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슈도 / 구카이 대사의 가르침
헤이안 시대에 공가[1]나 승려[2]의 사이에서 유행했던 것이 점차 시대가 지나면서 센고쿠 시대 무렵에는 무가에서도 당연시되었다. 근본적으로 성욕을 푸는 것이 주 원인이었지만 주군하고 잠자리를 같이 한 가신들이나 부하들이 주군에게 더욱 충성을 바치게 되는 등 정치적으로도 유용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3] 이 즈음해서 귀족들 취미에서 일반인들도 즐길 정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남색 풍습은 에도 시대에도 성행했다. 평화기에 와서도 남색이 성행한 것은 에도의 인구가 극심한 남초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에도 시대 초창기) 에도에는 가족 단위로 오기보다는 혈혈단신으로 온 남성들이 많았던 데 반해 여자의 수가 극심하게 적었다. 1721년에 에도의 인구는 사무라이를 제외하면 약 50만 명 정도였지만 이 중 남성의 인구는 32만 명인 데 반해 여성의 인구는 18만 명에 불과했다. 당시에도 유녀가 있기는 했지만 유녀랑 같이 하는 것이 고위층이 아니라면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던 데 반해 남창과 같이 하는 것이 훨씬 더 쌌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남창과 같이 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도 한 몫했다.
그러나 평화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슈도의 정치적인 유용도가 줄어들고 와카슈도 상대를 두고 칼부림을 부리거나 암살하는 참변이 벌어지는 등 당대 기준으로 넘어갈 수 없던 풍기문란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남색을 탐탁치 않게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바뀌었고[4] 이후 에도에서 여성의 비율이 늘어남에 따라 굳이 남색을 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수요가 크게 줄면서 쇠퇴해 나갔다. 결정적으로 메이지 유신을 겪고 성관념이 서구화되면서 남색은 특이한 사람들이 음지에서나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현대 매체에도 그 영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보이즈 러브나 오토코노코 매체 등으로 간접적으로 슈도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다.
그 탓에 당대의 일본 문학작품 중에는 남색을 다룬 소설이나 그림들이 적지 않게 나오며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중도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여럿 존재한다.
센고쿠 시대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무사가 가신의 아들이나 전도유망한 젊은 이를 코쇼(小姓)로서 자신의 수발을 들게 했는데 대개 다이묘의 중도의 상대는 코쇼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마에다 토시이에 및 모리 란마루가 와카슈도의 상대였다고 하며[5], 이외에도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카게카츠, 다테 마사무네 등이 와카슈도를 즐긴 적이 있는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예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행하지 않았는데 히데요시 본인은 하층민 출신이라 이런 '높으신 분들의 취미'에 대해 처음부터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여색을 즐겼다고 한다. 때문에 풍류도 못 즐긴다고 까였다. 심지어 이런 평판을 잠재우기 위해서 가신들이 일부러 미동 수십 명을 방에 넣어 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가게 했는데 가신들의 기대대로(?) 정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동 하나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일제히 총애를 받았냐고 물어봤는데 미동은 "누나가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불교 대형 사찰에서는 보통 치고(稚児), 즉 머리를 깎지 않고 절의 잡일이나 행사를 돕는 어린 소년들이 슈도가 되는 일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고[6] 높은 귀족 자제 출신의 조치고(上稚児)나 재능이 뛰어난 주치고(中稚児)들은 애먼 일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신분이 낮은 이른바 게치고(下稚児)는 자주 승려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전혀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문서상에서도 이 슈도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고대 그리스[7]에는 스승과 제자의 동성애 관계가 존재했고 고대 이집트에서도 귀족들의 취미 중 하나가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소년애가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그리스가 가장 동성애에 긍정적이었는데 여성과의 섹스는 그냥 애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남성끼리의 섹스는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고대 그리스/동성애 문서 참조.