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라의 실패와 후한의 시작: 왕망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급진적인 개혁(토지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을 펼치다가 나라를 대혼란에 빠뜨렸고,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 송나라 왕안석의 개혁 역시 실패했다 / 동양식 이상경제의 상징인 정전제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 현실과 이상은 언제나 다르다는 것을 멍청한 정치인, 탁상공론 분배론자들은 이해해야

 


  • 신나라의 실패와 후한의 시작: 왕망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급진적인 개혁(토지 국유화, 노비 매매 금지 등)을 펼치다가 나라를 대혼란에 빠뜨렸고, 전국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3. 실존했는가?[편집]

    정전제를 현실에 적용하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일단 농지가 현대의 경지정리된 밭처럼 반듯한 네모로 나올 리가 없다. 모양이 다르고 토질이나 환경도 차이가 있을 테니 당연히 소출량도 다를 터, 누구나 좋은 땅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일단 분배받은 후도 문제이다. 가정마다 부릴 노동력에도 차이가 난다. 밭 크기가 똑같으면 아들을 많이 낳아서 10대 초반의 아들들처럼 가용 노동력이 많은데 먹일 입이 많은 가정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들을 못 낳았는데 가장이 힘이 약하거나 병석에 누웠다거나 혹은 죽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 상식적으로 엄청난 변수가 발생할 텐데, 고작 9분의 1의 세율로 이 행정력을 어떻게 확보하고 이를 어떻게 납득시킬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 [3] 이런 문제 때문에 왕망이 정전제를 강행했을때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고 무엇보다 조세가 안 걷혀 신나라는 바로 망하고 후한이 들어섰다.

    상나라 춘추전국시대가 철기로 넘어가는 시대라는 점에 착안해, 정전제를 당시 아직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등장하기 이전이라 조잡한 농기구만으로 농사를 짓기에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만 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농업방식이라는 설명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전제가 정말로 고대 중국에서 실존했는지부터 의심받는 판국에 거기에 또다른 가설을 얹은 것이 증거가 있을 리도 없다. 또한 공동경작을 시행한다면 그냥 여전제처럼 공동농장을 해서 공동경작 공동분배를 하지, 굳이 우물 정자로 집집마다 땅을 나눠줄 필요가 없다.

     

     

     

    ① 왕안석의 개혁(신법)은 왜 실패했는가?

    왕안석의 신법은 쉽게 말해 "국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해 부를 재분배하겠다"는 11세기판 국가사회주의(또는 강력한 케인즈주의) 정책이었습니다. 농민들에게 저리로 돈을 빌려주는 청묘법, 중소 상인을 보호하는 시역법 등을 펼쳤습니다.

    • 실패 원인 (휴먼 리스크): 취지는 좋았으나 시스템을 굴리는 하급 관리(인간)들의 본성을 간과했습니다. 실적을 올려야 했던 관리들은 돈이 필요 없는 부유한 농민에게도 강제로 고리대금을 받으며 청묘법을 악용했고, 시장의 유통망을 국가가 독점하려다 보니 경제 체질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결국 민심이 돌아서고 정적들의 맹공을 받았습니다.

    • 왕안석의 말년: 1076년 황제의 신임을 잃고 재상에서 물러나 금릉(남경)으로 은퇴했습니다. 자신이 평생 고친 법들이 정적들에 의해 잔인하게 폐지되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고독과 화병 속에서 1086년(65세)에 쓸쓸히 사망했습니다.

       

       

      8. 비판[편집]

      후대에 대표적인 개혁자로 평가받지만 소위 '개혁 정치인'들이 다 그렇듯 동시에 비판도 많이 받았다. 개혁 부분에 집중하여 고평가하는 사람도 있었고 최근엔 이쪽이 다수파지만, 한동안은 그 폐단에 주목하여 나쁘게 보곤 했었다. 특히 성리학을 세워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남송주희가 사마광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저평가되어 온 편. 주희는 왕안석 또한 나름대로 유능한 명신으로 평가했지만 신법에 대해선 상당히 비판적이었으며 북송의 멸망 원인으로 이 신법의 부작용을 제기하였다. 이 때문에 성리학 국가였던 조선에서도 왕안석의 평가는 나빴다.

