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얼 사회 일본의 명과 암 (feat. 도쿠가와 이에츠나)

한국은 '사실관계'에 집착하고, 일본은 '이미지'에 집착한다니... 엉터리 같은 헛소리를 말도 안되는 이유를 갖다붙여서 설명한다.


저자의 지적 수준이 초딩인지 현저히 의심되지만... 그래도 군데군데 취할 부분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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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을 잘 지켜서 성장한 나라
매뉴얼을 위조해서 무너지는 나라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의 배경에는 암묵지가 있었다. 정상적인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 보다는 편법을 통해 나가는 것이 훨씬 좋았다. 이는 한국인 특유의 추진력과 겹쳐서 발전의 핵심이 되었지만 돈과 연줄만으로 해결이 가능하다는 인식을 만들어버렸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진통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본은 반대의 사회다. 유난히 강력한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고 이 시스템이 사회 단위에 복제되며 이 시스템들이 각자의 매뉴얼에 의해 관리된다. 질서 있는 일본은 이 매뉴얼에서 나온다.


하지만 이 매뉴얼에도 부작용은 존재한다. 하나는 현대사회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불과 수년전의 혁신 기술이 전 세대 기술이 될 정도로 최근 사회의 진보는 빠르다. 매뉴얼이 이를 따라갈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의 혁신은 반드시 매뉴얼 검토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고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큰문제는 이 매뉴얼이 반드시 올바름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현재 일본사회가 겪는 진통, 나아가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의 단초가 된다.



물을 달라며 살려달라는 국민을 살려주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매뉴얼로 이뤄진 나라

나는 심심하면 각 나라의 라디오를 틀어 놓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인터넷 라디오의 발달 덕분이다. 개중에는 일본 라디오도 있는데 일본 방송들은 나에게 일본이 얼마나 매뉴얼을 좋아하는지 알려준다. 예를 들어 태풍이 불었다면 태풍의 현황, 피해상황을 자세히 말해준다. 그런데 그 다음에 꼭 태풍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수해를 입었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전이 되었을 때 주의사항이 이어진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아니 그 시간과 세세함 자체가 틀리다. 저의 태풍대비 A to Z을 다 보여주는 수준이다. 


이게 기업으로 가면 정말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의 채용은 회사 시스템에 맞게 사람을 교육시킨다는 전제하에 이뤄진다. 이렇게 입사한 인재는 회사를 위해 업무 매뉴얼을 익혀야 하는데 이 매뉴얼이 우리 상상과 차원이 다르다. 사실상 회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이 적혀 있으며 심지어 인간관계에 관한 것까지 다룬다. 상사, 동료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인사할 때 허리는 얼마나 몇 초간 숙여야 하는지, 한번 인사한 상대를 또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화를 받을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일일이 교육시킨다. 


때로는 변태성마저 느껴진다. 일본의 모 유명제과 대기업의 전화응대 교육자료의 내용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전화 받을 때 목소리가 도, 미 화음이면 상대방에게 관심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관심을 보일 때는 솔 화음으로 받으라’는 내용이다. 농담 반으로 음치는 살아남기 힘든 것이 일본사회인 것이다!! 


다만 이걸 보고 ‘일본 사회만 답답하다’는 선입견을 가지면 곤란하다. 이런 제약은 한국사회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매뉴얼이 없다면 선배가 만든 암묵지가 매뉴얼이 된다. 아무리 일을 잘해도 눈치가 바닥을 기면 출세하지 못하는 이유다. 한국식 ‘공기읽기’다.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매뉴얼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일본인의 매뉴얼 지향적인 성향은 ‘와’라는 시스템을 잘 운용하고 지키기 위해서다. 일본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깊게 인식하고 있기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철저하게 매뉴얼을 따른다.



