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적인 기업문화가 안전 참사로 이어진 사례들: 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
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JR福知山線 脱線事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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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일 | ||
유형 | ||
사고 원인 | 과속 및 ATS 설치 미흡 | |
발생 위치 | ||
인명 피해 | 사망 | 107명[1] |
부상 | 562명 | |
운영 기관 | ||
사고 열차 | 열차 번호 | 도시샤마에행 쾌속 5418M |
차량 | 207계 전동차 Z16+S18 편성 | |
노선 |
2005년 4월 25일, 효고현 아마가사키시에서 발생한 철도 사고.
토사 쿠로시오 철도 스쿠모역 충돌사고, JR 우에츠 본선 탈선사고와 함께 '2005년 일본철도 3대 참사'로 불리고 있다. 이 사고로 승객과 승무원 포함 107명이 숨졌고 562명이 부상을 당했다.[4] 또한 서구권에서는 아마가사키역 주변에서 일어났다 해서 '아마가사키 탈선 사고 (Amagasaki derailment)'라고 한다.
사고 당일 열차의 기관사는 '다카미 류지로 (高見隆二郞, 23세)'. 젊은 나이에 JR 서일본에 취직하여 일찍이 사회에 뛰어든 경력 11개월 차 초보 기관사였다. 그는 이 날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출근 시간대에 근무 편성을 받았다.[5]
그래서 다카미는 이 날도 운행을 하면서 경험 미달로 인해 수 차례 정시 도착에 맞추지 못하고 지연이 되는 실수를 거듭하게 된다.[6] 다카미는 지연됐던 시간을 어떻게든 만회해 보고자[7] 무리한 과속을 하게 되었고 결국 이타미역에 접근할 때 정차 위치를 무려 72m[8]나 지나쳐 버리는 오버런을 범하고 만다.
JR 서일본 규정 상 열차가 오버런 되면 반드시 상부에 보고해야 했기에 다카미는 먼저 무전을 통해 차장에게 오버런하였으니 열차를 후진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선 불이익이 두려웠는지 오버런 거리를 조금 줄여서 보고해 달라고 부탁했다. 차장은 이 때 분명 이 부탁을 들었지만, 대답하려던 찰나 객실에서 항의하는 손님이 발생해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무전을 끊어 버렸다.[9] 민원 응대를 마친 차장은 열차가 후진하는 동안 다시 수화기를 들어 상부에 72m가 아닌 8m의 오버런이 있었다고 축소 보고하였다.[10] 이 통화는 기관실에서도 들을 수 있었기에, 다카미 또한 축소 보고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태를 수습하느라 열차는 약 1분 20초 가량 지연 되었고, 엄청난 초조함에 휩싸인 다카미는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황급히 출입문을 닫고 출발하였다.[11][12] 열차는 거센 덜컹거림[13]과 함께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고, 승객들은 손잡이를 잡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차가 굉장히 흔들렸다. 다카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속도를 올려 나갔다.
그렇게 열차는 일찍이 제한 속도를 초과해 매서운 속도로 질주하였고 아마가사키역으로 향하는 길에 급커브로 우회전하는 곡선 구간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 커브 구간의 제한 속도는 시속 70km/h. 그러나 열차는 이를 훨씬 뛰어넘은 무려 시속 116km/h로 구간에 들어서게 되었고, 다카미는 뒤늦게나마 제동을 걸었으나[14] 과속을 견디지 못한 열차는 결국 관성에 의해 붕떠버린 채 탈선하여 선로에서 고작 6m 떨어져 있던 아파트[15]와 강하게 충돌. 그리고 뒤의 객차들은 차례로 잭나이프 현상이 발생하며 앞차들을 처참하게 종잇장처럼 구겨 버리고 난 뒤에야 비로소 멈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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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사고 차량은 총 7량 열차이지만 사진을 보면 6량 밖에 보이지 않는데, 사진에서 선두로 추정되는 아파트 가장 가까운 쪽에 충돌해 있는 칸은 사실 1호차가 아닌 2호차이다. 1호차는 아예 건물 안까지 밀려 들어가 사진에서는 보이지도 않는데 당시 뉴스를 접한 시청자들은 선두의 파손도가 가장 심한 차량이 1호차인 줄 알았으나, 2호차였다는 소식에 경악했다고 한다.
