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는 영국에서 보편적 선거제도가 시작된 것은 아직 채 100여년도 안된 1928년의 일이다; 마그나카르타니 명예혁명이니 권리장전이니 하는 것들을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으로 설명하곤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귀족의 권리를 위한 것이었을 뿐, 일반 시민의 권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러다이트 운동 (1811-1817)과 차티스트 운동 (1838~1848)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노동자/시민 민권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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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거법 개정(Reform Acts)은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새로운 유권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영국 하원 의석을 재분배했던 법률의 개정 과정이다.

1832년 개정법을 통해 지나치게 과도한 대표성을 누리던 자치구의 권리를 박탈했으며 1867년 개정법과 1884년 개정법을 통해 유권자의 범주를 넓혔다. 1918년 개정법은 21세 이상 모든 남성과 30세 이상 모든 여성의 투표권을 인정했고 1928년 개정법을 통해 21세 이상 모든 국민의 투표권을 인정하면서 비로소 보통선거가 확립되었다. 1969년 개정법이 통과되면서 투표 가능 연령은 18세로 낮아졌다.

국제적으로 영국 의회 웨스트민스터 체제 민주주의 확산에 기여하는 선봉자 역할을 했으며 의회 제도의 어머니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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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까지 영국의 산업은 숙련공들이 공장에 모여서 협업을 통해서 규격화된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제 수공업이었다. 그런데 증기기관이 지속적으로 개량되어 기계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되자 수공업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수공업과는 다르게 비싼 돈 들여서 숙련직을 고용하지 않고 소수의 비숙련공만 고용해도 충분히 돌릴 수 있는 게 기계였고 그러면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 때문에 저임금에 손쉽게 부려먹을 수 있는 여성과 미성년자 고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심지어 5~6살짜리 어린이들도 일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였다. 반대로 숙련공의 가치가 급속하게 낮아지면서 일부 장인을 제외한 나머지 수공업자들은 대거 공장 문을 닫고 노동자로 전락하며 몰락해 버렸고 보호 역할을 해 줄 길드도 시대의 변화에 뒤쳐져 약화되어 가면서 결국 사라졌다. 상인과 숙련공이 주도하던 공장제 수공업은 몰락하고 소수의 자본가가 대규모의 노동자를 고용해서 제품을 대량생산하는 기계제공업의 시대가 도래했다.

더불어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은 매년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고 인클로저 운동으로 많은 농민들이 도시로 나가 일하게 되었는데 이러다보니 자연스레 잉여노동력이 넘쳐나게 되었다. 자본가들은 생존의 위기에 처한 이들 도시빈민들의 절박함을 이용해서 쥐꼬리만한 임금에 하루 12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을 시켰다. 이 결과 자본가들은 엄청난 재산을 모아서 부르주아 귀족으로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데 반해 노동자들은 하루 15-16시간씩 일해도 푼돈밖에 벌지 못 했고 다쳐도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나기 일쑤였으며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실업자의 수도 나폴레옹 전쟁기의 불황을 타고 급속히 늘어났다.

더군다나 당시 영국은 매년 일정액 이상의 세금을 내는 부유층 남성에게만 투표권을 주는 사실상 귀족민주정에 가까운 체제였다.[2] 따라서 투표권이 없는 노동자, 소작농, 도시빈민 계층의 이해관계는 완전히 무시되고 있었으며 영국 정부와 의회는 이런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해선 무관심했고 철저하게 자본가들의 이해만 대변하였다. 영국 의회는 자본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1799년 '단결금지법'을 제정해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집단교섭, 파업 등 일체의 집단행동[3]을 금지해 놓았다. 사회보장제도 또한 전무했으며 빈민구제는 일부 종교단체의 소규모 자선활동이 전부였다. 당시는 야경국가론의 시대였다.[4]

반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생산성은 급격하게 올랐지만 부의 재분배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빈부격차는 급속도로 벌어졌다. 투표권도 없고 합법적인 집단행동도 금지된 상황속에서 이들의 불만은 결국 비합법적인 폭력으로 터져나왔다. "기계로 인해 계속 고통을 받을 바에야 차라리 부숴버리는 게 낫다."는 주장이 비정규직 섬유 노동자들 사이에서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공장이 가동되지 않는 밤이 되면 몰래 망치로 기계를 고장내거나 공장을 불태웠고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으로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불황에 시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러다이트 운동은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게 되었고 시인 바이런 같은 지식인들조차 노동자들의 요구가 정당하다면서 지지를 표했으며 자발적인 후원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은 실질적인 피해와 함께 러다이트 운동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기계로 인한 생산성 향상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당시 스펜서 퍼시벌 총리 내각에서 군대를 풀어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주동자들을 모두 처형하는 등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러다이트 운동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불안감과 불만은 수면 아래로 내려간 것일 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결국 노동자들은 이 운동을 통해 부분적이나마 노조 설립이 허용되었고 단체교섭을 인정받는 등 영국 정치권과 자본가들의 양보를 이끌어냈다.

러다이트 운동은 산업 혁명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리잡아가던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요구하면서 일어난 최초의 노동운동이었지만 동시에 산업화와 기계화라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을 거부하는 근시안적 한계를 드러낸 사례다.

러다이트 운동의 실패 이후 노동자들은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세기 말 이 차티스트 운동으로 결집한 노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맞물려서 정치세력이 되어 영국 노동당이 출현했다.

 
한편 러다이트 운동의 원인 중 하나였던 빈부격차 실업 문제는 전체적인 생산성의 향상 보통선거 제도의 도입에 따른 노동권 보장과 사회보장제도의 확대가 맞물리면서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허나 전면적인 복지제도 도입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려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복지제도가 어느 정도 도입되었지만 복지국가 수준은 아니었고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보통 선거에 의한 대중 민주주의와 산업시장에서의 효율성, 노동자의 권리확대를 절충하면서 발전해 기존의 소극적 야경국가의 정책에서 벗어나는 데는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가 발간될 때까지 오랜 기간의 투쟁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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