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 중 어느정도가 사실? 전부 사실? : 1727년부터 1732년에 걸쳐, 파리의 성 메다르라는 작은 교회에서는 일련의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현대의 독자들은 그 사건을 공상에 불과하다고 웃어넘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공산만은 아닌 것 같다. 그것이 진실이었다고 증명하는 여러가지의 고문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 재판관 등 사회적인 신뢰도가 높은 인물들의 이야기도 포함되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의학자나 철학자나 과학자나 현 단계에서는 아직 그 기적의 해명을 시도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기적은 파리의 부신부 프랑수아 드 파리의 매장에서 비롯되는데 1727년의 일이다. 프랑수아 부신부는 당시 37세의 젊은 나이였으나 병을 치유하는 힘을 가진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그는 코넬리우스 얀센 사제(1585~1638, 화란의 가톨릭 신학자)의 신봉자였다. 그는 인간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제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프랑수아 부신부는 자기에게 구비된 병의 치유력이 신에게서 주어졌음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관은 성 메다르의 높은 제단 뒤의 무덤 속에 안치되었다. 참석자들은 차례대로 꽃을 바쳤다. 그 가운데 불구의 어린이가 하나 있었다. 그 아이는 관 위로 넘어질 뻔했다. 당황한 아버지가 손으로 부축하는 순간 아이는 몸을 뒤틀며 발작을 일으켰다. 몇 사람이 교회 경내의 조용한 구석으로 아이를 끌고갔다. 그러자 갑자기 경련이 멈추었다. 아이는 눈을 뜨고 놀란 듯이 두리번거리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믿기 어려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장례식의 참석자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아이는 근육이 전혀없는 오른발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에 그 오른발이 건전한 왼볼과 같은 상태로 치유된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절름발이, 문둥병, 곱사등이, 장님 등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상류계급'의 사람 중에는 이 기적의 치유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프랑수와 부신부의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뱅이였다. 부자는 그 정신상의 문제를 가톨릭의 예수회에 맡기고 있었는데 훨씬 학문적이며 세속적인 지혜도 통달한 교파이다. 그러나 무지나 인간의 허약함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는, 이 경이로운 일들을 설명할 수 없음을 점차 알게 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예수회는 기적이란 것은 '사기'거나 악마의 소행이라고 퍼뜨렸다. 그 결과 파리의 상류계급들은 성 메다르 교회의 경내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왔다가 충격을 받고 돌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그중에는 인쇄물을 통해서 증거를 남기는 사람도 있었다. 가령 필립은 인과관계로 이 현상의 설명을 시도했다.
한편 베네딕트회의 수도사 베르나르 루이 드 라 타스트와 같이 기적을 행하는 사람을 신학적인 근거로 탄핵하고자 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타스트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나 기적의 대상자에게서도 사기행위 또는 엉터리라는 증거를 적발해내지는 못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증언이 쌓여 갔다. 이 시대의 위대한 철학자의 한 사람인 데이비드 흄(1711~1776)은 그의 저서 <인간의 이해에 관한 탐구(1758)>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한 인물에게서 그렇게 많은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은 전에 없던 일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 지식의 시대에 그 인격 및 지식을 믿을 수 있는 다수 인사의 눈앞에서 많은 기적들이 증명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많은 상황이 단일한 사실을 확증한 것을 우리는 역사상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 사건을 조사한 사람 중에 루이 아드리앵 드 페주라는 법률가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눈으로 본 것을 친구인 판사 루이 바실 카레 드 몽제롱에게 말하지만 판사는 가볍게 물리친다. 마술사에게 속았거나 축제 때 흔히 볼 수 있는 마술사의 경우를 '기억'이라고 떠들어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는 페주와 동행하여 교회를 구경하러 갔다. 법률가라는 인텔리가 어쩌다가 속았는지를 확인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리하여 1731년 9월 7일 아침에 출발한다. 그러나 교회를 출발할 때 몽제롱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후에 그는 목격한 것을 부정하기는커녕 투옥조차 감수하게 된 것이다.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뒤 판사가 최초로 목격한 것은 땅 위에서 엎치락 뒤치락하고 있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었다. 믿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때로는 등을 뒤로 젖히고 뒷머리가 발뒤꿈치에까지 이르도록 몸을 굽히도록 했다. 여자들은 모두 긴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발목에서 묶여 있었다. 폐주의 설명에 따르면 부신부의 신비의 축복을 받는 여성은 이것이 지금까지 의무로 되어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거꾸로 서거나 몸을 흔들거나 하면, 호기심이 많은 남자들이 구경하러 교회로 몰려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 의식에 남자가 참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몽제롱은 여성이나 소녀가 참혹하게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게 비쳤다. 사나이들은 몽둥이나 철봉으로 여자를 구타했다. 땅바닥에 엎드려 있는 여자도 있었는데 그들은 분명히 거대한 무게의 바위같은 것에 짓눌린 몰골이었다.
