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91년 버블 붕괴 이후 약 20여년간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이유는 (2010년대부터는 회복 시작) 금융 문제 (좀비 기업과 은행간의 유착관계)로 한국이 그 전철을 밟을 가능성은 없다; 90년대 후반의 폴 크루그먼의 주장대로 2001년 세계 최초로 양적완화를 시작하여 고이즈미 정권 때 경험한 이자나미 호황 (2002.1~2008.2); 2007년 금리를 올리는 실책을 저질러 더 신중해진 일본 중앙은행; 한때 전세계 반도체 산업의 80%를 장악했던 일본 제조업의 완벽주의적 장인정신인 모노즈쿠리(+ 버블 여파)은 오히려 3차 산업혁명에서 일본이 뒤쳐지게 만들었고, 2003년 개발된 일본 전기차 에리카를 망하게 만들었으며, 도요타가 내연기관차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일본 반도체 산업이 망한 이유는 1986, 1991, 1996년 미일 반도체 협정+1990년대 반도체의 국제 분업 시스템을 따라가지 못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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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70년대 석유 파동, 그로 인한 1980년대 정부 주도 조선산업 구조 조정 등을 겪으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개발과 산업에 대해 고민했다. 이 과정에서 향후 일본 경제를 이끌어 줄 첨단산업 분야를 찾았고 메모리 반도체, 특히 그 중에서도 DRAM 개발 및 생산을 그 핵심으로 판단해 통상산업성의 보호 아래 성장시켰다.
정부 주도 아래 일본 반도체 산업은 제조업체, 제조장치업체, 소재(웨이퍼)업체로 이어지는 수직 산업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정부 정책 뿐만 아니라 일본 산업계의 폐쇄적인 계열 문화까지 더해져서 미국산 제조장치나 소재들이 일본 제조업체의 공정라인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면서 규모의 경제와 산업 파생 효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당시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하던 미국을 압도하는 투자와 연구가 가능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미국 인텔 등과 비교해 수율도 높을 뿐 아니라 무려 10%나 저렴한 가격에 납품이 가능했다. 여기에 당시 저평가돼 있던 일본 환율, 값싼 노동력도 유리한 수출 환경 조성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초중반 세계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나갔다.
1984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모토로라, 인텔, 마이크론 등을 앞세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고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성적도 좋았지만 1985년을 변곡점으로 상황이 대반전됐다. 이전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각각 44% 점유율로 양분하던 미국과 일본 사이에 균형이 깨진 것이다. 제2의 진주만 공습에 비유될 정도의 일본산 반도체 수출이 미국 반도체 산업에 치명타를 입혔고 심지어 미국산 전자기기의 일본산 메모리 사용도 급증했다. 같은 시기에 빠른 기간에 우후죽순 늘어난 일본 업체들의 영향으로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이상 현상도 발생하면서 메모리 가격이 폭락했는데 이걸 견디지 못한 인텔 등 미국의 반도체 업체 대부분이 메모리 시장에서 철수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공격적인 덤핑공세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게다가 미국 주력 반도체 기업의 제품 품질이 일본 하위권 기업 제품보다 떨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도 일본 반도체 산업의 강세가 꺾이지 않자 미국 반도체 산업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고 결국 미국은 일본에 대한 통상압박을 준비했다. 1985년 6월 14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의 무역대표부(USTR) 청원3은 그 시작이었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일본 시장 진입 장벽, 외국산 반도체 차별,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 정부 주도의 반도체 투자 및 생산설비 확대 등을 문제삼았다. 이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일본 반도체 기업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전기, 도시바, NEC 등 7곳을 덤핑 혐의로 USTR에 제소했다. 이어 9월까지 인텔, AMD, 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일본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덤핑 관련 제소가 이어졌다. 미국의 대일본 통상압박의 정점은 상무부가 찍었다. 당시 말콤 볼드리지 미 상무부 장관은 일본 반도체의 덤핑혐의에 대한 직권조사로 압박 강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직권조사란 기업들의 제소 없이도 상무부 직권으로 특정국 수출품의 덤핑 여부 등을 조사하고 이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역제재 수단이다.
