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단에 넘어간 ‘흑인 공화국 1호’… 조폭 두목이 대통령으로?

 https://www.chosun.com/international/2024/03/26/VG4SWS7UCRH6HCMEEONUFYP4YQ/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는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암살 이후부터 극심한 치안 공백에 시달려 오다가 최근 조직폭력단(조폭)의 폭력 사태가 더욱 심화해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지난 21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통령궁 인근 거리에서 시민들이 총격에 몸을 피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는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암살 이후부터 극심한 치안 공백에 시달려 오다가 최근 조직폭력단(조폭)의 폭력 사태가 더욱 심화해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지난 21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대통령궁 인근 거리에서 시민들이 총격에 몸을 피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중미 카리브해 섬나라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 인근 페티옹빌에서 벌어진 경찰과 조직폭력배(조폭) 간 총격전으로 22일 최소 열 명이 숨졌다고 현지 언론 아이티리브레가 보도했다. 이 지역에서 닷새간 벌어진 총격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30여 명으로 늘어났다. 유엔난민기구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아이티에서는 살인 사건이 4789건 일어났다. 폭력·절도·성폭행 등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강력 범죄를 빼고 순수하게 사람 목숨을 앗은 사건만 집계했는데 전년도보다 120% 증가했다.

조폭들이 국가를 점령하다시피 하고 활개 치는 상황이 진압되지 않을 경우 피해자 수는 올해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010년 1월 3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지진을 겪은 뒤 국제사회에서 ‘온정의 손길’이 답지했던 세계 최빈국 아이티가 재건은커녕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상황이다.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이 집에서 괴한에게 피살된 뒤 3년 가까이 벌어진 정치 혼란에 조폭 두목의 협박으로 총리가 쫓겨나는 상황까지 이르면서 ‘전례를 찾기 힘든 실패한 나라’라는 낙인은 점점 짙어지고 있다.

지난 21일 무장 경찰들이 조폭에게 총을 겨냥하며 대치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21일 무장 경찰들이 조폭에게 총을 겨냥하며 대치하고 있는 모습. /로이터 연합뉴스

중남미·카리브해 국가 협력체인 카리브공동체(CARICOM)는 22일 아이티 정당 관계자들과 과도정부를 이끌 임시 총리 인선과 향후 선거 일정 등을 정하는 협의에 들어갔다. 아이티는 흑인 노예들의 무장투쟁으로 프랑스 식민 세력을 물리치고 1804년 건국한 중남미 최초의 흑인 독립국가로 주변국 독립 투쟁의 본보기가 됐던 나라다. 그랬던 아이티가 이제는 국정을 이웃 국가들에 의탁하는 처지가 됐다. CARICOM 가입국들은 대부분 1960~1980년대 독립한 신생국이다.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는 지난 12일 아리엘 앙리 아이티 총리가 사의를 밝히면서 촉발됐다. 2021년 모이즈 대통령이 피살된 뒤 국가 지도자 역할을 해왔지만 후임자도 없는 상황에 덜컥 물러나겠다고 한 것이다. 그를 몰아낸 이는 아이티 최대 폭력 조직 ‘G9′의 두목 지미 바비큐 셰리지에다.

그래픽=김성규
그래픽=김성규

셰리지에가 이끄는 G9을 비롯해 아이티 조폭들은 단계적으로 국가를 혼란으로 내몰았다. 이달 초 교도소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해 죄수 3000여 명을 탈옥시키며 나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조폭과 군경의 총격전 과정에서 사상자는 속출했다.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조폭들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셰리지에는 6일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앙리(총리)가 물러나지 않으면 대량 학살을 겪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협박했다. 그 뒤 진짜로 총리가 자리에서 물러나 버렸다. 아이티가 ‘조폭 공화국’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셰리지에는 40대 후반의 나이로 원래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이었지만 범죄 연루 혐의로 2018년 12월 해고된 뒤 조폭으로 돌변했다. 이름 가운데 붙은 ‘바비큐’라는 별칭에 대해 자신은 “어머니가 어린 시절 통닭을 구워 가족들을 먹여살린 데서 딴 것”이라고 하지만, 일부 외신은 ‘사람을 산 채로 불지를 정도로 잔혹하다고 해서 생긴 악명’이라고도 보도한다.

국가 기능이 상실되면서 아이티 국민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조폭 난동으로 36만명이 집을 떠나 난민이 됐고, 100만명이 기근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경고(유엔세계식량기구)도 나온다. 미국·프랑스·독일 등 주요 국가들은 앞다퉈 자국민을 철수·대피시키고, 접경국인 도미니카공화국은 국경 수비 강화에 나섰다.

다른 제3세계 국가보다 빨리 독립을 쟁취한 아이티가 세계 최악의 실패 국가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 기로마다 위정자들이 ‘최악의 선택’을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흑인 노예의 독립국’이라는 상징성을 가진 아이티는 건국 초기 중남미 식민지 독립 투쟁을 지원하고 독립투사들의 도피처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유럽과 미국에 의해 고립됐고, 서구에 적개심을 갖게 된 아이티 지도자들은 헌법에 외국인의 토지 소유 및 투자 금지 조항을 삽입하는 등 폐쇄적 정책으로 맞섰다.

포르토프랭스의 조폭 연합인 G9의 수장이자 전직 고위 경찰관 지미 바비큐 셰리지에. /로이터 뉴스1
포르토프랭스의 조폭 연합인 G9의 수장이자 전직 고위 경찰관 지미 바비큐 셰리지에. /로이터 뉴스1

후임자들도 민생보다 권력 유지에 혈안이 됐다. 폭정으로 악명 높던 프랑수아 뒤발리에(1957~1971년 집권)와 장클로드 뒤발리에(1971~1986년 집권) 부자(父子)의 철권통치 종식 뒤에도 연이은 쿠데타와 유혈 사태, 다국적군 개입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2010년 1월 대지진 참사를 지켜본 국제사회의 지원이 잇따르면서 재건의 길에 들어서리라는 기대도 나왔지만 큰 진전은 없었다. 2011년 역사상 최초로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민주주의가 싹틀 것이라는 기대감도 커졌다. 그러나 정파 간 권력 다툼 가운데 총리 인준에 실패하고, 선거가 연기되는 등 혼란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대통령 암살 뒤 조폭이 나라를 쥐락펴락할 정도의 상황까지 전락했다.

앞서 아이티가 혼돈에 빠졌을 때는 미국 주도 다국적군(1994년)과 유엔안정화임무단(2004년)이 급파됐다. 하지만 지금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등 두 개의 전쟁에 지친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아프리카 케냐가 지난해 자국 경찰 1000명을 치안 인력으로 파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혼란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아이티는 수많은 국가에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미국 경제학자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는 아이티를 북한·소말리아 등과 함께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된 권력자들의 탐욕으로 인해 실패한 국가’로 꼽는다.

☞아이티

중미 카리브해 히스파니올라섬의 서쪽 3분의 1가량(2만7750㎢)을 차지하는 나라. 나머지는 도미니카공화국이다. 인구 1147만명(지난해 기준)의 95%는 흑인이다. 프랑스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이후 독재와 미국 군정, 군부 쿠데타와 내전 등을 거치며 극심한 빈곤과 치안 부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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