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성문화를 짧게 언급하며 "일본 성인 남성은 남색을 즐길 때에도 절대 수동적인 역할은 맡지 않으며, 여성의 입장에 놓이는 것은 반드시 소년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일단 국화와 칼의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단 한번도 일본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을 저술할 때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의 양이 한정적이었기에 저 내용은 맞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반박 기록이 후지와라 요리나가의 일기인 '타이키'인데 거기에는 후지와라 요리나가가 바텀이고 어린 후지와라 다다마사가 탑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그리스와 로마의 동성애가 '탑', '바텀'의 역할은 철저히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도 이럴 것이라고 확증편향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그리스와 로마처럼 성인이 바텀 역할을 했다고 주변인들이 욕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후지와라 요리나가의 일기인 '타이키'같은 귀족의 일기는 후손들에게 남기는 문서였고, 정치적인 시사를 주는 것이 목적이다. 정말 그리스와 로마처럼 '탑'과 '바텀'의 관계가 바뀌었다고 욕을 먹었다면 그러한 내용을 애초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8]
어쨌거나 당시 조선인들의 눈에는 매우 기이하게 보였던 풍습이었다.[9] 조선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러한 풍습에 대해 기이하다고 평가하고 있는 데 신유한(申維翰)이란 사람이 쓴 《해유록(海遊錄)》을 보면 신유한이 당대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와 대화하던 중 동성애 문화를 언급한다. 신유한이 "남녀 간의 정욕이야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에 어찌 음(陰)이 없이 양(陽)끼리만 서로 정을 느껴 즐거워할 수 있소?"라며 의아해하자 호슈는 "학사께서는 그 즐거움을 아직 모르시는군요."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한다. 이에 신유한은 "아메노모리 호슈조차 똑같이 저리 말하니, 일본의 풍속이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서양인 방문객들도 중도를 보고 놀라곤 하였다. 이때의 서양인들은 성경에서 남색 금지를 명시한 기독교도들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동시대 중국에서는 정덕제 이래 중하위 관료들이 징계를 피하겠다고 곱상한 남자 기생을 찾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그렇게 이상한 풍습까지는 아니었다. 경극 배우들도 성매매에 뛰어들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장 청나라 시절에 나온 소설 홍루몽에서도 등장인물들끼리의 동성애 문화가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되며 청나라 당국의 단속에도 대략 19세기 말까지 남아 있었지만 20세기에는 남자 기생들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해서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이러한 남색 풍습은 에도 시대에도 성행했다. 평화기에 와서도 남색이 성행한 것은 에도의 인구가 극심한 남초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에도 시대 초창기) 에도에는 가족 단위로 오기보다는 혈혈단신으로 온 남성들이 많았던 데 반해 여자의 수가 극심하게 적었다. 1721년에 에도의 인구는 사무라이를 제외하면 약 50만 명 정도였지만 이 중 남성의 인구는 32만 명인 데 반해 여성의 인구는 18만 명에 불과했다. 당시에도 유녀가 있기는 했지만 유녀랑 같이 하는 것이 고위층이 아니라면 가격대가 만만치 않았던 데 반해 남창과 같이 하는 것이 훨씬 더 쌌기 때문에 많은 남성들이 남창과 같이 하는 것을 선택했던 것도 한 몫했다.
그러나 평화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서 슈도의 정치적인 유용도가 줄어들고 와카슈도 상대를 두고 칼부림을 부리거나 암살하는 참변이 벌어지는 등 당대 기준으로 넘어갈 수 없던 풍기문란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무라이들 사이에서 남색을 탐탁치 않게 보는 것이 일반적으로 바뀌었고[4] 이후 에도에서 여성의 비율이 늘어남에 따라 굳이 남색을 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수요가 크게 줄면서 쇠퇴해 나갔다. 결정적으로 메이지 유신을 겪고 성관념이 서구화되면서 남색은 특이한 사람들이 음지에서나 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현대 매체에도 그 영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서 보이즈 러브나 오토코노코 매체 등으로 간접적으로 슈도의 향기를 느낄 수는 있다.
그 탓에 당대의 일본 문학작품 중에는 남색을 다룬 소설이나 그림들이 적지 않게 나오며 일본의 전통극인 가부키에도 중도를 소재로 다룬 작품들이 여럿 존재한다.
