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에 순수한 정의란 거의 없다; 영국이 1807년에 노예무역을 폐지한 '사악'한 이유와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한 이유 모두 '규제'를 활용해서 경쟁자를 찍어내리기 위함이었다; 대륙봉쇄령으로 자충수를 두고 정치적, 외교적으로 몰락한 나폴레옹

 https://blog.naver.com/strategicvision/221198124442



영국이 1807년 노예무역 폐지한 이유
(1) 나폴레옹보다 사상적으로 우위에 서기 위해
(2) 자유주의 기치 내걸고 전쟁을 하는 나폴레옹이 식민지 개척 못하게 하고 유럽전쟁에 몰두하게 하기 위함 (베어링 가문의 목적)


//


루즈벨트 와그너 노동관계법
(1) 히틀러 의식
(2) 이후 폐지


//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이 실패한 이유: 해군력의 미비와 밀수 성행


문제는 나폴레옹의 관점에서 본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있었다는 것. 섬나라인 영국을 유지하는 것은 교역이고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면 경제파탄이 일어나리라는 것까진 분명 정답이었으나, 자국의 해군력이 영국 반토막 이하라는 점을 간과해버린 것이었다.

사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집권기 이전부터 영국에게 해상 봉쇄를 당하고 있었다.
영국은 프랑스 혁명이 본국으로 전파돼 영국 왕실이 무너지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신경질적으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국적선과 항구를 혁명공화정 시절부터 혁명제정에 이르기까지 내내 봉쇄하고 있었다. 중간에 간헐적으로 휴전협정을 통해 약간의 외교적 이익을 보고 봉쇄를 풀 때도 있었지만 해상봉쇄라는게 항만에서 약간 떨어진 공해 상에 소형 분함대들을 순찰시키는 행위라 함대의 정비와 인원교체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봉쇄하는 영국 입장에서도 일정 기간의 휴식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휴식기를 지나고 나서는 언제라도 해상봉쇄를 재개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에 프랑스 상선 입장에서는 몇 달에 걸친 항해기간동안 언제 봉쇄가 재개되어 나포될지 모른다는 위협을 늘 겪고 있는 셈이 된다. 배라는 것의 건조기간, 선원의 육성 시간을 생각하면 한두번의 무사항해로 그 손실을 감당할 수 없으니 사실상 영구적인 해상봉쇄를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뛰어나고 가격대비 품질이 우수한 영국 제품의 공급이 차단되자 물자 부족현상이 발생하며 밀수가 성행하였다.


두 번째 통로는 밀수. 섬유 등 영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워낙 뛰어나 프랑스조차 육군의 군복을 제작하며 영국산 밀수 원단을 사용할 정도였다.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L42XPZTRG


...


유럽의 사설 금융업자에 머물던 유대인들이 대거 전면에 등장한 것도 대륙봉쇄령의 영향이 크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세계를 호령했던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과 대륙간 밀수로 거대한 부를 쌓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을 일으켜 세운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대륙봉쇄령으로 수출이 안됐거나 공장에 쌓인 물품을 헐값으로 사들여 밀수선을 통해 대륙에 팔아 떼돈을 벌었다.

밀수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간파한 나폴레옹은 물론 친인척들은 밀수선단을 운영해 막대한 부를 쌓아 프랑스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국민적 신망을 받던 리더가 측근 비리와 자신의 비도덕적 행위로 위기를 자초하는 게 남의 일 같지 않다.


출처 : https://www.sedaily.com/NewsView/1L42XPZTRG

...


