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마니아' 제자가 사학과 못 가는 현실... 유학 권유했습니다 by 서부원

 

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는 미개한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기고문.


영국처럼 한 분야만 특출나게 잘해도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어야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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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 전날 자습 시간, 다그치며 수학 공부하랬더니 채 10분도 못 버틴 준형(가명)이의 책상 위엔 역사책이 펼쳐져 있다. 그것도 교과서가 아닌, 제목조차 낯선 두툼한 역사 교양서다. '수포자(수학 포기자)'인 그에게 역사책을 읽는 건 공부이기보다는 취미이자 휴식이다.

하지만 수학 수업은 그에게 어쩔 수 없이 '멍 때리는' 시간이다. 귀 쫑긋 세워 봐야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고, 그렇다고 책상에 엎드려 잘 수도 없다며 하소연한다. 차마 열강하시는 선생님께 누 끼칠 순 없지 않으냐고 반문할 만큼 나름 예의 바른 친구다.

수학 수업보다 시험 때가 더 좋단다. 선생님 눈치 보지 않고 '당당히' 엎드려 잠잘 수 있는 시간이어서다. 시작종이 울린 뒤 3분이면 족하다. 반, 번호, 이름을 적고, 문항 수를 확인한 뒤 번호 하나를 골라 한 줄로 그으면 그의 시험은 끝난다. 물론, 서술형은 비워둔 채로다.

지금 인문계고등학교에서 널리고 널린 게 그와 같은 '수포자'다. 수학 수업 중인 교실을 들여다보면, 그 수가 확연히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수능을 코앞에 둔 고3의 경우엔 둘 중 한 명이, 갓 입학한 고1조차 세 명 중 한 명이 '수포자'라는 이야기가 교사들 사이에 공공연하다.

교육 당국은 학교에 기초학력 부진 학생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종용하지만, 눈에 띄는 효과는 없다. 본디 기초학력이란 성취 기준에 도달하는 걸 의미하지만,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에겐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성취 기준이 아니라 내신 등급이다.

등급을 산출해 한 줄 세우는 상대평가 방식에서 기초학력 보장 프로그램은 되레 하위권 아이들을 낙인찍는 부작용만 양산한다. 어차피 태반이 '찍고 자는데', 그들 사이에 순위를 매겨 부진아를 가려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대놓고 '운이 없어' 부진아가 됐다고 투덜댄다.

선다형 문항의 정답을 배분한 교사가 부진아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시험이 다섯 개 중 정답이 더 많은 번호로 찍은 아이가 '승자'가 되는 게임이라는 거다. 찍어서 점수가 더 높게 나온다면, 굳이 어렵사리 공부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반문할 지경이 됐다.

"선생님.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수학 공부에 힘을 쏟느니, 차라리 그 시간에 역사 공부를 하는 것이 제 개인에게도, 또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요?"

"당장 대학엘 갈 수 없으니 문제"라고 눙쳤지만, 하마터면 '네 말이 옳다'며 맞장구를 칠 뻔했다. 역사 공부를 놀이처럼 여기는 그의 머릿속에 당최 이해하지 못하는 수학 공식을 욱여넣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다. 대입의 당락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과목이지만, 적어도 그에겐 가성비 제로의 허망한 고역일 뿐이다.

'수학'이라는 굴레

 

대입을 핑곗거리 삼아 그의 질문을 무찔러버리긴 했어도 뒤통수가 따가웠다. 역사를 전공하는 데 수학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활용되는지 묻는 그에게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질 못했다. 사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나중에 박사 학위까지 따겠다고 호기롭게 말하는 그에게, 지금 대입에서 필요로 하는 수학 공부는 딱히 쓸모가 없다.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26년째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내가 살아있는 증거다. 그때도 수학은 국어, 영어와 더불어 '도구 과목'이라 불리며 모든 수험생을 옥죄었다. 문, 이과 구분이 확연하던 당시, 특히 이과생들에게 수학은 자신의 진로를 결정짓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마냥 설렐 만큼 역사 공부가 좋았지만, 역사책을 읽을 순 없었다. 사학과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수학이라는 고산준령을 반드시 넘어야 했기에 밤낮으로 수학 공부에만 매달렸다. 매일 수학 문제집을 베고 잠들 만큼 무진 애를 썼지만, 결과는 신통찮았고 의욕은 시나브로 꺾여갔다. 학창 시절 "천국은 어떤 곳일까?" 묻는 친구에게 "수학이 없는 세상!"이라고 답했던 기억도 난다.

