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선생 제자 남승희의 칼럼들: 재밌고 대단히 유익하다; 스키니진과 남성 드로우즈 팬티의 등장, 남성의 여성화의 생물학적/진화론적 원리, 90년대 이후 시작된 여성에 의한 남성의 성적 대상화, 남성들의 쓸데없는 서열싸움 대신 남성에게 해방을?;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2000)에서 인간 남성의 짐승적 특성이 약화되는 이유로 인구조밀과 네오테니(neoteny, 어린애성)를 든다; 여성들이여, 노브라를 유행시키자! ; 원조교제와 청소년 보호는 불가능하다;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수컷성을 죽일 수 있는 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남성; 아름다운 남자들에게 바라는 것; 남성의 여성화와 여성의 남성화가 시사하는 것: 지금 전체적인 인간사회의 흐름은 여성화이다. 이에 대해서는 헬렌 피셔가 [제1의 성](생각의나무)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수컷들의 위계구조와 경쟁, 폭력의 방식들을 이와 전혀 다른 '여성적 방식', 즉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와 협력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방식들이 대체하는 변화가 지금 경제에서 또 전사회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탈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유연한 여성이 유리하다는 얘기다. 권위적인 남성은 도태될 것이다. 이제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 여성 상위시대는 올 것인가?; 자식의 색을 드러낼 수 없는 남자가 불쌍하다?; 90년대 복고풍이 유행한 이후 여자들의 패션은 여성화 - 복고풍 유행은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한 저항의식?; 강한 여자가 아름답다?; 미소년이 좋고 그보다더도 더 야한 남자가 좋다; 남자가 아닌 육체나 패션이나 태도를 통해서 '야함'을 풍기는 남자, 스스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즐기는 남자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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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남성들이 섹시해지는 이유 있었네핑크빛 의상·야한 속옷에서 화장·액세서리까지… 생존 위한 몸부림?
![[문화]남성들이 섹시해지는 이유 있었네](https://img.khan.co.kr/newsmaker/704/cul1-0.jpg)
‘남자들이여. 부드럽고 아름다워져야 생존할 수 있으리니’
아침
샤워 후 말끔히 면도한 얼굴에 스킨로션부터 아이크림, 에센스, 자외선 차단제까지 꼼꼼히 바르는 젊은 남성의 이야기는 더 이상
새롭지 않다. 울긋불긋하게 색조화장을 하지 않을 뿐 피부와 몸매 관리에 신경 쓰기는 여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흐름을 화장품 업계가 놓칠 리 없다. 모공, 기미를
감춰주는 색조화장품 ‘보닌 더스타일 포토제닉’(LG생활건강), 근육을 탄력 있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앱도스컬프트’(비오템옴므)
등 남성용 화장품 시장은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남성
패션이 화려해지고 대담해졌다고 호들갑을 떨 일도 아니다. 언젠가부터 남성복에도 빨강, 노랑 등의 원색은 물론이고 산뜻한
라임컬러나 귀여운 느낌의 핑크까지 다양한 색상의 옷이 등장했다. 조인성, 천정명 등 꽃미남 스타들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입고 나온
꽃무늬 셔츠나 재킷이 일반 남성 사이에서도 유행하는 등 남성 패션은 나날이 현란해지고 있다.
스키니진, 젊은 남성 사이 폭발적 인기
요즘엔 한 걸음 더 나아가 섹시함을 강조하기 위해 등장한
스키니진(바지통이 아주 좁아 다리에 착 달라붙는 진)이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심지어 앞쪽에
프릴(잔주름을 잡은 가늘고 긴 장식천)이나 레이스를 단 셔츠, 앞가슴 부위에 요란한 주름장식을 달고 목에는 줄 리본으로 묶음
장식을 한 블라우스형 셔츠까지 나왔다. 물론 과거의 품 넉넉한 통자형이 아니라 허리선이 쏙 들어가 몸에 잘 맞는 스타일이다. 요즘
남자들의 옷은 이처럼 어깨와 허리, 엉덩이와 허벅지 등 몸 구석구석이 몸에 착 달라붙는 게 주류다.
그야말로 “이거 남자 옷 맞아?” 할 만큼 여자 옷인지 남자
옷인지 한눈에 구분하기 어려운 옷 투성이다. 크리스찬라크르와 옴므의 김다인 디자인실장은 “남성복에 여성적 느낌이 전이되면서 남성의
곡선을 드러내는 날카로운 실루엣과 다양한 장식을 한 옷들이 유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이크림과 자외선차단제 등으로 노화를 방지하려는 남성이 많다. 사진은 거울 앞에서 화장하는 남성과 남성용 화장품. <경향신문>
이런
경향은 전통을 중시하는 남성 정장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올들어 여성복처럼 허리를 잘록하게 넣어 S라인을 강조하고 허리선을
높게 해 다리가 길어 보이게 하는 날씬한 스타일의 슈트가 주종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 어깨가 넓은
박스스타일의 재킷을 입고 있다면 이제는 ‘촌스럽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속옷은
더 야해졌다. 몇 해 전부터 남성속옷에도 컬러풀한 줄무늬와 체크무늬 등이 등장했지만 지금은 한층 더 패셔너블한 멋을 살릴 수
있는 남성 속옷이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다. 특히 로라이진(밑위 길이가 짧은 진)이나 스키니진처럼 겉옷의 변화는 속옷의 변화를
유도했다.
남성 팬티는 드로우즈 스타일 등장
종전 삼각이나 트렁크 팬티 일색이던 남성 팬티는
드로우즈(트렁크 스타일이면서도 피부에 착 달라붙는 팬티) 스타일이 등장하며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속옷전문브랜드 보디가드에서
2003년 전체 팬티 매출 중 15%를 차지했던 드로우즈는 올해 2배 이상 증가해 매출 비중이 35%에 달한다. 드로우즈 판매율이
높아진 것은 겉옷 맵시까지 살려주는 속옷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속옷전문브랜드 르페의 조혜선 디자인 실장은 “몸매를 잘
살려주면서도 편안함이 강조된 드로우즈의 인기나 입체적 패턴으로 맵시를 살려주는 속옷을 찾는 남성 고객이 많아진 것은 진정한
자기패션과 자기표현에 대한 남성들의 욕구가 높아졌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뒷면이
훤하게 비치는 망사팬티부터 꽃자수가 화려하게 디자인된 레이스가 달린 팬티, 심지어 남성 T팬티까지, 이제 남자팬티는 그 화려함과
섹시함에 있어 여자팬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속옷전문브랜드 섹시쿠키의 전지연 디자이너는 “과거 남자 속옷은 여성 속옷과 디자인
컨셉트를 철저히 구분했으나 지금은 전제품 중 20% 이상이 여성 디자인과 같은 제품으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매트로 섹슈얼(패션에 민감하고 외모에 관심이 많은
남성을 이르는 말)을 넘어 크로스 섹슈얼(단순한 외모 가꾸기 수준이 아니라 여성의 액세서리는 물론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화장까지
차용하여 자신을 꾸미는 남성)이라는 용어가 탄생한 배경이다.

트렁크 스타일이면서 몸에 착 달라붙는 드로우즈(위)와 화려한 무늬의 삼각팬티. <사진 제공/키스리퍼블릭·로페·섹시쿠키>
지난
12월 1일부터 10일까지 대학로 쇳대박물관에서 열린 ‘남자를 위한 장신구’전도 최근의 사회·문화적 변화를 보여준 의미 있는
전시회다. 그동안 주로 여성의 전유물이라던 장신구에 대한 인식을 깨고, 남성을 위한 다양한 장신구가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
전시회에는 서정기, 서상영, 최우현, 한젬마, 정용진, 황두진, 리사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 부인 등 한국의 장신구, 패션, 건축
분야에서 활동하는 초대작가 37명과 젊은 금속공예가 41명이 참여했다. 넥타이, 커프스링크 등 전통적인 장신구 외에 꽃 브로치,
목걸이, 반지 등 다양한 액세서리가 출품됐다. 전시 기획자인 전용일 국민대 교수는 “남성이 패션과 미용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현상은 남성을 바라보는 사회·문화적 시각에도 변화가 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이 전시는 장신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는
남성성에 대한 고찰을 위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사실
오랜 인류 역사에서 장신구는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착용했다. 단 신분을 나타내는 도구로서의 역할이 컸다. 고대 이집트만 해도
상류층 남성과 여성은 금이나 원석, 에나멜, 상아 등으로 만든 값비싼 보석류를 착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팔찌, 발찌, 목걸이,
귀고리, 반지, 벨트 등이다.