센고쿠 시대에는 주로 신분이 높은 무사가 가신의 아들이나 전도유망한 젊은 이를 코쇼(小姓)로서 자신의 수발을 들게 했는데 대개 다이묘의 중도의 상대는 코쇼였다. 대표적인 예가 오다 노부나가의 경우 마에다 토시이에 및 모리 란마루가 와카슈도의 상대였다고 하며[5], 이외에도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카게카츠, 다테 마사무네 등이 와카슈도를 즐긴 적이 있는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예외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행하지 않았는데 히데요시 본인은 하층민 출신이라 이런 '높으신 분들의 취미'에 대해 처음부터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대신 여색을 즐겼다고 한다. 때문에 풍류도 못 즐긴다고 까였다. 심지어 이런 평판을 잠재우기 위해서 가신들이 일부러 미동 수십 명을 방에 넣어 놓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가게 했는데 가신들의 기대대로(?) 정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미동 하나를 데리고 나갔다. 잠시 후 미동이 돌아오자 일제히 총애를 받았냐고 물어봤는데 미동은 "누나가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불교 대형 사찰에서는 보통 치고(稚児), 즉 머리를 깎지 않고 절의 잡일이나 행사를 돕는 어린 소년들이 슈도가 되는 일도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이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고[6] 높은 귀족 자제 출신의 조치고(上稚児)나 재능이 뛰어난 주치고(中稚児)들은 애먼 일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신분이 낮은 이른바 게치고(下稚児)는 자주 승려의 성욕 해소 대상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전혀 이상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 문서상에서도 이 슈도에 관한 이야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있다. 고대 그리스[7]에는 스승과 제자의 동성애 관계가 존재했고 고대 이집트에서도 귀족들의 취미 중 하나가 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기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소년애가 일본만의 독특한 현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그리스가 가장 동성애에 긍정적이었는데 여성과의 섹스는 그냥 애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이지만 남성끼리의 섹스는 진정한 마음을 나누는 행위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고대 그리스/동성애 문서 참조.
미국의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의 성문화를 짧게 언급하며 "일본 성인 남성은 남색을 즐길 때에도 절대 수동적인 역할은 맡지 않으며, 여성의 입장에 놓이는 것은 반드시 소년이어야만 한다"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일단 국화와 칼의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단 한번도 일본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고 루스 베네딕트가 국화와 칼을 저술할 때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료의 양이 한정적이었기에 저 내용은 맞지 않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반박 기록이 후지와라 요리나가의 일기인 '타이키'인데 거기에는 후지와라 요리나가가 바텀이고 어린 후지와라 다다마사가 탑이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그리스와 로마의 동성애가 '탑', '바텀'의 역할은 철저히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도 이럴 것이라고 확증편향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그리스와 로마처럼 성인이 바텀 역할을 했다고 주변인들이 욕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후지와라 요리나가의 일기인 '타이키'같은 귀족의 일기는 후손들에게 남기는 문서였고, 정치적인 시사를 주는 것이 목적이다. 정말 그리스와 로마처럼 '탑'과 '바텀'의 관계가 바뀌었다고 욕을 먹었다면 그러한 내용을 애초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8]
어쨌거나 당시 조선인들의 눈에는 매우 기이하게 보였던 풍습이었다.[9] 조선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러한 풍습에 대해 기이하다고 평가하고 있는 데 신유한(申維翰)이란 사람이 쓴 《해유록(海遊錄)》을 보면 신유한이 당대의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와 대화하던 중 동성애 문화를 언급한다. 신유한이 "남녀 간의 정욕이야 음양(陰陽)의 이치에 따라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에 어찌 음(陰)이 없이 양(陽)끼리만 서로 정을 느껴 즐거워할 수 있소?"라며 의아해하자 호슈는 "학사께서는 그 즐거움을 아직 모르시는군요."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한다. 이에 신유한은 "아메노모리 호슈조차 똑같이 저리 말하니, 일본의 풍속이 미혹(迷惑)함을 알 수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서양인 방문객들도 중도를 보고 놀라곤 하였다. 이때의 서양인들은 성경에서 남색 금지를 명시한 기독교도들이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동시대 중국에서는 정덕제 이래 중하위 관료들이 징계를 피하겠다고 곱상한 남자 기생을 찾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그렇게 이상한 풍습까지는 아니었다. 경극 배우들도 성매매에 뛰어들기도 했을 정도였다. 당장 청나라 시절에 나온 소설 홍루몽에서도 등장인물들끼리의 동성애 문화가 아주 적나라하게 묘사되며 청나라 당국의 단속에도 대략 19세기 말까지 남아 있었지만 20세기에는 남자 기생들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해서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고보 대사(弘法大師)'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밀교 진언종을 창시한 대승려 구카이에게 일본 황실이 내린 시호다. 당나라 청룡사에서 밀교의 가르침을 받고 806년에 일본에 귀국했는데 이때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당시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동성애 풍습에 관한 규범들을 함께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후 승려들과 치고들 사이에서의 동성애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으며 에도 시대에 들어서는 사회 전반에 퍼지기까지 했다니 어찌보면 일본 와카슈도의 시조일지도 모르는 셈이다.
