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투기자본과 일본 제국 (1868~1945): 1930년대 일본 육군이 폭주한 것은 국제투기자본의 사전 각본이었다
1. 국제투기자본과 일본 제국은 (1) (아프리카 수단에서 영국군이 참패한 예에서 보듯, 영국군만으로는 세계 지배에 군사적, 재정적 한계가 있으므로) 일본을 통한 아시아 (위탁/대리) 통치, (2) 일본의 산업화 및 이로 인한 투자 배당소득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었기에 메이지유신 시기인 1868년부터 1920년대까지 협력 관계에 있었다. 1870년대부터 세계 최초의 일본 국채 펀드를 영국 귀족 및 기업인들이 투자했던 것은 이 때문이며, 메이지 정부의 재정지원을 영국의 오리엔트 은행과 HSBC가 해줬던 것도 이 때문이다. 자딘매디슨 사의 사원이자, 푸치니의 희극 <나비부인>, 그리고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실존모델인 토마스 블레이크 글로버가 사카모토 료마를 지원하고, 미쓰비시 그룹의 토대가 되는 조선, 철도, 맥주 등 여러 사업들을 이와사키 야타로에게 넘겨준 것 역시 이 때문이다.
2. HSBC로 표상되는 영국 프리메이슨 귀족 세력이 1860년대부터 일본에 관심을 가졌고, 이토 히로부미 같은 조슈 5인방의 영국 유학을 주선해주었다면,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말부터 일본을 금본위제 체제에 편입시키면서 본격적인 관심을 주게 된다.
나다니엘 로스차일드, 제이콥 쉬프 등과 친분이 있던 마쓰가타 마사요시 총리는
3. 1902년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선포되고, 일본 제국은 로스차일드의 지원으로 승승장구한다.
4.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국 대리인인 유태인 제이콥 쉬프가 일본이 1904-5년 러일전쟁에서 필요한 국채의 50% 이상을 조달해주었고, 이 공로로 일본왕으로부터 1등급 훈장을 받는다. 로스차일드 세력이 러일전쟁에서 일본을 지원해준 것은 (시티 오브 런던의 경쟁세력인 베어링 세력이 관리하던)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 중국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함이었다. 로스차일드와 일본 제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음은 물론이다.
일본은 당시 인구가 1억을 육박하고 있었으므로, 중국과 러시아로 진출하여 인구 증가 문제 및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려고 했다.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후일 1930년대의 만주 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5. 다치바나 다카시가 <천황과 도쿄대>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였지만,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 1905년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의 굴욕을 선사했다.
일본은 끝까지 관철해야 할 강화조약의 절대적 필요조건으로 첫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자유처분권을 러시아가 승낙하고, 둘째, 일정 기한 내에 러시아군이 만주에서 철수하며, 셋째, 랴오둥반도의 조차권 및 하얼빈에서의 여순 간의 철도를 일본에 양도할 것을 내세웠다. 러시아는 이에 대해서는 거의 승낙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강화조약에 따른 비교적 필요조건, 곧 사정이 허락하는 한 관철을 시도한다는 조건 가운데 러시아로부터 배상금을 지불받고, 사할린섬을 할양받는다는 사항을 러시아가 완강히 거부하면서 회담이 난항에 빠졌다.
교착상태에 빠진 회담은 유태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루스벨트의 일본인 하버드대 동문인 가네코 켄타로가 루스벨트를 설득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알려져 있다)이 니콜라이 2세를 설득하여 사할린 쪽 부분을 할양하도록 함으로써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다.
어쨌든 미국이 개입한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인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결과를 얻음으로서, 일본 국내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6. 일본 정부는 국제투기자본 때문에 러·일 전쟁 후에도 높은 수준으로 유지했던 군사비 지출 탓에 국가재정에 가해지는 압박이 대단했다. 일본 정부는 전쟁 중인 1905년 1월 상속세를 제정해 4월부터 시행에 들어갔고, 전격적으로 소득세를 인상했다. 담배(1904년)와 소금(1905년)을 전매제도로 운영해 세입증가를 도모했다(담배 전매는 1985년, 소금 전매는 1997년까지 지속됐다). 영업세와 주세, 설탕소비세, 간장세, 등록세, 각종 거래세, 수렵면허세, 광업세, 인지세 등도 이 시기에 신설되거나 인상됐다.
일본은 결국 로스차일드 가문이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전쟁 특수’에 힘입어서야 국가가 재정난을 벗어나게 된다.