중용의 정치를 펼 수밖에 없던 쇼군

도쿠가와 막부의 4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츠나(徳川家綱)’의 입지는 불안했다. 그가 쇼군에 올랐을 때 나이가 불과 11살이었던 것이다. 그는 즉위하자 마자 유이 쇼세츠가 일으킨 반란에 휘말리게 된다. 이를 수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숙부인 호시나 마사유키였다. 그는 전 정권 신하들과 힘을 합쳐 쇼군을 지켜냈고 이후 그들은 전 정권에서 이어받았다는 뜻을 담아 칸에이의 유로라 불리게 된다. 전 정권 실세들이 기반이 되어준 덕분에 이에츠나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안정된 국정을 펼칠 수 있었고 이 태평성대가 29년이나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왜 그들은 권력을 직접 쟁취하려 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이에츠나 정권을 보호한 것은 이에츠나에게서 타오르는 리더의 혼을 봐서가 아니었다. 막부라는 시스템이 무너지면 그들이 권력을 누릴 터전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일본인은 시스템 밖에 퇴출당하면 참 힘들어진다. 


이렇게 난을 진압한 이에츠나의 다음 숙제는 신하와의 줄다리기였다. 이는 경험 없는 군주가 거쳐야 할 쉽지 않은 숙제였다. 그 세종대왕조차 태종이 그렇게 권력을 갖출 수 있도록 외척과 권신을 정리해 줬음에도 임기 초년에는 신하들에게 시달리고 밀려야 했다. 성종은 별의 별 트집을 다 잡혔다. 


이에츠나도 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임기 초반에는 자신의 정책을 설득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신하들에게 밀렸다. 그래서 ‘그리하거라 님(左様せ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신하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뜻이다. 업적이 별로 없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자연스럽게 이에츠나의 치세는 조직유지를 위해 반발을 다독이는 중용의 정치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에야스가 만든 통제 정책을 일부 완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말기양자(末期養子)제도였다. 말기양자 제도란 다이묘가 사망하면 양자를 들여 다이묘를 물려주는 제도로, 이에야스는 이를 철저하게 금지했다. 양자를 들이지 못한 다이묘가 죽으면 영토는 중앙정부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회수한 영지를 마음에 드는 다이묘에게 줄 수 있으니 막부의 권한이 강해졌다. 이에츠나는 이를 폐지했고 덕분에 다이묘의 권력이 안정적이 되었다.


하지만 이게 막부에게 안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전에는 다이묘가 죽어서 영지가 중앙정부에 귀속되면 그 밑의 가신(사무라이)들은 낭인이 되어 치안을 어지럽히는 칼을 든 골치덩어리가 되기 일수였다. 하지만 세습제도가 생기면 이를 막을 수 있었다. 자연히 치안이 안정되고 농업발전은 물론 유통경제도 활성화시켰다. 이렇게 그는 에도시대의 시스템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여 중용을 지킨 군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이런 업적을 낳은 탓인지 그는 인자하고 현명한 군주로 그려진다. 이를 잘 나타내는 일화가 있다. 천수각 꼭대기에 있을 때 무료하게 보였는지 한 가신이 서양을 통해 들어온 망원경을 바쳤다. 여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기분전환이 될 것이라고 권한다. 그런데 이에츠나는 조용히 미소 지으면서 말한다


‘내가 비록 어린아이지만 직책은 쇼군이다. 쇼군이 백성들을 망원경으로 내려다본다면 세인들이 불쾌하지 않겠는가?’


라면서 망원경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보통이라면 망원을 만져 보기라도 했을 것이다. 백성들이 높은 사람에게 감시당하면 불안해한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천수각, 쇼군의 것이면 엄청 높은 곳에 짓는다.

그가 아버지 옆에서 쇼군수업(조선의 세자수업)을 받을 때 일이다. 교사가 ‘가장 무거운 벌은 사형이며 그 다음으로 무거운 것은 귀양을 보내는 유형(島流し)이다’라고 가르치자 그는 반문한다. 


“유형을 간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가? 먹을 것은 있는가?”

“(이에 아무도 대답이 없자) 유배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형벌인데 사람이 죽어서야 사형과 다를 게 무엇인가? 형벌의 의미가 없지 않는가?”