남성을 위한 다양한 장신구 선보여
공예·디자인평론가인 이수목씨는 “목걸이, 팔찌,
귀고리, 브로치 등의 화려한 장신구가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은 19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며 “그러나 꾸미기 좋아하는 남성들의
출현과 함께 성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사고에 반하는 문화적 현상들이 자주 등장하면서 장신구 또한 남성들이 자신을 잘 표현하기 위한
좋은 아이템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삼성패션연구소
김정희 과장은 “1960년대 남성들이 몸치장과 패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옷차림이 다채로운 경향을 보이자 칼럼니스트 조지
프레지어는 이런 현상을 일컬어 ‘공작새 혁명’이라고 불렀다”며 “최근의 남성들의 변화는 공작새혁명을 떠올리게 한다”고 말했다.
196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는 1950년대에 비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격변을 맞게 되고 그 결과 남성의 옷차림에도
영향을 끼쳤다. 남성들도 장발과 화려한 프린트 셔츠, 네루재킷(컬러를 높이 세운 긴 상의) 등이 유행했다. ‘공작새혁명’이라는
용어는 이 시기 남성들의 멋내기 혁명에서 탄생한 것이다. 수컷 공작새처럼 화려해졌다는 의미다.

사진은 처녀에게 선보이기 위해 화장한 아프리카의 워오디배족 신랑 후보(출처: 성하출판의 ‘별난 인종 별난 에로스’).
화장을
하고 피부를 가꾸며 예쁜 옷을 입어 자신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남성들의 노력을 가리켜 사회생물학자들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말한다. 경제력을 가진 여성들이 더 이상 남성의 지갑에 의존하지 않게 되면 굳이 결혼제도 속으로 들어가 남성을
떠받들고 살 이유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조디 포스터처럼 결혼을 거부한 채 아이만 낳아 기르는 비혼모 여성이 증가하는 것도
이런 흐름을 대변한다. 몇년 전 호주의 모내쉬 대학의 과학자들은 정자의 도움 없이도 난자를 수정시키는 방법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남자 없이도 마음만 먹으면 임신과 출산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 결과 여성은 권력이나 재력이 있는 남성보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남성을 선호하게 된다. 사회생물학자들의 논리는 이런 시대에서 남성은 여성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꾸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성시대에는 남자도 화장을 한다’의 저자로
사회생물학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이런 변화는 이미 전세계적으로 굉장히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며 “여성은 더 고와져
자기만족을 얻으려고 화장을 하지만 남자가 화장을 하며 자신을 꾸미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라고 단언했다.
최 교수는 “앞으로는 여자보다 남자가 성형을 더 많이 하게 되고 화장품이나 옷을 사는 데 더 많은 돈을 쓰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와 같은 주장의 바탕에는 다윈의 ‘성선택론’이
있다. 다윈의 ‘성선택론’은 그가 1859년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12년 후인 1871년 ‘인간의 유래’라는 저서를 통해
밝힌 것으로, 자연계의 거의 모든 생물에서 수컷이 암컷들보다 훨씬 더 화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고 노래와 춤을 잘추며 수컷끼리
끊임없이 경쟁하며 위태로운 삶을 사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수컷이 암컷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구애하기 위해 수려한 깃털을 펼친 공작새 수컷, 암컷과 장난치는 긴 갈기의 수컷. <경향신문>
다윈의
성선택론에 따르면 번식에 관한 결정권은 궁극적으로 암컷에게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 암컷과 교미하여 후세를 남기는 수컷은 전체의
10% 미만에 불과하다. 소수의 선택받은 수컷들이 다수의 암컷을 독점한다. 나머지 90% 이상은 암컷과 짝짓기 한 번 해보지
못하고 지구상에서 사라진다.
수컷들이
암컷에게 선택받아 후손을 남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크게 두 가지. 첫째는 아주 매력적이어서 암컷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공작새 수컷이 쓰는 전략이 대표적인 사례다. 공작새 수컷의 화려한 깃털은 암컷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기능을 제외하곤 이로울 게
없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도 카바레에서 만난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제비에게 몸과 마음 바치고 돈까지 갈취당한 아줌마들이 어디 한
둘이던가.
두 번째 방법은 암컷들이
필요로 하는 자원을 독점하여 그들의 선택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북방코끼리바다표범은 번식기가 되면 북미 대륙의 바닷가 모래밭에
모여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 넓은 모래사장은 혈투 끝에 최종 승자가 된 수컷의 영토가 된다. 암컷들은 모두 그 수컷의 아내가 돼
그 수컷은 많을 경우 무려 100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리게 된다. 인간도 권력이나 재력을 가진 남성이 첩까지 두며 여러 여성을
거느린 적이 있었다. 지금도 상당수의 여성에게 배우자 조건 0순위를 물으면 ‘재력’이라고 말한다. 이는 그동안 남자들이 출세에
목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됐다.
권력·재력보다 아름다운 남성 선호
주지할 점은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수컷의 두 번째 방법은 더 이상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점이다. ‘나는 미소년이 좋다’의 저자인 남승희씨는 “여성이 독립적이 될 때 미소년 애호가 생겨난다”고 말했다. 또 영국의 진화심리학자들이 전형적인 미남의 사진을 컴퓨터로 조작해 현대 여성들의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 같은 사람이라도 얼굴의 특정 부분(입술)을 여성적으로 변화시킨 사진을 압도적으로 선호했다고 한다. 터프한 미남보다 부드러운 미남을 선호하는 현대 여성의 경향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다.

‘남자를 위한 장신구’ 전에 출품된 다양한 남성용 장신구.
최재천
교수는 “자연계에서 보면 수컷은 암컷보다 아름답고 대낮에 처절한 힘겨루기를 하는 건 모두 암컷을 차지하겠다며 목숨을 거는
수컷들”이라며 “이것이 자연계 섭리로 이제 인간사회도 성선택권이 여성에게 더 주어지고 남성들은 선택받기 위해 성형을 하는 등 더
예뻐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오랜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해 성비가 균형을 잃어 2010년부터는 한국 남자 대여섯 명
중 한 명은 결혼할 여성을 찾지 못한다고 한다. 그만큼 여성의 성선택권은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시대가 바로 목전에 온 것이라면 요즘 남성의 패션이나
미용에서 두드러지는, 예뻐지고 섹시해지는 변화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 변화가
빠른 곳이다. 얼마 전 미 서부 최대 일간지인 ‘LA타임스’는 “전세계 굴지의 화장품회사들이 남성용 화장품을 개발해야 하는지를
두고 회의를 하는 시기에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에서는 벌써 남성화장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한국인의 선견지명과 발빠른 변화에 서양인들도 혀를 내두른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작은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에 컬러풀한 화장을 하고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의상과 현란한 하이힐로 치장한 ‘아름다운’ 남성들을 거리에서 조만간 쉽게 만나게 될지 모른다.
<박주연 기자 j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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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경제력은 결혼 결정 중요 요소로 이미 자리매김
![[사회]부자의 공개구혼, 누가 돌을 던지랴](https://img.khan.co.kr/newsmaker/828/66_a.jpg)
200억
원대 자산을 가진 49세 여성이 한 결혼정보업체를 통해 공개구혼에 나선 일이 최근 화제가 됐다. 결혼정보업체 선우는 지난 5월
21일 홈페이지를 통해 “사업 성공, 이제는 연애 성공을 꿈꾸는 골드미스! 그녀의 배우자가 될 스페셜 남성을 찾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이 여성에 대해 “개인사업에 매진해 200억 원대의 자산을 보유한 그녀는 단아한 외모와 늘씬한 체구의 여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여성이며 운동과 여행을 즐기고 리더십을 갖춘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소개했다. 또 “대학 대신 사회로 나가
열심히 일하느라 혼기를 놓쳤다”고 덧붙였다.
150억원 가진 여성 공개구혼 눈길
그녀가 찾는 이상적인 남성상에 대해 업체 측은 “동갑부터 10살 연하의 미혼 남성, 4년제 대학 이상의 학력, 안정된 직장, 서울·경기권 거주자, 활달하고 호방한 성격의 마음 따뜻하고 진실한 남성”이라고 안내했다.