또한 봉쇄령 후에 유럽 여러 정부의 묵인하에 밀수가 횡행했던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프랑스도 재수출과 내수를 겨냥하고 영국으로 와인과 브랜디를 수출했다. 한 마디로 대륙 봉쇄령은 유명무실한 칙령이었다. 실제로 1807년에서 1816년 사이 영국으로 수출된 프랑스 와인은 한 해 4,478배럴에 달했다고 한다. 이 양은 프랑스 와인 수출 총량의 무려 8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외에도, 상시적으로 밀수항로를 통해 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

 

이 밀수는 좀 복잡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영국 정부도 프랑스 정부도 정부 차원에서 밀수를 장려했습니다. 당시는 요즘같은 경제학 이론이 나오기 전이고, 원시적인(?) 수준의 경제학 이론에서는 자국의 물건을 상대방에게 팔아 정금을 빼오는 것이 제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봉쇄를 한다고 하지만 그 봉쇄는 '자신의 금을 빼돌리는 상대방의 수출품'에 대한 것이었고, 반대로 '상대방의 금을 빼내올 수 있는' 자국의 수출품을 팔아넘기는 것은 적극 장려해야 했습니다.


...
 

이래 저래..... 영국제 상품들의 밀수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로군요. 물론 나폴레옹도 유럽 대륙의 산물을 영국에 팔아넘겨 중요한 '금'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고 하지요.


 

1812년 영국 의회에서는 이러한 발언도 나왔다지요. '프랑스 육군 병사들의 군복은 요크셔 산이며, 술트 원수를 포함해서 그의 군단 병사들의 군복 장식품은 버밍엄 산이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대륙봉쇄망을 뚫고 밀수가 횡행했다는 사실도 말해 줍니다마는 그만큼 영국 면직물의 경쟁력이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

두번째로 영국이 이루고 있던 해상제국과 식민지들의 단결력보다 나폴레옹과 프랑스가 다른 유럽 국가들을 통제하는 힘이 더 약했다는 것이다. 서로 고통을 받게되면 영국 식민제국과 대륙의 유럽국들 모두 흔들리겠지만 영국 식민제국은 바이런 등 화평파가 세력을 불리기도 했지만 반역까지 이르진 않았고, 주류세력은 나폴레옹에 대한 증오심으로 이를 갈며 버티고 있었다. 반면 나폴레옹에 의한 강압으로 경제적 고통을 받던 유럽국가들은 프랑스 혁명제국의 통제력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이는 프랑스의 완전한 외교적 고립을 초래하였다.


대륙봉쇄령의 문제는 이걸 프랑스만 당하기는 억울하니 전유럽이 스스로 항구를 닫으라고 강요해버리면서 전유럽이 프랑스 육군에 의한 해상봉쇄를 당하게 되어버린 셈이 되는 것이다. 또한 프랑스 스스로도 엄청난 손실을 받으면서 제정 지지율도 급락하게 되어 나폴레옹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어차피 해상봉쇄를 당했는데 왜 또 궁지에 몰렸냐하면 프랑스 상인들이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제국가를 통한 우회교역으로 영국과 그 식민지들과 교역함으로서 약간의 수수료를 지불하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교역은 활발하게 진행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륙 전체를 봉쇄한다는 정신나간 정책으로 이들 국가를 통한 무역로까지 막히면서 완전히 물류가 마비되었다. 심지어 대륙봉쇄령 이전에는 프랑스 항만으로 들어오는 중립국 함선은 영국이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건드리지 않았는데 대륙봉쇄령에 분노한 영국이 프랑스 항만에 대한 전면적인 폐쇄를 선언해 그나마 중립국 함선에 의한 프랑스 항구의 가동도 정지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수수료 때문에 프랑스에 호의적이었던 네덜란드등 국가들이 일거에 반프랑스 세력으로 돌변하는 효과까지, 나폴레옹의 돌이킬 수 없는 자충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해상봉쇄의 결과에 따른 수많은 실업과 물자부족에 대한 원성이 프랑스로 치닫게 된다. 그 결과 수많은 전투로 친족과 프랑스 장군을 타국의 왕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프랑스로 돌려놓았던 유럽외교지형에서 또다시 왕따가 되어버렸고 경제적 고통은 대륙봉쇄령이 해제되지 않는 이상 영원한 것이기에 이들 친족과 장군들이 그들의 손으로 프랑스를 배신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

 

푸틴과 빈살만의 석유 치킨게임

미국의 중저가 셰일가스 업체들 찍어누르기 위해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