현재 구카이 대사의 가르침을 담은 것 중 가장 오래된 건 1598년에 쓰인 책이다. 그 책의 서문을 보면 한 사람이 와카슈도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던 도중 17일째 되는 날에 구카이 대사가 앞에 나타나 한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구카이 대사는 책을 건네주면서 '이 책을 보면 한낱 언덕의 원숭이들조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렀다고 한다. 그때 구카이 대사가 전해줬다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총 3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은 어린 소년들이 승려들에게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법, 두 번째 부분은 소년들을 자세히 관찰해 승려들로 하여금 소년들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마지막 부분은 아예 대놓고 항문 성교의 방법을 설명한다.
아래의 내용은 구카이 대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부분이 나올 수도 있으니 열람 시 유의.
현재 구카이 대사의 가르침을 담은 것 중 가장 오래된 건 1598년에 쓰인 책이다. 그 책의 서문을 보면 한 사람이 와카슈도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던 도중 17일째 되는 날에 구카이 대사가 앞에 나타나 한 권의 책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구카이 대사는 책을 건네주면서 '이 책을 보면 한낱 언덕의 원숭이들조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일렀다고 한다. 그때 구카이 대사가 전해줬다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총 3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부분은 어린 소년들이 승려들에게 손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법, 두 번째 부분은 소년들을 자세히 관찰해 승려들로 하여금 소년들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방법, 마지막 부분은 아예 대놓고 항문 성교의 방법을 설명한다.
아래의 내용은 구카이 대사의 가르침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부분이 나올 수도 있으니 열람 시 유의.
1부
1. 소년이 집게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손가락을 움켜쥐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뿐입니다."를 의미한다.
2. 소년이 한 엄지손가락을 제외하고 양손을 완전히 움켜쥐면 "나는 당신의 사랑을 인정하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당신의 것으로 만들겠습니다."를 의미한다.
3. 소년이 검지와 중지를 엄지손가락에 대면 "당신을 보고 싶다"는 뜻이다.
4. 소년이 부채의 술을 뒤집는다면 네가 그의 방으로 오기를 바란다는 초대의 뜻이다.
5. 소년이 양손의 검지와 엄지로 원을 그리면 "오늘 밤"을 의미한다. 중지를 사용하면 "내일 밤"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가 약지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나중에 언젠가 한번"을 의미한다.
6. 소년이 양손의 가운데 손가락과 약지를 엄지손가락에 대면 네가 그의 방으로 오기를 바란다는 초대의 뜻이다
7. 소년이 약지와 새끼손가락을 엄지손가락에 대면 그가 너에게 말하고 싶지만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소년은 다음날 밤에 다시 시도할 것이다.
8. 소년이 사정이 생겨 피차 오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면 양손의 약지를 엄지손가락에 대고 만질 것이다.
9. 소년이 검지를 만지고 새끼손가락을 엄지손가락에 대면 내일 밤에 다시 올 것이라는 의미다.
10. 소년이 당신의 소매를 잡아당긴다면, 네가 꼭 방문하기를 원한다는 의미다.
2부
1. 소년이 말을 한 후에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라. 조곤조곤 말하는 소년들은 대체로 사랑에 민감하다. 그런 소년에게는 조금은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진심을 보여주어도 좋다. 그의 무릎에 기대어 그에 대한 관심을 분명히 하라. 소년의 로브를 벗길 때 무엇을 할 것인지 정확히 설명하여 그를 안심시키도록 하라.
2. 소년이 제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사랑에 둔감한 경우가 있다. 그런 소년은 적극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의 성기를 쓰다듬고 그의 가슴을 마사지한 다음 점차 그의 엉덩이 부위로 손을 움직여라. 그때쯤이면 소년은 네가 그의 옷을 벗길 때쯤 말없이 너를 유혹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3. 마음이 온유한 수행자는 공격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가장 좋다. 조용히 그를 편안하게 한 다음 그를 관통하라.