이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아버지 이에미츠는 크게 기뻐하면서 유형에 처한 사람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체제를 만들고 이것을 다케치요(竹千代: 이에츠나의 아명)의 첫 업적으로 삼으라고 지시한다. 


식사를 할 때 국에서 사람의 머리카락이 나왔다. 당황해서 여급이 국그릇을 치우려고 하자 이에츠나는 ‘국은 도중에 버리고 주방에 들여가라’고 지시한다. 이유인 즉, 만약 그 국이 그대로 주방에 돌어가면 왜 그 국이 남았는지 조사가 이뤄질 것이고(맛이 없었던 건지, 독이 나왔는지 등) 머리카락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관련자는 바로 처형당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기 때문에 국을 버려서 다 먹었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는 소양을 갖춘, 덕성을 갖춘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경우에 따라선 무자비해질 수 있었다. 군주로서 막부라는 사회시스템을 지킬 의무가 있기에.



온화한 성군이 잔혹해질 수밖에 없던 이유

한국 사람들은 무언가 잘못 굴러가는 상황을 그냥 두지 않는다. 외적이 쳐들어오면 의병, 독립운동을 했고, 독재 정권은 민주화 운동으로 극복해 낸 사람들이다. 그래서 현재 일본이 돌아가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마 한국인들 같았으면 피폭된 식재료를 먹어서 응원하자고 했을 때 당장 총리관저에 몰려가서 시위를 했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처음부터 이랬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1960년 일본을 미국의 군사적 전략에 포함시키기 위한 안보법이 추진되자 일본 국민들은 대규모 시위로 대항했다. 그 규모는 무려 33만명에 달하는 수치였다. 인구비를 비례해보면 촛불시위 버금가는 것이었다. 


그 이전으로 가면 다이쇼 데모크라시, 더 이전으로 가면 ‘잇키(一揆)’를 들 수 있다. 첫 잇키는 1428년에 일어났다. 국가의 무거운 세금, 사원과 사채업자의 고리대금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일제히 봉기해서 난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사원을 습격, 차용증서를 불태우고 1441년에는 교토까지 몰려가서 세금과 빚을 없애 달라고 시위했다. 이에 정부는 백기를 들고 빚을 실제로 탕감해준 역사가 있으니 민중운동의 결실도 맛본 민족인 것이다.  

문제는 권력자의 행동이다. 이런 시위가 15~16세기에 무려 50차례나 일어나자 그들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알리지 않는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1653년, 사쿠라번은 재정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무거운 세금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이럴 경우 바로 상위 관리에게 이를 건의하되 바로 그 위로 올리면 안되는 시스템이 있었다. 호리타는 매뉴얼에 따라 상위 관리에게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바다 건너 옆나라도 그랬듯 세금을 덜 걷는다는 것은 바로 관리의 무능, 그들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호리타는 포기하지 않고 여러가지 매뉴얼에 따른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국가의 행정을 총괄하는 ‘에도번정’까지 상소를 올리지만 그들은 시스템 밖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세금 때문에 다 말라 죽을 판이 되자 사쿠라번의 고오즈(公津)라는 작은 마을의 촌장인 키우치 소고로가 쇼군에게 직접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이는 당시 국가 행정시스템에서 벗어난 행위였다. 그렇게 그는 처형된다.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이에츠나가 키우치의 상소를 듣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줬기 때문이다. 사쿠라번의 재정상황에 대한 조사를 명한 후 가혹한 과세를 조정해준다. 이렇게 사쿠라번은 모라토리엄을 막을 수 있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렸다. 


그런데 왜 키우치는 처형당했는가? 이에츠나는 키우치가 올린 상소의 내용에는 전폭적으로 공감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문제는 에도막부의 시스템상 쇼군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행동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죄목은 매뉴얼 위반이었다.


잘못된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고 죽이는 사회에서
 시스템 개혁은 목숨을 건 행위다


옆나라인 우리는 상황이 약간 다르다. 세조대의 홍윤성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별명은 살인마 정승, 정말 기분이 나쁘면 사람을 때려죽이고 이를 권력으로 묻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그의 변덕에 죽은 사람 중에 나계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홍윤성에게 선물로 보낸 노비를 선별한 것이 그 사람이었는데 그 노비들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였다. 


