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히] 80년 8월 17일 "김대중, 조총련 돈 안 받았다" (feat. 문명자)

 
제 1장 중앙정보부 주일공사 최세현 증언 "김대중은 조총련과 관계 없다"

80년 5월 17일 신군부에 연행된 김대중 씨는 군사재판에 회부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재판을 하나마나 그에게 사형이 선고될 것은 삼청동자도 짐작하는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광주학살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권력을 위해서라면 앞뒤 가리지 않는 전두환 신군부 일당이 김대중 씨를 속전속결로 처형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대중을 살리기 위해서는 내외의 양심세력에 호소해 국제여론을 불러일으켜야 했다. 그래야만 미국정부가 움직일 것이었다.

김대중 씨에게 씌워진 혐의는 반국가단체 수괴로서 내란을 음모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반국가 단체란 73년 일본에서 결성된 한민통(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을 가리키는 것이고, 내란 음모란 광주항쟁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한민통은 민단의 개혁파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반유신운동 단체였다. 조총련과는 전혀 관계없었다. 그러나 전두환 일당은 전향한 조총련 관계자를 증인으로 내세워 조총련과 한민통이 밀접한 관계인 것으로 몰아가려고 했다. 김대중이 사형을 면하려면 우선 이 부분을 사실대로 밝힐 수 있는 증인이 와 있었다. 바로 김재규의 동서인 최세현이었다. 그는 10.26 당시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였다. 즉 중앙정보부 일본 총책임자였던 것이다. 그는 10.26 이후 전두환 일당의 보복을 피해 미국 뉴욕으로 피신해 왔다.

나는 [아사히 신문] 워싱턴 지국장 다나카 상과 이 문제를 의논했다. 다나카 상은 최세현이 입을 열 경우 1,2,3면에 걸쳐 대대적으로 보도하겠다고 했다.
나는 시노트 신부와 함께 최세현을 만나러 뉴욕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고 만나 주지 않았다.

80년 4월 나는 등소평 중국 부수상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런데 집을 비운 사이 최세현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고 했다. 귀국 후 최세현을 만났다. 그가 나를 찾은 이유는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전두환 일당을 피해 급히 미국으로 온 처지이니 그는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다. 한국 정부는 그의 외교관 신분을 박탈했고 미국 정부로부터는 추방명령이 떨어졌다. 워싱턴에 있다가 뉴욕으로 간 변호사 존 김에게 그 문제를 상의했는데 존 김이 나에게 가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나는 말했다.

"내가 최 공사를 도울테니 당신은 김대중 씨를 도우시오. 최공사의 증언이 있어야 김대중 씨는 살아날 수 있습니다."

최세현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나는 국무성의 패트리셔 데리안 인권담당 차관보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호소했다. 마침내 최세현 일가에 대한 강제 송환 처분이 중지 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일본 [아사히]신문 워싱턴 지국장과 함께 최세현을 앉혀 놓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는 원래 심리학을 전공한 학자로 고려대 교수로 가려다가 동서인 김재규의 간곡한 청으로 주일 대사관 공사로 나가게 되었다고 했다. 김재규는 다음과 같이 부탁했다고 한다.
"형님, 도쿄에 가셔서 김대중 씨와 조총련의 관계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셔서 사실대로 보고해 주십시오. 우리 요원들을 시켰더니 모두들 한 건 하려는 생각이 앞서서 어떤 보고에서는 김대중 씨가 조총련 돈을 받았다고 하고, 또 어떤 보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하니 내가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부임 후 김재규의 명령대로 김대중과 조총련, 한민통과 조총련의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한민통은 조총련과 전혀 관계가 없고 김대중도 조총련의 돈을 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최세현 인터뷰는 80년 8월 15일을 기해 [아사히]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는 최세현 인터뷰 기사를 영문으로 써서 [아사히]에 넘겼다. 그리고 일본어 번역판까지 모두 확인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8.15를 기다리고 있는데 8월 10일쯤 뉴욕에서 최세현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문 기자님,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워싱턴으로 가겠습니다."
그가 워싱턴에 나타나 하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기사를 8월 15일에 내보내는 것을 중지해 주셔야 되겠습니다. 제가 동생 최재현이 후쿠오카 한국 영사관에 교육감으로 있는게 기사 나간다는 얘기를 했더니 펄펄 뛰고 있습니다."