      왕안석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신법 자체가 비현실적 내지는 백성들의 이익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이미 당대에 소동파는 희녕변법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가한 바 있는데, 일단 정부의 전곡 출납 장부의 곡식 가격 자체가 이미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어 있고, 품질이 떨어지면 팔 수 없고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거래 자체가 성립이 안되니 조정에서 사들이고 되파는 가격은 시장가격보다 높아 백성들에게 가해지는 부담은 똑같거나 구법 이상이고 차라리 상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비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희녕변법 후 신종은 32곳이나 되는 궁내 창고에 비단을 꽉 채우고도 모자라 창고를 추가로 지었을 정도였지만, 소동파는 왕안석의 신법이 민간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라 지적하고[31] 상홍양에게 속은 한무제 말년에 이르러 도적들이 봉기하고 난이 일어났다며 만약 무제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거나 소제가 법을 고치지 않았다면 한나라는 얼마 안 가서 망했을 거라고 하기까지 했다.[32] 그러니까 왜 한무제랑 똑같은 짓을 하느냐는 비판이었다. 사실 상홍양(한무제)이나 왕안석이나 외부의 적(흉노, 요-서하)을 막기 위해 이런 정책을 추진했다는 걸 생각하면 소동파가 왜 이런 비유를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나마 한무제나 상홍양은 흉노를 막을 재정을 만들어 실제 흉노 원정에 제대로 쓰기라도 했지 왕안석의 신법은 부작용만 일으켰다는 점에서 말 부터가 그런데 무제는 경제 시기부터 지어진 군마용 말목장을 더 지어 말을 기르게 했지만 왕안석의 보마법은 군마와 짐말이 다르다는 점에서 이미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신법 중 가장 논쟁거리였던 청묘법 또한 정부가 민간 사금융보다 더 높게 고리의 이자로 돈놀이를 하느냐는 비판이 나왔다. 더해서 청묘법이 처음 시범적으로 실시된 하북일대에서는 백성들이 단체로 존경받던 전 재상이자 명신 한기에게 몰려가 "청묘인지 뭔지 하는 것 좀 황제폐하께 제발 없애달라고 해주십쇼. 이것 때문에 죽겠습니다."라고 집단행동까지 했고[33][34], 신법당과 왕안석의 주장을 지지해주던 인사들까지 이를 비판했다. 또 보마법은 잠깐 지나가는 글에도 비현실적이라는[35] 비판이 이어진다.

      즉, 왕안석의 개혁은 말만 국가와 일반 서민층인 농민, 중소상인들을 위한 것이지 실질적으로는 정부가 기득권을 대체해 대지주, 대상인의 위치를 독점해 민간의 이익을 독차지하고, 정부가 사채놀이를 하며 백성들을 수탈하는 짓이 아니냐는 것이 정책 자체에 오랫동안 가해진 비판이었다.

      이는 조선에서도 이어졌다. 홍대용의 계방일기 같은 것을 보면 세손(정조), 유학자(실학자 포함)들이 한 목소리로 왕안석을 조롱하곤 했다.
      "여기서 왕안석이 재상이 된 것이 역사의 쾌사입니다."
      "어찌 그렇소?"
      "그러지 않았다면 왕안석이 간신인 것이 밝혀지지 않고 현자로 평가되었을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저런 분위기였다. 왕안석이 얼마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지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그 이전에 대동법 실시 과정에서 대동법 실시를 주장하는 측은 자신들이 왕안석 같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정작 정조는 왕이 되고 난 후에는 왕안석을 옹호했다.
      정조 : "왕안석은 사마광과 비교하면 인품은 몰라도 재주는 뛰어나지 않소?"
      다른 신하들 : "사마광은 거의 완전한 사람입니다. 정치를 오래 했다면 삼대의 정치를 이뤘을 것입니다"
      채제공 : "옛법을 고치고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요즘 젊은 것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사마광이 더 낫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조 : "그렇소. 주자도 왕안석이 명신이라 일컬었소."

      두 번째 비판은 왕안석의 태도와 신법당에 대한 것이다. 먼저 왕안석은 중앙 데뷔 당시부터 특유의 성격과 그 성품 때문에 반대가 심했다. 당시 조정 내에서 한기 등 경험 많은 원로들과 강직한 성품을 가진 오규 같은 이들조차 함께 일할 당시 경험한, '당연한 것조차도 자기가 싫으면 무조건 자기합리화하며 듣지 않는 태도'와 업무 처리에서도 현실을 파악하지 않은 채 잘못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외고집' 기질을 이유로 강하게 반대했다.[36] 하지만 신종은 원로들의 조언이나 군목사로 함께 일한 이후 경험을 토대로 기용에 반대한 오규 등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고, 반대의견을 낸 장지기에게는 과거 그가 구양수를 비판할 때 개인가정사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대놓고 면박을 줬다. 그러나 결국 이들의 주장처럼 왕안석의 가장 큰 결점으로 지적된 성격과 업무 스타일은 개혁 집행과정에서 갈수록 문제를 발생시킨 결과, 왕안석을 지지했던 이들조차 정적으로 만들어 결국 왕안석은 실각, 송나라는 개혁의 실패와 부작용으로 긍정적 효과보다는 악영향이 커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왕안석은 빠른 개혁을 위해 지지층을 최대한 늘리려 노력했고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이들을 대거 개혁 업무 전면에 추천해 중앙 요직을 차지하게끔 했다. 따라서 신법당은 순식간에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문제는, 그렇게 세를 늘리다 보니까 여혜경, 채경, 증포와 같이 영 문제가 많은 인물들이 신법당의 대부분 구성원을 이뤄버렸고, 왕안석 생전에도 뒤가 구린 짓을 해서 문제가 된 인물들이 많았다.[37]