나계문의 부인, 윤덕령은 이 억울함을 풀고 싶었다. 하지만 홍윤성은 세조의 계유정난까지 따른 공신중의 공신, 현직 정승이다. 조선의 사법 시스템은 제기능이 아닌 살인마를 보호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자 윤덕령은 목숨을 걸고 세조의 온천 행차길에 뛰어들었다. 당연히 능지처참을 당할 중죄. 하지만 상황을 들은 세조는 윤덕령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상까지 내렸다. 이후에 윤덕령이 보복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여기서 일본과 한국에 차이점이 드러난다. 한국에서는 무엇이 옳은지가 반영되었지만 일본에서는 시스템, 매뉴얼이 더 중시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에츠나도 애민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키우치의 문제는 풀어주되 그를 처형할 것을 명한다. 왜냐?


막부의 시스템과 매뉴얼을 잘 지키는 것이 쇼군 최대의 임무였기 때문이다.


막부는 잘못된 조세제도로 인한 문제보다는 키우치를 살려줬을 경우 다음부터는 중간단계를 건너뛰고 바로 쇼군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일이 일어날 것으로 봤다. 기존의 병폐보다는 시스템, 나아가 권력을 지키는 것에 사회가 동의한 것이다. 


일본사에서 이렇게 매뉴얼을 깨다가 죽은 사람은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럼에도 상대적으로 덜 유명한 이에츠나를 고른 이유는, 이런 애민군주마저 시스템으로 인한 강압을 고를 정도로 시스템의 중요성이 컸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아무도 시스템의 폐단을 고칠 생각은 에도 막부가 망할 때까지 하지 않았으니까.

이런 시스템을 운용하고 지키기 위한 매뉴얼의 위력이 큰 이유다.
 일본에서 매뉴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상상이상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성향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일본인들도 데모도 하고 폭동도 일으킨다. 오늘날 이런 일이 없는 이유는?


매뉴얼이 지배하는 사회

일본인이 사회, 제도를 시스템화하여 안정을 꾀한다면 이 시스템을 운용하는 핵심은 매뉴얼이다. 모든 조직은 매뉴얼을 가지고 있고 이 범주내에서 움직일 것을 교육, 사회제도, 인식이 강제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좀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사실 매뉴얼에는 장점이 많다. 조직 구성원이 최단 시간에 적응할 수 있고 예측 불가능한 사태를 방지하기 좋다. ‘매슬로우’에 의하면 인간은 질서, 안정에 대한 욕구가 있다고 한다.

 

어쩌면 삶의 불안정한 변수를 통제하려는 인간의 욕구가 절묘하게 사회제도로 만들어진 게 ‘매뉴얼 사회’

 아닐까 싶다. 그래서 비단 일본만이 아닌 여러 나라, 여러 사회에서 매뉴얼이 중시된다. 


문제는 일본에서는 매뉴얼이 현실 위에 있다는 것이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태평양 연안에서 M9.1이라는 일본관측사상 최대의 지진이 일본을 덮쳤다. 위기에 빠진 일본은 침착한 대응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더니 이후에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놀라움을 줬다. 


사고가 발생한지 4일만에 도쿄전력이 원전사고 현장에서 철수하려고 한 것이다.


사고를 수습해야 할 도쿄전력이 철수를 하다니? 원전문제가 해결이라도 된 것일까? 간 나오토 총리가 현장에 급히 달려가서 이유를 묻자 도쿄전력은 황당한 답변을 한다. 당시 원전 주변의 방사능 물질 농도가 작업자에게 허용된 연간 50밀리시버트를 넘어섰기 때문에 규정에 의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위험이 규정을 넘어서자 위험에 대한 대응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결국 작업이 다시 재개된 것은 매뉴얼의 허용기준을 250밀리시버트로 고치는 회의가 끝난 이후였다. 이 상황은 황당함을 넘어 아쉬움을 넘겨준다. 그 다음에 들린 이야기는 골든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노심이 지하수 층까지 뚫고 들어갔다는 이야기였으니까. 


