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한반도 건너가 이중섭을 만나려고 했던 야마모토 마사코와 이중섭의 눈물나는 사랑 이야기
이중섭 젊은 시절 |
1936년 2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4월 도쿄 교외 무사시노에 있던 제국미술학교(帝国美術学校, 데이코쿠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진학했다.
1937년 4월, 제국미술학교를 중퇴하고 문화학원(文化学院, 분카가쿠인)에 입학한다. 이 곳은 경직된 일본 사회 분위기에 반기를 들고, 자유롭고 독창적이며 감성적인 인간을 키워낸다는 이념 아래 설립되어 일본 최초의 남녀 평등교육을 실시한 학교로도 유명하다.
1938년,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입선한다.
1939년, 같은 미술부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 2022)를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당시 이중섭은 굉장히 미남에다가 운동, 노래도 잘 하고 그림 실력도 탁월해 교내의 인기스타였다고 한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연애 중에 서로를 '아고리', '아스파라거스'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아고리'는 일본 유학 시절, 일본인 친구들이 턱(あご, 아고)이 길었던 이(李, 리)중섭을 부르던 별명이었다. 요즘말로 말하면 '턱돌이' 비슷한 셈. 당시 같은 반에 이(李) 씨가 3명이나 있어[8] 서로 구분할 겸 저런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아스파라거스'는 둘이 하얀 아스파라거스 통조림을 자주 같이 먹고는 했는데, 길쭉한 아스파라거스와 마사코의 발가락이 닮았다고 해서 이중섭이 붙여준 별명이라고 한다. 또 이중섭은 마사코를 '발가락군(ゆび君)'이라는 애칭으로도 많이 불렀는데, 전에 마사코가 발가락을 다쳐서 이중섭이 치료해 준 것이 계기이다. 우연히도 둘 다 발가락과 관련되어 있다.
처가도 그녀의 아버지가 미쓰이창고 주식회사[9] 고위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역시 상당히 부유한 집안이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마사코의 집안에서 이중섭과의 교제를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야마모토 마사코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부모님은 결혼을 한 번도 반대한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도 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화가로 먹고살 수 있겠나' 걱정은 하셨지만 조선인이라고 차별한 적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딸바보였어요. 저를 믿어주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셨어요. 먹고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프리미엄조선》 〈이중섭과 이남덕에 대한 왜곡된 사실들〉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입선, <기원 2600년 기념 미술창작가협회 경성전>에 출품한다. 이 해 성탄절부터 마사코에게 그림엽서를 발송하기 시작한다.
1941년 3월, 문화학원을 졸업했다. 이쾌대와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창설한 뒤 도쿄(3월)와 경성(5월)에서 창립전을 열고 '연못이 있는 풍경'을 출품한다. 4월엔 <제5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입선하고 협회 회우 자격을 얻었다.
1943년, <제7회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출품한다. 한신태양사에서 '제4회 태양상(조선예술상 개칭)'을 수여한다. 이 해 전람회 준비를 위해 조선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에 돌아오지 못하고[10] 원산에 계속 체류했다.
1944년 12월, 이중섭이 가족의 결혼 승낙을 받고 마사코를 조선에 불러온다. 당시 태평양전쟁이 막판으로 치달으면서 미군이 폭격기와 잠수함을 동원해 일본 연안 해상교통을 옥죄던 시기였으나, 마사코는 겨우 배를 얻어타고 부산과 서울을 거쳐 원산으로 올 수 있었다. 이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총후 화가[11]로 일한 흑역사가 있다. 물론 원해서 그런건 아니고 이중섭이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해 형 이중석[12]이 일부러 총후 화가로 만든 것이었다.
1945년 5월 20일, 원산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李南德)'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둘의 결혼식 사진[13] |
1946년 1월엔 이쾌대가 신미술가협회를 확대시킨 독립미술협회에 가입했다. 3월엔 북조선예술동맹 산하 원산미술동맹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해 봄에 첫아들이 태어났으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그 비통함을 승화시켜 8월 광복절 기념 평양에서 열린 <제1회 해방기념종합전람회>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날으는 어린이'를 출품한다.
1947년, <제1차 전국미술전람회>(평양)에 출품했다.
1947년, 둘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1949년, 셋째 아들 태성이 태어났다. 원산 근처의 송도원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하루 종일 소를 관찰하며 연필 소묘 등을 많이 했다.
