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첫번째 부인, 버림 받고 법사에 사기·폭력 당한 기구한 삶 / 이승만 첫번째 부인, 6·25전쟁 중 한강다리 못건너고 인민군에 사살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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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흥인지문)에서 북쪽 낙산 방향을 바라보면 성벽 안팎으로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성안 쪽 길은 연인들의 인기 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다.
동대문 바로 옆에 있었던 옛 동대문이대병원과 동대문감리교회 자리는 흥인지문공원으로 조성되어 그곳에 서면 동대문, DDP, 남산타워가 보이는 전망을 자랑한다.
그 동대문 성곽 안쪽 길을 따라 1km쯤 걸으면 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의 사저 ‘이화장’에 닿는다. 성곽 암벽 아래다. 이승만은 이 이화장에 1947년 10월~1948년 8월까지 거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 되어 경무대로 이사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후에 그해 5월 29일까지 다시 이 사저에서 두 달 가까이 살았다. 그리고 하와이로 망명했다.
그 성곽 바깥쪽 길을 따라 800m쯤 오르면 ‘지장암’이라는 암자가 나온다. 1927년 지적도에 지장암과 지장암 일대 땅(창신동 625번지)이 이승만 소유의 밭과 대지로 기록되어 있어 지장암은 일제강점기 암자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장암 법사와 이승만 본처와의 관계가 부부의 파국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 있게 퍼졌다.
현재 이화장과 지장암은 불과 300m 거리다. 성벽 암문이 있어 넘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깝다.
‘이승만의 일가인 우제하의 증언에 의하면 (이승만-박승선) 부부간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10년 귀국했을 때 부인 박씨가 그동안 1200평짜리 앵두밭을 절에 시주한 것이 표면적인 동기라고 한다. 이승만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절에 앵두밭을 시주한 것에 격노했다는 것이다.’(출전: 김용삼 지음 ‘대한민국 건국의 기획자들’)
바로 그 절이 지금의 지장암이다. 그런데 그 ‘시주’의 저변에는 부모가 맺어준 방식에 의해 구식 결혼한 이승만이 본처를 버린 데서 기인한다. 망명가 남편의 금의환향을 기다리며 끝까지 수절하며 기다린 본처, 하지만 프란체스카와 중혼 사실을 숨기고 싶었던 이승만. 그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호적에서 본처를 몰래 파버리면서까지 ‘총각 결혼’으로 남고자 했던 이혼 명분 싸움에 '지장암'이란 암자가 있는 셈이다.
중장년 이상 국민 대개는 이승만의 처는 그가 유학 중 만난 ‘호주 댁’ 프란체스카 도너(1900~1992)로 알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정확히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데 오스트리아를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착각한 국민이 ‘호주 댁’이라 불러 그리 굳어졌다.
사실 많은 국민이 추앙하던 독립운동가인 초대 대통령이 본처가 있음에도 중혼을 했고, 새 여자를 위해 조강지처를 버렸다면 민심은 악화일로였을 것이다. 남아선호와 단일민족 사상이 강한 한국민에게 서양 여자가 국모라는 현실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본처를 버린 대통령?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권을 잡은 이승만과 그 측근들은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그리고 흔적을 없애야 했다. 이들은 국부 이승만의 신화를 위해 호적 말소를 시도했고 그 작업은 아무런 문제없이 이뤄졌다. 따라서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와 서류상 첫 결혼이 됐다.
그들이 본처 문제를 숨기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본처에 대한 보도가 일제강점기 있었으나 대통령에 오른 후 어느 매체에서도 거론되지 않는다.
1926년 7월 15일 자 조선일보는 ‘누항(陋巷)에서 신음하는 이승만 박사 부인’이라는 타이틀로 박승선의 고단한 삶을 보도했다. 누항은 ‘좁고 지저분함’을 뜻한다.
이 보도에 따르면 당시 박승선은 ‘창신동 뒷산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정하여 시골 조카 하나를 데려다 기르며 종교와 육영 사업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예수교를 지성으로 믿어가며 보종학원이라는 학교를 만들어 배우지 못한 어린이들을 가르치며.본래 그 땅은 이승만 소유이며 현숙한 부인 박씨가 가난한 이들에게 집을 짓도록 도와줘 수십 호의 촌락이 생겼다’라고 전한다.
한데 박승선의 이런 선함을 이용해 그를 ‘신음’케 하는 일이 생겼다. 당시 보도문을 현대문으로 바꾸면 아래와 같다.
