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욕 - 인간의 도덕관념은 모두 위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까발린 도발적인 작품; 한국의 젊은 작가 중에는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을 쓸만한 재목이 없다
1. 도덕과 윤리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사회의 '다수파'가 정한 합의에 불과하다는 '어두운 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작품. 일례로, 어째서 물에 대해 성욕을 품는 것은 안 되고, 이성의 성기에 대해서 성욕을 품는 것은 사회적으로 타당하게 여겨지는가? 성욕이란 사실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닌, 다수파에 속하느냐 소수파에 속하느냐의 문제에 불과할 뿐이다. 다수는 언제나 다수에 속하지 않은 소수를 단죄하려고 하고, 도덕은 손쉬운 단죄의 방법이다. 다수와 다른 성욕을 지닌 사람들은 다수파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이상성욕자'에 불과할 뿐이다.
다수파의 성욕, 즉 이성애자의 성욕에 한정해서 생각해봐도 다수파가 믿는 도덕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고, 쉽게 붕괴될 수 있는 것인지는 간단한 예시를 통해서 드러난다. 인간은, 특히 남성은, 평생 강렬한 성욕을 품고 누군가를 강간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 말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대다수의 남성 속에는 그러한 흑심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사회의 법과 제도가 동물적인 본능을 제어하는 역할을 하기에 실제로 자신의 욕망을 분출해서 '성범죄자'가 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사회의 법과 제도가 붕괴된다면, 다수의 남성들은 기꺼이 소유욕을 불태우며 누군가에 대한 강간을 시도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항상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강간이 만연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 극한의 상황에서는 본능의 고삐가 풀리게 되고, 동물적 욕망은 자유로이 분출된다). 요컨대, 다수파의 성욕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상황에 의해 (사회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것이지, 그들이 성인군자라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 속으로 간음한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일갈했던 예수의 말을 적용시켜 생각해보면, 이미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인간들은 성범죄자나 다름이 없다. 그들은 그저 응큼한 생각을 적극적으로 실행에 옮기지 않은 잠재적 성범죄자들일 뿐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정욕(情慾)이 아닌, '올바른 욕망'이라는 의미의 정욕(正欲)인 것은, 다수파가 지향하는 '올바른 욕망'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지적하기 위함이다.
성욕의 문제에서 한 단계에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자연세계에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 같은 도덕과 윤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모든 기준은 인간이 ('다수파'에 속하는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정한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고지능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다만 대중들은 어리석고 위선적이며, 종교에 의존해서 살아가기에, 이러한 진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심지어 혐오감을 드러낼 뿐이다. 아로가 유튜버나 블로그에서 '도덕의 상대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한 살해행위를 할 때는 왜 살해행위로 보지 않고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냐고 지적할 때는, 병신들이 벌떼같이 달라붙으며 공격을 한다. 그만큼 그들의 가치관에 손상을 주는 치명적인 진실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재미삼아 파리나 모기를 죽이거나, 먹고 살기 위해 돼지, 닭, 소를 죽이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지, 인간들끼리 서로 살육을 저지를 때와는 전혀 다른 범주의 행위라는 것이다. 물론 '인간' 나부랭이들의 그러한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동물이 그저 다른 동물을 죽이는 것에 뭐라고 이유를 갖다 붙히든 거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든, 인간이 파리를 죽이든, 자연계의 관점에서는 동일한 '살해 행위'일 뿐이다.
기생수가 인간 대신 지구에서 먹이사슬의 최상위에 위치해 자신들의 '본능'에 따라 열등한 인간들을 잡아먹는다는 설정의 만화 <기생수>가 참신하고 훌륭했던 것은, 어리석은 인간 대중들이 갖고 있는 도덕관념을 박살낼 수 있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관점을 뒤바꿔서 생각해보면, 기생수가 인간을 잡아먹는 행위를 인간들이 도덕을 근거로 비판할 수 있다면, 인간이 닭이나 돼지를 잡아먹는 행위 역시 도덕을 근거로 비판할 수 있는 것이다.
2. 소설의 저자가 '물 페티쉬'라는 극단적 예시를 든 것은 시의적절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동성애나 양성애, 무성애에 대해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제3의 성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날로 확대되어가고 있지만 (물론 아직도 어리석은 이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있다), 그 이외의 성욕은 일반인들의 규범과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극 중에서 말하는 물 페티쉬는 실존하는 페티쉬인데 (https://en.wikipedia.org/wiki/Aquaphilia_(fetish)), 소설 속 물 페티쉬가 인간을 배제한 물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현실의 물 페티쉬는 수영복을 입거나 물에 젖은 인간 (특히 미남, 미녀의 젖은 모습)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결정적 차이점이 존재하긴 한다.
