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 전쟁이 일방적인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닌 이유 / 국제 관계의 냉혹함

 이 콘텐츠는 러우 전쟁의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파헤쳐, 우리가 흔히 접하는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선 냉철한 국제정치 현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소련 붕괴 이후 나토의 동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러시아 사이에 얽힌 수백 년간의 학살과 지배의 역사를 통해, 전쟁이 결코 한 가지 원인으로 발생하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특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파시즘적 뿌리나 북한, 중국과의 과거 협력 사례 등 미디어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불편한 진실들을 접하며, 국제 관계를 감정이 아닌 국익 중심의 현실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러우 전쟁의 복잡한 원인과 국제정치적 관점 
  1. 전쟁의 원인에 대한 냉정한 시각 필요

    1.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국제법적으로 문제이며 범죄이다. 

    2. 그러나 전쟁을 선악의 관점으로만 보면 국익을 제대로 볼 수 없으므로 냉정하게 바라봐야 한다. 

    3. 러우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소련의 붕괴에 있다. 

  1. 소련 체제의 이해와 붕괴

    1. 소련(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의 의미: 소비에트(위원회)는 노동자, 농민, 군인, 지식인들이 모여 국가를 대체하는 위원회를 의미한다. 

      1. 막시즘-레니니즘은 정부와 국가 체제를 자본가의 이익을 보호하는 폭력 조직으로 보아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소비에트 공화국은 당을 중심으로 러시아, 우크라이나,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15개 공화국이 모인 연방이었다. 

    2. 소련의 동유럽 공산화: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체코,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을 강제로 공산화하여 소련 블록을 형성했다. 

      1. 이 블록은 나토(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대항하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WTO)의 전선이 되었다. 

      2. 나토와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전선은 동독과 서독의 경계선이었으며, 동독에는 소련군 약 32만 명, 서독에는 연합군 약 30만 명이 주둔하며 충돌했다. 

      3. 이로 인해 모스크바와 서유럽 간의 경계선은 동독으로 멀리 떨어져 안전했다. 

    3. 소련 붕괴 후 동유럽 국가들의 반러시아 정서: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강제적인 공산주의 이식과 반소련 운동 진압(프라하의 봄 등)으로 인해 러시아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의 위협 인식

    1. 나토 가입 약속 파기: 소련 붕괴 후 소련군이 동독에서 물러날 때, 영국, 미국, 서독은 나토가 동독에 들어오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으나, 이는 구속력이 없었다. 

    2. 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가입: 통독 후 동독은 나토에 가입했으며,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과거 소련의 공화국 및 동유럽 국가들이 우후죽순으로 나토에 가입했다. 

    3. 러시아 국경까지 다가온 나토: 과거 모스크바의 국경선은 동독이었으나, 나토의 동진으로 인해 발트 3국은 모스크바를 내려다볼 정도로 러시아 국경 가까이 나토가 다가왔다. 

    4.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 남은 것은 우크라이나이며,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의 심장부가 뚫리는 것과 같아 러시아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한다. 

      1.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과 돈바스 지역 내전 유발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나토 가입을 헌법에 명시했다. 

      2. 이는 경기도가 북한과 동맹을 맺어 서울이 포위되는 것과 같은 충격으로 비유될 수 있다. 

  1. 전쟁에 대한 서방 중심적 사고의 문제점

    1.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착각: 자유민주주의 진영에서는 나토가 러시아를 침략할 일은 없다고 상식적으로 생각하지만, 러시아의 관점은 완전히 다르다. 

    2. 미국의 침략 사례: 미국은 베네수엘라, 파나마, 그레나다를 침공했으며,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이유로 카타르를 공격하는 등 자국의 국익이 필요하면 선악을 따지지 않고 전쟁을 벌였다. 

      1. 이라크 침공 후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키고 교수형에 처한 사례도 있다. 

    3. 미디어의 영향: 람보, 탑건 같은 영화나 서부 영화에서 미국이나 백인이 미화되고 침략에 명분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서방 중심의 사고에 젖어들게 한다. 

    4. 입체적 사고의 필요성: 한쪽의 관점만으로 전쟁을 볼 수 없으며, 러시아 입장에서 나토의 동진은 어마어마한 위협이다. 

2.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얽히고설킨 역사 

2.1.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뿌리 및 폴란드와의 관계 
  1.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의 시작: 9세기 키예프 공국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가 함께 출발한다. 

    1. 당시 류릭이라는 바이킹이 내려와 지배하며 류릭 왕조가 시작되었고, 이 왕조는 16세기 말까지 지속되다가 17세기부터 로마노프 왕조로 이어진다. 

    2. 따라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왕조의 뿌리가 같다. 

    3.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어로 '변경'이라는 뜻으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변경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2.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악감정: 중세 시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공국은 17세기까지 유럽의 강국이었으며, 우크라이나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1. 폴란드의 오랜 지배와 수탈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폴란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다. 

  3.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악감정: 1654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인 코자크들이 폴란드 지배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였다. 

    1. 당시 지도자 흐멜니츠키는 러시아 차르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이를 수락하여 '페레야슬라브 조약'을 체결했다. 

    2. 러시아는 이 조약을 우크라이나 영토 편입 및 복속으로 해석했으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군사 동맹으로 생각했다. 

    3. 이 조약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변경을 지켜야 한다는 약속을 포함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중앙(러시아)의 통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2.2. 20세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비극적인 역사 
  1.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시작과 파시즘의 뿌리: 20세기 초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로 인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시작되었다. 

    1. 당시 유럽에서 민족주의는 다른 존재를 악마화하는 나쁜 행위로 이어지기도 했다. 

    2. 돈초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아버지로, 파시즘 사상을 도입했다. 

