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中

직관과 느낌에 따라 순리에 맞게 나아가면 운명의 수레바퀴가 제대로 맞물려 돌아간다는 것 ㅡ 즉, 인생은 리듬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음악적 스토리라는 것 ㅡ 그것이 하루키 문학의 본질이자, 하루키의 본질이다.

설령 그의 스토리들이 지나치게 장황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느껴져도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느낌을 캐치하는 것이다. 하루키의 인생 역시 이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만하다. 하루키는 29세 때 야구장에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 아주 자연스럽게 소설가가 되었다. 이번 이 신작소설 역시 무려 40년이나 묵혀두었다가 작가의 필력이 상승하고, 다시 써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자 고쳐써서 새로 낸 것이다. 그의 소설들에는 항상 순간순간에 적합하게 상황을 캐치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나는 어느 정도의 구속은 즐기는 편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묘한 이야기’를 써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묘, 신기, 불가사의― 이런 식으로 정리한 다음에 글쓰기를 시작하면 자연스레 리듬이 생기고 그 흐름을 타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것들도 툭툭 튀어나오니까요. "

- 아사히 신문의 《도쿄기담집》 출간 기념 인터뷰에서 


인생은 리듬이며, 리듬이 곧 하루키 문학의 특징이다.

무신론자였지만 '마술적 사실주의' 기법을 주창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다르게, 하루키는 문학적으로도 본질적으로도 유물론자가 아닌 유심론자로 보인다. 그의 문학적 세계관은 지극히 리얼한 세계가 비리얼한 세계(이데아, 꿈, 환상)와 아무런 잡음없이 공존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하루키 자신도 그것을 철학적으로 아무 문제없이 인식하는 듯 하다.

이하 그의 신작에서 발췌.

 


"나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한 달에 한두 번 너를 만나 얼굴을 보고, 단둘이 긴 산책을 하고, 여러 가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서로의 정보를 친밀하게 교환하고, 보다 깊이 알아가는 일이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는 나무 그늘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입술을 포갠다 ㅡ 그렇게 근사한 시간에 그 외의 요소를 성급하게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가는 거기 있던 소중한 무언가가 망가져서, 다시는 원상태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신체적인 건 나중 일로 남겨두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혹은 직감이 내게 그렇게 일러준다."

- p.20-1

 

"암, 명령이고말고. 새벽 한시쯤 문득 잠이 깼는데 베란다 의자에 왠 여자가 앉아 있는 거야. 허연 달빛을 받으면서. 한 눈에 망령인 줄 알아봤네. 그런 미인은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세상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걸세. 그 모습에 나는 그저 말문이 막히고 몸이 얼어붙었어.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더군. 이 여자를 위해서라면 무엇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한쪽 팔, 한쪽 다리, 심지어 목숨까지 내줄 수 있다고. 그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어. 내 인생에서 품어온 모든 꿈을, 좇아온 모든 아름다움을 그 여자가 체현하고 있었네."

- p.99


"만약 그렇다 해도 너를 좀 더 잘 알고 싶어. 여러 가지를, 모든 것을."

"그중엔 모르는 편이 나은 것도 있을 거야."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면 자연히 그 사람의 모든 걸 알고 싶어지는 거야."

"그리고 그것을 떠맡겠다고?"

"그래."

- p.109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속삭이듯 말한다. "뭐든지 전부 네 것이 되고 싶다."

...

"하나도 빠짐없이 네 것이 되고 싶어." 너는 말을 잇는다. "너와 하나가 되고 싶어. 정말이야.

- p.110

 

"하늘이 잔뜩 찌푸린 오후, 나와 너는 옛 다리 옆에서 만나 남쪽 웅덩이로 향한다. 너는 장갑을 끼고 후줄근한 천으로 만든 자루를 어깨에 메고 있다. 자루에는 물통과 빵, 작은 담요가 들어 있다. 휴일의 피크닉이라도 가는 모습이다. 과거에 벽 바깥의 세계에서 너와 ㅡ 혹은 너를 꼭 닮은 '분신'과 ㅡ 데이트를 했던 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서 나는 열일곱 살, 너는 열여섯 살이었다. 너는 연녹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에 어울리는 엷은 초록색 ㅡ 마치 서늘한 나무 그늘 같은. 하지만 그건 다른 세계, 다른 시간에서의 일이다. 계절도 다르다."

