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지 요시노의 커버링 - 불과 200페이지에 불과한 책이지만 오랜만에 읽은 매우 수준높은 책이었다. 논리정연하고 생산적인 담론들로 가득했다. 한국인들이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게하면 더 많이 계몽되고 '다양성'을 이해하게 될텐데 유감이다; 참고로, 아로는 동성애 문제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고 당연한 개인의 권리라고 보지만, 동성애자들의 입양과 양육에는 반대한다

이 책을 읽고 네 가지 논점을 만들고 싶다.

 

1.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은 교육학적으로 매우 유익한 책이며, 노지마 신지의 드라마와 함께 전세계 (특히 한국의) 고등학생들이 의무적으로 읽었으면 하는 작품이다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은 단순히 동성애자들의 복잡미묘한 심리를 다룬 책이 아니고, 사회적 마이너리티 (종교적 소수자, 소수인종, 여성, 장애인 등)가 사회주류의 가치관에 자신을 동화시키려는 심리적 기제 전반을 다룬 책이다. 

 

그렇지만 책에서 가장 메인이 되는 대상이 동성애자들이기도 하고, 다른 소수자들과 다르게 가장 법적, 제도적으로 소외된 대상이기도 하니, 커버링의 문제를 논하기에 요러모로 가장 적합한 대상이라고 하겠다. 

 

불과 200페이지에 불과한 책이지만 오랜만에 읽은 매우 수준높은 책이었다. 하버드, 옥스퍼드, 예일 출신답게 문장들이 군더더기가 없고, 논리정연했다. 또 딱딱한 이론서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경험담이 실려있어 이론과 실무 모두에서 균형잡힌 책이었다. 저자는 자신의 논리에 대한 동료 교수의 반대의견도 같이 제시하면서 놀랄만큼의 균형감각을 보여주었다. 

 

한국인들이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게하면 조금이나마 더 많이 계몽되고 '다양성'을 이해하게 될텐데 유감이다. 개성없는 판상형 아파트에 천편일률적인 패션, 의대와 돈에 미친 사회구조,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 무질서한 시민의식, 유튜브와 블로그의 넘쳐나는 악플들, 촛불시위에서 보듯 쉽게 세뇌당하기 위한 정신상태 등 주입식 교육의 폐해가 만연하고, 개인의 개성과 권리를 무시하는 파시스트들로 이루어진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남녀노소 강제적으로 읽게 해야하는 책이다.

 

이는 노지마 신지의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90년대 사회파 드라마들 (인간실격, 성자의 행진, 미성년 등)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꼭 보여줘야 하지만, 아마 PC주의에 빠진 무지한 학부모들의 반대로 실현이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니라, 마치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냥 은폐하는 것이 교육학적 관점에서 더 위험할텐데 말이다. (한국의 무지한 학부모들은 피임과 성교육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섹스를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것을 선호하고, 인간의 폭력성과 사회구조의 부조리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그저 아이들이 시험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고 명문대에 진학하길 바란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 뜻을 모른다"고 했던 괴테의 말처럼, 등장인물들이 극단까지 가는 상황에 처하는 노지마의 작품들이야말로 인간 본성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들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노지마는 자신은 항상 작품에 교훈을 담아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은 오히려 청소년이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도 적극 동감하는 바이다.

 

2. 동성애 문제는 커버링의 가장 좋은 예시; 진중권이 <폭력과 상스러움>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동성애는 선천적 문제이며, 따라서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동성커플들이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자연법상, 민법상 지극히 당연하며, 자신들의 천부인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성적 지향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선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성애를 종족 번식에 위배되는 반윤리적인 행태라고 지적하거나, 후천적 결과물인 것처럼 말하는 무지한 대중들은 (특히 근본주의에 세뇌된 기독교 광신자들), "나는 당신이 여자인 것을 반대한다," "나는 당신이 교수인 것을 반대한다", "나는 당신이 당신인 것을 반대한다", "나는 당신이 OO의 아들인 것을 반대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논리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동성애적 행동(homosexual behavior)이 관찰된 동물 종은 1,500종 이상이고, 그중에서 과학적으로 문서화된 종은 약 500~600종 정도다. 포유류 중에서는 침팬지, 보노보, 돌고래, 사자, 양, 기린, 코끼리 등이 있다.


동성애와 양성애가 자연적 성향이기 때문에, 1973년,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APA)는 DSM-II에서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공식적으로 제거했다. 그러나 완전히 삭제된 것은 아니고, “Ego-dystonic homosexuality” (자기 자신이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못해 괴로워하는 상태)라는 항목이 DSM-III (1980년)까지 일부 형태로 남아 있었다. 이마저도 1987년 DSM-III-R 개정판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동성애는 이후로 정상적인 인간 성적 다양성으로 간주되었다. 지난 수천년간 동성애와 양성애 현상이 인간사회에서 만연했고, 왕과 귀족층, 지식인층에서 특히 유행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늦은 조처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현재로서는 이것이 '주류' 의학계의 의견으로 정착되었다.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과 달리 전체 사회의 1-5% 이내에 속하는 소수자라고 해서 그들의 권리를 말살하려 들거나, 또는 마치 불쌍한 자들을 구제한다는 심정으로 동정하고 인정해줘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기 짝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동성애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수많은 질서 중 하나일 뿐이다.