      1. 당시 파시즘은 국가와 민족의 통합, 단결을 강조하는 선진 사상으로 인식되어 매력적이었다. 

      2. 따라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한 뿌리는 파시즘이다. 

    3. 스테판 반데라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그가 만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은 나쁜 짓을 많이 했다. 

  2. 러시아 혁명과 우크라이나의 내전: 1917년 러시아 혁명 성공 후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만들어졌고, 우크라이나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만들었다. 

    1. 이때 최초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 형태가 만들어졌다. 

    2. 레닌이 우크라이나를 강제로 소련에 편입시키려 하자,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동쪽의 친러 세력과 서쪽의 친유럽 민족주의 세력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3. 이 내전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소련에 대한 감정이 더욱 나빠졌다. 

  3. 스탈린의 홀로도모르: 스탈린은 농토 집산화 과정에서 유럽의 빵 바구니였던 우크라이나에서 대규모 기근을 발생시켰다. 

    1. 이로 인해 약 3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홀로도모르'라고 부른다. 

    2.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스탈린과 모스크바는 악마로 각인되었다. 

  4. 2차 세계대전 중 우크라이나의 비극: 1941년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을 침공하여 우크라이나까지 밀고 들어왔다. 

    1. 모스크바를 악마로 여겼던 우크라이나인들 중 일부는 히틀러를 해방자로 생각했다. 

    2. 우크라이나인들은 자원하여 나치 군대가 되었고, '할리치나 사단'을 결성하여 히틀러와 함께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3. 폴란드인 학살: 스테판 반데라의 OUN 조직은 히틀러의 나치와 협력하여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던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다. 

      1. 1943년~1944년 사이에 5만~10만 명의 폴란드인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2. 이 사건은 '볼히니아 학살'로 불리며, 영화 '볼히니아'에 묘사되어 있다. 

    4. 유대인 학살 협력: OUN은 우크라이나 내 유대인들을 찾아내 죽이는 데 나치와 협력했다. 

      1. 전쟁 이전 6.2%였던 우크라이나 유대인 인구는 전쟁 후 0.2%로 줄었다. 

  5. 스탈린의 보복과 반데라 조직의 저항: 히틀러가 패퇴하고 스탈린이 다시 우크라이나로 들어오자, 스탈린은 스테판 반데라 조직을 제거했다. 

    1. 반데라 조직은 1950년까지 우크라이나 내에서 스탈린 군대와 게릴라전을 벌였다. 

    2. 스테판 반데라는 독일로 도망갔으나,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2.3. 현재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갈등과 국제 관계의 냉혹함 
  1. 현재까지 이어지는 악감정

    1.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사이가 좋지 않다. 

    2. 폴란드와 우크라이나도 사이가 좋지 않다. 

    3. 폴란드는 우크라이나를 도우면서도 '볼히니아를 기억한다'며 동상을 세우는 등 볼히니아 학살을 잊지 않고 있다. 

    4. 볼히니아 학살의 시신들은 아직도 다 발굴되지 않았다. 

  2. 폴란드의 러시아에 대한 악감정: 폴란드는 러시아에 대해서도 '카틴 숲 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1. 스탈린은 2차 세계대전 중 폴란드 장교와 지식인 약 2만 명을 학살했다. 

    2. 이는 폴란드의 부흥을 막기 위한 지도 세력 제거 목적이었다. 

    3. 러시아에 있는 카틴 숲에서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에야 러시아가 이를 인정했다. 

    4. 카틴 숲 위령제를 지내러 가던 폴란드 대통령과 각료들이 비행기 추락으로 전원 사망하는 비극도 있었다. 

  3. 복잡하게 얽힌 유럽의 역사: 유럽은 민족적 동질성이 강한 한반도와 달리, 국경이 붙어있고 민족과 종교가 복잡하게 섞여 있어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분쟁처럼, 한 국가 안에 다른 민족의 영토가 섬처럼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4. 국제 관계의 냉혹함

    1. 현재의 러우 전쟁을 선악으로만 보거나 감성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2. 폴란드인들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끔찍한 역사를 기억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에게 학살당한 역사를 기억한다. 

    3.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며, 힘이 없으면 학살의 수레바퀴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3. 우크라이나의 과거 행적과 국제 관계의 현실 
  1. 우크라이나의 과거 북한 지원: 러우 전쟁 직전 우크라이나 전쟁 박물관에는 6.25 전쟁에 참전했던 우크라이나 조종사들에게 북한이 보낸 감사장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1. 이는 우크라이나가 과거 북한을 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우크라이나의 중국 군사력 증강 기여: 중국의 해군력 증강에 우크라이나가 크게 기여했다. 

    1.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는 미완성 항공모함 '바랴그'를 중국에 팔아넘겼다. 

    2. 중국은 바랴그 없이는 항공모함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3. 우크라이나는 선박 엔진 기술, 항공기 기술 등 많은 중국군 현대화 기술에 기여했다. 

  3. 우크라이나의 북한 탄도 미사일 기술 기여: 북한의 탄도 미사일 기술에 우크라이나의 RD-250 로켓 기술이 들어갔다는 것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상식이다. 

  4. 국제 관계의 현실적 관점

    1. 우크라이나를 무조건 선으로, 러시아를 악으로 보는 것은 냉정하지 못한 시각이다. 

    2. 러우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 러시아 편을 든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봐야 한다. 

    3. 역사와 국제 질서는 냉혹하며, 자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강자와 약자를 판단하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4. 감정적으로 접근하기보다는, 국가의 미래를 위해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며, 국제 관계에서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5. 미국이 주권 국가인 베네수엘라 대통령에게 현상금을 거는 것과 같은 사례는 국제 질서의 냉혹함을 보여준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