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5.16 쿠데타의 배후는 국제투기자본(존 위컴, 제임스 밴 플리트, 미 육군 방첩대, 미 중앙정보국); 박정희가 친일파 출신 하버드대 청강생 정일권을 미국통이라 해서 주미대사에 앉힌 이유; 세계은행 이사였던 신병현을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 보좌관 및 한국은행 총재로 앉힌 이유; 송요찬 관련 재미있는 일화 (feat. 문명자)
지금 생각해 보면 5.16 당시 미국인들의 행적에 의문스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주한 미대사관의 대리대사로서 매구르더 유엔군 사령관과 함께 5.16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던 마샬 그린은 그 후 미국으로 돌아와 케네디 행정부의 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를 역임했다. 필자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은 일이 있다.
"왜 미국은 5.16을 진압하지 못했나요?"
-"코리안 전체가 한물갔어요. 모두 기회주의자요. 내가 쿠데타 군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자고 하니까 윤보선 대통령의 답변은 '우리 군끼리 충돌하면 언제 북괴가 쳐들어올지 모른다'며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군사 쿠데타와 같은 국가 위기의 순간에 총리라는 사람이 수녀원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5.16은 장면 정부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지난 95년 위컴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의 측근으로부터 5.16 당일 반도 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깔멜 수녀원으로 이동시킨 사람이 다름 아닌 위컴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는 직책은 부사령관이지만 계통은 정보라인 이었다. 박정희 쿠데타를 뒤에서 봐줄 수 있는 위치였다. 위컴은 당시 반도호텔에 장기 투숙하고 있었는데, 5.16 직후 장면이 반도호텔 뒷문으로 나가서 준비된 지프에 타고 깔멜수녀원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장면으로 하여금 미 8군이 아닌 깔멜수녀원으로 가도록 한 것이 누구의 의사였는지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다.
나는 어쨌든 위컴이 장면을 미 8군으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미국 측의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 사실은 미국 측이 장면을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는 징표로 해석 될 수 있다.
앞서 말한 측근에 따르면, 위컴은 5.16 직후 그 살벌한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으며 서울 시내를 활개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연평도에서 주재하며 목회하던 한 유명한 미국인 신부를 가톨릭 신자인 케네디에게 보내 5.16 군사 쿠데타 세력들을 인정해 주라고 호소하게 한 것도 바로 위컴이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미국인 신부는 여자 문제로 정보기관에 약점이 잡혀 있던 상태였다. 76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한창일 때 프레이저 청문회장 방청석에 그 신부가 나타난 일이 있다. 나와 함께 청문회를 방청하던 시노트 신부(74년 한국에서 목회중 인혁당 사형수 처형에 항의하다 박 정권에 의해 추방된 메리놀 교단의 신부)는 흥분해서 "당장 저 빤질빤질한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다"면서 역시 머리까지 빨개졌었다. 두 사람이 모두 대머리였던 것이다.
그런 위컴의 행적을 미 국무성 사람들이 몰랐을까? 미국이란 나라의 생리상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겉으로는 주한 미 대사관과 미8군 사령관이 쿠데타 반대 성명을 내 합헌 정부를 지지한다는 명분을 확보하는 한편, 미국의 정보기관들은 은밀히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5.16을 둘러싸고 '미국인들이 서로 짜고 쇼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지지만 믿고 자기 진영의 규합을 이루지 못한 장면 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미 행정부가 상당히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미 국무성은 부산 정치파동 이전부터 장면을 지지했다. 4.19 혁명으로 장면이 집권한 이후에도 미국은 오랜 숙원사업인 환율 현실화, 한.일 관계 정상화 과정을 조속히 이루기 위해서 장면 정권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지원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5.16 이후 미 국부성의 한 관리가 "장면 박사가 무력했기 때문에 한국 내에서 쿠데타를 꾸미던 세력이 다섯이나 있었다"고 말한 것을 놓고 볼 때, 미국측은 5.16 쿠데타 직후 장면 정권에게 쿠데타 기도에 맞서 내부를 단합할 수 있는 최후의 기회를 주는 동시에 그렇게 안 될 경우 성공한 군부 인사들과의 협력의 길을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워싱턴에서 5.16 군정 승인 문제, 공석이던 주한 미대사 부임(새무얼 버거), 박정희 장군 방미 등 주요 외교 문제가 거침없이 수행된 것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다.