일본 정부의 로비 등 그 어떤 외교도 양국 간 무역역조 심화와 통상갈등 최고조로 한껏 예민해진 미국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양자협정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당시 10% 수준이던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2]을 1992년까지 20%로 높이고 반도체 덤핑수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으며 미국의 대일본 반도체 직접 투자 금지도 철폐해야 했고 협정 체결 후에도 미국은 일본의 미준수를 거론하여 보복관세 부과압박, 일본 반도체 산업 감시 등 압박을 이어갔다.
실제로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일본 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미국 반도체 업계의 일본 투자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면서 정작 일본 기업들은 미국 내에 공장을 건설하고 위기에 빠진 미국 반도체 기업을 매수하려고 시도하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렇듯 일본은 자국의 산업 육성을 빌미로 대놓고 미국을 상대로 보호무역을 가했다. 그래서 미국이 부당하게 일본을 상대로 통상 압력을 가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실상은 이런 이유로 경제논리에서 미국이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정부 주도 아래 일본 반도체 산업은 제조업체, 제조장치업체, 소재(웨이퍼)업체로 이어지는 수직 산업구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정부 정책 뿐만 아니라 일본 산업계의 폐쇄적인 계열 문화까지 더해져서 미국산 제조장치나 소재들이 일본 제조업체의 공정라인에서 점차 자취를 감추면서 규모의 경제와 산업 파생 효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당시 반도체 시장에서 경쟁하던 미국을 압도하는 투자와 연구가 가능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 결과 미국 인텔 등과 비교해 수율도 높을 뿐 아니라 무려 10%나 저렴한 가격에 납품이 가능했다. 여기에 당시 저평가돼 있던 일본 환율, 값싼 노동력도 유리한 수출 환경 조성에 힘을 보탰다. 이렇게 일본 반도체 산업은 1980년대 초중반 세계 시장을 거침없이 잠식해 나갔다.
1984년까지만 해도 미국은 모토로라, 인텔, 마이크론 등을 앞세워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주도하고 있었고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성적도 좋았지만 1985년을 변곡점으로 상황이 대반전됐다. 이전까지 세계 반도체 시장을 각각 44% 점유율로 양분하던 미국과 일본 사이에 균형이 깨진 것이다. 제2의 진주만 공습에 비유될 정도의 일본산 반도체 수출이 미국 반도체 산업에 치명타를 입혔고 심지어 미국산 전자기기의 일본산 메모리 사용도 급증했다. 같은 시기에 빠른 기간에 우후죽순 늘어난 일본 업체들의 영향으로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이상 현상도 발생하면서 메모리 가격이 폭락했는데 이걸 견디지 못한 인텔 등 미국의 반도체 업체 대부분이 메모리 시장에서 철수했다. 반면 일본 기업들은 공격적인 덤핑공세로 더욱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게다가 미국 주력 반도체 기업의 제품 품질이 일본 하위권 기업 제품보다 떨어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도 일본 반도체 산업의 강세가 꺾이지 않자 미국 반도체 산업은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섰고 결국 미국은 일본에 대한 통상압박을 준비했다. 1985년 6월 14일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의 무역대표부(USTR) 청원3은 그 시작이었다. 미국 반도체 업계는 일본 시장 진입 장벽, 외국산 반도체 차별, 일본 정부의 보조금 지원, 정부 주도의 반도체 투자 및 생산설비 확대 등을 문제삼았다. 이로부터 정확히 열흘 뒤 미국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이 일본 반도체 기업 히타치 제작소, 미쓰비시전기, 도시바, NEC 등 7곳을 덤핑 혐의로 USTR에 제소했다. 이어 9월까지 인텔, AMD, 내셔널세미컨덕터 등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일본 업체들을 대상으로 한 덤핑 관련 제소가 이어졌다. 미국의 대일본 통상압박의 정점은 상무부가 찍었다. 당시 말콤 볼드리지 미 상무부 장관은 일본 반도체의 덤핑혐의에 대한 직권조사로 압박 강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직권조사란 기업들의 제소 없이도 상무부 직권으로 특정국 수출품의 덤핑 여부 등을 조사하고 이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무역제재 수단이다.