3. 이 소설이 훌륭한 자신과 다른 성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완고한 모습도 잘 표현되어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다양성'을 기치로 내걸고 동성애자 등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범주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성만을 취사선택하려는 깨시민들의 어리석은 모습 역시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 중 대학생 동아리에서 '다양성 페스티벌'을 열자고 제안한 야에코가 이러한 범주의 인물을 표상한다.) 물론 다양성 그 자체를 완전히 거부하는 인간들보다야 질적으로 훨씬 낫지만, 다양성이라는 가면 아래 인간의 내면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그 더러운 모습을 감추고 이상주의자 흉내만 내는 인간들도 (현실세계의 평등주의-LGBT-좌파 세력) 썩 인간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음을 소설은 잘 그리고 있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밸런스있게 다양한 화자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다. 극 중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검사를 업으로 삼고 있는 히로키는 '다수파'를 표상한다. 그는 사회주류의 길에서 벗어나 학교 등교를 거부하고 유튜버가 되려는 초등학생 아들을 비난하지만, 섹스할 때 눈물을 흘리는 아내에게 은밀한 페티쉬를 갖고 있다. 이상성욕자들을 비난하지만, 남몰래 하나 둘 씩 페티쉬를 갖고 있는 대중들의 위선적 모습에 대한 현실적 고증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어딜가든 모임을 이끌고 주류가 좋아할만한 아이디어를 내놓아 인기가 많은 슈는 '다수파'를 표상하고 있다. 반대로, 이케맨 대학생으로 이성의 선망을 한몸에 받지만 '물 페티쉬'라는 비밀을 가진 모로하시와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지만 자신의 특이성욕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된 나쓰키와 요시미치는 '소수파'를 표상한다.
4. 소설에서 역전의 포인트가 되는 지점은 똑같이 물 페티쉬를 가진 나쓰키와 요시미치가 계약결혼을 통해 '연대'를 이루는 장면과, 모로하시와 그를 남몰래 연모하는 야에코가 다양성과 특이성욕을 주제로 격론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인간의 성욕이란, 실로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의 영역이고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이긴 하지만, 바늘구멍 같이 좁은 확률로 타자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거나, 최소한 이해하려는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책 말미에 서평을 쓴 임상심리학자 도마타 가이도가 정욕(正欲)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행위 자체가 또 다른 정욕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어서 말하면서도, 나쓰키와 요시미치의 연대를 통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보았다고 말한 것 그대로이다.
5. 이처럼 다양한 관점들을 통해 인간이 갖고 있는 도덕관념을 그 뿌리에서부터 뒤흔드려는 시도를 한 작가 아사이 료가 1989년생으로 최연소 나오키상 수상자인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40년대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자신의 10대 시절 (1910년대다)의 동성애 감정에 대해 다룬 탐미주의적 소설 <소년>의 적나라하고 거리낌없는 동성애 묘사들에 놀랐듯이, 일본 작가들은 정말로 인간 본성에 솔직하고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1930년대 아베 사다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성도착자 커플의 비극을 그린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1976)>도 지극히 탐미주의적으로 인간의 성욕을 묘사한다. 옛부터 지진과 자연재해가 많고, 권력자들에 의한 서슬퍼런 '귀족정치'가 성행했던 나라답게, 사물에 대한 접근방식이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것이다. 반면 유교국가 조선의 후예인 한국의 소설가들은 대중들을 각종 도덕관념과 대의명분으로 선동하지만, 인간본성에서 멀어지면 멀어지는만큼 그들의 소설은 보편적, 역사적 가치를 잃게 된다. 박경리는 일본의 문화에는 야만과 폭력 밖에 없다며 신랄하게 비난한 바 있지만, 아로가 보기에는 열등한 족속의 자격지심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의 소설가들이 세계에서 평가를 못 받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국가적 업적으로 내세우고 기뻐할 것 같은 수준이면,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은 (위에 언급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동양권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국보다 60년은 문화가 앞서있다는 것 아닌가?
6. 특이성욕, 다양성 지향의 위선, 도덕관념의 허구성 등을 주제의식으로 삼은 도발적인 작품인만큼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다소 난해하게 생각하는 대중들도 분명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로는 세계 최고의 천재일 뿐만 아니라, '소수파' 중에서도 가장 '소수파'에 위치한, '진성 소수파'이기 때문에 작품 이해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작가에게 '진성 소수파'의 관점을 좀 더 농밀하게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왜냐하면 '소수파'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나오키상 수상작가 아사이 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소수파는 아니고, 다수파와 소수파 그 경계 어딘가에 위치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 귀찮아서 문자 교정은 안하고 그냥 pub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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