이에 대해 적잖은 언론은 결혼정보업체가 ‘황금만능
세태’를 조장한다는 비판적 기사를 내보냈다. 해당 업체가 2007년 1000억 원대 자산가가 데릴사위를 공개 모집하는 것을
주선했고, 3개월 뒤에도 150억 원대 자산가인 만 37세 여성 사업가의 공개구혼을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눈길을 끌었다는 사실도
곁들였다. 자산 규모를 앞세운 공개구혼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도 대체로 곱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해당 여성을 비아냥대는 글도
많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게 정당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사회·경제적 조건은 그동안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적으로 배우자
선택에 중요한 요소가 돼왔기 때문이다. 이는 각종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해 선우가 남녀 회원 550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은 사회·경제적 조건(35.2%)을 배우자의 조건으로 가장 우선시했고, 남성 역시
외모(30.6%)에 이어 사회·경제적 조건(21.6%)을 따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에게 남편감의 경제력 유무가 결혼
결정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불변의 태도였다. 사회생물학자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는 “인간 세계에서
권력과 재력이 중요한 결혼 조건이 되기 때문에 남성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이른바 ‘출세’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것”이라고 저서
<여성시대에는 남성도 화장을 한다>에서 밝혔다.
![[사회]부자의 공개구혼, 누가 돌을 던지랴](https://img.khan.co.kr/newsmaker/828/67_a.jpg)
과거부터
지금까지 사법고시를 패스했거나 의사 면허를 획득한 신랑감에게 속칭 ‘마담뚜’를 통해 딸과 함께 열쇠 3개(집, 자동차, 병원
또는 변호사 사무실)를 주겠다며 달려드는 부잣집이 줄을 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돈보다 사랑을 선택하는 순정파도 많지만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일부 남자는 ‘여태껏 고생한 데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는 생각으로 부잣집 딸과 백년가약을 맺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는 이수정씨(28)가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 사회 일각에서 결혼이 얼마나
상품화되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이씨는 엄마의 성화로 중매를 통해 일명 ‘사’ 자 신랑감들을 몇 차례 선봤는데, 매번 소개비로
1000만 원씩 마담뚜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혼사가 이루어지면 추가로 2000만 원을 더 건네는 조건이었다. 이씨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한 남자는 여자 집안의 재산이 100억 원 이상일 경우만 소개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나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중매하는
아주머니가 말하더라”라고 전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경제력이 향상하면서 여성의 경제력은 남성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조건에서 날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제 불황 속에서 이 같은 남성의 태도는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여성의 경제력을 중시하는 남성의 증가는 지난달
야후코리아가 누리꾼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남자들이 바라는 최고의 내조’가 무엇인지 묻는 문항에 전체
2103명의 응답자 중 28%(587명)가 ‘맞벌이로 가계의 경제 부담을 나누는 것’을 1순위로 꼽았다.
남자가 바라는 최고의 내조는 맞벌이
일반인
사이에서도 ‘혼테크’ 또는 ‘결혼로또’라는 말이 유행한 지 오래다. 혼테크는 부잣집 자녀와 결혼함으로써 최대의 이익을 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관련, 부자가 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는 말도 있다. 첫째는 부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 둘째는 주식이나
채권, 부동산 등에 투자해 부자가 되는 것,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이미 성공한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다. 흔히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 결혼은 인생을 단번에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비즈니스’인 셈이다.
여성의 경제력에 대한 남성의 기대는 연상녀·연하남
커플의 증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연하남이 연상녀를 좋아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경제적인 부담에서 해방되고 싶은 심리도 있다.
반면 경제적으로 여유로움이 있는 연상녀의 경우 남성의 경제력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어리고 잘 생긴 남성을 선호한다.

결혼으로 단번에 부자가 된다는 ‘혼테크’, ‘결혼로또’ 라는 말도 유행한다. 사진은 신랑·신부 인형. <경향신문>
이번에
공개구혼한 49세 여성도 자필 공개구혼장에 “젊은 남성이면 좋겠다”고 적었다. <나는 미소년이 좋다>의 저자
남승희씨는 “여성이 독립적이 될 때 미소년 애호가 생겨난다”고 말했다. 최재천 교수도 “여성들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가 향상하면
남성의 재력이나 권력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해질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며 “그렇게 되면 여성들의 남성관이 변하는데 최근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꽃미남 열풍’이 좋은 예다”라고 저서에서 밝혔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랑’이 어느 정도 전제됐을 때 이야기다. 재산이 많은 것은 분명 그 사람의 장점이지만 돈만 많다고 행복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의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는 “좋은 조건이
짝을 고르는 데 최소한의 기준을 제공하긴 해도 결국 어떤 짝을 선택하느냐 문제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고 말했다. 조건
때문에 선택한다면 더 좋은 조건의 상대를 만났을 때 똑같은 이유로 떠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번에 공개구혼한 49세
여성도 이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 부자라는 것이어서 그걸 먼저 내세웠겠지만 배우자 선택은 누구보다 꼼꼼히
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순 없다.
선우에 따르면 49세의 200억 원대 여성 자산가의 경우 공개구혼을 밝힌 지 일주일 만에 무려 33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렸다고 한다. 업체는 그중 250명의 지원자 명단을 구혼 여성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지원자는 36~43세(1968~1973년 생)가 절대 다수며 구혼 여성과 21세 차이가 나는 28세(1981년) 남성 1명을 비롯해 29세 남성 6명 등 20대 지원자도 7명이나 됐다. 또 지원자들의 직업은 의사와 수의사, 회계사 등 전문직을 비롯해 중앙정부부처 공무원, 대학교수, 고등학교 교사, 은행·대기업 사원 등으로 다양하다.
http://amalgam.pe.kr/critic/article/2001wolf.html
차라리 놀지를 마라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자가 여자들을 반드시 재밌게 해주어야 하는 미팅문화
다. 여자들은 머리가 없나, 감각이 없나? 모든 걸 남자한테 맡기고 자기는 오로지 미용과 패션에만 힘쓰면 다란 말인가? 그게 노는 건가? 아니지. 노는 게 아니라 놀아주는 거다. 여자
는 남자와 (생색내며) 놀아주고 남자는 여자와 (필사적으로) 놀아주고, 아무도 스스로 즐겁게 창조적으로 노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그나마 스토리가 있고 이벤트가 있는 남녀의 미팅이 나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술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되는 남자들의 술문화보다는 말이다. 원래가 젊은이문화는 몸
의 낭비를 과시하는데 주력하게 되지만, 하지만 그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면 결말은 비참해진다. 늙어서도 여전히 과시형 낭비 외에는 모르니 어느 순간에는 놀기를 그만둘 수밖에. 뻑
뻑한 몸으로 세상이 지워준 의무나 열심히 해내고, 그러다 정 힘들고 쌓이면 어디 날 데리고 놀아줄 사람 없나? 하고 추잡한 몰골로 돈지갑만 들고 헤매는 것이다.
이 지구 위에 '놀아야 한다!'는 당위는 없다. 놀 줄 모르는 사람은 놀지 마라. 차라리 집에서 발 닦고 잠이나 푹 자면 미용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좋은 책을 읽어 진정
짜릿한 즐거움을 맛보는 것이 백배 낫지 않을까 싶다. 지겹고 재미없는 노동의 대가로서 어쨋거나 무조건 즐겨야만 되는 의무조항으로서 놀기를 실행할 필요는 없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잘 놀기 위해서는 연구와 개발이 필요하다. 여유를 가진 탐색 속에 진짜 흥미로운 것,
나를 끌어당기는 것을 찾아낼 때에만 '제대로 놀기'란 시작된다.
자기랑 같은 취미를 가진 친구가 곁에 없다고 좌절할 것은 없다. 혼자 놀면 되니까. 최근
출판된 [스노우캣의 혼자놀기]를 보면 혼자서도 재미있게 잘 노는 방법이 짜안한 철학과 함께 잘 소개되어있으니 참고할 만도 하다. -0-; 그리고 늘 하는 얘기지만 인터넷은 뒀다 뭐
하나, 다 제대로 만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인 것인데.
머리로 놀아라.