      왕안석과 학문적 성향이 맞고 잘 통한 까닭에 일찍부터 절친이었던 여혜경의 경우에는 사마광이 왕안석에게 해준 뼈있는 조언처럼, 자신과 왕안석이 실각될 위기에 처하자 왕안석을 공격했다. 이후에도 다시 복직한 상황에서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해 과거 왕안석의 발언들을 증거로 내세워 공격해 사임하게 만들었다. 또 증포의 경우, 신법의 열혈 지지자이자 추진 세력이었음에도 결국 왕안석이 실각하는 데 합세했다.[38] 왕안석 죽은 후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파당을 짠 것도 유학자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39] 거기다 그 파당의 내부 상태가 이러니 왕안석을 포함한 신법당 전체가 간신이라는 후대의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이다. 사실 왕안석이 질이 나쁜 인물들을 믿고 그들을 대거 추천해 키웠다는 점과 파당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권력을 쥐어준 것 자체로도 충분히 간신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행동이다.

      그 외에, 최근에는 저런 조치들로 북송을 구할 수 있었느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북송 시대 송휘종 무렵에 승자는 채경을 중심으로 한 신법당 측이었고, 구법당은 역적으로 몰려 모욕당했다. 또한 신법도 완전히 묻힌 것은 아니어서, 상당히 많은 정책이 발굴되었고 구법당 옹호측인 주희도 신법과 비슷한 정책을 내놓기도 했었지만 결국은 북송이나 남송이나 망했기 때문이다. 다만 북송의 멸망의 원인은 송신종부터 이어온 당쟁에도 있지만 송휘종의 사치와 낭비도 한몫 했으며 채경이 비록 신법당 측이라지만 그가 제대로 된 신법 정책만을 한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북송이 망한 결정적 원인은 막장 군주인 송휘종과 북송의 잘못된 외교정책에 있었다.[41]

      아무튼 이제나 저제나 평가는 "현명한 개혁자 왕안석이 수구꼴통들의 음모에 매장당했다."나 "간신 왕안석의 사악한 음모가 나라의 수명을 깎았다"로 갈린다. 물론 세상 모든 정치가 이렇게 나뉜다고 봐야한다.

      9. 왕안석에 대한 어록[편집]

      왕안석은 학문을 좋아하지만 낡은 것을 고집하기 때문에 논의가 실제와 맞지 않을 것이니 만약 왕안석에게 정사를 맡긴다면 틀림없이 많은 것이 바뀔 것입니다.

      왕안석이 정말로 등용된다면 천하가 반드시 혼란해질 것이니 공들은 마땅히 이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오.

      문장과 절개 있는 행실은 당대에 뛰어났고, 더욱이 도덕과 경세제민을 자신의 책무로 삼았다. 신종으로부터 예우를 받아 재상의 지위까지 이르렀고 세상은 바야흐로 왕안석의 장래를 바라보며 이왕삼제(二帝三王)의 성세[42]를 다시 보기를 바랐을 것이다. 왕안석은 이에 재정과 국방을 선무로 삼는 데에만 급급하여, 흉악하고 간사한 이들을 끌어들이고 충직한 이들을 배척하였으며, 조급하고 흉포하게 천하 사람들을 부려서 경박하게 그들의 삶을 즐기는 마음을 허비시켰다. 결국에는 간사한 이들이 잇달아 잔학한 짓을 자행하여 사해에 해로운 독을 퍼트렸고, 숭녕(崇寧), 선화(宣和) 연간에 와서는 화란이 일어났다.

      송사 권327 왕안석전, 주희의 비판
      신종: "왕안석을 재상으로 삼는 것은 어떠하오?"
      한기: "왕안석을 한림학사로 삼으면 자리가 남지만, 왕안석을 재상의 자리에 두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지만 신종은 한기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왕안석을 재상으로 삼았다. 아아! 이것은 비록 송나라의 불행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왕안석의 불행이기도 했다.

      송사 권327 왕안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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