최재현은 "형님 없어진 것만 가지고도 지금 죽을 판인데 김대중 관계 기사를 터뜨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 가족을 다 죽이려 합니까. 우리를 모두 미국으로 데려가든지 아니면 기사 터뜨리는 것을 중단해 주세요."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아니, 최공사, 그 얘기를 왜 이제야 합니까. 진작 얘기했으면 무슨 대책을 세웠을 것 아닙니까. 지금 그런 얘기를 하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앞이 캄캄했다. 최재현 일가 다섯 명을 어떻게 닷새 만에 미국으로 데려온다는 말인가. 결국 기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김대중의 운명은 어찌되는가.
집에 돌아와서 남편 최동현에게 상황을 얘기했다. 나는 너무나 낙망해서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만 포기할래요."
남편 최동현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여보, 그러면 김대중은 죽어. 당신이 가서 그들을 데려오시오."
"뭐라고요? 내가 무슨 수로 전두환 일당들을 피해 그 사람들 다섯명을 미국까지 데려옵니까? 할 수 있으면 당신이 가 보세요."

최동현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보 나는 못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어. 이건 김대중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길이오. 포기하지 마시오."

순전히 남편의 부추김 때문에 나는 그 무모한 일에 나섰다. 남편의 말대로 마지막으로 한 번 용기를 낸 것이었다. 우선 국무성 대변인 하딩 카터의 알렉산드리아 집으로 찾아갔다. 국무성 인권담당 차관보 패트리셔 데리안은 그의 아내다. 나는 두 사람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최재현 일가를 미국에 데려와야만 김대중이 살 수 있다고 호소했다. 그들은 공감을 표하고 협조해 주겠다고 했다. 패트리셔 데리안에게 물었다.

"패트리셔, 내가 이 다섯 명의 미국 비자를 어디서 어떻게 받을 수 있겠니? 너는 할 수 있잖아. 영사과의 누구를 찾아가야 하니?"

패트리셔가 말했다.
-"쥬리, 용기를 내. 너는 잘 할 수 있을거야. 우선 그들을 런던으로 오게 해. 그리고 런던의 미국 대사관으로 가서 비자과장을 찾아가도록 해."

나는 바로 일본에 있는 한민통 배동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사람들 런던으로 보내세요. 입은 그대로 몸만 빠져 나오라고 하세요. 짐은 절대 안 됩니다."

짐을 챙겨들고 출발할 경우 중앙정보부가 눈치 챌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런던으로 날아갔다. 가서 보니 런던에는 공항이 두 군데 있었다. 도쿄에서 오는 비행기가 착륙하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입국장에서 최재현 일가를 기다리는데 동양사람들만 보면 전두환의 보안사 요원들인가 해서 가슴이 철렁했다. 드디어 최세현과 인상이 비슷한 최재현이 나타났는데 이들 다섯명의 가족은 이민보따리처럼 산더미 같은 짐을 카트에 실은 채였다. 아들은 손에 소니 카세트까지 들고 있었다. 기가 막혔지만 뭐라 하기도 힘들었다. 이들을 재촉해서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 가까운 호텔에 들어갔다.

호텔방에서 의자란 의자는 모두 문 앞에 쌓아 놓았다. 바람에 문이 덜컹거리기만 해도 누가 들이닥치는가 해서 신경이 곤두섰다. 상대는 이미 손에 피를 묻힌 군인들이었다. 그들이 한밤중에 우리를 기습해 온다 한들 낯선 런던 땅에서 대체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인가. 뜬눈으로 밤을 세우다시피하고 다음날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비자과에 가니 온갖 인종이 창구에 줄을 서 있는데 도떼기시장이 따로 없었다. 비자과장을 찾았으나 자리에 없었다. 이러다가 눈에 띄겠다 싶어 다섯명을 끌고 나와 캐나다 대사관으로 갔다. 캐나다를 경유해 미국 비자를 받는 방법도 있었던 것이다.

캐나다 대사관에는 어두컴컴한 실내에 다섯 사람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관용비자 창구로 가서 최재현의 외교관 여권을 내밀었다. 여권을 받아든 영사는 창구문을 닫더니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게 아니가. 한국 대사관에 확인 전화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창구문을 마구 두드렸다.