사고 당시 2호차 내부 (열람 주의) |
가장 선두에 있던 1호차는 116km/h의 속도로 아파트 1층 주차장에 그대로 돌진해 건물 내부로 깊숙히 파고들어 완파되었고, 뒤이은 2호차는 상술한 잭나이프 현상으로 급격하게 꺾여 객차의 측면 부분이 건물 외벽과 강하게 충돌하였다. 그리고 바로 뒤따라오던 3호차가 차례로 지그재그 상태로 돌진하며 또 한 번 2차 충돌을 일으켜 2호차는 그렇게 처참히 구겨져 버렸다. 4호차와 5호차는 아파트에 충돌하는 참사는 간신히 면했으나 역시나 탈선하여 선로변에 널브러졌고, 최후미였던 6호차와 7호차 만[16]이 탈선의 마수를 피해갈 수 있었다.
해당 열차가 통근 전철이다 보니 승차권을 사면 해당 구간의 아무 전철이나 탈 수 있어 정확한 탑승 인원은 파악하기 어려우나 대략 700명 정도가 승차하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 사고로 인해 그들 중 총 107명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으며, 그 중 99명은 완파된 1호차와 2호차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당시 반대편 선로에는 특급열차[17]가 진입하고 있었는데 사고를 목격한 한 여성(47세)이 순간 기지를 발휘해 철도건널목의 비상버튼을 눌러 마주오던 특급열차를 정지시켰다. 자칫 발생할 뻔한 2차 참사를 방지한 공을 인정하여 일본 정부는 이 여성에게 '홍수포장 (紅綬褒章 こうじゅほうしょう, Medal with Red Ribbon)'을 수여하였다.
또 사고 현장인 아파트 근처에 있는[18] '일본 스핀들 제조 (日本スピンドル製造株式会社)'[19]라는 회사 직원들이 소방관들의 구조 활동[20]에 도움을 줘서 이 회사 대표도 홍수포장을 받았다.
이외 주변 주택가 사람들도 구조 작업에 참여하였다.
덧붙여서 해당 구간의 한계속도는 106km/h인 것으로 드러났다. 즉 이를 초과하게 되면 열차가 버티지 못하고 탈선하게 된다는 것인데, 상술한 바와 같이 이를 벗어난 116km/h의 속도로 진입하였으니 과속이 주된 원인이라는 데 더욱 힘이 실리게 되었다.[22]
결국 사고의 주된 원인은 지연 시간을 조금이라도 만회해 보려고 했던 기관사의 무리한 과속이 이러한 큰 참사를 불러 일으키게 됐다는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그외에는 ATS 장비가 구형이라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JR그룹 각 사는 제한 속도 초과를 막을 수 있는 ATS-P나 ATC 같은 유형의 신호 시스템을 차근차근 적용 중이었으나 당시 후쿠치야마선은 ATS-P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ATS는 입력된 속도를 초과하면 기관사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23] 무조건적으로 열차에 제동이 걸리게 되는데 이 장치에 결함이 있어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의견이다.
스테인리스 스틸로 제작된 열차의 경량화가 문제라는 지적도 있었다. 열차는 통상적으로 일정한 충돌 강도를 갖추도록 되어 있으며, 물론 해당 207계 전동차는 그 조건을 만족했지만 전면 충돌 강도에 비해 측면 충돌 강도가 미흡하여 사고를 키웠다는 이야기이다.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고베(神戸)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케이한신(京阪神) 지역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철도회사끼리의 치열한 경쟁을 벌어지는 곳이다. 주요 도시 구간마다 2~3개의 철도 회사가 역을 짓고 열차 운행하는 트랜스포트 타이쿤이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동네이다.
물론 이러한 경쟁은 철도 서비스가 향상되는 장점을 불러오기도 하였다. 당시 JR 서일본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열차의 빠른 속도와 정확한 운행 시각을 무조건적으로 앞세웠다. 이렇듯 고속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24] 철도 운행의 정시성도 칼같이 지켜지고, 운행 시간도 대량 단축되었기 때문에 편의성과 서비스 측면에서는 나름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JR 서일본은 이렇듯 빠른 속도와 정확한 도착 시각을 엄수하기 위해 열차를 운행하는 기관사들에게 막대한 압박감과 책임감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열차 운행에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실수가 발생하였을 땐 그들에게 소위 '일근 교육'이라는 것을 진행하여 실수를 범한 기관사를 강하게 비난하고 꾸짖었으며, 그들을 크게 위축되게 만들었다. 일근 교육은 실수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기관사들을 근무조에서 제외시킨 채 상사 면담이랍시고 비인격적인 언행을 쏟아내며 강하게 비난하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선로에 묻은 비둘기의 배설물을 닦아내도록 시켰으며, 막대한 분량의 리포트나 깜지를 옮겨 쓰게 하는 등 그야말로 군기훈련에 가까운 수준의 교육을 시켜 실수한 기관사를 강하게 꾸짖었다.