7. 국제투기자본이 일본을 통해 만주를 먹으려는 그림은 러일전쟁 시기부터 짰을 개연성이 높다. 이는 프랑스 로스차일드 주도 하에 남만주철도 회사가 1906년 11월 26일에 설립되었고, 그 초대 총재로 훗날 도쿄시장을 지내게되는 로스차일드계 고토 신페이가 선출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로스차일드계로 분류될 수 있는만큼, 고토 신페이는 훗날 소비에트와 커넥션을 갖게 된다.
국제투기자본이 일본을 통해 만주를 먹는 그림은 1925-27년 요시다 시게루의 만주/몽고 분리정책 같은 대중국 강경책에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8 . 국제투기자본은 수출로 먹고 사는 일본 경제의 흐름을 다이쇼 시대 (1912-1926년)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시킨다. 로스차일드-모건 재벌은 1930년 설립을 앞두고 있던 국제결제은행(BIS)의 출자국이 되는 조건으로 일본에게 금 수출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5대 열강의 일원 중 유일하게 금해금을 하지 않았던 일본은 1928년, 마침내 금해금을 결정하게 된다. (실제 시행은 1930년 1월 11일에 가서야 이뤄진다.)
9.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에드몽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1929년 대공황을 일으킨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던 영국과 미국의 산업재벌들, 특히 헨리 포드를 몰락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나, 그 후유증이 너무 컸다. (헨리 포드는 1920년대부터 반유대주의, 반로스차일드주의 운동을 하며 시온의정서를 대량 배포한 바 있는 프리메이슨이었다.) 세계 경제는 몇 년동안 처절한 고통 속에서 신음한다.
10. 일본은 1929년의 대공황에 1930년의 금해금이 겹쳐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게 된다. 적절하지 않은 타이밍에 실행한 일본의 금해금 정책이 어떻게 일본 경제게 악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보면,
a. 첫째, 환투기로 막대한 자금이 빠져 나갔다.
여러 정부를 거치며 금해금이 지연되는 동안 국내외 은행들에서 대량의 엔 매수, 달러 매도를 수행하여 100엔에 43달러 50센트의 환율을 만들었다가 과거의 금본위제로 복귀하여 100엔 = 49달러 85센트로 돌아가자마자 이 은행들은 바로 대량의 엔 매도, 달러 매수를 감행하여 1930년 1월부터 6월까지 단 6개월만에 2억 3000만엔의 금이 국외로 빠져나갔고, 이걸로 일본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참고로 이건 금해금 전년도 일본 정부 예산의 약 12%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고 한다.
b. 둘째, 금본위제 복귀로 인해 세계경제와 일본경제가 커플링되면서,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에 일본 역시 직격탄으로 맞게 되었다. 대공황이 1930년대 내내 지속되자, 일본 역시 그 타격을 안고가야 했음은 물론이다.
c. 셋째, 미국발 대공황이 일본으로 몰아닥쳤을 때 하마구치 내각은 당시 국제 금융의 중심지로 여겨진 시티 오브 런던만 안정되어 있다면 이 공황은 결국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기고 더 강력한 긴축 정책(14억 5천만 엔까지 세출을 삭감하기로 결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건 더 큰 오판이었다. 미국발 대공황에 런던의 시티가 버티다 못해 결국 두 손을 들고 말면서 경제 중심지가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고 영국을 믿고 긴축 정책을 밀어붙인 하마구치 내각의 경제정책은 공황을 키우는 삽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실수입 임금지수도 1929년의 103.9에서 1930년의 98.7, 1931년에는 90.7으로 심각한 임금삭감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즉 실업자가 만연하고 실업자가 아니라도 임금이 팍팍 내려가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이 끌어오르는 상태였다는 것. 국가적으로 봐도 일본의 GNP는 1929년의 13,941백만엔에서 1930년엔 11,245백만엔, 1931년에는 10,678백만엔까지 감소하고 주가지수는 1929년의 104.5에서 1930년에는 71.5, 1931년은, 53.0까지 폭락하고 만다.
이는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당시 정부에 대한 큰 불신을 안겨주었고, 만주사변과 5.15 사건에서 보여주는 군부의 폭주에 대한 열렬한 지지를 행하게 되는 주요한 동기가 된다.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본격적인 일본 군부의 대륙 침략은 일본 정부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적극적인 재정을 하도록 만들었고, 적극재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나아진 경기는 국민들로 하여금 이 심각한 경제위기에서 정부는 아무것도 안하는데 군부가 열심히 일해서 해결해 준다 & 해결해 주려 하고 있다는 여론을 형성하면서 대대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 것.