- p.142

 

"너에게서 온 편지를 봉투를 뜯지 않고 책상 서랍에 넣어둔 채 한나절 묵힌다. 한시라도 빨리 읽고 싶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러나 그 편지를 곧바로 읽지 않는 편이 좋다ㅡ는 예감(혹은 기우)이 든다. 그래서 열어볼 때까지 한동안 시간을 둔다. 떨리는 마음으로."

- p.155

 

"그러나 한편으로는 확고한 예감 같은 것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이런 생활을 이어가다보면 분명 나 자신을 똑바로 유지할 수 없을 테고, 그 결과 내 안의 소중한 무언가가 손상될 것이다ㅡ 그런 예감이었다. 어딘가에서 매듭을 지어야 한다. 또한, 대략적이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너와 나의 관계에서 물리적인 거리는 정신적인 거리에 비하면 그리 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만약 네가 나를 정말로 원한다면, 나를 정말로 필요로 한다면, 이 정도 거리는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을 것이다."

- p.169

 

"도쿄에서의 내 생활은 몹시 고독하다. 너와의 접촉을 잃음으로써(그 상실이 일시적인지 영속적인지도 판단할 수 없는 채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가 힘들어진 것 같다. 예전부터 내 안에 그런 경향이 있긴 했지만 더욱 심해졌다. 너 아닌 누군가와 교류하는 일에서 거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학교에서는 어떤 서클이나 동호회에도 들지 않았고, 친구라 할 만한 상대도 찾지 못했다. 내 의식은 오로지 너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 네가 내 안에 남기고 간 기억에 집중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자취방에 틀어박혀 많은 책을 읽고, 흘러간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동시상영 영화를 보며 시간을 죽이고, 가끔 공공수영장에 가서 오래 수영을 했다. 걷다 지칠 때까지 정처 없이 긴 산책을 했다. 도쿄는 넓은 도시였고, 아무리 걸어도 길이 끝나지 않았다. 그 외에 또 무얼 했을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 p.171

 

"삽십대가 끝나고 마흔 살 생일을 맞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작은 동요가 일었다. 결국 누구와도 맺어지지 않고 이대로 평생을 외톨이로 보내는 걸까? 앞으로 나는 착실히 나이를 먹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욱 고독해질 것이다. 이윽고 인생의 내리막길에 접어들어 신체 능력도 점점 약해진다. 지금껏 별생각없이 간단히 해왔던 일들이 쉽지 않아질 것이다. 그런 미래의 내 모습을 아직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없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으리란 건 쉽게 상상이 된다."

- p.194

 

"벽은 말했다. 너희는 벽을 통과하지 못한다. 설령 하나를 통과하더라도 그 너머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짓을 하든 결과는 똑같아.

"듣지 마요." 그림자가 말했다.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그래, 달리거라. 벽이 말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었다. 얼마든지 멀리 달려가려무나. 나는 언제나 거기 있을테니. 

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똑바로 달려 그 앞에 있을 벽으로 돌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림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의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 그리고 나와 그림자는 단단한 벽돌로 이뤄져 있을 두꺼운 벽을 반쯤 헤엄치다시피 통과했다. 마치 부드러운 젤리층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처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감촉이었다. 그 층은 물질과 비물질 사이의 무언가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시간도 거리도 없고, 고르지 못한 알갱이가 섞인 듯 독특한 저항감이 느껴질 뿐이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물컹거리는 장애물을 돌파했다.

"내가 뭐랬습니까." 그림자가 귓가에서 말했다. "전부 환영이에요.""

- p.206-7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도시가 대단히 기교적이고 인공적인 장소란 겁니다. 모든 존재의 균형이 정묘하게 지켜지고, 그걸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빈틈없이 움직이고 있어요."

...

"바로 그겁니다. 도시는 남쪽 웅덩이가 위험한 장소라는 정보를 사람들 머릿속에 심었어요. 도시 주민이 벽 바깥으로 나갈 수단은 이 웅덩이가 유일하니까요. 북문에선 문지기가 눈을 번득이고 있고, 동문은 폐쇄되었고, 강 입구는 튼튼한 쇠창살로 막혀 있어요. 벽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인간이 이 도시에 그리 많진 않겠지만, 그래도 도시는 탈출 가능성을 봉쇄하려는 겁니다."

...

"그림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다행히 당신은 아직 영혼을 빼앗기지 않았어요. 우리는 여기서 하나가 되어 웅덩이를 빠져나가 바깥세계로 돌아갈 겁니다.""

- p.211

 

"애당초 이 도시를 만들어낸 건 당신 아닙니까. 당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어요. 실제로 조금 전, 눈앞에 우뚝 선 단단한 벽을 무사히 통과했고요. 그렇죠? 중요한 건 공포를 이겨내는 겁니다."