물론 사고를 일으켰던 다카미 또한 이 악행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입사 초기에 이미 무려 약 100m 오버런 실수를 범하여 한 차례 일근 교육을 받았던 경험이 있었다. 이후 그는 일근 교육을 또 받게 될까봐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약 10개월 뒤 사고가 발생했던 당일에도 계속된 도착 지연과 72m의 오버런 때문에 몹시 초조함이 들어 어떻게든 지연을 회복하고자 무리한 과속을 감행하다가 참변을 불러 일으키게 된 것이다. 이를 덧붙이는 근거로 당시 다카미는 탈선하기 4초 전에 브레이크를 가동하였는데 이 때 비상 브레이크가 아닌 상용 브레이크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JR 서일본 규정에 따르면, 비상 브레이크를 가동하게 되면 반드시 상부에 보고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기에 이를 주저한 다카미가 탈선 4초 전인 긴박한 상황에도 비상 브레이크를 걸지 않고 상용 브레이크를 가동하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마저도 제동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았을 때 당시 기관사는 일근 교육을 받는 것이 두려워 초조함에 휩싸인 채 무리한 가속을 감행하게 되었고, 탈선 위기에 놓인 급박한 상황에서도 지연 시간 회복에 미련을 놓지 못한 채 완전한 제동을 시도하지 않다가 참사가 발생했다는 의견이다.
전방에 시속 70km/h 제한 표지판이 떡하니 배치되어 있는데 아무리 경력 11개월 차 초보 기관사라 한들 인지하지 못했을 리가 만무했고, 당시 열차는 잦은 지연과 오버런이 발생했던 차량이었으니, 일근 교육이 두려워 실수를 만회하기 위한 초보 기관사의 무리한 과속이 총체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일근 교육을 이 상황에서 제외하고 생각하게 되면, 기관사가 굳이 이러한 무모한 시도를 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그가 다른 이유에 의해서 과속을 감행하게 됐다는 정황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후진적인 사내 문화가 결국 사고의 가장 큰 간접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대로 숙달되지 않은 사람을 통근 시간대 기관사로 배치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큰 비판을 받았다. 통근 시간대는 유동인구도 많고 지연이 발생하게 되면 탑승객 다수가 지각하는 사고[25]가 발생하게 되므로 보통 경력이 많은 베테랑 기관사들이 주로 맡는 시간대이다. 신참 기관사들은 고참 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정도로 하고, 이마저도 정말 피크 시간대에는 고참 기관사의 집중에 방해 될 것을 우려해 신참을 아예 현장에서 빼버리기까지 할 정도이다.
상황이 비슷했던 JR 동일본을 예로 들면 이미 1990년대부터 안전 관리와 기관사 및 차장 교육을 철저히 진행하고 있었다. 출퇴근 시간엔 보조기관사로 일하면서 주기관사 옆에서 보고 배우는 식으로 연수를 진행하고 운전실습은 승객이 많지 않은 낮 시간대에, 그나마 옆에 관리하는 고참 기관사가 1~2명씩 꼭 동승한 상태로 이루어지며, 운전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정기관사 자격을 주지 않고 계속 실습기관사로 교육을 거듭하는 등 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가하였다.[26] 그러나 JR 서일본은 고작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안전 관리를 소홀히 하고 승차 인원이 많아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경력이 안 되는 신참 기관사가 혼자 운전대를 잡도록 투입하는 등 교육도 제대로 안 했다. 이 점이 밝혀지면서 JR 서일본은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
또한 당시 JR 서일본은 속달성만을 고려해 여유 시간이 없는 열차 시각표를 짰는데, 부족한 여유 시간이 기관사들에게는 작은 실수조차도 무조건 만회를 해내야 지연을 면할 수 있다는 압박감으로 이어져 결국 과속 같은 위험 운전을 시도하려는 유혹이 훨씬 커졌다는 지적이 있다.
- 사고 노선은 55일 간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 JR 서일본은 경쟁 노선인 한큐 타카라즈카 본선을 통한 대체 운송을 실시했으며, 이 때 타카라즈카 본선은 극심한 혼잡과 지연에 시달렸다. 또한 사고 여파로 JR 후쿠치야마선 이용객 일부가 한큐 타카라즈카 본선으로 이전하는 효과가 있었다.