이 여성들은 모두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더 때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런 난폭한 처치에 의해서 여자들은 병이나 불구의 몸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 내의 다른 장소에는 19세 정도의 장밋빛 얼굴의 예쁜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탁자 앞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먹는다. 그녀에게 접근하여 접시에 담긴 것을 본 몽제롱은 질겁을 했다. 겉모양과 그 냄새로 보아 인간의 오물임에 틀림없었던 것이다. 구역질 나오는 오물을 입에 넣으면서 그녀는 때때로 노란 액체를 마신다. 그것은 오줌이었다. 소녀는 노이로제의 치료를 위해서 왔다고 했다. 하루에 몇 백 번 손을 씻지 않으면 안 되고 남이 손을 댄 음식물은 절대로 입에 넣지 않았다.
부신부의 기적은 이 소녀도 치료하기에 이른다. 이런 종류의 상황은 정신병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고 어처구니없는 광경이 또 기다린다. 그녀는 이 음식(?)을 먹은 후 기분이 나쁘다는 듯 입을 벌렸는데 그 입에서는 하얀 액체가 흘러나왔다. 페주는 그것을 잔으로 받았다. 그것은 마치 우유 같았다.
인간의 배설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 소녀를 본 몽제롱은 소름이 끼쳤지만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했다. 더욱 처절한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회 내의 또 다른 장소에서는 화농의 상처나 종기를 말게 하기 위해서 몇몇의 여자들이 자신의 의지로 지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상처를 입으로 빠는 일이었다. 한 사람이 어린 소녀의 다리에서 붕대를 벗기나 심한 냄새가 풍겼다. 몽제롱은 역겨움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다리의 곳곳이 화농되어 있었고 뼈까지 보이는 곳도 있었다.
