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한센인 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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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센인들의 고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해방 직후 병원
운영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병원생(=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의 갈등이 발생했다. 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렸던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였던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었다.[6]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병원생들은 직원 몇 명을 폭행치사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결코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죽창과 총이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 버렸다. 이들 중에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 버리고 기름[7]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환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자유로운 사진 촬영이 가능한 장소이며 방문객들이 묵념을 하고 가기도 한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 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죽창과 총이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 버렸다. 이들 중에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 버리고 기름[7]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 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환의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자유로운 사진 촬영이 가능한 장소이며 방문객들이 묵념을 하고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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