"급한 일이 생겨서 일정이 변경되었습니다. 우리 가족의 비자 신청서를 도로 주시겠습니까?"
허둥지둥 캐나다 대사관을 나와 다시 미국 대사관으로 갔다. 잡히더라도 미국 대사관에서 잡히자는 심정이었다. 최재현과 나는 거기서 부부로 둔갑했다. 남편의 성도 최씨였으므로 나의 여권은 미시즈 최로 되어 있었다. 창구에 줄 서있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아는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훗카이도오 미국 영사관에서 부영사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지옥에서 부처님이라도 만난 듯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했다.

"곤니찌와?"
-"아니 쥬리 아니요.. 반갑소."

"우리 가족이 지금 팬암으로 워싱턴에 가야 하는데 두 시간 반밖에 안 남았습니다. 비자 30분 안에 해줄 수 없어요?"
-"노 프로블럼(문제없다)"

이리하여 최재현 일가의 미국행 비자를 속성으로 겨우 손에 넣었다. 호텔에 들러 짐을 싣고 팬암이 뜨는 히드로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가 터졌다. 최재현 일가는 런던까지의 비행기표만 끊어 가지고 왔던 것이다.

"아니. 워싱턴까지 끊지 왜 런던까지만 끊었어요?"
-"한민통 사람이 런던까지만 가면 문여사님이 알아서 준비할 것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다섯 사람의 워싱턴행 비행기표를 끊으려면 3천 5백 불이 필요했다. 그러나 나의 신용카드로 3천5백 불이나 결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최재현 일가에게도 그만한 현금이 없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 때 팬암 항공 카운터에 아는 얼굴이 눈에 띄었다. 밥이었다. 워싱턴에 근무했는데 런던으로 전근 와 있었던 것이다.

"헤이 밥!"
-"헤이 쥬리"


"사람의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벌어져서 미국 국내여행 하느라 그랬다. 기사는 예정대로 나가도 된다.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최재현 일가 구출 소동으로 기사는 예정보다 이틀 늦게 공개되었다.

80년 8월 17일 [아사히]신문은 전 주일 한국대사관 공사 최세현 인터뷰 기사를 일면 톱으로 실었다. 제목은 '전 한국중앙정보부 일본 책임자 최세현 공사 증언, 김대중 조총련 돈 받은 적 없다' 였다.

[ 차례로가기 ]

[아사히] 80년 8월 17일 "김대중, 조총련 돈 안 받았다"

이 기사로 군사재판에서 김대중을 '반국가단체 수괴'로 몰아가려던 전두환 일당의 음모는 명분을 잃었다. 더군다나 한일 양국은 73년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정치결탁을 통해 해결하면서 납치사건 이전의 김대중의 일본 행적을 문제 삼지 않기로 약속했었다. 그것을 문제 삼기 시작하면 김대중 납치사건을 묻어 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일당은 김대중을 사형시키기 위해 박정권과 일본 정부 간의 검은 약속까지 깨면서 73년 결성된 한민통을 조총련의 자금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로 몰고 갔다. 더구나 일본의 최대 신문 중 하나인 [아사히]가 최세현의 증언을 대서특필하자 일본 여론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은 다시 여론의 초점이 되었다. 일본 정부로서는 전두환 일당에게 항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80년 9월 17일 군법회의는 마침내 김대중 씨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일본에서는 김대중 피고 구출을 주장하는 시위와 집회, 기도회, 시가 촛불 행진이 있었고 일본 총평은 한국제품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스즈키 수상은 이사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면서, "김 씨를 사형하면 한국에 대한 일본 국회 정세나 매스컴의 논조등이 거세지게 되고 그런 분위기에서는 한국에 협력할 수 없게 된다"라며 선처를 강력히 요구했다.

81년 1월 23일 대법원에서 김대중 씨에 대한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날 국무회의에서 그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김대중이 드디어 살아난 것이다. 한국은 물론 미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수많은 이들이 벌인 헌신적인 구명 투쟁의 성과라 할 것이다.

최재현 일가는 그 후 미국에 정착했다. 나는 보증인이 되어 사회 보장카드를 받게 하고 일자리를 주선하는 등 그들의 정착을 도왔다. 그러나 세상이란 넓고도 좁은 것인가. 최세현의 딸이 이순자의 삼촌인 이규광의 아들과 결혼하는 일이 생겼다. 그들은 10.26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귀고 있었다고 한다. 젊은이들의 결혼에 대해 무어라 말할 입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최 씨 일가가 전두환과 사돈이 된 셈이니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그들 일가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 후로는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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