- p.212

 

"이쪽 '현실세계'에서 나는 중년으로 불리는 나이에 접어든, 이렇다 하게 두드러지는 특징이 없는 한 남자다. 더는 그 도시에 있던 때처럼 특별한 능력을 갖춘 '전문가'가 아니다. 눈에 상처를 내지도 않았고, 오래된 꿈을 읽을 자격이 주어지지도 않았다. 거대한 사회를 구성하는 몇 가지 시스템 중 하나, 그 톱니바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매우 작고 대체 가능한 톱니바퀴다. 그 사실을 얼마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p.226


"나는 그저 이 현실이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뿐이다. 이 장소의 공기가 내 호흡기에 맞지 않는다, 라고 바꿔 말해도 될 정도로. 이대로 여기 머무르면 머지않아 숨쉬기도 힘겨워질 것이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다음 역에서 이 전철을 내리고 싶다ㅡ내가 바라는 건 오직 그뿐이다. 무조건적으로 필요한 것,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것.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상사는(그리고 아마 동료들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현실이 나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 라고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그 깊은 위화감은, 아마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것이리라."

- p.228


"책을 읽을 생각도 들지 않고(내게는 상당히 드문 일이다), 음악을 들을 기분도 아니었다. 식욕도 거의 일지 않는다. 술을 마시고 싶지도 않다.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는다. 이따금 식료품을 사기 위해 집밖으로 나가도 눈앞의 풍경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노인, 사다리에 올라 나무를 손질하는 사람들, 통학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아도 현실세계의 광경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모두 아귀를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무대배경으로, 교묘하게 입체를 가장한 평면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p.229

 

 "오키에게 뒷일을 맡겨두고 나니 예상한 것 이상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미세하게나마 상황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감촉이 나의 의식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었다."

- p.241


"시곗바늘은 언제나처럼 앞으로 나아가며 시간을 쌓아갔지만, 나에게 진짜 시간은 ㅡ 마음의 벽에 박힌 시계는 ㅡ 그대로 움직임을 뚝 멈추었다. 그로부터 삼십년 가까운 세월은 그저 공허를 메우는 데 소비해온 것이나 다름없다. 텅 빈 부분을 무언가로 채울 필요가 있기에 주위에 보이는 것으로 그때그때 메워갔을 뿐이다. 공기를 들이마실 필요가 있기에 사람은 자면서도 무의식중에 호흡을 계속한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 p.254


"그런 설명을 하는 사이, 나는 문득 알아차렸다ㅡ큼직한 책상 구석에 모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을. 남색 베레모였다.

...

무언가와 무언가가 이어져 있다.

시간이 거기서 뚝 멎어버린 것 같았다. 시곗바늘은 먼 과거의 중요한 기억을 열심히 찾는 듯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바늘이 다시 움직이기까지 한동안 시간이 걸렸다."

- p.263


"글쎄요. 연애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정신질환이다, 라고 말한 게 누구였더라?"

- p.287


"그런 건 여기서 하루하루 일하다보면 차차 알게 될 겁니다.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요. 지금은 그런 데 크게 신경쓰지 말고, 일단 이곳의 업무를 차근차근 익히십시오."

- p.291


"하마터면 고야스 씨에게 물어볼 뻔했다. 왜 당신 손목시계에는 바늘이 없습니까, 라고. 그러면 고야스 씨는 그 이유나 사정을 신선히 설명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물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언가가 나에게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고 알리고 있었다."

- p.324


"그 중 <시편>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람은 한낱 숨결에 지나지 않는 것, 한평생이래야 지나가는 그림자입니다.'"

- p.358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으리라고 고야스 씨는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깨달았다. 그의 본능이 확연하게 알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고 말았다. 아마도 영원히."

- p.396


"살면서 몇 명의 여자를 만났고, 좋아하기도 했습니다. 제법 진지하게 사귀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소녀만큼 누군가를 열망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릴 것 같고, 대낮에 깊은 꿈을 꾸는 것 같고, 다른 생각은 하나도 할 수 없는, 그런 순수한 심정을 품은 적은요."

- p.447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소년은 이 현실세계와 마음이 이어져 있지 않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의미로는 뿌리내리지 않은 것이다. 임시로 매어둔 기구 같은 존재. 지상에서 살짝 떠오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풍경을 보고 있다. 그러니 매어둔 고리를 풀고 이 세계를 영언히 떠나버리는 일에 고통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다."