- 사고 당시 일부 JR 서일본의 직원들이 사고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음에도 볼링대회를 즐기고 낮술을 곁들인 점심을 먹었던 사실이 보도되어 큰 비난을 받았다.
- 사고 열차에는 JR 서일본의 직원도 2명 탑승했으며 이들은 큰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했는데, JR 서일본은 이들에게 구조 활동을 시키지 않고 정상 출근시켜 비난을 받았다.
- 사고 이후 JR 서일본 2대 회장이자 초대 사장인 '츠노다 타츠오 (角田達郎)' JR 서일본 고문이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으며 이듬해 지병인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 사고 차량인 207계 전동차는 JR 서일본의 코퍼레이트 컬러인 파란색 띠가 둘러져 있었으나(구도색 열차 모습) 사고의 악몽을 연상시킨다는 여론으로 남색과 오렌지색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제작된 후속 모델인 321계도 남색과 오렌지색 띠를 둘렀다. (신 도색 모습)[27]
- 사고 열차 번호인 '5418M'은 영구결번 처리되었다. 비슷한 시각을 운행하는 열차는 5818M으로 바뀌었다가 시각표 개정을 거쳐 현재는 5422M으로 운행하고 있다.
- 지나치게 빡빡한 열차시각표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받자 이를 개정하여 후쿠치야마선 전 열차가 종전에 비해 운행소요시간이 늘어났다. 사고 구간의 제한 속도는 70km/h에서 60km/h로 낮아졌다. 그 외 어반 네트워크 구간에서도 시각표가 개정되어 소요시간이 약간 증가하는 변화가 있었다.
- 이 사고보다 앞선 2003년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유족 17명이 JR 서일본 노동조합 측의 초청으로 이 사고 추모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 사고 이후 JR 서일본 홈페이지에는 이 사고에 대한 사과문이 메인에 올라가 있다. 홈페이지를 리뉴얼하면서도 사과문을 유지하고 사고 개요와 사고 후 반응, 사고에 대한 대응에 대한 페이지를 전부 메인 페이지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해 놨다. 심지어 한국어판 홈페이지에도 이 사고를 언급하는 안전 헌장을 띄워 놓고 있다. #[29]
- JR 서일본은 사고 이후에도 사고 당시에서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직원 대접과 소홀한 차량 관리 때문에 언제 비슷한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블랙 기업으로 악명 높다.
- 2006년 개최된 사고 1주기 추모 행사에는 사고 당시 기관사 다카미 류지로를 제외한 106명만 명단에 올랐다. 본 사건이 일본 국내에서 기관사에 의한 업무상 과실치사 사건으로 취급되어 재판에 회부된 터라 사고 당시 기관사는 제외되었다.
-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본문 참조.
- 스페인 갈리시아 고속열차 탈선사고: 본문 참조.
- 전라선 율촌역 무궁화호 탈선사고: 본문 참조.
- 대만 이란선 열차 탈선 사고: 본문 참조.
- 스트라스부르 TGV 탈선 사고: 본문 참조.
시뮬레이션으로 돌린 영상[30] |
저는 분해서 분해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의 생명을 빼앗고 두 사람의 미래를 빼앗고
저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은 JR그룹이 원망스럽고 원망스러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있어도 괜찮나요? 괜찮을 리가 없어요.
벌레 잡듯이 ○○을 죽이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이 싸움에서 질 수는 없어요.
저를 지옥으로 떨어트린 JR과 싸워주세요.
-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로 사망한 남성의 연인(32)이 자살하면서 남긴 유서
사고 2개월 뒤의 사고 구간 영상[31] |
안내방송 내용:
다음은, 아마가사키, 아마가사키역입니다. 이번 역에서 JR 고베선 고베 방면과 JR 도자이선으로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JR 타카라즈카선에서의 탈선 사고로 인해 아마가사키에서 타카라즈카 구간에 대해 열차의 운행을 중지하였으나, 오늘 6월 19일부터 운전을 재개하였습니다. 이용해주시는 고객님들께 장기간에 걸쳐 큰 불편과 폐를 끼쳐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 2014학년도 EBS의 영어 과목 수능 연계 교재인 인터넷수능에 이 사고를 설명한 지문이 수록되었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만 언급되었지만 내용이 이 사고와 상당히 일치한다. 원본(32페이지 Culture 이하)
- 2018년에 사고 당시 열차가 충돌했던 지점(옛 이퓨전 아마가사키 아파트)에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이 조성되었는데 열차가 직접 충돌했던 아파트에 저층부 일부를 남겨 두어 보존했다. 기사[32] 기념관인 후쿠치야마선 탈선 사고 현장 "추모의 집" (祈りの杜 (もり) 福知山線脱線事故現場)의 1층은 1호차가 충돌하면서 돌입했던 내부(필로티)와 그 앞 지하 부분까지 보존되어 있다. 사진 조성 중에 유족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파트 벽에 기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아사히 신문에 실렸다.