5.16 이후 이 사건을 미국민들에게 어떻게 홍보하는가 하는 문제는 케네디 행정부의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였다. 미 행정부가 4.19 혁명을 지지했던 기억이 미국민들에게 생생하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장 정권이 약하기 때문에 교체돼야 한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더구나 케네디를 지지해 준 스펠만 대주교 같은 인물은 장면 박사를 강력히 지지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와 같은 사람을 납득 시키는 것도 문제였다. 결국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 내의 사태 진전을 현지 보고 하는 방식으로 미국민들에게 5.16을 알렸다. 국무성 관리들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고, 케네디 자신은 태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63년 11월 케네디 암살 후 그의 죽음을 애도했던 나의 기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다. 당시 케네디의 시신은 장례식장인 국회의사당으로 가기 전까지 백악관 이스트룸에 있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은 시신이 떠나기 전날 밤 시신 앞에서 마지막으로 추도식을 가졌다. 냉정한 기자들도 하나 둘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에 민주주의가 만발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마지막 기자 회견에 한없이 감동하고 있던 나 역시 그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떠난 케네디의 죽음을 한없이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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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이 너무 많아 추방됐다."
3. 한국 중앙정보부는 대공 정보활동 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 중앙정보부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 지향인사들과 친미 인사들의 인권과 자유를 억압하기 위해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에 오랫동안 산 미국인으로 CIA가 이 부패하고 악질적인 야수를 열렬히 지지하는 데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CIA는 남베트남에서 부패한 고 딘 누 비밀경찰과 특별부대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도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다고 봅니다. 나는 미국인으로서 특히 한국에서 CIA의 사업 방향을 돌리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중앙정보부는 예산만 가지고는 자금을 충당할 수 없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자금 출처를 마련하고 있는데 자유당 추종자들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능률적 방식으로 자금을 염출하고 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미국 대사와 전 미8군 사령관 메로이 장군의 협력을 얻어 미군 잉여 자재판매업을 독점하고 있고, 심지어 미군 쓰레기 처분까지 맡고 있습니다. 미군 택시 운영권도 아무런 경쟁 입찰도 없이 따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허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나 버거 대사와 멜로이 장군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는 62년 6월 미국 대사가 현실에 눈을 뜰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한국 중앙정보부는 김종필의 형 김종락을 통해서 새로운 자금 출처를 마련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서 장사를 하려거나 한국에 투자할 일본인들로부터 자금을 짜내는 것입니다. 김종락은 새나라 자동차 공장과 의암 수력발전소 건설 사업에서 자금을 염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한국 증권파동은 주로 한국 중앙정보부 자금 조달을 위해 생긴 사건임은 물론입니다. 이런 파문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보부는 현재도 증권시장을 이용해서 중앙정보부와 간부들의 개인 치부를 위해 계속 자금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4. 귀하는 군사 정권에게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 되었다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 한국에서 내가 추방된 이유에는 의심스러운 측면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추방은 나에게도 고역이었지만 가족에게도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실상 망명객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박정희는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 많다고 여겨 한국에 남아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봅니다.
체포 됐을 때 나는 한미 간의 우호통상항해 조약에 보장된 바대로 공개재판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인 공개재판에서는 저명한 한국인들이 당한 것과 같은 부정재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박 정권은 공개 재판을 하지 않고 나를 추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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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직후 박정희는 민주당 정권이 임명한 주미대사관 공관원들을 모두 해임해 버리고 그 자리를 온통 자신의 수족들로 채웠다. 그가 특히 신경을 썼던 주미대사직에는 당시 하버드 대학 청강생으로 있던 정일권을 미국통이라고 해서 앉혔다.
사실, 정일권과 강문봉은 군부의 권력 암투 속에 56년 1월 발생한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서울지구 병사구 사령관 허태영 대령이 모든 책임을 지고 정일권과 강문봉은 살아났는데, 그것은 미 8군 사령관 밴플리트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일권이 밴플리트에게 한국 처녀들을 계속 상납하는 등 채홍사 노릇을 했던 것이 효과를 본 셈이었다. 박정희는 이 같은 정일권의 대미 인맥을 자신의 방패로 활용하려 했다.