일본 정부의 로비 등 그 어떤 외교도 양국 간 무역역조 심화와 통상갈등 최고조로 한껏 예민해진 미국을 상대로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아 양자협정문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당시 10% 수준이던 일본 내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2]을 1992년까지 20%로 높이고 반도체 덤핑수출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으며 미국의 대일본 반도체 직접 투자 금지도 철폐해야 했고 협정 체결 후에도 미국은 일본의 미준수를 거론하여 보복관세 부과압박, 일본 반도체 산업 감시 등 압박을 이어갔다.
실제로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일본 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위해 미국 반도체 업계의 일본 투자를 의도적으로 방해하면서 정작 일본 기업들은 미국 내에 공장을 건설하고 위기에 빠진 미국 반도체 기업을 매수하려고 시도하는 이중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렇듯 일본은 자국의 산업 육성을 빌미로 대놓고 미국을 상대로 보호무역을 가했다. 그래서 미국이 부당하게 일본을 상대로 통상 압력을 가했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실상은 이런 이유로 경제논리에서 미국이 더 이상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있었다.
이 협정의 연장을 거쳐 1996년 협정 종결 당시 미국은 목표한 점유율을 이뤄냈지만 일본 반도체는 이미 회생불능 상태였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하여 일본 반도체 기업들은 한일 무역 분쟁 때 강점을 과시한 소재, 제조장치(이른바 '소부장') 중심으로 산업이 재편되고 엘피다 메모리 같은 전방 기업들은 파산했으며 미일 반도체 기업들의 기술원조나 라이센스 발주로 연명하고 있던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술 발전을 거듭해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만약 이 협정으로
미국이 일본에 철퇴를 내리지 않았더라면 10개에 육박하던 일본의 DRAM 제조사들이 일본 정부의 지원 하에 시장을 장악하고
삼성이나 SK하이닉스는 지금만큼 잘 나가는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함께 반도체 강국으로 급성장한 대만은 이 협정으로 누린 혜택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일단 TSMC는 창업 당시 일본이 아닌 네덜란드의 노포 메이커 필립스로부터 출자와 기술 지원을 받았다. 거기에 일본 기업들이 전성기에도 그닥 잘하지 못했던 파운드리 쪽으로 특화되어 나가서 엔비디아 같은 신흥 팹리스 기업들과 동반 성장하였다. 대만은 메모리 쪽으로는 애초에 진입도 늦은 데다 90년대 말에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대거 몰락하고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기술을 퍼다줬음에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한국과 함께 반도체 강국으로 급성장한 대만은 이 협정으로 누린 혜택은 거의 없는 수준이다. 일단 TSMC는 창업 당시 일본이 아닌 네덜란드의 노포 메이커 필립스로부터 출자와 기술 지원을 받았다. 거기에 일본 기업들이 전성기에도 그닥 잘하지 못했던 파운드리 쪽으로 특화되어 나가서 엔비디아 같은 신흥 팹리스 기업들과 동반 성장하였다. 대만은 메모리 쪽으로는 애초에 진입도 늦은 데다 90년대 말에 일본 반도체 업체들이 대거 몰락하고 합병하는 과정에서 한국 기업들을 견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기술을 퍼다줬음에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 엘피다 메모리 전직 기술자 유노가미 다카시(湯之上隆)는 이 협정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국에서는 '일본 반도체 패전(敗戰)'이라는 저서를 쓴 것으로 유명한데 해당 저서에서 그는 일본 반도체 몰락의 원인을 미일 반도체 협정보다는 수익성 개선 실패로 꼽고 있다.## DRAM 가격의 하락을 예측하지 못하고 과잉 기술로 과잉 품질의 비싼 DRAM 제조에만 매달린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결국 수익률 개선 대신 '기술에 대한 집착' 때문에 호황기에 충분히 이익을 내지 못하고 불황 때는 대규모 적자를 냈다는 것이다.
결국 기승전결은 역시나 자국에 대한 기술 찬양인데 세계가 못 알아봐준다는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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