그렇게 부산으로 피난을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 의지할 만큼 형편 좋은 친척이나 지인이 없는 이중섭으로서는 생계가 막막했다. 본래 이중섭은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란 금수저 출신이라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산 적이 없다 보니, 자연히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신세를 진다는 행위를 아주 싫어하고 어쩌다 신세를 져도 어떻게든 갚아야만 하는 성격이어서, 어느 정도 뻔뻔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전시 상황이 상당히 낯설었다. 게다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예술가여서 험한 막일을 해가며 돈벌이를 하는 데에도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중섭을 대신해 부인 이남덕이 거리로 나서 재봉질을 해가며 연명하는 일이 다반사였다.[18] 이런 지경이니 취침 때도 각종 옷들을 다 껴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너무 추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1951년 1월 15일,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그나마 조카 이영진이 있어 연고가 있다는 제주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제주도에 특별한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에 머물지도 정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이 "서귀포가 좋다"고 하는 말을 듣고 몇 날을 걸어갔다. 서귀포의 '알자리 동산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반장 송태주·김순복 부부가 본인들의 집 곁방(4.6㎡, 1.4평) 한 칸을 내어주어 네 식구가 살았다.(현 서귀포시 정방동/서귀동 512-1번지) 여기서도 그의 가족은 별다른 생계수단이 없어 피난민에게 주는 약간의 배급을 받고, 종교단체의 지원을 받으며, 게를 잡고 한라산에서 부추를 뜯으며 힘들게 삶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시기 꽃게와 물고기와 좁은 방에서 얼킨 가족들이 그림의 주요 주제가 된다.) 그래도 몹시 춥고 피난민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부산과 달리 제주도는 그나마 덜 춥고 평화로워[19] 생활은 자유롭고 즐거웠으며,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이 언덕배기에서 산 경험이 창작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10월엔 대한오페라단 창작오페라 '콩지팟지'의 무대장치-소품제작에 참여하는 소일거리를 얻기도 한다.
이 당시 이중섭이 기거하던 정방동의 송태주·김순복 부부의 집과 방은 '이중섭거주지'라는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으며[20], 그 뒤에는 2002년 이중섭미술관이 개관했다.
1951년 말,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파다한 데다, 역시 제주도에서도 가난을 해결할 수는 없어서 12월에 다시 부산 범일동 판자촌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여전히 돈벌이는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가난과 추위로 상당히 힘든 생활이 계속되었다.
전쟁 중이던 당시 한국에는 한국인 배우자를 따라 남아 있다가, 배우자가 전사/행방불명되면서 오갈데 없는 처지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일본인들이 꽤 많이 있었다. 반대로 일본에는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뒤에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환해야 할 한국인들이 제법 있었다. 이들을 맞귀국시키기 위해 일본 측에서는 송환선을 운영하고 있었다. 마사코는 우선 부산 초량동의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7월 경에 제3차 송환선을 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원래는 이중섭까지 온 가족이 함께 도일하려 하였으나, 당시에는 해방 후 한일간 국교 단절이 이어져 정상적인 인적 교류가 매우 어려웠기에[22] 이중섭은 동행할 수가 없었다.
이중섭과 마사코는 이 때부터 가족의 재회를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이중섭은 그림을 열심히 그려 이를 팔아 일본으로 건너갈 밑천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 해 7월엔 친구 구상의 저서 '민주고발'의 표지를 정기적으로 제작했다. 12월엔 <제1회 기조전>에 출품했다.
1953년 5월, <제3회 신사실파전>에 출품했다.[23]
하지만 이렇게 재회를 위해 안간힘을 쓰던 부부는 치명적인 사기에 휘말리게 된다. 이중섭의 오산학교 후배로 마영일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4], 이 마영일이 일본에 있던 마사코를 찾아와서는 일본서적 무역업을 해보자는 제안을 한다. 여전히 낙후된 한국에서는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과 지식에 대한 수요가 높았기 때문에, 일본서적을 한국에 들여와 팔면 제법 돈이 되었다. 마영일은 마사코가 일본에서 책을 사서 본인에게 부쳐주면, 본인이 그걸 한국에서 팔아 구입 원금은 마사코에게 부쳐주고 이익금의 일부는 한국에 있던 이중섭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이에 솔깃한 마사코는 마영일의 말대로 도쿄 대학가에서 서점을 하던 친구에게 약속어음을 써주고 5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이때는 마영일이 약속대로 원금은 마사코에서 보내주고, 이익금 일부를 이중섭에게 나눠줬다. 안심한 마사코는 그 다음에는 무려 27만엔 어치의 책을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마영일이 원금도, 이익금도 제대로 돌려주지 않았다. 마영일로부터 8만엔 정도를 돌려받은 것으로 보이나 결국 20만엔 가량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돈을 벌기는 커녕 빚을 갚기 위해 마사코도 20년 이상을 삯바느질을 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53년 7월, 이중섭은 친구 구상의 도움으로 대한해운공사 선원증을 얻게 되어 단기체류로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갈 수 있게 되는데, 이 때 마사코의 어머니(장모)는 이중섭이 항구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신원보증서까지 구해 주었다. 그것도 보통 사람에게 부탁한 게 아니고, 친분이 있던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 농림대신에게 부탁해서 보증해 주었다고… 가족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에 계속 머물러 있으려고 했던 이중섭을, 훗날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불법체류자라는 신분이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며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낸 사람 역시 장모다. 이들 네 식구는 1주일 동안 히로시마의 여관방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결국 이것이 이들 가족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말았다.