...
5.16 당시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워싱턴에 와 있던 송요찬의 떳떳하지 못한 처신도 기억에 남는다. 그는 육군참모총장 재직 중 4.19가 발발하자 계엄 사령관에 취임했는데, 민주당 정권이 출범한 후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집요한 정군운동에 밀려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루는 송요찬이 저녁 늦게 남편 최동현을 급히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돌아왔는데 별로 기분 좋은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물었다.
"그 양반이 무슨 일로 당신을 불렀어요?"
-"최기자는 장도영이하고 같은 평안도 출신인데 무슨 닿는 선이 없는가 합디다"
"그래서 뭐라 했어요?"
남편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뭐라기는? '그런 선 없어요 하고 딸기만 한 접시 먹고 왔지요."
5.16 후 박정희는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을 명목상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그러니 장도영과 닿는 선을 찾는다는 것은 곧 박정희에게 다가갈 길을 찾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박정희가 일으킨 하극상으로 육군참모총장직에서 밀려나 미국에 와 있는 처지면서도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권력을 쥐자 다시 그 밑으로 들어갈 궁리를 하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송요찬이었다.
"당신이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며?"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보낸 기사가 신문에 나오려면 하루는 더 있어야 하는데 이 친구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단 말인가. 데이비스를 다그쳤더니 그는 "국무성에서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외국 특파원들이 본사에 타전하는 기사들은 모두 국무성에 한 카피씩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스펜서 데이비스를 데리고 국무성의 마샬 그린 차관보 방으로 갔다. 마샬 그린은 5.16 당시 한국 대사 대리직에 있으면서 대통령 윤보선에게 "군을 출동시켜 쿠데타군을 진압하자"고 설득했던 인물이다. 나를 보자 마샬 그린은 "그런 인민재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선수를 치고 나왔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미리 본 기사대로 나는 박정희 전력 기사 때문에 캥거루 코트에 올라갔다. 당신들은 여순 반란 사건에 관한 모든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 기록들을 모두 공개하면 내 기사가 오보인지 아닌지 밝혀질 것이고, 내가 더 이상 캥거루 코트에 올라갈 일도 없을 것이다."
퇴근 후 남편에게 국무성 사건에 대해 얘기했더니 남편은 오히려 되물었다.
- "텔렉스 회사에서 외국 특파원들 기사를 국무성으로 넘기는 걸 아직도 몰랐단 말이오? 당신 특파원 헛했구먼."
"그러면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는 미국 민주주의는 몽땅 거짓말인가요?"
-"이 여성은 미국이란 나라를 너무나 모르고 좌충우돌 하는 게 문제야."
사실 그랬다. 당시 나는 미국이란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후에도 나는 실리든 안 실리든 박정희 관련 기사를 계속 본사로 보냈다. 당시 박정희 의전실에 근무하던 이 아무개가 나중에 미국에 왔는데 그로부터 " 당시 박의장이 '워싱턴 문기자가 또 뭐 또 보내온 것 없나' 하고 줄곧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엄청나고도 어이없는 얘기였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분단문제를 한민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 육군 일개 대령들이 30분 만에 처리했다는 것이었다. 훗날 이와 관련된 국무성 문서가 공개되어 이를 [동아일보]에 송고했던 기억이 난다.
백악관 앞에서 같이 5.16 반대시위를 벌였던 사람들의 그 후 행적을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생각되는 바가 많다. 박정희는 이들을 하나씩 하나씩 회유해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미국에서 세계은행 이사를 지내던 신병현 씨는 그의 후배 김정렴이 박정희의 비서실장이 된 후 본격화한 회유공작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그는 그 뒤 귀국해 청와대 경제담당 특별 보좌관을 거쳐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최경록 장군도 "선배님, 그러실 것 없이 한국에 와서 손잡고 일합시다"라는 박정희의 간청에 점차 흔들리더니 결국 귀국해 런던대사-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최 장군이 민주당 정권에서 육군 참모총장직에 있을 때 박정희가 관련된 영관급 쿠데타 음모가 적발 되었는데 최경록은 그들을 관대하게 처리해 주었다고 한다. 비록 최경록이 5.16을 반대했지만 이 같은 과거의 은혜를 생각해 박정희는 그를 심하게 박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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