돈으로 놀 수 있다고 무슨무슨 족이 됨으로써 잘 놀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예측가능한 삶은 언제나 침해당한다.
http://amalgam.pe.kr/critic/article/2001if.html
남자는 어떻게 변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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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생긴 남자의 고민
요즘 영화 [친구] 이후로 한참 주가가 오른 장동건은 그동안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고 들었다. 바로 '잘 생긴 남자 컴플렉스'라고, 너무나 잘 생긴 외모 때문에 얼굴로 뜬 스타 취급만 받고 진정한 연기자로 인정받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친구]에서 한 바가지로 인상을 구기고 나오면서 터프한 일면을 마음껏 보여준 후, 장동건의 인기는 말도 못 하게 치솟았다. 물론, 날씬 샤프 조각같던 예전이 더 좋았다고 하는 팬들도 있지만 말이다. (나같은 사람은 팬도 아니면서 옛날이 더 좋았지 하고 뒷북을 치고있다.)
너무 잘 생겨서 고민이었다니, 남자도 참 어려운 직업이다. 일반인도 아닌 배우가 말이다. 하긴 여자는 못 생기긴커녕 조금만 덜 생겨도 주연급으로 뜨지도 못 하는데, 남자배우는 좀 덜 생겨도 오히려 '친근한' 매력을 흩뿌리며 크게 될 수도 있다. 한석규가 잘 생겼다고 생각할 여자가 몇 명이나 될까? 지금은 귀여운 남자로 통하고 있는 차태현이 처음 모이동통신 CF로 떴을 땐 '어글리 모델'의 신분이었다는 걸 기억들 하실래나 모르겠다.
남자들이 처지에 따라서는 잘 생긴 것을 컴플렉스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잘 생긴 남자의 마음가짐'이라는 것이 아직 확립이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즉, 예쁜 여자는 어려서부터 이쁘다 이쁘다 칭찬에 익숙해지면서 그것을 자랑으로 알고 스스로의 자부심을 키워나간다는 '공주유형'을 쉽게 확립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예쁜 남자는 주변에서 이쁘다, 잘 생겼다, 혹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올 수도 있는) 여자애 같다 등의 칭찬을 해대기도 하고, 특히나 '사내자식이 계집애 같다, (재수없게시리)' 등의 부정적인 반응까지도 빈발하다보면 자신의 미모에 대해 부담감 없이 순도 100%의 자부심과 만족감을 가지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지금 우리 주위에 포진한 생기발랄한 미소년들은 다 많든적든 간에 주변의 외압을 이겨내고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는 경지에 이르렀거나, 실행중인 것이다. 존경할 만하다.
성적 대상화의 전당에 오른 남자
요즘의 매스미디어를 보면 단연코! 예쁘고 잘 생긴 남자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한국의 추이는 확실히 그렇다. 90년대를 우려먹었던 '부드러운 남자'는 이미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버린 것인지 당연한 조건 취급이고, 무조건 '예쁜 남자', 여자 뺨치게 이쁜 꽃미남들이 넘실거린다. 전엔 십대취향의 보이그룹 정도에나 한두 명 끼어 들었던 진짜 미소년급들이 요새는 제법 자주 보인다. 전엔 십대와 이십대 초반의 순정만화매니아들 사이에서나 통하던 미소년 신드롬이 이젠 상당히 대중화된 편이다. '꽃미남 마케팅'이라는 개념이 들어선 것만 봐도 엄청난 발전이다.
무엇보다도 남자들 스스로가 귀여운 남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사태의 진지하고도 바람직한 측면을 말해준다. 무리 속에서 인기 있고 싶은 것이 인간과 영장류의 특성이다. 남자는 여자들이 터프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터프해 보이려고 애쓰지만, 미소년이 인기 좋다고 하면 어떻게든 이뻐 보이려고, 얼굴이 안 되면 귀염성 있는 태도로라도 인기를 얻으려고 애쓰게 되어있다. 여자들이 남자들에게 인기 있는 여자가 되기 위해 청순한 척, 귀여운 척 혹은 섹시한 척을 하는 것과 똑같다.
여자들도 계속해서 본격적이 되어갈 남성의 성적 대상화에 대해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아직까지는 아마도 '민망해서'란 이유에서인지 섹시한 척하는 남자까지는 못 나오고 있지만 그것도 그리 먼 일은 아닐 것이다. 남자가 섹시한 척을 하고 그걸로 여자들한테 인기를 끌더라도 그게 남자의 명예에 해가 되지는 않는 사회분위기라는 것은 중요하다. '사회적 위신'의 문제라는 것은 인간에겐 놀랍도록 중요해서 '남자가 여자보다는 조금이라도 나아야' 가정의 평화가 유지되는 까닭으로 개명한 요즘 세상에도 당연하다는 듯 수많은 여자들은 양보와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좁을 때, 사소한 차이는 결정적이 된다. 그러니 남자들은, 확실한 여자들의 환호라는 백그라운드 지원 없이는 자기의 섹시한 매력을 함부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여성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여자들이 경제력이 쎄져서? 여자들이 사회진출을 한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서야 여자들은 자기를 보호해줄 남자 대신 자기가 귀여워할 남자들을 선호한다. 경제력 있는 남자만 쳐다보는게 아니라 무조건 이쁜 남자 보는 재미에 모든 시름을 잊기도 한다. 즉 경제력을 가졌다고 자동적으로 독립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한 개인으로서 자신을 중심에 놓고 살며 생각하고 거취를 결정해야 독립적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미소년 신드롬이 점차 매니아에서 일반 대중으로 퍼져나가는 모습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여자들의 미감의 독립이었다. 이는 당연 성적 취향의 변화를 동반한다. 먼저 만화 속에서나 보고 즐기던 어여쁜 소년 같은 남자를 현실 속에서도 원하는 여자들이 많아졌기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스스로 예쁜 남자가 되어줄 남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미소년의 이미지는 마치 청순한 소녀의 이미지처럼 성적인 매력과는 상관이 없을 듯이 보이는 매우 고상하고 미적인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역시 성적인 의미를 갖는다. 꼭 애인구함이 아니더라도 예쁜 남자 담론은 생활의 일부로 번성하면서 여자들의 새로운 성적 취향에 일조하고, 현실의 연애사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상화가 남자를 해방한다
남자들의 아름다움, 또는 성적 매력이라는 것은 대낮에 커피샵에서 벌이는 여자들의 수다꺼리로 적절한 주제가 되었다는 것을 이제 남자들은 무시할 수가 없다. 아니,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뼈빠지게 일해 처자식 먹여살리면서, 이뻐지기까지 하라고? 이미 아저씨된 나는 죽으란 말이냐? 하는 불만들도 나올만 하다. 하지만 외모의 압력을 똑같이 받는 것이야말로 온전한 남자가 되기 위해선 거쳐가야만 하는 과정이다. 이미 취업을 위해서라면, 성형수술도 불사하는 남자들의 얘기는 이미 뉴스거리도 안 되는 것이 요즘이다. 앞으론 장가가기 위해서 성형수술하는 남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를 두고 남자도 여자처럼 고생해봐라, 차원에서 즐거워하는 근시안적인 보복심리에서 벗어나 좀 넓은 시야를 가져보자. 외모경쟁의 압박이라는 부산물만 볼 것이 아니라 남자가 아름다와질 마음을 먹고 자신을 가꾸기 위해 매순간 돌아보게 된다는 인류사적인 전환을 보잔 말이다. '사내답게' 보이기 위해 남자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희생을 했다. 기쁘고 슬프고 두려운 더없이 인간적인 감정들도, 섹시하고 신기한 자기 몸에 대한 나르시시즘도, 알록달록 예쁘고 귀여운 장신구들로 자신을 치장하는 재미도, 이 모든 것에서 파생되는 균형잡힌 인격과 인생의 폭도 남자는 가질 수 없었다.
남자들이 쓸데없는 서열싸움에 목숨을 걸고, 별것도 아닌 일로 사람들 괴롭히는 건 욕구불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은 남자도 예쁜 옷을 입고, 어디 가서 귀여운 척을 하고 사랑받을 수 있고 가족에 대한 의무와 봉사 외에도 뭔가 진지하게 추구할 자기 인생을 갖고있다면, 그렇게까지 늙어갈수록 탐욕을 부리고 추잡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뒷구멍으로는 호박씨 열심히 까는 한국인의 양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 '바람직한 남자'가 내몰린 막다른 골목이다. 그러니까, 이 웃기는 사회구조를 바꾸고 싶다면, 무엇보다 남자를 해방해야 한다.