- 탈선사고가 난 이후 5418M은 결번 처리 되었다.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00515510002145
김미경 대덕대 명예교수 인터뷰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민주적
권력서열 민감한 한국어 존대법, 선진국 진입 막아
'하대 기술'의 집약체 반말...살인도 불러"1997년 대한항공 추락사고 당시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7년 8월 5일 대한항공 801편이 괌 공항 주변 야산에 추락했다. 254명 중 228명이 사망했고 당시 1만8,000원이었던 대한항공 주가는 3,400원까지 급락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의 작가 말콤 글래드웰은 그의 출세작 '아웃라이어'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며, 사고 원인으로 '한국의 문화 관습'을 꼽았다. "대부분 비행기 사고는 기장과 부기장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데, 한국어는 언어구조 전체가 윗사람을 어떻게 대접해주어야 하느냐의 문제가 얽혀 있다. 항공기 사고와 한국의 서열 문화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한 그 책에서, 글래드웰은 월등한 성공을 가능케 한 사회·문화적 요인을 살피며 '비행기 추락의 민족 이론'을 제시했다. 이론을 내놓은 지 5년 후인 2013년 7월, 이번에는 아시아나 항공기가 샌프란시스코 비행장에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하며 해외 주요 언론들은 다시 글래드웰의 이론에 주목했다.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에 한국어, 정확하게는 한국어의 존대법과 하대법으로 인한 문제는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 새 정부 들어 열린 첫 국정감사에서는 어김없이 반말 논란이 나왔고, 지난달에는 나이 어린 지인에게 반말을 듣고 모멸감을 느껴 흉기를 휘두른 50대 남성이 징역형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지난 2019년 모텔 장기 투숙객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해 무기징역을 받은 장대호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반말'이었다.
존대법이 발달한 예의바른 한국어? 하대법도 똑같이 발달
강기윤 국민의힘 의원과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충돌하고 있다. 두 사람은 '호칭'으로 시비가 붙어 고성을 주고받다 회의가 파행됐다. 두 의원은 "니(너)나 가만히 계셔라", "너라고 그랬나"라며 날 선 말을 주고받다가, 정회 이후에는 서로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이기 직전 상황까지 이어졌다. 뉴스1TV 캡처
영어학자의 눈으로 한국어의 특징을 꾸준히 연구한 김미경 대덕대 명예교수는 한국어 존대‧하대법의 문제가 몇 개의 에피소드로 그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누구나 배우기 쉽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인 문자이지만, 상대방을 높이거나 낮추는 말이 문법까지 발달한 한국어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말이다. 한국어의 존대법이 한국인이 위계질서와 권력서열에 민감하게 만들고 열린 의사소통, 나아가 민주화와 선진국 진입까지 더디게 한다는 주장이다.
김 교수는 지난 4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언어 측면에서 살폈을 때 첫째 비결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글을 가졌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직후, 모어인 한국어를 국가 공식어로 채택해 공식어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춘 점이었다. 두 연구를 끝낸 후 한국이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를 다시 언어 측면에서 연구했는데, 한국어의 존대‧하대법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 같은 연구를 모아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두 얼굴의 한국어 존대법'(2020년1월·소명출판)을 출간한 바 있다.
흔히들 한국어는 존대법이 '발달한' 언어라고 인식하지만, 김 교수는 존대법이 '복잡한' 언어라고 지적한다. 상대를 높일 수 있는 화법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뜻이다.
호주 사이요르 부족이 동서남북 방향을 알아야 동사를 선택할 수 있다면, 한국어는 상대방과 나, 그 대화를 듣는 청자 사이의 권력서열을 알아야 주어와 조사(김 장관이, 김 장관께서, 김 장관님께서), 동사(말해라, 말하세요, 말씀하세요, 말씀하십시오)를 선택할 수 있다. 한국인이 "실례지만"을 추임새로 붙이면서도 초면에 나이와 학번을 묻고 서열을 정리하는 이유다.