- 1953년 11월, 공예가 유강렬의 초청으로 통영의 나전칠기기술원에서 교사로 근무한다.
- 1954년 5월, 유강렬, 장윤성과 <3인전>(통영 호심다방)을, 강신석, 김환기, 남관, 박고석, 양달석과 <6인전>(마산 비원다방)을, 박생광과 <이중섭 개인전>(진주 카나리아다방)을 차례로 개최한다.
- 1954년 6월, <제6회 대한미술협회전>(경복궁미술관)에 출품했다.
- 1954년 7월, <현대미술작가전>(천일백화점)에 출품했다.
- 1954년 9월, 책 <저격능선>, <황금충> 등의 표지화를 제작했다.
- 1955년 1월, <이중섭 작품전>(미도파백화점)을 개최했다.
- 1955년 4월, <이중섭 작품전>(대구 미국공보원)을 개최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연 마지막 전시회였다.
그가 간간히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엽서엔 가족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예컨대 신혼 초에 잃은 첫아들이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며 발가벗은 채[25] 즐겁게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하지만 이 그림들은 그저 '벌거벗었다'는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춘화로 취급되어 정부에 의해 강제로 철거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어린이에 대해서 너무한 거 아니냐는 사람도 있겠지만, 성이 폐쇄적인 시대에 작가 루이스 캐럴 같은 양반이 때때로 페도필리아로 비난받는 걸 생각하면 당시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다. 또 어디까지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기 그린 그림에는 복숭아나 게 등 동양화에서 장수나 복을 상징하는 사물도 많이 들어가 있는데, 이 또한 죽은 아들이 천국에서 따다 먹으라고 천도복숭아를 그렸다는 뒷얘기가 있다.
부두 막노동조차 건강 문제로 여의치 않게 되자 당시 담뱃갑에 들어있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은지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6.25 전쟁으로 그림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쓸모 없어진 엽서나 담뱃갑의 은박지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런 은박지에 날카로운 것으로 새긴 뒤에 잉크를 칠하고 닦아내면 파인 곳에만 잉크가 스며드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26] 이후 은박지 작품 3점이 뉴욕 현대미술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1956년 1월, 퇴원 후에도 삽화와 표지화를 다수 제작했다.
이후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며 청량리정신병원[29] 무료입원실에 입원했다가, 병원 원장에 의해 정신 이상이 아닌 심한 간염증상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하여# 서울적십자병원으로 옮겼다.[30]
그러다 여름에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적십자병원에서 황달, 정신병, 거식증 등이 겹쳐 안타깝게도 9월 6일 향년 39세라는 한창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쳤다. 사흘 후 문병 온 이중섭의 선배이자 소설가 김이석이 사망 소식을 처음 알고 친구와 유족에게 연락을 돌렸다. 이중섭의 시신을 수습하기 전에 병원에서 입원비로 18만원을 청구했는데, 김광균이 5만원, 기타 인물들의 조의금으로 4만원을 내고 나머지는 병원이 삭감해주었다.[31] 시신은 9월 11일 홍제동 장재장에서 화장되어 봉원사 납골당에 잠시 머물다가 11월 18일 입관했다. 이중섭의 무덤은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 망우리공원묘지에 있다.[32]
요즘 남조센 김치녀, 된장녀, 페미나치들이 이런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한숨만 나올 뿐.
#장면1
2016년 6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장. 화가 이중섭(1916~56)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러 사람들은 긴 줄을 이루었다. 오누키 도모코(大貫智子) 마이니치 신문 전 서울 특파원도 그중 하나였다. 미술관 가는 취미가 없는 그를 이곳으로 이끈 건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일본인 아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보고 싶다(見たい).” 도쿄에 있는 어린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이중섭이 보낸 그림 편지 속에서 ‘만나고 싶다(会いたい)’가 아닌 한국어로 생각한 다음 머릿속에서 일본어로 옮긴 듯한 표현이 눈에 띄었다.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는 전부 전할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을 강렬한 필치의 그림으로 대신한 걸까.' ‘보다’와 ‘만나다’ 사이의 미묘한 위화감에서 한국어의 어려움을 매일 체감하는 서울 특파원,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중섭 부부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졌다.