남자를 해방 안 하고서는 여자는 해방이 안 된다. 아무리 인권을 들먹이고 평등을 주장해도, 고를 만한 남자가 없이 다 치사빤스인 놈들밖에 없으면 그 올바르고 훌륭한 여자들은 다 어디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단 말인가? 남자들이 '사내다움' 속에 갇혀 자기의 '인간다운' 욕망들을 죽일 것을 강요받는 한, 그들은 계속해서 복수를, 혹은 보상을 원할 것이다. 그 내역이 아주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는 걸 결혼생활을 해본 여자나 영화를 많이 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윈윈 전략?
지금 여성이 전세계적으로 받고 있는 차별과 억압에 대해서, '응징'을 하고 바로잡으려 들어서는 별 효과가 없을 거라고 난 생각한다. 범죄가 안 일어나려면 사회가 평안해야 되듯이, 대증요법보다는 원인박멸이 근본적인 것이다. (물론 치안도 잘 되어 있어야겠지만) 여성차별과 성폭력의 주범으로 '남자'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미련한 짓이다. 남자 모두를 죄인 취급하는 건 범죄자를 무죄인양 만들고 남자들을 공범으로 묶어주는 효과밖에는 안 낳는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남자도 스스로 즐거움을 추구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술먹고 깽판치는 "남자다움"의 즐거움이 아니라 자신내면의 즐거움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여성의 규범"에 동화시키자는 것이다. 자기 즐거움이 없고 권력만 있으면 사람이 폭력적이 된다. 괜히 구중궁궐 대비마마들이 폭력적 군주성향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자신의 몸을 성적 매력을 내뿜는 사랑스러운 존재로서 즐기고, 남들의 기대를 받고, 시선을 자랑스럽게 누리게 된다면 굳이 욕구불만에 시달리며 스스로는 박탈당한 色을 밖에서 약탈해올 필요도 없고 치사하게 권력이나 힘을 이용해서 남들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아갈 이유도 감소할 것이다.
그리고 물론 성적인 대상화로 인한 폭력의 위험에도 똑같이 노출된다. 본래 폭력은 권력관계의 상하 문제였지 남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단순히 여자들이 남자를 희롱하는 것 정도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무차별 성희롱이 문제가 될 것이다. 남자가 성추행이나 성폭력을 당하는 것은 벌써부터도 있었던 일이지만 앞으로는 그것이 더 두드러지고 공론화될 것이다. 그런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숨겨야만 유지가 되었던 '남자'라는 틀은 이제 적용이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범죄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또 인류의 공적으로 처벌해야만 하는 범죄일 뿐이지, '힘없고 불쌍한 여자들'만이 당하곤 하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아니다.
이제야, 남자들은 여자의 분노와 두려움을 이해할 가능성이 생긴다. 앞으로 남녀를 통털어 사회적 강자, 혹은 돈 많은 계급과 돈이 없어 젊음과 아름다움을 갈취당하는 계급의 구도가 형성되어버릴 위험성을 부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위협을 이겨낼 수 있는 충분히 생산적이고 건강한 문화를 만들 가능성 역시 엄존한다.
여자들 또한 스스로가 빠져있는 피해자 혹은 약자 담론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무 대책 없이 단지 남성중심사회를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은 안일하고 조잡한 양심이다. 나는 사회적으로 차별 받는 여성이니까, 스스로를 피해자로 규정함으로써 자기가 가해자가 아닌 것으로 만족하고 자기의 불만스러운 인생을 합리화하는 것은 그만둘 때도 되었다. 싸우려면 이길 싸움을 할 일이다.
남자는 여자와 다르다, 하지만 닮아간다
물론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러나 남자의 안에 들어있는 '위험한' 수컷성이라는 것은 다루기 나름이다. 얼마든지 무해한 방법으로 해소할 수 있는데, 계속 비뚤어진 채로 내버려둘 이유가 없다. 남성의 공격성이 퇴화하는 건 이미 기정사실이다.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는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2000)에서 인간 남성의 짐승적 특성이 약화되는 이유로 인구조밀과 네오테니(neoteny, 어린애성)를 든다.
인류가 문명을 건설하고 도시에 오밀조밀 모여살게 되면서부터, 계속해서 남자는 호전성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린애성이야말로 인간의 특징이고, 인류진화의 경향성이다. 미숙아로 태어나 평생을 놀이하고 학습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고, 변해가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점점 남자들의 얼굴이 어리고 이뻐지는게 다 이유가 있었다. 먹고 살기 편하고, 싸울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문명의 방향은 계속해서 확산되고, 피드백된다.
그리고 어린애성을 늙어죽을 때까지도 간직하는 강자가 누구냐면 바로 여성이다. 지금 경제에서 또 전체적인 인간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분명히 여성화의 흐름이다. 위계구조를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로 바꾸는 것은 단지 탈산업화의 흐름이 아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모델이 필요하고, 여성적인 관계들은 훌륭한 준거가 된다.
그래서 미소년 신드롬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미감적으로 표현하는 사건인지도 모른다. 여성성, 혹은 어린애성을 최고도로 발휘한 남자가 바로 미소년이니까. 유행이야 변하기 마련이니 좀 있으면 섹시한 남자가 뜰 지도 모르고 귀여운 갑바맨이 뜰지도 모를 일이지만, 남자는 변화한다는 기본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남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 욕망의 라이트를 자신에게 비추어야 한다. 내 속의 어둡고 어두운 욕망은 나도 몰라, 여자는 미스테리인가봐, 하면서 헛소리 못 하도록, 그러니까 최상품을 내놓아 보라니까, 하고 압박하는 것은 여자들의 몫이다. 투명한 욕망은 가능하며 공정한 관계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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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1 여성들이여, 노브라를 유행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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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패션채널을 보고있노라면 엄마나 아빠가 와서 들여다보고는 본인들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을 제기하신다. "도대체 왜 쟤들은 브라를 안 한거니?" 나로선 가장 친절한 대답을 해드린다. "저 동네에선 브라를 하면 '전 벌써 가슴이 쳐졌거든요'라는 얘기거든요." "그러냐? 거참 세상..."
이미 한국에서도 패션모델의 세계에서는 브라는 '감히' 아름다운 가슴을 가릴 권리를 내세울 수 없는 '낙후된' 물건인 듯하다. 하지만, 거리를 걷는 여성들은 모두 브라를 하고있다. 제아무리 섹시하고 자유분방한 듯 보이는 스타들도 노브라로 나선 모습은 아직 못 보았다.
하지만 집에선 자동적으로 노브라인 모든 여성들이 동조하겠지만, 브라는 불편하고 노브라는 편하다. 그래서 나는 전세계적으로 노브라 운동을 하던 70년대에 한국에선 유신시절이나 보냈다는 것이 몹시도 억울하다. 하지만 이제와서 모든 여성단체들이 모여서 노브라를 주장한다고 해도, 그리고 여성들이 모두 좋겠다! 하고 동조를 한다고 해도, 각개인들이 지하철의 호통치는 할아버지들 및 일반인들에게서 손가락질 받을 위험을 안고 노브라라는 모험을 결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내놓는 대안은 '유행'이다. 섹시 글래머스타 몇 명만 도와준다면 충분히 노브라 유행은 가능하다. "다 큰 처녀가 그게 뭐냐?" 하면 "유행이에요!" 하고 빠져나가면 되는 거다. 가슴에 자신있는 여자들부터 노브라를 할테니, 노브라 자체가 과시행위로서 잘나가는 패션 아이템이 될 수 있다. 그러다가 웬만큼 유행이 되면 덩달아 모든 여자들이 부담없이 노브라를 할 수 있을거다.