여야 신경전에도 "후배"로 서열 정리하는 '하대법의 마법'
2015년 9월 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가정어린이집 보육인대회에서 문재인(왼쪽)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손을 맞잡은 후 포옹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상대방을 높이려면 나를 낮춰야 하기 때문에 한국어는 존대법만큼 하대법도 복잡하다. 반말이 종종 언어폭력의 전술로 쓰이는 배경이다. '어린 사람의 반말에 앙심을 품고' 흉기를 휘둘렀다는 사건은 요즘도 일 년에 몇 번씩 보도된다.
김 교수는 이 '하대법의 기술'이 가장 절묘하게 쓰이는 분야로 정치를 꼽았다.
2015년 박근혜 정부 당시 경남중‧고등학교 동창회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말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나란히 동창회에 참석한 그는 한 해 선배란 이유로 먼저 축사한 후 문 대표를 이렇게 불렀다. "후배, 앞으로 나와." 여야 대치 상황에서 김 대표는 문 대표가 단상에 오르자 손잡고 만세를 부르고 포옹도 했다.
김 교수는 "상대방을 후배라고 부른 후, 반말하며 자신의 지위를 높이는 게 놀라웠다. 반말 한마디로 두 사람 관계가 여야 대표가 아니라, 윗사람·아랫사람으로 변질된 순간"이라며 "한국어의 하대법을 이보다 잘 활용한 예를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절묘한 한 수"라고 꼽았다.
김미경 대덕대 명예교수
문제는 이런 '하대법의 기술'을, 듣는 사람은 언어폭력으로 받아들이고 업무 역량을 급속히 떨어뜨린다는 사실이다. 1990~2000년대 국내 항공기 사고가 존댓말로 인한 '잠재적인' 의사소통 불편의 결과라면, 언어폭력을 당한 후 생명이 위협당할 수도 있을 만큼 업무 역량이 떨어진다는 보다 직접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
2015년 이스라엘 텔아브비대 의대 리스킨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언어폭력을 겪은 의료진은 그렇지 않은 의료진보다 52% 더 많은 오진을 했고 치료 과정에서 43% 더 많은 실수를 했다. 신생아 집중치료실 소속 의사 24명, 간호사 48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신생아가 괴사성장염에 걸린 상황을 가정해 실험한 결과다. 실험군이 들은 언어폭력은 "이스라엘 의료진 수준이 미국보다 형편없다"는, 한국 상사들은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수준의 비판이었다. 그럼에도 "실제였다면 신생아 생명을 위독하게 만드는 심각한 오류"를 저지른 셈이다. 김 교수는 "해당 논문에서 연구진도 의료사고 상당 부분이 무례한 말로 인해 시작된다고 경고한다"고 지적했다.
각종 호칭에 에너지 낭비...존대법 폐해 고쳐야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가 대선 전인 지난해 12월 26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자신의 허위 이력 의혹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김 여사는 윤 대통령 당선 직후, 자신을 둘러싼 호칭 논란에 대해 "영부인이 아니라 대통령 배우자라는 표현이 좋다"고 밝힌 바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어의 존대법, 그로 인한 한국인의 권력서열 집착에 대한 부작용은 각종 호칭 논란에서도 드러난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해 4‧7재보궐 선거 기간 양향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트위터에 쓴 김영춘 부산시장 후보 지지 선언에 대한 친문 지지자들의 공격이다. 김 교수는 "'김영삼이 발탁하고, 노무현을 지켜냈고, 문재인이 가져다 쓴 김영춘이야말로 부산의 적장자'란 말에 '대통령이 네 친구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아직 대통령이 국민 위에 있다는 정서"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해외 국가 원수는 바이든도 기시다도 시진핑도 모두 호칭 없이 이름만 쓰지만 한국 사람에게만 유독 호칭을 붙여 쓰는 것도 한국어 존대법의 특징이다. 탄핵 후 일부 언론이 '박근혜씨'로 보도한 것처럼 권력이 사라지면 호칭을 바로 격하시키는 것도 특징"이라고 덧붙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대통령 배우자 호칭 논란 역시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쏟는, 한국어 존대법의 대표적 부작용이다.
'시대 흐름과 더 이상 맞지 않는 한국어 존대법'을 바꿀 방안이 있을까.
김 교수는 "정신이 바뀌어야 한다"고 단언했다. "대통령과 국민, 상관과 부하가 적어도 '언어적으로 평등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국어 존대법의 병폐를 개선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는 "화자와 청자 둘 다 존대법을 쓰든 하대법을 쓰든 하나의 문체로 통일하면 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반말에 상처를 많이 받아서 상호 존대가 좋을 것"이라며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똑같은 위치'가 되는 걸 견뎌야 한다"고 말했다.