일본 사회는 매뉴얼에서 벗어난 사태에 직면하면 놀랄 정도로 무기력 해진다.
천재지변으로 포장한 사실상의 인재, 후쿠시마 원전 폭발.


매뉴얼 때문에 일어나는 사고는 이것 만이 아니었다. 재앙의 진원지였던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은 지진 후 11일이 지났을 때까지 구호물품을 받을 수 없었다.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인데 문제는 주민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져갈 때 일부 물자집적소에는 식량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11일째 구호물품이 보급된 이유는 정부덕이 아니라 상황을 보다 못한 지역 야쿠자의 기부 덕분이었다(일본의 야쿠자는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지역사회에 여러가지로 기여한다). 


이 모든 비극이 매뉴얼 때문에 일어났다. 
 외국의 구호물자를 검역, 배분하는 매뉴얼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뉴얼이 사회를 위한 것인지 사회가 매뉴얼을 위한 것인지 모르는 일본정부 덕분에 외국의 구호세력은 굶주리는 이재민들을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만에서 온 구조대는 공항에서 2일간이나 묶여 있었으며 한국의 CJ제일제당에서 일본정부에게 보낸 자사 식료품, 음료수는 (우리 매뉴얼로 검증을 마친)일본산을 가져오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반려되었다. 심지어 미국의 구호마저 거절하는 바람에 미국은 ‘짐이 많아서 버리고 간다’는 핑계까지 대야 했다. 내가 직접 인터뷰했지만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모 외국계 기업 직원은 일본정부의 규제를 편법으로 피하기 위해 물과 식료품을 실험용 샘플로 들여와서 연명했다고 한다. 


겨우겨우 물자배급이 이뤄졌지만, 그 놈의 매뉴얼 때문에 통행허가증을 받지 못해서 국도로 우회해서 돌아가다가 과적차량으로 걸려서 운행중지가 되는 경우마저 있었다. 일본사회는 매뉴얼이 없다면 국민들이 굶어 죽어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는 그 상징중의 상징이다.



매뉴얼에 숨겨진 무서운 진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그래도 매뉴얼을 지키려는 거니 성숙한 사회가 아니냐는 이야기다. 물론 매뉴얼을 지키는, 사회가 합의한 룰을 따르는 행위는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매뉴얼이라는 것이 과연 절대적인 것일까? 아니 이 매뉴얼은 애초에 누가 만드는 것일까? 혜택을 받는 사회 구성원? 천만에. 


시스템의 최대 수혜자인 권력자다
 
 

일본에서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위기가 오면, 시스템과 매뉴얼에 매달린다. 하지만 이것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기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한 행동이다. 


후쿠시마 원전의 부적절한 관리로 인해 사람들은 고향과 삶의 터전을 벗어나서 살아야 했다. 물리적, 정신적인 충격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도쿄전력은 책임을 지기는커녕 책임에서 회피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매뉴얼을 만들었다. 


도쿄전력은 보상에 관한 접수규정을 까다롭게 만들었다. 평소의 일본 같았으면 보상신청서를 쓸 때 각 용어는 쉽게 설명하고, 전문용어는 별지를 만들어서 설명했을 것이다. 그게 일반적인 매뉴얼사회 일본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재민들이 받은 서류는 전문가,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기껏해야 지역에서 농업, 수산업에 종사하는 노인계층에게 이런 서류를 요구하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보상을 포기했다. 이 허들을 통과한 사람에게도 난관이 생겼다. 피난 과정에서 쓴 비용, 피난 도중에 지출한 모든 것을 영수증으로 증빙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재난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그 과정에서 영수증을 과연 챙길 수 있었을까? 


도쿄전력이 정말 배상을 해주고 싶었으면 이미 만들어진 ‘긴급재해에 관한 매뉴얼’을 적용했으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다 배상해주면 기업경영에 악 영향이 오니 경영자가 책임을 져야한다. 그래서 권력을 쥔 경영자는 ‘보상을 안 해줘도 되는 새로운 보상 매뉴얼’을 만들었고 관료와 정치가가 이를 묵인하면서 최악의 상황을 만든 것이다.