#장면2
“키도 크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죠.”
94세 할머니는 60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이야기를 하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식민지ㆍ분단ㆍ전쟁을 겪으며 서른넷에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들을 혼자 키운, 힘든 세월마저 비껴간 듯한 만년 소녀. 2016년 9월 도쿄 시부야 인근의 자택에서 처음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ㆍ1921∼2022) 여사의 모습이었다. 이중섭은 그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오누키(48) 기자는 '90세까지 산다면, 나도 이렇게 나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이것은 ‘국민화가’ 이중섭을 둘러싼 신화도, 전설도 아니다. 그저 진득한 사랑 이야기다. 단 7년을 부부로 함께 지내고,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을 홀로 견딘 어느 아내의 이야기다. 8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난 오누키 기자는 “어제 마사코 씨와의 첫 인터뷰 녹음본을 다시 들어봤는데, 이중섭과 처음 만난 18세 때의 별명대로 ‘아고리(턱이 긴 이 씨)’라고 부르며 웃는 목소리였다”고 말했다.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신문사 기자가 한일 관계도 대북 문제도 아닌, 1956년 세상을 떠난 한국인 화가와 그의 남은 가족들에 대한 책을 썼다. 2021년 일본 최초의 이중섭 평전으로 출간된 『사랑을 그린 사람,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다. 오누키 기자가 이중섭의 자취를 쫓아 서울·도쿄·제주·통영·부산 등 현장을 취재하고, 아내와 아들을 인터뷰한 결과물인 이 책은 일본 대형출판사 쇼가쿠칸에서 주최하는 논픽션 대상을 받았다.
일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중섭, 또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바다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을 연결한 저작이다. 코로나19로 두 나라를 오갈 수 없던 시절, 더 큰 공감을 얻었다는 평가다. 책은 최근 『이중섭, 그 사람』(최재혁 역, 혜화1117)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미술도, 이중섭도 잘 몰랐지만 그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그때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거였어요. 부인 마사코 씨는 세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힘들었던 시절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었어요. 40대의 마사코 씨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습니다.”(오누키 기자)
책의 토대가 된 것은 이중섭과 마사코 뿐 아니라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 시인 김광균 등 지인들이 보내온 편지다. 상당수가 한국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탄핵 정국, 한일 관계 경색 등의 이슈로 특파원 재임 기간이 5년으로 늘었던 때의 취재 결과물이다. 남편과 떨어져 서울에서 초등생 아들을 키우며 워킹맘으로 산 기간이기도 했다. 34세에 남편을 잃고 초등생 두 아들을 홀로 키운 마사코의 젊은 시절이 자주 겹쳐졌다. “‘마사코 씨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1939년 도쿄의 미술학교에서 처음 만난 이중섭과 마사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결혼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0년 겨울 해군 수송함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 갔고, 한 달 만에 제주로 내려갔다.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을 1952년 도쿄로 떠나 보낸 것이 사실상의 영이별이었다.
절절한 그림편지로 가족에게 마음을 전하던 이중섭은 4년 뒤 무연고자로 39년의 생을 마쳤다. 생활력 없는 남편, 어린 두 아들의 부양은 마사코의 몫이었다. 목사 가운을 재단해 팔며 생활을 이어갔다. 서귀포에서의 배고픔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장남 태현 씨는 2016년 인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둘째 태성 씨는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였고,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랐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건 그가 15세 때였다.
오누키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것은 쭉 기억하고, 힘들었던 것은 누구도 탓하지 않은 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게 아닐까. 그게 마사코 선생이 101살까지 살아간 힘이었을 것"이라며 1953년 마사코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글을 보여줬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저는 전 세계 누구보다 가장 행복합니다. 그 사랑만 있으면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충분해요.'
‘겨울연가’ 같은 한류 드라마도 즐겨보던 마사코는 “누군가 이중섭을 연기한다면, ‘욘사마’보다는 이병헌이면 좋겠다”며 웃기도 했다는데….
“'아고리의 넋이 나를 건강하게 지켜주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또 만날 수 있겠죠?’하고 말을 걸고 싶어집니다”(2016년 7월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가족전’ 때 보낸 메시지)라던 마사코는 지난해 8월 13일 남편의 곁으로 돌아갔다.
오누키 기자는 "그의 1주기를 맞아 한국 독자들께 이 책을 소개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의 목소리로 그의 한결같은 사랑도 알리고 싶다. 둘의 사랑이 있었기에 이중섭의 작품도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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