‘.이 박사의 처 박승선은 동네 사람이나 인근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 그런데 지난 13일 오전 7시쯤 그 이웃에 사는 지장암이라는 절에 주지 노릇을 하는 강재희(64)라는 늙은 자에게 무수한 폭행과 모욕을 당하고 나중에는 구타까지 당하였는바
.강재희라는 자는 본래부터 박 부인이 현재 사는 곳에서 한참 동안 떨어진 곳에 남의 터에다가 지장암이라는 절을 짓던 중 얼마 되지 아니하여
강재희는 불교를 숭배하는 승(僧)의 몸으로 파계의 행동이 많아 육근청정(六根淸淨=진리를 깨달아 욕심과 집착이 없어지고 육근이 깨끗하여지는 일)을 입으로만 찾는 자이니, 처첩이 네 사람씩이나 있어 온갖 좋지 못한 일이 많음으로 집터를 빌린 사람의 눈 밖에 나게 되자 집터를 내어달라고 주인의 성화가 일자 다수의 계집과 종들을 데리고 갈 곳이 없어 쩔쩔매다가
박 부인이 마음이 착하여 갈 곳 없는 사람들에게 집터를 잘 빌려주므로 박 부인에게 찾아가서 자기의 처지가 몹시 어려움을 말하고 구원을 얻고자 애걸복걸하였다.
.(강재희는) 서로가 종교를 믿는 바에야 신을 믿기는 마찬가지인데 내가 부처님을 모시고 거리로 나앉게 생겼으니 절을 지을 터를 빌려달라 함으로 박 부인이 종교가 다르기는 하나 착한 일 하기는 마찬가지이니 그리하자고 쾌히 승낙하였다.강재희는 등기문서를 빌려주면 잠깐 융통하고 나서 가을에 갚겠다 하고.박 부인이 열성 있는 자로 여기고 돈은 물론 좁쌀까지 사다가 꾸어 주는 등 편의를 봐주어 생긴 절이 지장암이라.’
그런데 강재희가 안면을 싹 바꾸기 시작했다.
‘강재희는 박 부인이 남편 이승만 박사가 상해에서 반일 운동을 하므로 사찰을 받고 있자.이 생원이라는 자에게 박 부인에게 시비를 걸게 한 후 (지장암에서) 쫓아 내려와 박 부인에게 입에 담지 못할 갖은 욕설을 다 해가며 이유 없이 박 부인의 가슴을 주먹으로 쳤고 박 부인이 계단에서 글러 떨어졌다.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박 부인에게 강재희가 쫓아와 치마허리를 붙잡고 경찰서로 가자고 내쳐 박 부인은 어깨, 머리, 허리 상처를 입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은혜를 입고도 원수로 갚는’ 이 박사 부인 구타 사건을 2회 연재와 가십을 통해 보도했다. 사실 이 보도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 상황상 쉽지 않았다. 이승만은 망명한 독립운동가였고, 그의 집안과 그 부인은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인 형사 보조와 일본인 형사들이 수시로 창신동 박 부인 집을 드나들었다.
다른 측면에서는 이 기사가 이승만이 본처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못 박은 기사이기도 하다. 당시 신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소수의 식자층인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선의 엘리트들은 한 독립운동가 아내의 비참한 삶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한데 이 본처 얘기는 그 이후로 어디에도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다 4·19혁명 발발 후 이승만이 실각하고 난 그해 12월 일본인 기자가 전 부인 박승선 문제를 거론하며 이승만의 후손이 없다는 요지의 보도를 한다. 이 내용은 외신 발로 동아일보가 다뤘다.
결국 본처 문제에 대해 이승만 정권 시절 권력이 언론에 대한 은밀한 작업을 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국부의 동상이 세워지던 시대 ‘이승만 본처’ 문제는 금기어였다. (다음 회 계속)
(4) '몽실언니' 권정생 , 사랑에 대한 소망과 슬픔 (3) 윤락녀가 된 여자 친구."가엾은 운명에 목이 멘다" (2) 독립운동가 부부의 '달콤살벌' 부부 싸움 (1) 무당집 과부, 조난 당한 선비와 정을 나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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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1875~1965) 전 대통령의 본처 박승선(1875~1950 추정)의 사진을 보면 오른쪽 눈이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 장애가 있는 것 아닌 게 싶게 균형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봉사’(시각장애인을 칭하는 옛 말)와 혼인시킬 수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던 이경선은 맞춤한 며느리감을 찾아냈다. 같은 동네(지금의 서울역 건너편)에 사는 가난한 집 규수 박 소저였다.