물론 남성들도 환영해 마지않을 것이다. 처음에야 너무 야해서 눈 둘 데를 모를 수도 있고, 또 스커트 길이가 짧아지거나 탱크탑이 나오거나 할 때마다 일었던 '도발적인 의상이 성폭력을 유발하네' 어쩌네 하는 웃기는 책임전가의 테러리즘의 위협이 또 일어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엔 적응하게 된다. 게다가 뻥브라의 위험에서 벗어나 '정직한' 가슴들을 만날 수 있으니, 남자들로선 손해볼 일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 노브라 유행이 관습의 저항선을 돌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또 하나의 조건은 멋진 모양새이다. 얼마전 서양에서 브라끈을 끈나시와 함께 입어 두 줄이 보이게 하는 것이 유행하니까, 이곳에서는 차마 그렇게는 못하는 여성들을 위해 비닐로 만든 일명 '패션브라끈'이 나왔다. 마찬가지로, 노브라라는 과감한 컨셉에 걸맞는 섹시하고도 멋진 스타일의 옷, 새로운 전형성을 개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역시 노브라는 공격적 패션과 어울릴 것이다. 당당하게 자신의 섹시함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적극적인 태도에 맞는 멋진 스타일로 나설 때, 노브라는 성공적으로 유행을 일으킬 수 있고, 한국여성들을 그 불편과 더위, 강요된 얌전함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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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12 청소년 보호는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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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나라가 원조교제로 들썩거리더니 얼마 전엔 '청소년 대상 성범죄자의 인터넷 실명공개'까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서는 이중처벌이라는 반박도 가능하고, 공개방식의 문제로 동명이인의 피해가 우려되기도 한다. 그리고 진짜 '원조교제'에 대한 처벌이라면 일방적 처벌이라는 문제가 제기될 것이다.
원조교제(청소년 성매매)는 과연 범죄인가? 힘없고 어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못된 어른들이 저지르는 성범죄인가? 엄연한 성폭행과 같이 은근슬쩍 섞어 공표해도 되는 범죄인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면 청소년들은 이미 자기 의사에 따라 행동할 수 있고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어른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유로운 두 개인이 만난 원조교제'라는 환상을 주조할 수는 없다. 처음부터 '원조'라고 하는 사항이 들어있는 한, 자원(젊음이든 돈이든)의 불균형으로 인한 매매가 예상되고, 시장이 형성되면 나름의 매카니즘이 돌아가니까.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는 온통 십대만이 돈쓸 자격이 있는 것처럼 야단법석 젊음의 가치를 흩뿌리면서 한편으로는 '청소년보호'를 이야기한다. 그것이 진짜 '보호'이든 '족쇄'이든 간에, 이미 자란 몸에 적절한 욕망과 능력과 의지가 있음에도 사회가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저임금 파트타임 노동 외에는 모든 돈벌이 수단을 박탈당한 청소년들이 그저 참고만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중 일부가 변칙적인 방법을 택하는 건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가 아니라 권리다. 애정생활의 권리, 자기 인생을 살 권리, 자긍심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온전해지기 위해 존중과 동시에 배려를 받을 권리 말이다. 십대는 애정관과 노동관을 형성하고 인간관계와 인격수양을 쌓는 인생의 중요한 시기로서, 그 다양한 시도와 모험의 정당성을 사회는 인정하고 적절히 지원해주어야 한다. '보호'의 망상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청소년들 역시 앉아서 불평만 하고 있는 불행한 낭비를 걷어치워야 할 것이다. 사춘기가 빨리 오고 인생이 일찍 문을 열었으면 그게 맞게 사회적 지위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젊음의 특권을 고취시키는 양하는 이동통신회사나 의류회사에만 봉사하다 청춘을 보낼 순 없다. 직접 나서서 권리를 요구해라. 자기자신에 대한 권리를, 현재를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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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malgam.pe.kr/critic/article/good03.html
굿3 남자를 죽이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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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들이 있다. 하나는 길거리에서 가래침을 크엑~하고 뱉어대는 남자들이고 또 하나는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고 앉는 남자들이다. 물론 남생각 안 하고 담배피우는 사람도 싫지만, 그것은 남녀불문이니, -.-; 싫어하는 남자로 유형화하기엔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종종 사람 짜증나게 하는 일이지만, 현대사회의 남자들은 자기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오줌을 갈기던 그 옛날 수컷의 버릇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남들이 불쾌해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쓴다. 특히나 한국남자들의 안하무인은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인류가 만든 문명사회라는 것은 '인구조밀'을 특징으로 한다. 게다가 도시라는 것은 원래가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유지가 불가능할 인구를 인공적으로 과밀거주하게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던가? 그래서 지금까지 문명사회의 남성은 자기 안의 호전성을 죽일 수밖에 없었고, 그 방향으로 진화해왔다. 덕분에 요즘의 젊은 남성들 중에는 예의바르게 자라나 자연스럽게 남을 배려하고 자기의 몸놀림을 조심하는 싹싹한 친구들도 제법 많다.
남자들의 짐승적 특성이 약화되는 현상에 대해 린 마굴리스는 [섹스란 무엇인가?](지호 2000)에서 두 가지 동기를 제시한다. 하나는 방금 말한 인구조밀이고 또 하나는 인류 진화의 경향성인 네오테니(어린애성)이다. 네오테니란 인간이 다 커서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성질을 갖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란 미숙아로 태어나 평생을 놀이하고 학습하며 새로운 것을 찾아 변해가는 존재다. 여기에, 지금 급변하는 세상의 흐름을 유연하게 타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린애성을 갖는 것은 더욱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수컷성을 죽이고 좀더 부드럽고 유연한 몸과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남자들이야말로 미래를 차지할 남성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더더욱 많아져 버릇없는 남자들의 세력을 눌러버려야 나라가 잘 될 것이다.
내 생각에, 아름다운 남자란 반드시 잘 생기고 풋풋한 젊음을 과시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 지금 세상에서, 아름다운 남자란 자기 안의 수컷성을 죽일 줄 아는 남자다. 지하철처럼 여럿이 나누어쓰는 공간에서, 자기 몸집이 크더라도 1인당으로 주어진 공간으로 일단 만족하고 거기서 넘치지 않도록 남을 생각해줄 수 있는 남자, 자기의 냄새를 아무데서나 불쾌한 방식으로 내뿜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은은하게 자기 존재의 향기를 풍길 수 있는 남자, 그런 남자가 바로 아름다운 남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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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malgam.pe.kr/critic/article/good04.html
굿4 아름다운 남자들에게 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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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이뻐하는 미소년은 Y2K의 마츠오 유이치군이다. 깎아놓은 듯한 턱선과 오똑한 콧날이 모든 만화의 미소년들을 그냥 눌러버린다. 일부러 이쁜 척, 귀여운 척하지 않아도, 보고만 있으면 그냥 항복이다. 내가 유이치군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뿐, 저얼대로 변하지 말 것, 그 미모 그대로 30대까지, 가능하면 40대까지도 가주는 것이다.
너무 미소년한테 바라는 게 많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장국영을 본다면 그렇게 불가능한 요구는 아니다. 맨날 미청년이었다가 40대가 된 요즘에야 겨우 30대쯤으로 보이니까. 그 미모가 가장 아름답게 꽃피었던 [천녀유혼]과 [아비정전]에서 벌써 30대였다는 준엄한! 사실에 이 세상 모든 남자배우들은 반성을 해야한다.
이상하게도 여자배우들은 인기가 높아가고 나이를 먹으면서 더 아름다워지고 날씬해지는데, 남자배우들은 친근한 느낌을 핑계로 아저씨가 되어간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만 봐도 그렇게 빛나던 미소년이었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갈수록 터프한 척만 늘더니 요즘엔 연기를 위해서란 이유로 살까지 쪘다. 비슷한 연배의 에드워드 펄롱이 그래도 아직은 꽃미남의 미모가 살아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국 남자배우들의 때 이른 노화증세 역시 특기할 만하다. 한때는 장국영 닮았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이경영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괜시리 미남컴플렉스를 깨느라고 수더분해지려고 하고 있는 장동건이나 정우성이 나중에 어떻게 될런지, 아주 아찔해지려고 한다. 영화 [친구]로 장동건의 인기는 치솟았지만, 그 뒤안엔 그래도 일찍부터 건질 만한 꽃미남이었던 그가 사천만의 인기를 얻으려고 '친근한' 남자가 되어가는 것을 가슴아파하는 여성팬들의 눈물이 있다. 배우 입장에서는 폭넓은 팬층이 욕심나겠지만, 남자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려도 되는 무가치한 것이란 말인가? 편안함 같은 덕목은 자기 애인에게나 바라고 배우에겐 오로지 아름다움만을 바라는 여성팬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가꾸고 만드는 남자는 이 나라엔 정녕 없단 말인가?