피해자를 돕기 위한 매뉴얼이 아니라
 권력층을 돕기 위해 매뉴얼을 조작한 것이다. 
 이런 현상이 점점 늘어나면서 시스템이 무너지는 것이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은 일본의 군수기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일본군부는 군수시설 폭격을 막으라는 지시를 내린다. 문제는 일본의 항공기는 미국의 B-29와 같은 고도로 날기는커녕 속도조차 따라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상사의 까라면 까라는 지시를 받은 군인들은 새로운 매뉴얼을 만든다.


군사시설을 민가 한 가운데에 만드는 것이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연합군은 폭격할 때 민간인 밀집지역을 최대한 피해서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런 점을 국민을 지켜야 할 군대가 이용한 것이다. 민간인이 많으므로 쉬이 폭격하기도 힘들고, 강제동원한 노동력으로 무기를 만드는데도 편하다. 이런 매뉴얼 지향주의는 더 나은 방법이 입안되었음에도 가미가제 특공대를 고집한 일본군부의 편협함으로 나타났다.


이런 본말전도는 오늘날에도 일어난다. 일본의 유력 철강회사인 고베제강은 신일본제철, JFE스틸에 비하면 작은 회사지만 일본내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전통 있는 기업이다. 그런데 2017년 이 회사가 품질을 조작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것도 무려 1970년부터. 


그들은 고객이 일정품질의 제품을 요구했을 때 제품이 그 품질에 못 미치더라도 조사결과, 규격을 조작하는 이른바 ‘특별채용’ 제도를 만들고 이를 아예 매뉴얼로 만들어 운영했다. 이렇게 원래 적합한 품질의 제품을 만들기 위한 제도가 매출을 위해 수치를 조작하는 제도로 변질되었다. 이렇게 조작으로 보호된 부품들은 일본 자위대, 신칸센, 도요타 자동차, 미국기업인 보잉, GM, 포드는 물론 한국기업인 현대자동차, 대한항공에도 공급되었다. 일본의 민폐가 단지 일본만의 문제임을 나타내는 사례 중 하나다.


국가도 다를 바 없다. 일본의 국민연금 사례는 이를 잘 나타낸다. 일본의 연금제도는 버블경제가 무너지면서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냈다.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약 20년이 지난 2018년이 되어서야 개악이라는 형태로 이뤄졌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관료들이 자신들의 공무원 연금인 ‘후생 연금’은 누락과 적자가 없도록 매뉴얼까지 뜯어고쳐가며 유지해온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시스템, 매뉴얼은 아무데도 없다. 계속 수혜자들이 목소리를 내어 변혁, 혁신을 요구하면서 대중을 위한 제도로 바꿔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은 그것이 실종된 사회에 속한다. 이것이 사회의 온갖 문제가 있어도 좀처럼 목소리가 모이지 않는 이유다. 


2019년 10월 일본 전역은 태풍 하나비스의 피해로 고생하고 있다. 꽤 많은 지역이 단수, 정전으로 인해 정전이 된 상황에서 지자체가 무력화되자 결국 자위대가 직접 물을 공급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위대는 물탱크에 물을 싣고 갔음에도 이를 공급하지 못하고 바닥에 버리고 갔다. 자위대가 직접 물을 공급하는 것이 매뉴얼 위반이라는 것이다. 피해지역 중 하나인 야마키타 마을의 상위 지자체인 카나가와 현은 본인들에게 물 공급을 요청하지 않은 것은 매뉴얼 위반이므로 절대 이를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카나가와 현은 지역 주민들에게 물을 공급할 여력이 없었고, 주민들은 식수난에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이런 부조리를 변혁할 책임은 대체 누구에게 있는가? 일본 사회가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한 결국 시스템은 본인들을 옥죌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불똥이 한국에 튀었다는 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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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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