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주의적 왕안석의 신법이 폐지된 이유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계와 부패 떄문이라면, 역시나 케인스주의적인 균전제가 당나라 때 폐지된 이유는 인구폭발+생산량의 폭발적 증가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 / 이는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브레튼우즈, 케인즈주의가 붕괴하고 시장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들어선 것과 같은 맥락이다 / 역사는 사건 개별로 보면 다 그 양상이 다르지만 본질에서는 동일한 패턴을 갖고 있다

 

정전제와 균전제의 차이점 및 정전제가 실제로 존재했는지도 말해

중국의 고대 및 중세 토지 제도인 정전제(井田制)와 균전제(均田制)는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어 삶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세수를 확보한다"는 국가 주도적 토지 개혁의 이상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합니다.

하지만 두 제도가 등장한 배경과 구체적인 운영 방식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습니다. 두 제도의 차이점과 정전제의 실존 여부를 나누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1. 정전제 vs 균전제의 핵심 차이점

가장 큰 차이는 정전제는 토지의 '공간적 분할(기하학적 구획)'에 초점을 맞춘 고대 전설적 제도이고, 균전제는 '인구(노동력)의 자격'에 맞춰 토지를 지급한 중세의 실제 법적 제도라는 점입니다.

구분정전제 (井田制)균전제 (均田制)
등장/시행 시기주(周)나라 시기 (맹자의 주장에 의해 정립)북위(485년) 도입 ~ 당(唐)나라 중기까지 실제 시행
형태적 특징토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9등분함사람의 성별, 나이, 신분에 따라 차등 지급
운영 방식외곽의 8칸은 사유지, 중앙 1칸은 **공동 경작(공전)**하여 세금으로 납부영업전(자손 세습 가능)과 구분전(사망 후 국가에 반납)으로 분할 지급
핵심 목적씨족 공동체의 결속과 이상적인 조세 수취전쟁으로 황폐해진 토지 재건, 호족 견제 및 자영농 육성
세법과의 연계조(助)법 (노동력을 조력하여 공전을 경작함)조·용·조(租·庸·調) 제도 (곡물·노동력·직물 징수)

1) 구조적 차이 비교

  • 정전제: 토지 자체를 기하학적으로 구획합니다. 900무(畝)의 땅을 100무씩 9개로 나누어, 8가구가 각각 100무씩 '사전(복지)'을 갖고, 가운데 100무의 '공전'을 8가구가 함께 농사지어 그 수확물을 나라에 바치는 방식입니다.

  • 균전제: 국가가 호적을 파악한 뒤, 15세 이상의 정남(성인 남성)에게 부인, 노비, 심지어 경작용 소(牛)의 유무까지 계산하여 그에 걸맞은 면적의 토지를 국가가 '대여'해 주는 방식입니다.


2. 정전제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역사학계의 정설은 "맹자가 서술한 형태의 완벽한 정전제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입니다. 즉, 현실 정치가 아닌 유학자들이 꿈꾼 이상향(유토피아)의 모델에 가깝습니다.

💡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는 이유

  1. 지형적 불가능성: 중국의 넓은 영토는 산과 강, 구릉이 많아 모든 토지를 바둑판이나 '井'자 모양으로 똑바르게 자르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2. 인구 변동의 한계: 시간이 지나면 가구당 인구가 늘어나거나 줄어드는데, 8가구가 딱 들어맞는 정전제 틀을 유지하면서 토지를 재분배하기는 행정적으로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3. 교차 검증의 부재: 정전제를 가장 구체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기원전 4세기의 맹자(孟子)입니다. 정전제가 시행되었다고 하는 주나라 당시의 실제 청동기 명문이나 고문서에는 '井'자 모양으로 땅을 나눠 공동 경작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짚고 넘어갈 점: '정전'이라는 개념 자체의 배경

다만, 완전히 무(無)에서 창조된 개념은 아닐 것입니다. 고대 씨족 공동체 시기에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함께 농사짓던 원시적 공동 경작의 기억이 남아있었을 것이고, 맹자가 이를 바탕으로 유교적 이상 국가를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이고 체계적인 '정전제'라는 이론으로 가공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3. 역사적 의의: 후대에 미친 영향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정전제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조광조, 유형원, 정약용 등)을 비롯한 역사 속의 수많은 개혁가들은 지주들의 토지 독점으로 농민들이 고통받을 때마다 "고대의 이상적인 정전제로 돌아가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며 개혁의 명분(토지 국유화 및 분배)으로 정전제를 소환했습니다.