천신만고 끝에 원하는 대학의 사학과에 진학했다. 수학에 발목이 잡히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아무튼 운이 좋았다. 최종 합격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이것이었다. 수험생활 내내 날 괴롭혔던 수학책과 문제집을 모두 갈기갈기 찢은 것! 애꿎은 책에다 분풀이한 셈이다.

대학 진학과 함께 수학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수험 부담을 털어낸 정도가 아니라 수학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대입을 준비하며 맹목적으로 외워야 했던 숱한 수학 공식들을 우연히라도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아들 녀석이 중학교 다닐 적 수학 교과서를 들고 와 이해가 안 된다고 묻기에 아빠로서 으스대며 설명해 준 게 인생에서 수학 공부를 써먹은 전부다. 솔직히 그때까지도 곱셈 공식과 근의 공식, 원주율 따위가 기억나는 게 놀라웠다. 그만큼 수학의 '트라우마'가 깊다는 뜻일 테다.

나 역시 거의 '수포자'에 가까웠지만,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차라리 수학 공부할 시간에 고전을 탐독하거나 한자를 익혔다면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입에서 고전이나 한문은 굳이 선택해 배울 필요가 없는 '기타 과목'이다.

뒤늦게 한자를 공부하며 부러 계산해 본 적도 있다. 수학 수업이 일주일에 4시간이니, 한 학기 17주를 곱하면 68시간이다. 1년으로 환산하면 136시간이고, 고등학교 시절 3년이면 무려 408시간에 이른다. 이 시간이면 한자 능력 검정시험 통과나 천자문 정도 떼는 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준형이에게 내 경험을 그대로 들려줄 순 없다. 전공과 상관없이 수학이 대입의 당락을 좌지우지하는 건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 현실이어서다. 2년 전 전 문·이과가 통합된 뒤로는 수학은 대입에서 여느 교과와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 됐다.

제자에게 외국 유학 권해... 무력감을 느꼈다
 

지난 6월 2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왼쪽)이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한 뒤 오승걸 책임교육정책실장이 수능에 출제된 '킬러문항'(초고난도문항) 사례를 공개하고 있다.
 지난 6월 26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왼쪽)이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한 뒤 오승걸 책임교육정책실장이 수능에 출제된 '킬러문항'(초고난도문항) 사례를 공개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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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심에 덧붙이자면, 학령인구의 격감으로 고등학교 졸업생보다 대학 정원이 더 많은 현실에서 '수포자'도 대학에 얼마든지 갈 순 있다. 다만, 준형이처럼 논문이나 '벽돌책'도 너끈히 읽어내는 역사 마니아가 정작 사학과에 진학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그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엔 사학과가 없고, 사학과가 개설된 대학엔 그의 성적으론 어림도 없다.

이과 학생들의 '문과 침공'을 통해 여실히 드러났듯 전공보다 대학의 '간판'을 중시하는 학벌 구조와 오로지 수능 점수와 내신 등급만이 공정하다고 믿는 세태 속에서 준형이를 구제할 방법은 없다. 준형이와 같은 아이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도입된 학생부종합전형도 불신의 늪에 빠져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구관이 명관'이라며 수능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여론마저 비등하고 있다.

내후년 고교학점제의 전면 시행을 앞두고, 정부는 우격다짐으로 '동그란 네모'를 그릴 모양이다. 알다시피, 고교학점제와 수능 위주의 대입 전형은 병립할 수 없는 제도다. 어느새 보통명사가 된 '수포자'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정부에 대안을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일지도 모른다.

"외국 유학을 떠나라. 너의 꿈과 미래를 위해선 그게 더 나은 선택일 수 있다."

답답한 마음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해법을 제시했더니, 준형이는 우리나라에 대학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비싼 돈 들여 유학을 떠날 필요가 있느냐며 되물었다. 전공에 의지가 있다면, 어느 대학에서나 공부할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면 되지 않느냐는 거다. '학문'은 사라지고 '간판'만 남은 우리 대학의 현실을 모를 리 없건만, 그의 천진난만한 얼굴은 차라리 죽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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