2020년 4월, 70년의 전통을 깨고 대전고법 이인석 판사가 존댓말 판결문을 작성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많은 시민들이 판결문을 환영했지만, 법조계에서는 '법원의 권위가 떨어진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김 교수는 "한자를 쓴 조선시대 양반들이 중국어에는 존댓말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존댓말을 고수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꼬집었다.
대한항공 8509편 추락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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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Air Cargo Flight 8509사고 4개월 전, 마카오 국제공항에서 화물을 하역하는 모습추락 이후 잔해, 앞에 있는 소방관의 오른쪽에 있는 것이 APU Intake Part이다.새 천년을 10일 앞두고 있던 1999년 12월 22일, 런던 스탠스테드 공항을 출발하여 밀라노 밀라노 말펜사 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8509편[2]이 이륙한지 약 1분 만에 90도로 기울어진 채 햇필드숲[3]으로 추락해 탑승객 4명 전원이 사망한 사고이다.
해당 항공기는 김포에서 출발해 타슈켄트, 런던 (스탠스테드), 그리고 최종 목적지인 밀라노(말펜사)를 경유한 뒤 다시 김포로 비행 할 예정이었다.
박득규 비행기 기장, 윤기식 부기장, 박훈규 항공 기관사 3명의 운항 승무원이 운항을 맡았으며 정비사 김일석 씨(사고 당시 45세)를[4] 포함하여 총 4명이 탑승하였다. 박득규 기장(사고 당시 57세)은 공군사관학교 15기 출신으로, 공군 중령으로 예편 후 1986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1987년 부기장으로 임명 후, 1991년 기장으로 승격, 1993년부터 후배 조종사를 양성하는 교관 조종사로도 활약하였으며, 1995년 퇴직 후 계약직 기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비행 시간은 총 13,490시간[5]을 비행했다. 윤기식 부기장(사고 당시 33세)은 1996년 영남대학교 졸업 후 대한항공 비행훈련원 24기로 입사하였으며 1998년 8월에 부기장으로 승격했으며 비행 시간은 1,406시간을[6] 비행하였다. 박훈규 항공 기관사(사고 당시 38세)는 한국항공대학교 졸업 후 1988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근무해 왔으며, 사고 전인 1999년 12월 초에 지상 훈련 교관으로 발령되었다.[7]
현재까지 대한항공의 마지막 인명사고이다. 이 사고 이후 무사고[8] 25년을 달성하였다.스텐스테드에서 비행 기록을 문서화하는 과정[10]이 약 1시간 늦어져서 밀라노까지 정시에 도착하기란 불가능해졌다. 비행 기록이 문서화되고 나서 비행기는 이륙했다. 그러나 밀라노를 향해 좌선회를 할 때 기장의 ADI에 반응이 오지 않았다. 비행기는 계속 회전을 했기 때문에 각도가 너무 높아지게 되고 경사각이 90도에 이르고 40도로 비행기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이 어떻게든 통제불능이 된 기체를 조종하려 했으나 결국 KE8509는 좌측 날개부터 지면에 충돌하며 폭발하였다.
윤 부기장의 ADI는 정상 작동했으므로 윤 부기장이 컨트롤을 잡고 회항했어야 하나 박 기장이 선배여서 윤 부기장의 회항 요구 및 여러 조언을 묵살하는 등 상당히 고압적으로 행동했던 탓에 결국 컨트롤을 넘겨받기 전에 비행기가 추락하고 말았다. 대한항공 조종사의 블로그@를 통해 알려진 바로는 박 기장은 부기장들을 잡는 사람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부기장의 사소한 실수, 뭔가 맘에 안 드는 행동을 보면 심하게 다그쳤다고.AAIB(Air Accident Investigation Branch)는 비행기록 장치, 기장의 ADI, 음성기록장치를 수습했고 분석에 성공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AAIB는 대한민국의 상하관계로 인하여 조종실에서 충분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못했고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상하관계 때문에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즉 2년 반 전에 발생했던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당시 대한항공의 사고가 잦아 대한항공은 델타항공, 일본항공으로부터 인적 관리 프로세스를 컨설팅받았다. 이 때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종사들은 결국 대한항공을 떠나야 했다.