이승만과 동갑내기로 키가 컸고 한쪽 눈 언저리에 푸르스름한 반점이 있었다. “옳다구나” 이경선은 1891년 박 소저를 며느리로 맞았다. 점쟁이 말을 거스르지 않고 ‘정신 승리’한 셈이다. 박 소저는 어미마저 일찍 여의었다. ‘박씨 집 딸’일 뿐 이름도 없었다. 그의 어머니는 1882년 임오군란 때 궁중 나인이었는데 폭도에 밟혀 죽었다는 설(박승선의 양자 증언)이 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신이나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한양도성으로 왔다. 이경선은 도성 안 염동(현 종로2가 일대)에 살았으나 재산을 술로 탕진하면서 점점 밀려 남대문 밖 우수재(현 후암동 일대) 부근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승만의 회고에도 “아버지는 친구와 술을 좋아해 있는 것 죄다 퍼주는 분”이라고 했다.
박 소저는 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출신이나 주로 황해도 연백군 관천리에서 살다 도성 밖 외가가 있는 우수재 근처로 이사했다. 그녀가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일경에 감시를 받을 때 황해도 연백과 시가붙이들이 사는 황해도 평산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던 것도 이와 같은 배경 때문이다.
박승선이 입양한 양아들 철호(가명) 씨가 6·25전쟁 당시 강화 교동도가 지척인 연백군 연안읍에 살다가 1·4후퇴 때 서해 장봉도를 거쳐 인천 시내서 정착한 것도 이승만 박승선 부부의 ‘공간’과 일치한다.
물론 이같은 이승만 본처 얘기는 지금도 봉인되어야할 금기다. 서울 ‘이화장’에 적을 둔 사단법인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회장 황교안) 홈페이지 ‘이승만 연보’ 등에도 박승선이 거론되지 않았다. ‘이승판 평전’의 저자 이주영 등 ‘이승만 연구가’ 등도 박승선에 대한 언급을 않는다.
본처 박승선을 둘러싸고 많은 연구자나 지지자들이 결혼 자체를 전면 부인하다 두 부부 사이의 아들 봉수(이명 태산·1899생) 문제, 혼인을 증명하는 가족사진 증거, 부부 관계임을 입증하는 호적 등 관련 문헌 등을 내밀면 한 발 물러서 박승선의 부정설, 합의 이혼설 등으로 대응한다.
그렇게 이승만이 프란체스카와 이중 결혼한 사실을 숨기려다 보니 ‘일그러진 신화’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울고넘는 박달재’의 작곡자 반야월의 노래비가 있는 박달재에 가보면 ‘반야월 기념비’가 있고 그 옆에 친일한 사실도 있음을 ‘그대로’ 적시한 안내문 사례에서 보듯 공과를 드러내 역사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한국 사회에 기여는 했으나 친일 등의 문제가 있는 이들의 기념비나 동상 옆에 친일 사실을 적시한 ‘단죄문’을 세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쨌든 그렇게 혼인한 부부는 조선말 부부가 그렇듯 아내는 현숙했고 남편은 양녕대군 후손이란 자부심을 가진 사람답게 반듯했다. 그러나 조선말 부패할 대로 부패한 과거제도를 통한 입신양명에 실패한 이승만은 결국 과거제도 폐지와 함께 출세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살아가던 부부 사이에 첫 아이가 생겼으나 사산했다. 그리고 결혼 8년 만에 아들 봉수를 갖게 된다. 양아들 철호 씨는 이승만 실각 후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내가 셋째 아들이라고 하셨다”며 “나는 태어나 줄곧 (대통령 이승만을) ‘정신적 아버지’로 생각하며 살았다”고 말했다. 철호 씨는 “아버지 유해가 (하와이에서) 서울로 운구 되어 오기 전 날도 이화장으로 가서 부친 상의 예를 다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지도자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만20세(1895년) 되던 해 배재학당에 입학하면서다. 반대로 박승선 입장에선 신학문을 접한 남편이 급변해 가정을 등한시하고 끝내 구식 여자인 자신을 버리고 중혼까지 치닫는 파탄의 길로 들어서는 서막이기도 했다.