아름다운 남자는 유전자의 덕으로 생겨나지만, 그 미모를 지키는 것은 의지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충동질하거나 억누르는 것은 여성들의 '기대'다. '일반적인' 기대에만 매달리지 않고 아름다움의 의지를 관철하고 나가는 남자들도 이젠 좀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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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5 남성의 여성화! 여성의 남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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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왠지 터프한 여자가 인기가 있는 듯하다. 물론 얼굴은 무지무지 이뻐도 되지만, 하는 짓 역시 무지막지 터프해도 괜찮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흥행성공도 별로 신기할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 전부터 남자들은 계속해서 부드러워지고 있었으니, 앞으로도 남성의 여성화는 계속될 것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생물학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환경오염과 스트레스의 영향으로 남자들의 정자수가 줄어들고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는 것은 분명 남성의 약화다. 이에 대해 미생물학자 린 마굴리스가 내리는 해석이 재미있다. 이미 인류는 매우 성공적으로 번식했으므로 이제부터 성적 번식은 감퇴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인구밀도의 증가에 따라, 그리고 인류 자체가 내재한 어린애성(neoteny)이라는 특성의 심화에 따라 남성성은 순화되어갈 수밖에 없다.
트렌드란 바뀌는 것이어서 앞으론 터프한 여자 대신 야시시한 여자가 인기를 얻을 수도 있고, 부드러운 남자들에도 물리는 날이 오면 막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갑바맨이 인기를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근저에서 진행되는 남성의 여성화는 멈추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도리어 앞으로 갑바맨은 완력을 자랑하고 여성 위에 군림하는 마초맨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몸을 잘 알고 계발하며 스포츠와 춤을 즐기는 잘 빠진 야한 남자라든가, 혹은 순진하고 귀여운 갑바맨 식으로 재미난 유형이 되어 인기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남성이 여성화되는 흐름은 동시에 여성이 남성화되는 경향과 피드백을 이루기 마련이다. 이때 남성성은 꼭 호전성을 얘기하는 건 아니다. 여성들이 실질적인 힘, 즉 사회적인 힘을 갖고 의사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을 중요시하고 싶다.
지금 전체적인 인간사회의 흐름은 여성화이다. 이에 대해서는 헬렌 피셔가 [제1의 성](생각의나무)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수컷들의 위계구조와 경쟁, 폭력의 방식들을 이와 전혀 다른 '여성적 방식', 즉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와 협력에 바탕을 두는 새로운 방식들이 대체하는 변화가 지금 경제에서 또 전사회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쉽게 얘기하자면 탈산업화, 정보화 사회에서는 유연한 여성이 유리하다는 얘기다. 권위적인 남성은 도태될 것이다. 이제 남성은 변화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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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7 여성상위시대는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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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상위 시대라는 말이 나온 지도 오래되어서인지 벌써 서구에서는 남녀 역차별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여성차별을 방지하려고 만들어놓은 법규가 역으로 남성들을 차별하는 부작용에 대한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는 꿈도 못 꿀 얘기다. 이곳은 너무나 남녀가 평등해서 여성 합격자 최소비율을 지정하기는커녕 지하철에서나 버스에서나 노인을 공경하는 일은 있을 수 있을지언정 치마입고 하이힐 신은 여자한테 자리를 양보한다는 관념은 머리 속에 없어 당연히 몸매구경이나 하고 앉아있는 걸로 아는 '평등한' 남자들밖에는 없으니.
이곳엔 벌써부터 그런 오버스러운 우려를 수입해야할 만한 조짐은 전혀 없다. 하지만 '여성상위 시대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여자의 지위와 권리를 획기적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한국의 앞날은 별로 신통치 않을 거라는 얘기는 지금 해야되지 않을까 한다.
지금 정보화 사회의 물결을 타고 여성인력에 대한 재평가가 화려하게 진행이 되고는 있지만, 다수의 여자들을 제약하는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변화는 미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육아와 가사노동이다. 그리고 이 곤란한 문제를 더 고달프게 만드는 진짜 문제는 애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사회성원을 재생산하는 엄청난 공적 서비스인데 이 나라는 오로지 그 책임을 부모만이 떠맡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게 여성의 희생이 된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는데, 결혼한 여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결혼 안 하는 여자가 많아져야 한다. 결혼을 하더라도, 하도 애들을 안 낳아서 나라에서 나서서 양육비 다 대주고 탁아소 만들고 직업보장도 해 줄테니 제발 애 좀 낳아달라고 할 때까지 안 낳아야 한다. 말하자면, 개인주의의 확산이 여성을 구원할 것이다. 독신자들은 여성복지를 위해 큰 일을 하고있는 셈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한국은 솔직히 말해 여자를 억눌러서 나라가 지금까지 이 모양이다. 잘난 여자들 능력은 사장시키고,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는 늙은 남자들의 욕심을 차리기 위해 너무 많은 자원과 기회가 낭비된다. 그 지겨운 무능력자들을 끌어내고, 오랫동안 힘을 축적하면서 기다려온 여성의 힘을 본격적으로 풀어준다면, 그래도 최소한 인간이 인간대접을 받으며 사는 데 익숙한, 잘 사는 나라들과도 게임은 붙어볼 만한 나라는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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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8 남자가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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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여자라서 불만이 많다. 여자는 생리도 해야되고, 애도 낳아야 되고, 게다가 키우기까지 한다. 또 결혼하면 왜 집안일을 우선으로 떠맡는 것인지, 앉아서 곰곰 생각하자면, 사회한테도 자연한테도 '매우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남자는 적당히 편하게 하고 다녀도 멋진데 여자는 죽어라고 꾸며도 중간밖에 안 간다. 선진국에서 못 태어나서, 부자집에서 못 태어나서 요모양인거다, 라고 논지를 돌리기엔 너무나 그 차별이 확연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여자는 딱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여자라서 다행이다'. 여자라서 억누르고 귀찮게 하는 모든 사회적인 제약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멋지게 꾸미고 다닐 수 있고 자신의 색을 발현해도 돌맞지 않는다는 것, 이게 바로 세상 살 맛이다. 차별은 깨부수면 되고, 권리는 쟁취하면 된다. 하지만, 치마를 못 입는 남자는 어디 가서 데모할 곳이 없다.
그렇게 보면 남자들은 불쌍하다. 칙칙한 양복 색깔 안으로 들어가야 인간대접을 받는다. 그나마 젊은이들은 좀 화려한 색의 옷을 추구할 수가 있지만, 슬프게도 이건 밥벌어 먹고사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얘기다. 요즘은 세상이 달라지고 있고, 그동안 여자들이 애써 자기 권리를 찾아온 만큼 이제 남자들도 자기네 色을 드높이려고 애쓰는 중이지만, 문화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걸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진실은, 그래도 노력한다면 쉽게 다 가질 수 있는 건 남자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매력을 결정하는 양대 요건을 외모와 능력이라고 봤을 때, 장기전에서는 남자가 단연 유리하다.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여자는 아직까지는 아무리 운이 좋더라도 자기의 최고 가치인 외모를 유지,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과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여자는 피부도 얇은 편이고 근육보다는 지방이 많은 몸이라서 부지런히 관리하지 않으면 쉽게 노화해 버린다. 하지만 남자는 피부도 두껍고 근육질이라 그렇게 쉽게 쳐지지도 않고, 뭐든지 타격을 덜 받는다. 단지, 쓸데없는 타격을 주는 습관-음주흡연-만 없애면 된다. 무슨 남자가 그러냐는 남들의 잔소리만 꺼버리면 된다. 한마디로, 그저 자기 하나만 잘 하면 되는 것이다. 자기네 장점을 좀 개발하면 좋으련만, 여전히 많은 남자들은 오로지 돈많은 남자가 되기 위해 무한한 희생을 되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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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10 여자의 패션을 빼앗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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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복고풍이 유행한 이후, 여자들의 패션은 계속해서 '여성적'이 되어간다. 여성적이라고 함은 불편을 감수하고라도 몸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실루엣을 추구하는 것, 실용주의와는 거리가 먼 예쁜 악세서리들을 알록달록 매달고도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공주풍 의상이나 비즈공예 악세서리들은 그 대표적인 예다.