11. 엉망이 된 세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로스차일드, 록펠러, 모건 등 국제투기자본은 합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기획한다. 일본에서 국제투기자본은 그동안 아시아 대리통치를 위해 키워줬던 겐요샤/흑룡회를 버리고, 일본 육군의 폭주를 의도적으로 방치한다.
12. 1931년 9월 18일, 일본 육군의 폭주로 만주사변이 터진다.
13. 미쓰이 (로스차일드)로부터 재정지원이 끊긴 겐요샤/흑룡회는 1932년, 혈맹단 조직원들을 시켜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 이노우에 준노스케 대장대신, 그리고 미쓰이 재벌총수 타쿠마 단을 죽인다.
혈맹단의 타겟이 미쓰이, 미쓰비시 재벌이고, 미쓰이, 미쓰비시는 국제투기자본의 기업이었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하마구치 오사치를 총으로 쐈던 인물은 첫 재판에서 선고된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정권을 잡은 군부의 도움 덕택에 1940년에는 감옥에서 풀려나온다. 그는 종전 후, 야쿠자 출신의 CIA첩보원으로, (록펠러 가문의) 반공 운동을 했던 코다마 요시오와 함께 한 우익단체 임원을 맡기도 했다.
https://ja-m-wikipedia-org.translate.goog/wiki/%E4%BD%90%E9%83%B7%E5%B1%8B%E7%95%99%E9%9B%84?_x_tr_sl=ja&_x_tr_tl=en&_x_tr_hl=en&_x_tr_pto=sc
14. 국제투기자본은 독일에서는 스탠더드 오일, IG파벤, IBM, 코카콜라, 벤츠 등 각종 기업들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를 키워주고, 마침내 그가 1933년 1월, 총통에 당선되게 만든다.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3년부터 시온의정서를 널리 배포하고, 반유대주의 (반로스차일드주의)를 선동한다. 외자계 기업들과 프리메이슨 세력의 도움으로 정권을 잡았지만, 그 최종적인 배후가 로스차일드였다는 생각은 못했던 모양이다.
15. 다치바나 다카시의 <천황과 도쿄대>가 잘 지적했듯이, 이 시기 대학에 대한 정부 당국의 검열이 일제히 강화된다. 불온한 발언과 학설을 이유로 정부가 법학부 교수 외 39명의 교수를 해임시킨 교토대 ‘다키가와 사건’(1933년 5월)과 천황의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도쿄대 교수를 해임시킨 도쿄대 ‘천황기관설 문제’(1935년)가 대표적이다.
천황기관설 문제 이후 우익 세력의 공격은 모든 방면으로 펼쳐져, 좌익 혹은 자유주의 경향을 보이는 도쿄대 교수들은
예외 없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대학 측이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고 말았다. 당대 도쿄대는, 특히 도쿄대 법학부와 경제학부는, 천황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전쟁에 필요한 다양한 이론적 프로파간다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튿날 우리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각자 서명하여 우치다 총장에게 건네주고는 깨끗하게 대학과 결별했다. 우리는
대학이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을 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또 우리가 이제 와서 대학에 돌아가도 파시즘이 지배하는 경제학부
안에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총장의 이런 태도에도 별로 분노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략) 그 비애는
우리의 패배가 아니라 오히려 유서 깊은 도쿄대의 자유가 패배한 것, 특히 창설 이래 20년 동안 우리가 선두에 서서 싸워온 도쿄대
경제학부의 자유주의가 괴멸한 것에 대한 비애였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대학에서 추방되는 것을 서글프고도 냉정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차가운 마음으로 특히 경제학부와 영구히 결별했다.” -2권 54장 경제학부 교수를 감옥에 매장한 스파이 H, 618쪽
16. 대공황의 원흉, 에드몽 제임스 로스차일드가 1934년 사망한다.
17. 1936년, 일본 육군의 폭주로 일어난 2.26 쿠데타로 일본 정국이 요동친다. 1936년 2월 26일, 부패한 정치가들과 재벌을 척결하고 정치권력을 천황의 친정으로 돌리는 것을 목표로 젊은 장교들과 하사관을 중심으로 1483명이 쿠데타를 기도하였다. 2월 26일에 발발한 이 사건은 4일째인 2월 29일에 진정된다. 그들이 척결 목표로 한 것은 당시 오카다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과 미쓰이, 미쓰비시 등의 재벌가였다. 겐요샤/흑룡회 세력과의 접점도 주목할만하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육군보다 해군쪽에 더 인맥이 있던 히로히토 일왕이 단칼에 육군 황도파의 요구들을 거부하고, 강경하게 진압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이다.
