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을 증오하고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오스카 와일드;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샴페인 잔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분에 넘치게 죽어가네"; 마치 오스카 와일드의 행보를 따라가듯 프랑스로 넘어가고, 감옥에 가고, 가족과 의절하는 코스를 밟았던 연인 앨프리드 더글러스
빅토리아 시대 가장 성공한 작가로 뽑히는 인물이다. 걸출한 글솜씨로 유명했으며 자신감에 찬 문학인 이미지의 전형 같은 인물. 그래서인지 자신을 남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에게 '평범'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적도 없다.
-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다면, 그들을 웃겨라. 안 그러면 당신을 죽이려고 할 것이다. (If you want to tell people the truth, make them laugh, otherwise they'll kill you.)
- 진정한 예술가는 대중의 주목을 전혀 받지 않는다.
- 천재는 타고난 것이지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 내 삶에 대해 알고 싶은가? 나는 내 천재성을 삶에 투영했으며, 내 글에는 내 재능을 투영했을 뿐이다.
- 위의 소송 직후 와일드는 동성애를 하였다는 죄로 기소당하게 되고(Regina v. Wilde), 이로 인해 아래에 기술된 형을 선고받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는 2년 동안 교도소[16]에서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더글러스는 와일드가 보낸 편지를 잡지사에 기고하고자 시도했다.[17][18]
이러한 절망 속에 와일드는 교도소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귀를 다치게 된 것으로도 모자라, 아내 콘스턴스에게 별거를 선언당하고 아들인 비비언과 시릴도 평생 볼 수 없게 되었다.[19] 와일드는 가정에 대한 애정이 있었으며 특히 자신의 아이들을 '나의 빛나는 보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가정파탄은 와일드에게 엄청난 고통으로 다가왔을 것이다.[20]
이때 감옥에서 쓴 편지를 모은 것이 <옥중기>, 혹은 <심연으로부터>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옥중기>와 <심연으로부터>는 와일드가 더글러스에게 보내는 편지이기는 맥락이 같으나 차이가 있다. 와일드는 친구이자 재산 관리인인 로버트 로스[21]에게 부탁해 한 장의 타이핑 사본을 남긴 후 원본 편지는 더글러스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로스는 친필 원본을 보관한 채 더글러스에게 사본 편지를 전달했으며[22], 동시에 수취인이 더글러스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을 모두 삭제해 <옥중기>라는 제목을 붙이게 된다. 이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죽은 후 60년이 지나 출간되었으며, 편지의 전문이 훼손되지 않은 판본이 <심연으로부터>다. 이 책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시작해 용서와 참회, 예술관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다.레딩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는 그날 바로 프랑스로 건너갔는데[23], 이곳에서 그는 아내가 보내오는 1주당 3파운드라는 매우 적은 돈과 유지되던 인맥을 통한 간단한 일을 통한 아주 적은 수입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돈은 술을 사는 데 사용하였고, 정신적으로도 매우 피폐해져 폐인같은 삶을 이어갔다. 치통에 시달렸지만 치과에 갈 돈조차 없었고, 결국 빌붙고 구걸을 하며 근근이 연명했다. 한번은 런던에서 알고 지내던 오페라 여가수를 길에서 만났는데 그는 길을 가로막고 서서 이렇게 말했다."나는 오스카 와일드요. 지금부터 지독히도 끔찍한 이야기를 할 테니 잘 들어보오. 돈 좀 주시오"
이후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 것은 딱 한번, <레딩 감옥의 노래>를 발표했을 때였다. 와일드는 이 시에서 연인을 살해하고 교수형에 처해진 병사의 이야기를 썼는데, 고통을 겪고 있는 자신의 삶과 연계해서 절실한 글을 남겼다. 1900년, 그를 괴롭혀오던 귓병에 대한 수술을 받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뇌수막염에 걸려 1900년 11월 30일 사망한다.
한 친구가 임종을 앞둔 그에게 마지막 샴페인 잔을 권하자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나는 내가 살아온 과정처럼 분에 넘치게 죽어가네"
아내인 콘스턴스와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24] 와일드는 형기를 마치고 아이들을 볼 권리를 얻기 위해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무척 우울해 했다고 한다. 와일드가 프랑스로 갔을 때 그를 한 레스토랑에서 본 이의 증언에 따르면, 한 아이가 와일드에게 "아저씨는 왜 혼자인가요?"라고 묻자, "나도 너 같은 아이들이 있는데, 지금은 아주 멀리 있어서 볼 수 없단다" 라며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 앨프리드 더글러스(Lord Alfred Bruce Douglas, 1870~1945): 일명 보시(Bosie).[52] 오스카 와일드의 연인이자 그를 몰락시킨 퀸즈베리 사건의 원인이 된 인물. 그런데 와일드는 이 사건으로 옥살이까지 하고서도 출소 후 더글러스를 다시 만났다. 친구 로스가 둘의 재회를 우려하는 편지를 보내자 이에 답장한 편지에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인정했다."친애하는 로비[53], 내가 보시에게 돌아간 건 심리학적으로 불가피한 일이었어. (...) 사람들이 내가 보시에게 돌아간 것을 비난하면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게. 그는 내게 사랑을 선물해주었다고. 외로움과 오욕 속에서, 끔찍한 속물세계와 석 달간 치열하게 싸운 끝에 난 자연스럽게 그에게 돌아갔던 거야. 물론 나는 종종 불행할 거야. 하지만 난 아직 그를 사랑하고 있네. 그가 내 삶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이 그를 사랑하게 만든 거야."그러나 두 사람은 곧 다시 헤어졌고, 보시는 와일드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보시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찾아왔을 때는 이미 장례식이 끝난 후였다고.[54] 참고로 이 사람도 여생이 그리 순탄치 않았다. 더글러스는 후에 와일드처럼 프랑스로 건너갔으나, 양가의 재정지원을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에 결국 다시 영국으로 돌아왔다. 결혼한 아내도 나중에 아들과 함께 더글러스를 떠났고 하나뿐인 아들은 1964년에 죽을 때까지 분열 정동정신병[55]으로 인해 정신병원에서 평생을 보내야 했다. 또 윈스턴 처칠을 비방한 혐의로 감옥에 6개월간 투옥되었다. 이때 수감하면서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를 연상시키는 <높은 곳에서>(In Eexcelsis)라는 시집을 쓴다. 더글러스는 1945년 74세의 나이로 울혈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1935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한 어머니와 함께 3월 23일 크롤리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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