90년대에 일어난 복고풍은 명시적으로 80년대의 '워킹걸'들에 대한 반란이었고, 어디까지나 남자들 틈에서 그에 지지 않으려는 듯 뻥튀기한 넓은 어깨에 대한 지겨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복고풍 유행은 70년대에서 80년대로, 아예 50년대로 맘대로 거슬러 올라가 버리지만, 한 가지 점에서는 모두들 약속이나 한듯 일치한다. 즉, 당분간은 커다란 어깨뻥을 구경하기가 힘들 것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요즘 여성 패션은 남성적인 모습에 매력을 못 느끼고 있다.
반대로 남자의 패션은 지금 한창 여자들의 특권을 빼앗아오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중이다. 염색이나 귀걸이 같은 건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한참 대표선수였던 헤어밴드에서 더 나아가 머리핀이 왜 안 나올까 나는 기다리는 중이다. 눈썹정리를 하고 화장을 하는 남자들이 늘어나고 있고, 몸매관리 못지 않게 피부관리에도 신경쓰는 요즘 남자들은 회사에서도 반바지를 입고 결혼한 후에도 노랗게 탈색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남자는 치마 입을 권리가 없다. 여자는 바지 입을 권리가 있는데 말이다. 바지를 입을 권리는 일할 권리, 사회적인 노동을 인정받고 자기 재량껏 자유를 누릴 권리를 말한다. 그렇다면 치마를 입을 권리는 자기의 色을 발현할 권리다. 미감을 충족하기 위해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는 여유를 반드시 가져야 의미가 있는 권리. 경제적인 동물로 낙인 찍혀 자기 색을 가리우고 무엇이든지 숫자로 나타내 보여주어야 하는 '불쌍한' 남자의 처지로서는 감히 주장할 수 없는 권리다.
그래서 만약 치마를 입는 남자들이 나타난다면 요즘 같은 때는 여성해방 투쟁 백번 한 것보다 더 나은 사회적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여자가 매일 아침 치마와 바지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하듯이 남자 역시 선택할 수 있다면, 똑같이 균형을 중요시하는 섬세한 인간이기를 기대받고 존중받을 수 있다면, 인간은 전체적으로 지금과는 아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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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malgam.pe.kr/critic/article/good06.html
굿6 강한 여자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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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여성은 정말 강해지고 있는걸까? 영화 속에는 터프한 여자들이 넘쳐나는데, 그게 현실 세계와는 조금이라도 상관이 있는걸까? 벌써부터 '터프한 그녀들'에 질리기 시작한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이런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나의 의견은 이렇다. 술 먹고 주정 좀 부리고 남자한테 손찌검 좀 한다고 해서 그대로 엽기적인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터프한 여자가 '뜨는' 지금의 경향이 단지 지나가는 유행일 뿐이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다음의 답변을 준비해놓고 있다. 유행은 지나가지만 자기의 흔적을 남긴다.
지금의 터프걸 유행이 가버리더라도 지금 인간의 진화상태로 봤을 때 여성의 힘이 갈수록 더 커지는 경향은 유효하다. 86년 [에이리언2]에서 시고니 위버가 완벽한 근육질 몸매로 강인한 여전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과 달리 요즘은 [툼레이더]의 여전사 라라를 연기한 안젤리나 졸리만 봐도 근육질이긴 하지만 굉장히 날씬한 근육이 되어버린다던가, 아예 [와호장룡]의 양자경과 장지이처럼 여리여리한 몸매로도 절대 강자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이를 강한 여성 이미지 자체가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와 타협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단지 그동안 근육질 과다의 여성 이미지에 물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여자가 매력과 강함 중 양자일택이 아니라 둘 다를 추구할 수 있는 좋은 세상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강한 여성의 이미지는 밀려갔다 오면서 좀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며, 그때마다 업그레이드된 사회상을 반영한다.
다음 번 막강 근육질 여성이 유행할 땐 한국에서도 드디어 아름다운 근육질 몸매를 추구하는 여성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지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육체는 반드시 일정 정도 이상의 근육을 필요로 하는 법이다. 몸무게 강박증에 걸린 현재의 무식한 다이어트 관습은 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아름답고 동시에 자유로운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힘이 뒤따라야 한다.
내 생각에 가장 좋은 방법은 중고생 여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것이다. 제대로 자기 몸의 운용법을 익히고 나서야 자기 인생의 키를 잡을 수가 있는 법. 최소한 일상적인 성폭력의 위협에 대해 가차없는 응징을 할 능력을 가진다면, '피해자=여성'의 신화는 여자들 안에서부터 무너져버릴 것이다. 남자는 여자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한다. 두려움과 존중은 종이 한 장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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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54688
당신도 미소년을 좋아하십니까?
작가 남승희의 <나는 미소년이 좋다>
이제는 모든 남자들이 너도나도 '야한 여자가 좋다'며 자신의 성적 취향을 자신있게 밝히고 있으며 여자 역시 '너 야하다'는 말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고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지금 이 때에 마광수 교수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제목의 책을 냈다면…어땠을까? '자기만 야한 여자를 좋아하나? 뭐 저런 뻔한 소리를 하는 거지?'하는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까?
마광수 교수의 해프닝이 일어난 지 12년 후, 그의 사건이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린 지금 한 여인이(우연치고는 기묘하게도 그녀는 마광수 교수의 제자이다) '나는 미소년이 좋다'는 제목의 책을 냈다. 여기서 미소년이라 함은 '샤워 중이거나 자고 있을 때나 혹은 아무 때나 덮치고 싶은, 즉 가지고 싶고 어루만지고 싶고 귀여워서 깨물어 주고 싶은 존재'를 말한다.
<나는 미소년이 좋다>를 단순히 미소년을 좋아하는 한 여자의 성적 취향에 관한 이야기라 치부하거나 혹은 미소년에 대해 그리고 미소년을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 쓴 감각적인 이야기라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의 지루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섣부른 흥미만을 가지고 달려들었다가는 '어? 이게 뭐야'하는 실망스러운 기분으로 책을 놓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나는 미소년이 좋다'라는 흥미진진한 제목의 이 책은 사실 내용도 흥미진진하지만 그 흥미진진함을 느끼려면 꽤 인내심을 갖고 책을 읽어야 한다. 작가는 일반적인 사회의 시각도 아닌, 페미니즘적인 성향도 아닌, 그렇다고 페미니즘에 무작정 딴지를 거는 것도 아닌…정말로 알 수 없는 관점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말은 일단 다 일리가 있다. 무엇보다도 여성이 권력을 가져야 야한 남자가 어깨를 펼 수 있으며 그들의 야함이 일종의 아름다움으로 부각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읽으며 무릎을 칠 정도로 공감이 간다.
나 역시 미소년이 좋으며 그보다도 더 야한 남자가 좋다. 하지만 '나는 야한 남자가 좋아'라고 말을 하면 일순간에 나는 색을 밝히는 여자가 되거나, 사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양아치를 좋아하는 여자로 전락하게 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직 덜 커 사람을 보는 눈이 없다는 질타를 듣게 될 것이다.
왜 야한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 일차적으로 그것은 아직 우리 사회에는 야한 남자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무작정 야함을 드러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에로배우나 성인 스타가 아닌 다음에야 남자들은 자신의 야함을 드러내는 데에 인색하며(익숙치 않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천박하다 생각하고, 남자는 육체적인 매력보다는 능력이나 심성으로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미소년이 좋다>를 읽으며 나는 벌써부터 누군가가 '나는 야한 남자가 좋다'고 선언할 때를 기다려 본다. 물론 그러한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야한 남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단순히 가만히 있어도 섹시함이 풍기는 남자 혹은 야한 농담을 즐기는 정도의 남자가 아닌 육체나 패션이나 태도를 통해서 '야함'을 풍기는 남자, 스스로를 욕망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즐기는 남자 말이다.
여자에게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자의 시선을 기다리고 즐기는 남자들이 대거 등장한다면, 그리고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양아치적인 매력으로 치부해버리는 남자들의 시각이 달라진다면 언젠가는 남자와 여자가 공평하게 서로를 보고 즐기며 유희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남승희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고 전 한국적인 차원에서 말하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과 개인주의, 물질적 풍요 속에 떠받들리며 자란 신세대가 필요했듯이 나는 야한 남자가 좋다고 온 나라를 들쑤시기 위해서는 관능적으로 해방된 남성들과 그런 남성들을 원하는 여성들이 자립할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토대가 절실하다"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물론 나 역시 동감이다. 빨리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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