4, 소년이 무술을 수련한다면 반드시 그의 검술을 칭찬하라. 그런 다음 그에게 위대한 사무라이의 이야기나 무용담을 들려주어라. 거기에서 일이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5. 소년이 새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지면 새를 싫어하더라도 그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것처럼 새에 대해 이야기하라. 공부를 좋아하는 소년에게는 학문과 서책에 대해 이야기하라. 소년이 마음을 열면 그때서야 너는 소년과 함께 네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 가장 큰 기쁨은 사랑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소년이 저항하지 않은 채로 너와 일을 치르는 것이다.
7. 소년이 너에게 스스로를 보여주는 것을 너무 부끄러워한다면 네 코털을 뽑아 일시적으로 미룬 다음 마음이 안정되면 그때 다시 시도하라.
3부
- 1. 종달새가 날아오르는 듯한 자세인 '류비(鷚飛)' 체위를 사용하라. 소년의 엉덩이를 들어올려 마치 종달새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자세를 취하도록 하라. 이 체위를 사용하면 소년에게 고통이 가지 않는다.
2. 침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소년을 풀어줄 타액이 없을 경우를 대비하여 언제나 양 손에 반쪽으로 자른 자두를 쥐고 있어라.
3. 소년의 다리를 네 어깨 위에 올려놓고 정면으로 삽입하라.
4. 꼬리뼈부터 성기를 문지르다 삽입하라. 이 체위를 취할 때에는 반드시 서서히 시간을 들여서 진행하라.
5. 네가 들어갈 때 네 배와 체중을 실어 소년의 엉덩이를 지그시 내리누르라. 이 방법은 어린 소년에게 사용해도 통증이 없다.
6. 소년을 타액으로 살짝 적시고 그즉시 바로 삽입하라. 이를 '건식 삽입'이라 부른다. 이 방법은 소년에게 상당한 통증을 유발할 수 있다.
7. 거대한 성기를 가진 사람을 시켜 소년의 긴장을 풀어주지 않고 그대로 삽입하게 하라. 이 방법은 소년에게 심각한 통증을 유발한다.
나는 이 책을 일본 소년애의 창시자 고보 대사로부터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받았다. 사쓰마번의 은자 사다토모 미츠오.
1. 작은 입을 가진 소년이 더 좋다. 입이 큰 소년들은 엉덩이가 꽉 끼거나 탄탄하지 않다.
2. 엉덩이가 약간 붉그스레한 것이 좋다. 둔한 엉덩이에는 변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3. 소년의 얼굴을 한 번만 봐도 그의 엉덩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판단이 가능하다.
필자는 고보 대사의 가르침에 위 3줄을 더하니 이는 곧 후세인들이 자유롭게 판단하기 위함이라. 게이초 3년(1598년) 3월 어느날 사다토모 미츠오.
[1] 천황을 직접 섬기는 일본 조정의 신하 겸 귀족이다. 후에 가마쿠라 시대 -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사무라이 계급이 대두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잃었으나 에도 시대 말기에 도막파를 지원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2] 불교의 가르침에 여자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 있어도 남성끼리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3] 테베의 신성부대도 이렇게 성애 이외의 긍정적 측면을 이용한 면이 있다. 스승 역할의 전사가 모범이 되고 학생 역할의 전사는 스승을 보고 배우며 서로 부끄럽지 않게 전장에서 모범을 보이고 결속력을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4] 이 무렵은 사실 일본에 성리학이 들어온 지도 꽤 되는 시점이었다.[5] 그러나 모리 란마루가 실제로 노부나가의 중도 상대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명확히 증명되지 않고 설만 존재한다.[6] 현대에는 신사나 절에서 대형 행사가 있을 때 임시로 동원되는 꼬꼬마들을 가리키며 유치원~초등학생들이 얼굴에 하얀 칠을 하고 헤이안 시대의 복장을 입는 경우가 많다.[7]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로마에서는 풍습으로서 인정되었을 뿐이지 긍정적으로 보진 않았다. 특히 로마 시민이 삽입당하는 것은 금지였다.[8] 호사카 유지도 자신의 채널에서 일본의 와카슈도를 설명할 때 나이에 따라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호사카 유지 말고도 문화심리 학자인 한민 역시 와카슈도를 설명할 때 그러한 역할이 있다고는 안한다.#[9] 조선에서도 남사당패들이 남자를 상대로 성을 파는 등 남색 풍습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일본처럼 고위층들도 거리낌 없이 즐겼던 것은 전혀 아니라 하는 사람들만 하는 마이너한 문화였으며 인식이 끝장나게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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