컨설팅 이후 대한항공은 이후 기장과 부기장의 상하관계와 고압적인 태도를 없애기 위해 국내선, 국제선 상관없이 기장과 부기장 간의 대화에서 한국어를 금지하고 오직 영어만 쓰도록 하였다. 기장은 반말하고 부기장은 높임말하는 한국어의 존비어 문화가 지나친 권위적 문제를 발생시켰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는 이 사고 이후 한때 대한항공의 운항을 금지할 것을 고려한 듯하나 실제로 실행하지는 않았다. 다만, 미국은 주한미군 병력을 대한항공을 이용해 이동시키지 않는다는 지침을 내렸다.
그 이외에도 파격적으로 훈련 과정을 고쳤으며 회사 문화를 고치기 위해 힘을 썼다. 이러한 노력으로 1999년 이후 사망자가 발생한 대한항공의 사고는 없다.
이 사건 이후 대한항공은 스탠스테드 공항 노선을 단항시키고 히스로 공항에서 런던의 화물을 처리하고 있으며, 스탠스테드 공항에는 아시아나항공의 화물기가 취항 중이다.이 사고를 톱 뉴스로 다룬 BBC News at Nine(1999년 12월 23일 방송)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 이 내용을 시즌 11 에피소드 7 나쁜 태도(Bad Attitude)를 방영했다. 다만 고증오류가 좀 많이 있는데 사고가 발생한 해는 1999년인데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존재하지도 않던 스카이팀의 로고가 붙어 있다.[26] 또 화물 하역장이라 여객기가 진입하는게 불가능하지만 영상에는 에어캐나다의 DC-9 여객기가 화물 하역장에 주기되어 있다. 그리고 사고 조사관이 군 출신 한국인 조종사 특유의 조종실 내의 불필요한 위계질서를 설명할 때 이런 상명하복식 문화가 수백 년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때 영상에서 조선시대 군대의 장군과 병사에 기장과 부기장을 빗대려고 한 듯 한데... 어느 나라 복장인지 알 수가 없다.[27] 부기장은 아무리 봐도 백정 수준의 옷차림이고 기장은 양 가슴에 A4지만한 울퉁불퉁하고 괴상한 나무 판때기 같은 걸 붙인 옷에 투구는 고대 로마 시대 갈리아식 투구에 가깝다. 철저한 고증까진 바라지 않아도 최소한 대충 두루마기에 가까운 거라도 입히고 갓만 씌웠어도 반은 갔었지만 철저히 배신하였다.앞서 말했듯이 이 사고로 대한항공이 크게 달라져 1999년 이후 한 차례도 항공기 추락 사망 사고를 내지 않게 되었다. 8509편 사고 이후 23년 만에 처음으로 일어난 기체 손실 사고인 대한항공 631편 활주로 이탈 사고 역시 탑승객 173명 전원이 생존하였다. 20세기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위험한 항공사로 여겨졌으나 사고 이후 훈련 과정을 개편, 신기재 대량 도입, 2000년에 스카이팀을 결성하고 비행 관련 사고가 현저히 줄어드는 등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커지고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위상이 높아지면서 현재는 대한민국 최대의 항공사로서 자리매김했다.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이 갑질 논란과 어처구니 없는 사태에 기체 결함 및 정비 부분 문제와 추가로 리튬 이온 배터리 관련 사건사고까지 다발적으로 발생하면서 상대적으로 더 안전해 보이는 효과까지 보고 있다.- 한국 조종사들의 전형적인 착륙 고집이나 권위주의(고압적 상하관계)가 영향을 끼친 사고
-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 1997년
-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 1993년
-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 1989년
- 대한항공 086편 이륙지연 사건 - 2014년
- 테네리페 참사 - 1977년 발생, 항공사상 최악의 인명피해. 이 사고와 비슷하게 기장의 권위주의로 인한 사고이다.
- 버겐에어 301편 추락 사고 - 피토관에 벌집이 생겨 계기 오작동으로 인한 추락 사고.
- 에어 인디아 855편 추락 사고 - 기장석의 ADI가 고장났음에도 무리하게 왼쪽으로 선회하다 이륙 1분 41초 만에 추락한 게 이 사고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나마 차이점이라면 이쪽은 항공 기관사가 아니라 부기장이 기체의 자세가 이상하다고 말은 했는데 역시나 기장이 무시해서... 결국 이륙 약 2분 후에 추락했다.
- 코파 항공 201편 추락 사고 - 유사하게 잘못된 ADI 신호로 인해 조종사가 비행착각에 빠져 추락한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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