 

동성애자들이 서로 좆을 빨든, 엉덩이에 뭔가를 집어넣든, 그것이 당신에게 미학적으로 혐오스럽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당신이 반대할 권리는 없다. 당신이 남몰래 AV 포르노를 보고 자위를 하는 것에 대해 누가 반대할 권리가 없듯이 말이다. 하물며, 국가가 나서서 그것을 형벌의 문제로 삼는다는 것은 미개함의 극치이다. 피에르 트뤼도의 말처럼, "성인들이 자신들의 침대에서 뭘하든 그건 국가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3. 동성애자의 커버링

켄지 요시노의 지적처럼,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지속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 1950~60년대 동성애자들에게 의학적, 심리학적 문제가 있다고 보고 전기충격요법을 동원해 '교정'시키려고 했던 매우 폭력적인 Converting 담론에서부터, 1993년 제정된 미국 군대의 "Don't Ask, Don't Tell" 정책과 같이 동성애 문제 자체를 아예 회피하려는 Passing 담론,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동성애자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그들이 적극적으로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내서 사회 다수에게 불쾌감을 줘서는 안 된다는 Covering 담론 등이 그렇다. 동성애에 대한 담론은 아직도 많이 미진하긴 하지만, 1950~60년대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동성애자 남성들, 즉 게이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이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달리) 남성적이고, 일반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그런 남성들을 짝짓기 상대로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쓰는 "일틱"이라는 용어는 일반적인 이성애자 남성과 비슷하다는 뜻이고 (성적 지향만 제외하면), "끼순이"라는 용어는 여성스러운 게이들을 폄하하는 경멸적 용어다. 이렇듯, 게이들 사이에서도 적당한 근육이 있고, 일반적인 이성애자 남성들의 특징을 가진 남성들이 연애시장에서 성상품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데, 이것이 바로 (머리가 나쁜 대다수 게이들은 인식조차 못하겠지만) 주류사회의 가치관을 마이너리티가 스스로 받아들이는 커버링의 과정이다.

 

일부 게이들이 홍석천을 싫어하는 이유 역시 원빈 같이 "잘생기고 남성스러운 남성"이 마이너리티 정체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홍석천 같이 "끼순이 같고 여성스러운 남성"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반감, 즉 커버링적 욕망의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참고로 20세기에서 가장 미남배우로 명성이 높았던 상당수, 이를테면 알랭 들롱은 양성애 성향이 있던 인물이었다.

 

4. 아로는 동성애 문제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고 당연한 개인의 권리라고 보지만, 동성애자들의 입양과 양육에는 반대한다

아로는 동성애 문제를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2에서 말했듯, 이는 찬반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머리가 나쁜 사람들만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반대'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러나 아로는 동성애자들의 입양과 양육에는 반대한다.

 

켄지 요시노의 <커버링>에서 내가 한가지 강한 반감을 갖고 있고, 심지어 켄지 요시노나 동성결혼을 한 커플들에 분노를 갖고있는 부분은, 그들이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아이를 양육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물론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가 다를 바 없다면, 그들이 갖는 권리 역시 동일해야 함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이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고 해서, 그들이 생물학적, 사회학적으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남성보다는 여성이 양육을 더 잘하기도 하고, 아이들 역시 아빠보다는 엄마에게 더 강한 애착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다. 남성과 여성의 신체구조나 뇌구조 역시 다르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아이들의 양육에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최적화되어있는 것이 진실이다. (물론 남성의 역할도 물론 매우 중요하다 - 아버지가 부재한 가정환경에서 범죄로 빠질 위험성이 높은 것은 통계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런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고, 기계론적으로 남녀 모두 동일한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멍청한 페미니스트들이나 켄지 요시노류의 어설픈 주장에 아로는 강한 반감을 갖고 있다.

 

게이나 레즈비언 커플의 양육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 가정과 게이 또는 레즈비언 커플이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고 해서, 그들이 생물학적, 사회적으로 '동일'한 환경에 놓여있는 것은 아니다. 철저하게 아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기 부모가 남자+남자 커플로만 이루어져있거나, 여자+여자 커플로만 이루어져있다면, 어릴 때부터 정체성에 많은 혼란을 겪을 것이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높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다. 도대체 그 아이는 무슨 죄가 있다고, 이 멍청한 동성애자 커플들의 '사회적 권리'를 위해서 어린시절부터 사회적으로 차별받기 쉬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 

 

아이는 죄가 없다. 만약 죄가 있다면, 찢어지게 가난하지만 꾸역꾸역 애를 낳아서 고생시키는 부모, 사회적 권리와 평등을 주장하며 아이를 희생시키는 동성애자 커플들에게 있을 뿐이다.

 

권리가 동등하다고 해서, 그 역할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남자와 여자는 분명 다르다.

남녀로 이루어진 커플과 남남 커플, 녀녀 커플은 모두 다르다.

 

이제는 '차별'이 아니라 '분별'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 점을 켄지 요시노는 매우 간과하고 있고,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한명의 이기주의자라는 생각이 든다. 서양인 남자와 결혼한 켄지 요시노의 자녀들은 남자 두명으로만 이루어진 가정 속에서 과연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않고 자랄 수 있을까? 적어도 나라면 어려울 것 같다. 절대 다수의 아이들에게는 여성의 존재와 남성의 존재가 모두 필요하다. 그것은 남남 커플, 여여 커플로는 무리다. 칼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시사하듯, 남성에게는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고, 여성에게는 남성성이 내재되어 있긴 하지만, 여성성의 대부분은 여성에게 있고, 남성성의 대부분은 남성에게 있기 때문이다. 가장 균형이 잘 맞추어진 것이 바로 남녀 커플의 조합인 것이다.

 

물론 켄지 요시노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부모와 가정환경에 만족하고, 심지어 감사함을 느낀다면 나야 할말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 '특수한' 케이스인 것이고, 나는 여기서 '평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아이라면 평균적인 남녀 커플로 이루어진 가정환경에서 자라나는 것이 남남 커플이나 녀녀 커플로 이루어진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것보다 평균적으로 (즉, 통계학적으로) 더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