- p.535

 

"좀 뻔뻔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말했다. "식사든 뭐든 언제 한번 같이 하자고 해도 괜찮을까요?"

그 말이 매우 자연스럽게 막힘없이 내 입에서 나왔다. 망설임도 주저함도 거의 없이. 뺨이 약간 달아오른 느낌이 들 뿐이었다.

...

나는 가게를 나와 집까지 걸었다. 걸으면서 내가 그녀에게 한 말을 하나하나 떠올려보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그녀에게 식사를 권할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 p.552


"그 날 그녀의 어딘가에 특별히 마음이 끌려서 식사를 권하게 된 것이리라. 그녀와 나눈 짧은 대화 속의 무언가가 내 마음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저 내가 혼자 지내는 것에 지쳐서, 하룻저녁 기분좋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를 찾았을 뿐인지도. 하지만 아마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직감이 그렇게 알렸다."

- p.553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생전에 육백 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했습니다. 작곡가로도 인기를 누렸고 명바이올리니스트로 화려하게 활약했지만, 그 후 오랜 세월 전혀 회고되지 않아 잊힌 과거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대에 재평가의 기회가 왔고, 특히 협주곡집 <사계>의 악보가 출판되어 큰 인기를 끌면서, 사후 이백 년이 넘어서야 단번에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음악을 들으며 이백 년 넘게 잊힌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백 년은 긴 세월이다. '전혀 회고되지 않고 잊힌' 이 백년. 이백 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아니, 이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 p.555

 

""또 만나자고 해도 될까요?" 나는  출입문 안쪽에 서서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말 역시 거의 무의식중에 자연히 입에서 튀어나왔다.

- p.571

 

"당신은 인생의 아주 이른 단계에서 최고의 상대를 만났던 겁니다. 만나버렸다, 라고 해야 할까요."

- p.579

 

"그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게 분명하다고 나는 깨달았다. 최종적으로 이 세계를 떠난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다. 아마 아직 살아 있는 다른 어느 인간의 죽음보다도."

- p.591

 

"형은 굳이 말하자면 체격이 작고, 동생은 굳이 말하자면 탄탄한 편이다. 그러나 얼굴은 많이 닮았다. 한눈에 형제임을 짐작할 수 있다(아버지에게서 개성적인 귀 모양을 물려받은 듯 했다). 둘 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시원시원하며, 좋은 환경에서 자란 인상을 준다. 옷차림도 세련된 도시풍이다. 형은 슬림한 진남색 슈트에 흰색 셔츠, 녹색과 남색 스트라이프 넥타이, 검은색 울 코트. 동생은 딱 붙는 회색 터틀넥 스웨터에 베이지색 치노팬츠, 남색 피코트 차림이다. 머리를 딱 적당한 길이로 커트하고 왁스로 매우 자연스럽게 정돈한 것도 닮았다.

커피숍 주인은 '외모가 수려한 젊은 남자 둘'이라고 표현했는데, 그야말로 적확한 형용이었다. 두 사람 다 깔끔하고 총명해 보이는데 잘난 체 하는 구석은 없어서, 처음 만난 이에게 틀림없이 호감을 살 인상이다. 그대로 데려가 나란히 남성용 화장품 광고에 실어도 될 듯하다."

- p.640

 

"가르시아 마르케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콜롬비아의 소설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현실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짓는 벽 같은 것이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가?

벽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확실한 벽이다. 경우에 따라, 상대에 따라 견고함을 달리하고 형상을 바꿔나간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 p.684

 

"이 작품에는 무언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느껴왔다. 다만 당시의 나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무언가를 충분히 써낼 만큼의 필력을 갖추지 못했다. 소설가로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금의 내가 무엇을 쓸 수 있고 무엇을 쓸 수 없는지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발표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다.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천천히 손보다 고쳐써볼 생각으로 그대로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

재작년(2020년) 초에 이르러(지금은 2022년 12월이다) 마침내 이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다시 한번, 송두리째 고쳐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발표한 때로부터 꼭 사십년이 지났다. 그사이 나는 서른한 살에서 일흔한 살이 되었다. 두 가지 일을 겸하는 신출내기 작가와, 나름대로 숙련된 전업작가(이렇게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사이에는 여러 의미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소설을 쓴다'는 행위에 대한 내추럴한 애정에는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 p.763-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진지하게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 우리는 그 제한된 수의 모티프를 갖은 수단을 사용해 여러 가지 형태로 바꿔나갈 뿐이다ㅡ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 p.7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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