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투기자본과 1979년 회교혁명: 데이비드 록펠러와 막역한 사이였던 라자 팔레비 국왕이 회교혁명으로 축출된 이유는 (1) 자꾸 석유 가격을 자기 멋대로 통제하려고 하고, (2) 석유 인상을 주도했으며 (유가가 저렴해야 소련이 아프간 침공할텐데, 국제투기자본 소련해체 기획과 엇박자) , (3) 팔레비는 시아파 성직자들과 갈등을 빚는 등 시아파임에도 세속주의 정권을 표방했는데, 이슬람 근본주의를 아프간 및 카스피해 소련 위성국가들에 전파하기 위해 회교혁명이 필요했기 때문? ㅡ 결국 록펠러 가문의 '소련해체 기획'이라는 큰 틀에서 사건을 해석해야 (4) 수니파 (사우디, 이라크) vs. 시아파 중동 판짜기 및 발칸화
팔레비 왕의 몰락: 록펠러와의 관계와 카터의 배신?
팔레비 국왕과 데이비드 록펠러는 매우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1979년 혁명 후 암에 걸린 팔레비가 미국으로 입국할 수 있게 지미 카터 대통령을 압박한 인물도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였습니다.
왜 축출되었는가? (음모론과 실재 사이)
지정학적 판짜기: 질문하신 "중동 테러리즘을 가상적으로 하는 세계지배" 가설은 지정학적 분석가들 사이에서 꾸준히 제기됩니다. 팔레비가 너무 비대해져서 석유 가격을 마음대로 조정하려 하자, 서방 세력이 그를 '유효기간이 지난 카드'로 버렸다는 해석입니다.
카터의 인권 외교: 당시 지미 카터는 '인권'을 강조하며 팔레비의 비밀경찰(SAVAK)의 탄압을 비판했습니다. 이는 이란 내 반정부 세력에게 "미국이 더 이상 왕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신호를 주었습니다.
호메이니와의 접촉: 최근 기밀 해제된 문서에 따르면, 호메이니 측은 혁명 전 카터 행정부에 "우리가 집권해도 석유 공급은 안정적으로 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 미국을 안심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록펠러에게 밉보였다기보다는, 석유 이권의 안정화를 위해 통제 불능이 된 왕보다는 새로운 종교 체제와의 협상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4. 1979년 혁명: 왜 이 구조가 깨졌나?
팔레비가 록펠러 등과 친했음에도 축출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가 너무 커버렸기 때문입니다.
산유국 연합(OPEC)의 득세: 팔레비는 1970년대 들어 석유 가격 결정을 서방 기업이 아닌 산유국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가격 인상을 주도했습니다.
통제 불능의 동맹: 서방 자본가들 입장에서 팔레비는 '말 잘 듣는 대리인'에서 '지나치게 비싼 값을 요구하는 파트너'로 변질되었습니다.
가설적 판짜기: 질문하신 것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은 왕정보다는 차라리 '공공의 적' 역할을 할 극단주의 세력을 등장시켜 중동 전체에 긴장감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석유 패권을 유지하려는 더 큰 그림(Great Game)이 작동했다는 해석이 나오는 배경입니다.
샤 정권의 몰락과 이슬람 혁명
샤 정권의 25년간의 독재와 비밀 경찰(사바크)의 탄압 이후, 1979년 이슬람 혁명이 발생하여 새로운 신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사건들은 미국과 이란 간의 오랜 적대 관계의 기원이 되었다.
혁명 전후의 비밀스러운 외교 접촉
1979년 이란 혁명 전, 망명 중이던 호메이니가 카터 대통령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미국과의 적대감이 없음을 시사했다는 문서가 공개되었다.
이러한 접촉은 이란이 미국의 '대악마'로, 미국이 이란을 '핵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란 핵 프로그램에 대한 과장된 공포
1990년대 이후 이란은 '이슬람 핵폭탄' 위협으로 프레임화되었으며, 수십 년간 핵 프로그램에 대한 공포가 조성되었다.
이란의 핵무기 개발 의혹은 2002년 우라늄 농축 시설이 공개된 후 본격화되었으나, IAEA와 미국 정보기관은 이란이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는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주장하며 과장된 선전전을 펼쳤다.
이란의 핵 개발 단계와 IAEA 보고서
이란의 핵무기 개발은 저농축, 중농축, 고농축 우라늄 생산의 세 단계를 거쳐야 하며, IAEA 보고서에 따르면 이란은 두 번째 단계에 진입한 상태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란이 핵무기 개발에 임박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실제 핵 보유국 이스라엘과 국제 사회의 이중 잣대
중동 지역의 실제 핵 보유국은 이란이 아닌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은 핵확산금지조약에 서명하지 않고 사찰을 거부하며 핵무기 보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란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공포 조장은 스트럭스넷(Stuxnet) 사이버 공격과 경제 제재의 명분으로 사용되었으나, 이는 이란의 비핵화 의지를 왜곡하는 것이었다
2. 소련-아프간 전쟁과 국제유가
소련-아프간 전쟁(1979~1989) 시기의 유가는 '전쟁 초기 폭등' 후 **'중반 이후 대폭락'**이라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겪었습니다.
전쟁 초기(1979~1980): 폭등 소련의 아프간 침공과 거의 동시에 이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중동 정세가 불안해지자 유가는 1년 만에 배럴당 $14에서 $35 이상으로 2.5배 넘게 치솟았습니다(제2차 오일쇼크).
전쟁 중후반(1980년대 중반): 폭락 (중요!) 전쟁이 한창이던 1985~1986년경, 사우디아라비아가 시장 점유율을 회복하기 위해 **석유 생산량을 대폭 늘리며 '치킨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유가는 $10대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소련에 끼친 영향: 석유 수출이 주 수입원이었던 소련은 이 유가 폭락으로 엄청난 경제적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프간 전쟁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 수입은 줄어드니, 결국 소련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우디가 유가를 떨어뜨린 배후에 **"미국과 사우디의 밀약(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한)"**이 있었다는 가설도 매우 유력한데, 이 공작 정치 이야기도 더 궁금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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