치유를 자원한 여자는 컨벌션(Convulsion, 그리스도교의 일파, 18세기 초 프랑스에서의 열광적인 얀센주의 단체. 컨벌션은 '경련'의 뜻)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기적의 치유를 받고 육체에 대한 비뚤어짐이나 경련으로 개종한 신자로 하여금 지금 신에게 선택되어 인간이 그 본래의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녀는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묵도했다. 그리고 소녀의 썩은 다리에 입을 대고 고름을 빨기 시작했다. 몽제롱의 눈에 꺠끗해진 다리가 보였다. 이 처치가 완료될 무렵 소녀의 상처는 완전히 치유될 것이라고 페주는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몽제롱은 다음과 같은 것을 보고 나서 일체의 저항을 버렸다. 심오한 무엇인가를 목격한 그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가브리엘 모러라는 16세의 소녀가 들어왔다. 그녀의 출현으로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상식을 초월한 이 기적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녀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그녀는 망토를 벗고 땅에 누웠는데 스커트는 발목까지의 길이였다. 끝이 날카로운 창을 손에 들고 네 명의 사나이가 다리를 벌린 채 그녀 위에 섰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 것을 신호로 사나이들은 창으로 그녀의 복부를 찌른다. 몽제롱은 말리려다 제지를 당했다. 그는 숨을 몰아쉰다. 그러나 피는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잠을 자고 있었고 평화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에는 쇠몽둥이가 그녀의 턱 아래를 누른다. 목을 관통할 정도였다. 그러나 쇠몽둥이를 들어올렸을 때 피부의 어디에도 상처가 없었다. 그 다음에 사나이들은 끝이 예리한 삽을 그녀의 가슴에다 대고 힘껏 눌렀다. 그래도 소녀는 평온하게 미소를 짓는다. 가슴에는 4개의 삽자국이 있어야 했는데 짓눌린 자취가 없었다. 이윽고 삽의 날을 목에 대고 사나이들은 힘을 다하여 짓눌렀다. 목이 잘릴 정도였으나 역시 그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가 절구공 모양의 큰 쇠몽둥이로 구타당했을 때 몽제롱은 어지러워서 쓰러졌다. 이번에는 25킬로그램 묵의 큰 돌이 약 1.5미터의 높이에서 그녀의 몸에 되풀이하여 떨어졌다. 마지막에그녀는 활활 타는 불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불 속에 넣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몽제롱에게도 열이 전해왔지만 소녀의 머리나 눈썹은 타지 않았다. 다시 그녀는 불이 붙은 석탄을 먹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 몽제롱은 더 견딜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그는 가끔 그 교회를 방문하여 자료를 모아 책으로 엮고 루이 15세에게 보고한다. 왕은 그 내용에 충격을 받았으나 노한 끝에 그를 투옥시킨다. 그러나 몽제롱은 '증인'의 입장을 고집했고 출옥 후 기적에 관한 정확한 학문적인 증거가 포함된 책을 다시 2권 내게 된다. 몽제롱이 투옥된 이듬해인 1732년, 파리의 치안당국은 이 '스캔들'을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해 성 메다르 교회의 폐쇄를 명령한다. 그러나 컨벌션파는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어디에서나 기적을 행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오랜 세월에 걸쳐서 기적을 행한다. 완고한 회의론자로 알려진 과학자 라 콩다민(1701~1774, 프랑스의 박물학자)도, 1759년에 몽제롱과 같은 흥분을 경험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상황을 목격한 것이다.
시스터 프랑수아즈라는 소녀가 나무십자가에 못박혔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몇 시간동안 그대로 방치되었다. 옆구리에는 창이 꽂혔다. 이것으로 그는 소녀가 치명상을 입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못을 뺄 떄는 분명히 피가 흘렀다. 그러나 보통 인간같으면 죽었을 이 고문에도 그 소녀는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상의 기적을 20세기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일부 연구가들은 이것을 자기 최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배설물을 먹는 소녀와 남의 상처를 입으로 빨아내는 여자는 설명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가브리엘 모러의 이상한 인내의 힘은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이 장면은 오히려 수도자의 고행에 가깝다.
가령 J. G. 베네트는 그의 자서전 <증언>에서 수도자의 의식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면도날과 같이 예리한 검이 벌거벗은 사나이의 배 위에 올려졌고 덩치가 큰 사나이가 그 위에서 뛰었다. 그러나 누워 있는 사나이의 몸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던 것이다." 이 경우에 작용하고 있는 것은 '생각의 힘'과 같은 것이다. 단순한 최면보다도 깊은 것이었다. 아직 해명되지 않았으나 분명히 주목할 만한, 인간이 가진 이상한 힘의 하나이다.
성 메다르에서 발생한 기적의 과학적 해명을 단순히 방기하는 것은 학문 그 자체를 중지함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는 이른바 '회의론자'의 입장에서 수박 겉핥기식의 설명으로 납득시키려는 태도를 삼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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