 만들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왜 중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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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 인쇄의 기원: 이 책은 목판 인쇄 기술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사례로, 그 당시 목판 인쇄 기술의 발달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입니다. 따라서 인쇄술의 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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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확산: 이 책은 또한 불교가 한반도에 널리 퍼지고, 국가적 차원에서 불교 경전의 인쇄와 보급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책으로, 8세기 신라 시기의 중요한 문헌입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도서관으로는 **"국립중앙도서관"**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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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연도: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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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서울에 위치하며, 국가적 자료의 보존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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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국립중앙도서관은 한국의 국가 문헌 자료와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연구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중요한 학술적 중심지입니다. 이 도서관은 다양한 디지털 자료와 고문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의 고대 문헌부터 현대 연구 자료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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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 국립중앙도서관은 3,000만 권 이상의 장서와 디지털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출판된 모든 서적을 보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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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초의 도서관: 쇼코칸 (8세기, 나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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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장 유명한 도서관: 국립도서관 (1948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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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도서관: 경주 독서당 (신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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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장 유명한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1945년 설립)
각각의 도서관은 그 나라의 학문적, 문화적 전통을 반영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중국 최초의 도서관과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했던 도서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중국 최초의 도서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은 "국자감"(國子監)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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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은 한나라(기원전 206년–220년) 시기에 유교 교육기관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이곳은 국가의 공식적인 교육과 학문을 담당하는 기관이었으며, 이와 함께 많은 서적들이 보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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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와 한나라 초기에는 국자감이 곧 도서관의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학문 연구를 위한 서적을 보유한 중요한 장소로 기능했습니다. 이후, 당나라(618–907년)와 송나라(960–1279년)로 넘어가면서 더 많은 도서관들이 발전했지만, 국자감은 중국에서 가장 초기의 도서관으로 여겨집니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은 베이징의 "국립도서관"(National Library of China)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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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도서관은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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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기준으로, 이 도서관은 약 3,500만 권 이상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중국의 고문서, 불교 경전, 문학 작품, 그리고 현대 연구 자료까지 폭넓은 자료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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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도서관은 중국의 전통적인 고전뿐만 아니라 서양 문학, 과학기술 서적, 디지털 자료 등도 포함된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있어, 학술 연구와 문화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도서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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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관"(秦書館): 진나라 시기의 황제 진시황(秦始皇) 시대에 설립된 것으로, 진시황은 "시경", "서경", "예기" 등 고대 중국의 중요한 고전들을 모았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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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도서관"(長安圖書館): 당나라(618-907) 시기의 수도인 장안(현재의 시안)에 위치했던 도서관으로, 그 당시 당나라의 문화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고, 많은 문헌과 학자들이 이곳에서 연구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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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초의 도서관: 국자감(한나라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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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 국립도서관(베이징)
중국은 오랜 역사 동안 수많은 중요한 도서관들을 설립하며, 문화와 학문을 보존하고 발전시켜왔습니다.
ChatGPT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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