18.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된다.
중일전쟁의 결과, 영국계 HSBC는 1941년 12월, 아시아에 있는 대부분의 지점 문을 닫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영업을 재개한 것은 1947년에 가서야 이뤄진다.) 아시아 경제의 중심지도 상하이에서 홍콩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 때문에 국제투기자본에게 밉보여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핵무기로 쑥대밭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을 정도로 이 은행은 국제투기자본의 중요한 전략 자산이었다.
단,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것 까지는 영미 자본의 의도에 맞았다. 이 때문에 미국이 중일전쟁 기간 내내 장제스에 대해 거의 지원하지 않았던 것이며, 조지프 스틸웰을 중국의 군사고문으로 보내 장제스의 최정예 부대를 말아먹고 중요한 곡창지대를 상실케하여, 중국은 일본과 소모적인 싸움을 계속해야만 했던 것이다.
19. 1940년, 국제투기자본의 하수인인 헨리 스팀슨 전쟁부 장관은 일본에 대한 공격적 경제 제재를 시작해서 마침내 수출 통제법The Export Control Act을 통과시킨다.
1940년 중반, 미국은 태평양 함대를 하와이로 이동시킨다. 전쟁을 미리 대비한 이동 패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해 10월, 미국은 금수 조치를 강화해 '영국 및 서반구 이외 지역으로의 철강 수출'을 전면 금지한다.
1941년
7월과 8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내 일본 자산을 전면 동결시키고, 일본 선박의 파나마운하 접근을 금지했으며, 원유와
천연가스의 대일본 수출을 금지했다. 이 조치로 일본은 국제 교역량의 4분의 3, 석유 수입의 80%가 차단되었다.
자원 공급을 차단하여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게 만들려는 국제투기자본의 기획이었다.
20. 국제투기자본은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을 '악의 축'으로 하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 위해 작전계획을 짠다.
1941년 1월, 미국외교협회(CFR)는 일본의 대외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중국의 대일 항전을 지원하고 대일 경제 제재를 단행하자는 제안을 내놓는다. 원자재가 부족한 일본은 미국의 경제 재재에 극히 취약하며 경제제재를 통해 일본의 일방적 군사행동을 자제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경제금융분과위는 1941년 1월 15일자 보고서 E-B 26("미국의 극동 정책")에서 일본의 동남아 진출을 저지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며, 일본의 행동을 기다리기보다 먼저 선제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경제적 이유로 "필리핀 열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영국령 말라야는 전시 평화시를 막론하고 미국에 매우 필요한 원자재의 산지다. 따라서 적대적 세력이 이 지역을 장악한다면 미국의 행동의 자유에 커다란 제약을 초래할 것"이란 것이었다.
둘째, 전략적 이유로 일본의 동남아 점령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대독일 항전 능력을 약화시키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동남아 식민지를 잃게 되면 핵심 전쟁 물자의 공급이 위협받고 아시아 내 영국의 위상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일본의 동남아 장악은 영제국 해체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져 호주와 뉴질랜드 등 영연방 국가들이 (영국 방어를 포기하고) 자국 방위에만 전념할 위험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다음 3가지 방책을 내놓았다. 첫째, 전쟁물자를 비롯해 중국에 최대한의 원조를 주어 전투능력을 향상시킨다. 그리하여 중국군이 일본군을 최대한 중국 대륙에 묶어놓도록 한다. (이미 1937년의 중일전쟁 역시 이러한 기획의 일환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둘째, 영국, 네덜란드와 함께 동남아 방위에 협조한다. 이를 위해 미 해군 및 공군을 파견한다. 셋째, 일본에 대한 전쟁물자 공급을 차단해 전쟁 수행 능력을 약화시킨다.
위원회는 "이 세 가지 방책을 통해 극동지역에서 일본의 세력 팽창을 막을 수 있다...물론 (선제 행동을 통한) 위험은 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따르는 위험도 있다. 상황에 대해 단편적,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것보다는 조직적이고 능동적인 대응에 따르는 이득이 훨씬 크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동남아 진출이 가시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미 CFR은 그랜드 에어리어 확보를 위한 최대 장애물로 일본을 지목하고 일본과의 전쟁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랜드 에어리어 확보를 위해 대중 군사 지원 및 대일 경제 제재가 필요하다는 CFR의 정책 제안은 1941년 1월 28일 헐 국무장관에게 전달됐고 일본의 동남아 침공이 시작된 직후인 1941년 8월 미국 정부에 의해 공식 채택됐다.