이승만은 당시 조선에 개신교 문명을 처음 전해준 아펜젤로가 세운 배재학당과 그들의 모임 공동체 상동교회(현 한국은행 건너편)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자유와 평등 사상을 익혔다. 그리고 그 사상은 자연스럽게 아내 박승선에게 까지 미쳤다.
이름도 없던 필부(匹婦)가 남편의 가운데 자를 따 ‘승선’이란 이름을 호적에 올릴(1916년) 수 있었던 것이다. 박승선은 상동교회에 다니며 한글도 배우고 서양 여선교사들로부터 영어도 배웠다.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과 그의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1885년 이래로 시병원, 동대문부인병원(보구여관 전신), 상동교회와 공옥학교 등을 세우고 활동하던 때였다.
당시 아펜젤러, 스크랜턴 모자 그리고 그들이 속한 조선감리회는 단순한 종교의 일파가 아니었다. 사회적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 교파 산하 상동교회 및 정동교회는 ‘민족교회’의 산실이었다. 그 교회 우산 아래서 독립운동가 전덕기 목사(상동교회)와 김구 이준 이상재 이회영 등 숱한 인물들이 뭉쳐 ‘105인 사건’과 ‘신민회 사건’의 주역이 됐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조선감리회의 영향력을 배경으로 전기적 인물이 되어 갔다.
또 이승만이 한 평생 ‘기독교 우파’가 된 근저에는 체험적 신앙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군주제 폐지를 주장한 역모 혐의로 종신형이나 다름없는 형을 받아 한성감옥에 수감(1899년) 됐을 때 감옥 안에서 신비체험을 했던 것이다. 정치인 이승만은 비록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가이며 끝내 독재자로 끝났으나 생활인 이승만은 근검과 절약이 몸에 밴 청교도였다.
이승만의 ‘절대반지’는 영어를 잘하고, 기록에 능한데 있다. 이를테면 출옥 후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으로 취임했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상동교회 역사연구자는 “개교 연설만 했을 뿐인데 교장이라는 타이틀은 무의미하다”라고 했다. 이승만은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중시한 까닭에 프로필 관리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어찌됐든 이승만은 적어도 1904년 말 1차 망명 후 귀국(1910년 10월) 무렵까지 본처와의 사이가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1899년 이승만이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수감되자 박승선은 대한문 앞에서 금식 시위를 벌였고 남편의 긴 수형 생활이 이어지자 조선에 온 선교사들에게 바느질한 엽랑주머니를 팔아 영치금을 댔던 아내였다. 더구나 1차 망명 기간 중인 1906년 미국을 불러들인 아들 봉수가 10개월 만에 그곳에서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는데도 그렇게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승만은 이런 아내를 1911년 일본 나가사키로 보내 서양 선교사들에게 영어공부를 시켰다. 1910년 귀국 전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승만이었니 구식 아내에게 신학문을 재촉할 만도 했다. 아내를 영어공부 시켜 미국으로 함께 들어갈 요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승선은 그곳에서 풍토병을 얻어 3개월 만에 귀국하고 말았다.
이승만은 귀국 1차 때 항일 강연과 미국 북감리회 조선선교부와의 유대를 면밀히 했다. 일제가 더는 놔둘 수 없어 손을 쓰려 하자 선교사 등을 통해 정보를 입수한 이승만은 1912년 3월 2차 망명을 떠난다.
남편이 2차 망명을 떠난 후 박승선은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황해도 평산의 시댁 재산을 지키기도 했다. 온전한 크리스천이 된 그녀는 오직 성경에 의지해 삯바느질과 삯빨래를 하며 견뎠다. 법사에게 사기를 당한 후 감리회 계통이던 창신동 옆 동대문부인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런 본처를 위해 자신의 할아버지 이규창 명의로 내려오던 창신동 땅과 집에 자신의 호적을 옮겨 박승선이 살도록 했다. 앞서 얘기했듯 불세례를 받아 ‘오직 성경’만 믿는 독립운동가의 아내였으므로 성서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타협 없는 ‘진보적 여인’임에 분명했다.
이 창신동에서 입양한 양자가 철호 씨다. 1960년대 초 철호 씨(당시 인천의 큰 교회 장로였다)는 언론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는 망명가 이승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여기고 살았다”며 “철들고 난 후부터 소문을 종합해 볼 때 이 박사의 친 자식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으며 지금도 그런 심경에는 변화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박승선이 1916년 창신동 집 개구멍받이로 얻은 아들이었다고 밝힌 인물이 철호 씨였다.