반면 균전제는 이 정전제의 '토지 균등 분배'라는 이상을 현실적인 행정 제도로 구현해 낸 성과물이었으며, 훗날 일본의 다이카 개신(한지법)과 한국 고대 제도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균전제가 폐지된 이유는?

중국 북위에서 시작해 수나라를 거쳐 당(唐)나라 전반기까지 국가의 근간이 되었던 균전제(均田制)가 결국 폐지된 근본적인 이유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와 경제가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균전제가 무너지고 폐지될 수밖에 없었던 4가지 핵심 원인을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 (가장 결정적인 원인)

균전제가 유지되려면 "사람이 죽거나 나이가 들면 국가에 땅을 반납하고, 새로운 성인이 나오면 국가가 줄 땅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성립해야 합니다.

  • 토지의 부족: 당나라 정관의 치(태종)와 개원의 치(현종)를 거치며 사회가 극도로 안정되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나누어줄 수 있는 토지의 양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 지급량의 감소: 결국 국가가 법에 정해진 만큼의 토지(예: 성인 남성 1인당 100무)를 다 채워주지 못하고, 실제로는 절반이나 3분의 1 수준밖에 주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2. 귀족과 호족의 불법적인 토지 겸병 (대토지 소유)

국가는 분명 토지 매매를 원칙적으로 금지(일부 세습 가능한 영업전 제외)했지만, 권력자들의 탐욕을 막지 못했습니다.

  • 소농들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기근이 들면, 귀족, 관료, 사원(불교 사찰), 그리고 지방의 신흥 호족들이 이들의 균전(토지)을 불법으로 사들이거나 강탈했습니다.

  • 그 결과, 국가의 땅이어야 할 균전이 소수의 권력자가 지배하는 거대한 사유지인 '장원(莊園)'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3. 농민의 도망(도호)과 호적의 부실화

균전제는 철저한 호적 조사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행정 제도였습니다. 누가 태어나고 죽었는지 정확히 알아야 땅을 수거하고 분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땅은 적게 받으면서 세금(조·용·조)과 군역의 의무는 고스란히 지게 되자, 살기 힘든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 대지주의 장원에 소작농(고용농)으로 들어가거나 부랑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을 도호(逃戶)라고 합니다.

  • 농민들이 호적에서 이탈하면서 국가의 호적부는 실제 인구와 완전히 따로 놀게 되었고, 토지를 재분배할 행정력 자체가 마비되었습니다.


4. 안사의 난(755년)으로 인한 결정타

안간힘을 쓰며 버티던 균전제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당나라를 뒤흔든 거대한 내란인 '안사의 난'이었습니다.

  • 전쟁으로 인해 화북 지방의 농촌 사회와 행정 조직, 호적 제도가 완전히 불타 없어졌습니다.

  • 당나라 정부는 당장 군비와 국가 재정을 메워야 했으나, 국가가 농민에게 땅을 주고 세금을 걷는 균전제 방식으로는 도저히 재정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결말: 조세 제도와 군사 제도의 대전환

균전제가 무너지자, 이와 세트로 묶여 있던 조세 제도인 조·용·조(租庸調)와 군사 제도인 부병제(府兵制)도 도미노처럼 함께 무너졌습니다.

결국 당나라 조정은 서기 780년(덕종 시기), 현실을 인정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합니다.

  • 토지 정책: 토지의 국유화를 포기하고 사유화를 전면 인정함.

  • 세금 개혁: 사람(인두세) 기준의 조·용·조를 폐지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자산(토지)의 양에 따라 1년에 두 번 세금을 걷는 **양세법(兩稅法)**으로 전환함.

이로써 중국은 국가가 토지를 나누어주던 고대·중세적 통제 경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고 시장 경제가 발전하는 소작제 중심의 사회(송나라 시대의 기반)로 이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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