21. 국제투기자본의 꼬임에 넘어간 도조 히데키 및 일본 육군은 전쟁을 만류하는 군장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평양 전쟁을 결심한다. (* 하버드대에서 유학했고, 주미 일본제국 대사관 국방무관으로 근무했던 '미국통'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제국 해군제독도 결사 반대했다.) 마침내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다.
22. 전쟁 초기에는 일본 육군이 승전을 거듭했고, 이에 경쟁 세력이었던 일본 해군도 자극을 받아 더욱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전황은 일본에 불리해져만 갔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일본제국 해군제독이 전쟁 시작 전부터 지적했듯이, 미국과 싸우기에는 도저히 일본의 체급이 맞지 않았다.
수상이자 육군상을 겸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는 미드웨이 해전(1942년 6월 4일부터 6월 7일)에서 해군이 제1항공함대 궤멸이라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히로히토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해군에 문의해 겨우 패배를 알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도조 히데키의 반응은 전쟁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아닌 육군이 그렇게 반대하던 작전에서 당하니 꼴좋다는, 분노가 섞인 비웃음이었다 한다. 도조 히데키는 해군 군령부로부터 굉장히 축소된 피해 보고를 받고 그대로 천황에게 상주했다. 그런데 해군에게 따로 보고를 받은 천황이 말하는 수치와 도조 히데키가 보고받은 수치가 달라 그제서야 얼마나 큰 피해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히로히토 일왕이 2차 대전의 전범이기는 해도, 육군이 아닌 해군 쪽 지휘라인과 맞닿아 있었다는 점에서, 도조 히데키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기 보다는 '수동적으로' 동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도조 히데키는 처음부터 일본 육군의 메이저였던 사람은 아니고, 일본 육군 내 마이너 세력, 즉 비조슈벌 소장파였다. 국제투기자본은 1860년대부터 자신들과 끈이 있던 조슈/사쓰마 세력을 활용한 게 아니라, 비주류 세력을 활용해서 일본 육군의 폭주를 부추겼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참고로, 1860년대부터 국제투기자본과 끈이 있던 조슈번 세력의 직계 후손이 바로 아베 신조다.
23.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일본 내 친미/친영파 요한셉 그룹은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하나 실패한다.
US스틸을 통한 모건계 인맥이자, 시라스 지로 (요시다 시게루 라인) 인맥인 닛산 창업자, 아이카와 요시스케는 일본의 전쟁패배를 예측해 닛산의 만주 철수를 고려했으며, 유태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계획을 검토하기도 했다. 유태인의 만주 이주를 검토한 것은 로스차일드에게 점수를 따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
24. 국제투기자본의 기획대로, 연합국은 승리하고, 추축국은 패배한다.
제2차 세계대전 덕택에 서구 선진국들의 경제는 완전히 회복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정책은 실패했지만, 미국은 전쟁을 통해 비로소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제투기자본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언제 전쟁을 했냐는 듯이 마샬 플랜과 콜롬보 플랜, 그리고 세계은행을 통해, 서독과 일본을 지원해주었고, 일본 재벌 (미쓰이/미쓰비시) 및 일본 천황의 권위를 복권시켜준다.
나치과학자들을 포섭한 미국의 페이퍼클립 작전은 일본군 생체실험 주도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미국은 전후 전범들과의 사법거래를 통해 생체실험을 통해 나온 자료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었다.
경제통이라 쓸모가 많다고 여겨졌던 '전범' 기시 노부스케는 국제투기자본에 의해 복권되고, 급기야 몇년 뒤에는 일본국 총리대신으로 화려하게 부활했으며(그의 동생 사토 에이사쿠 역시 총리로 집권했다), 그가 1955년에 만든 자민당은 아직도 일본을 통치하고 있다.
국제투기자본은 제2차 대전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었지만,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약 5천 500만명의 사망자를 초래하였다.
tag: 역사, 일본, 영국, 미국, 음모론, 로스차일드, 코다마 요시오, HSBC, 미쓰비시, 미쓰이, 러일전쟁, 만주, 금해금, BIS,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아돌프 히틀러, 겐요샤, 흑룡회, 다치바나 다카시, 천황제, 중일전쟁, 장제스, 헨리 스팀슨, 프랭클린 루즈벨트, CFR, 도조 히데키, 하버드 대학교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