이때 부정설과 개가설이 떠돌았다. 즉 창신동 ‘포도나무집 이박사 댁’이 부정을 해 자식을 얻었다는 것이다. 앞서 게재 했던 신흥우 주장(1949년 ‘이승만’ 저자이자 고문인 올리버 박사와 신흥우의 면담 기록)과 유사하다.
이 부분에 대해 1965년 8월 11일자 조선일보에 이승만의 생질 심종철(당시 70세·서울 북아현동 거주)은 “철호는 내가 확인한 양자임에 틀림없으며 박 여사가 창신동에서 외로움에 지쳐있 때 개구멍받이 핏덩이로 받아 기른 아이였다”며 “항간에 떠도는 부정설, 개가설 등은 낭설”이라고 말했었다. 이어 “박 여사의 성격이 이를 데 없이 강직했었고 마음 또한 비길 데 없이 착하셨다”고 덧붙였다.
이 신문은 또 복수의 창신동 주민 인터뷰를 통해 동네 사람들이 ‘망명가 이 박사의 박 부인’이라며 깍듯이 대했음을 전했다. 전동교회(서울 견지동) 전도사로 신여성 스타일인데다 보종학원이란 계몽학교를 운영했으니 ‘박 부인’ 대접을 받았던 듯하다.
그런데 그렇게 수절하던 박승선이 창신동 지장암 법사에 땅을 빌려준 뒤 사기 및 폭력 사건('이승만 대통령 본처, 버림 받고 법사에 사기·폭력 당한 기구한 삶' 편 참조)에 연루되고 부정설 및 개가설이 돌면서 이승만과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
이와 관련 이승만과 박승선이 섬겼던 상동교회에선 황해도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 박사 댁의 기구한 삶’이 회자되곤 했다.
이 교회 산하 민족교회연구소 황해도 출신 연구원은 “당시 박승선은 남편이 1, 2차 망명을 하며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으므로 상상하기 어려운 감시와 협박을 받고 있었다”며 “일제 경찰로부터 수치스런 일을 당한 박승선이 모성의 본능으로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아이를 키우게 됐다고 이승만과 친구였던 나의 집안 어른, 당시 고향 어른들이 말하곤 했다”고 밝혔다. 상동교회는 황해도 엘리트들이 주축을 이룬 교회이기도 했다.
구식 여인 박승선은 결국 이승만으로부터 버림 받았다. 중혼한 남편이 본부인에게 훼절을 이유로 들었다. 시대가 낳은 영웅이 이승만이었다. 시대가 낳은 비극의 여주인공은 박승선이었다.
지금도 이승만 본처를 둘러싼 이야기는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에 그랬던 것처럼 봉인('이승만, 진보적 조강지처 호적 말소로 봉인한 이유'편 참조)을 요구 당한다. 이승만을 신화로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용납이 안 되는 역린으로 여긴다. 그가 독립운동가였던 것도 분명하고, 기독교 우파 지도자였던 것도 분명하다. 또 독재를 하다 이를 깨끗이 인정하고 하야한 인물이기도 했다. 또 사생활에 있어 첩 두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구한말 사람이었던 것도 분명하다.
문제는 ‘국부 신화’를 창조코자 하는 사람들이 결국 자기 신념으로 객관적 연구와 소통을 막는데 있다. 이승만에 대해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 지나간 역사다. 우리는 그 역사를 통해 앞으로의 교훈을 얻으면 된다.
그 이름도 없던 ‘봉사’ 박 소저의 끝은 어떻게 됐을까.
박승선은 1949년 5월 이승만이 내세운 이기붕에 의해 ‘친족관계 부존재 확인소송’에서 호적 말소 당한다. 그렇게 창신동 호적 말소에 성공한 대통령 이승만은 1949년 7월 28일 ‘서울 종로구 이화동 1번지’에 전적을 하고 1950년 4월 ‘호주댁’으로 불렸던 대한민국 첫 영부인 프란체스카와 결혼신고를 한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은 한강다리를 끊고 ‘몽진’했다. 박승선은 결국 다리를 건너지 못해 피난을 가지 못했다. 그해 9월 서울수복이 되면서 국군이 들어왔다. 박승선은 신당동 사돈집에 거하면서 북한군이 다 물러 간 줄 알고 대문에 붙은 삐라를 떼다 인민군 총격에 사망했다고 한다. 또 납북됐다는 설도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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